Gyeongseong Detective Agency RAW novel - Chapter 13
00013 이중살인 =========================================================================
한밤중의 강은 어둡고 고요했다. 불어오는 바람이 영 심상치 않았다. 내일은 아무래도 비가 올 모양이었다. 제법 높아진 물결에 나룻배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돌석은 노를 있는 힘껏 저었다. 낡은 배의 뱃전에 물살이 찰박거렸다. 강물을 젓던 노가 바닥의 부드러운 진흙에 닿았다. 돌석은 노를 바닥에 박아 당겼다. 마지막 손님을 건너편에 내려 주고 온 뒤라 가벼워진 배가 쉽게 딸려갔다.
나루에 배를 대고 노를 올려 배 위에 던져 둔 돌석은 곰방대를 찾아 물고 불을 붙였다. 언제나와 똑같이 긴 하루가 푸르스름한 연기 사이로 꼬리를 말며 스며들었다. 시계는 없지만 아마 늘 그렇듯 자정이 가까운 시각일 터였다. 한참 곰방대를 물고 있던 돌석은 담배가 다 타들어가자 곰방대를 거꾸로 들어 탁탁 털었다. 시커먼 강물 위로 재가 떨어져 흔적도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이구, 하고 몸을 일으킨 돌석이 줄을 당겨 배를 막 묶고 있을 즈음이었다.
“게 누구야?”
어두운 강 위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미끄러져 건너왔다. 돌석이 그쪽으로 시선을 주자, 지금 막 나루로 들어온 배 한 척이 돌석의 배 옆으로 섰다. 돌석은 슬슬 침침해지는 눈을 두어 번 찡그렸다. 어둠 속에서 윤곽을 드러낸 것은 십오 년쯤 여기서 돌석과 함께 배를 띄워 온 춘필의 얼굴이었다. 날이 아직 싸늘한데도 팔뚝을 둥둥 걷어붙인 채 노를 젓던 춘필이 배를 세우고는 나루에 내려 돌석의 배 곁에 자신의 배를 함께 묶었다.
“내일은 암만해도 비가 올 것 같단 말이야.”
춘필의 말에 돌석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구름이 낀 탓인지 별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렇구만, 건성으로 맞장구를 친 돌석이 춘필의 등을 툭툭 쳤다.
“먼저 들어가네.”
“그러게.”
춘필이 밧줄을 묶으며 대답했다. 돌석이 뻐근한 허리를 두드리며 몸을 돌려 막 너댓 걸음쯤 옮겼을 때였다.
“이보게, 돌석이. 이보게!”
등 뒤에서 다급하게 들려 온 춘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돌석은 놀란 마음에 춘필을 돌아보았다. 춘필은 나루에서도 담 좋기로 유명한 사공이었다. 힘이 원체 좋을 뿐더러 간도 커서 어지간한 일에는 그리 당황하거나 겁을 먹은 꼴을 본 일이 없었다. 춘필의 목소리가 영 심상치 않아, 돌석은 황급히 가던 발을 돌려 춘필에게 도로 다가갔다.
“무슨 일인가?”
춘필은 나루터에 꼼짝도 않고 선 채 강 위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돌석은 고개를 빼어 춘필이 보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어둠에 잠긴 강은 먹물을 부어 놓은 듯 새까맣게 물든 채였다.
“무얼 본 게야?”
돌석이 의아해하며 묻는 순간 찰랑거리며 물결이 조금 높아졌다. 그리고 묶어 놓았던 돌석의 배 뒤편으로 희끄무레한 것이 물 속에서 떠오르며 아슴한 윤곽을 그렸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그 형체는 돌석의 뱃전 끄트머리에서 물결에 따라 조금씩 내려갔다 올라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춘필의 손가락이 그 형체를 가리켰다.
“저게 뭣처럼 보이나?”
돌석은 몸을 조금 더 앞으로 내밀었다. 희멀건한 것이 잠시 가라앉았다가 다시 떠올랐다. 다음 순간 돌석은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기묘한 감각이었다. 잠시 말이 없던 춘필이 돌석을 보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암만 봐도 사람 같어.”
“사람?”
놀란 마음에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고 보니 그 희끄무레한 것이 흰 옷을 입은 형체처럼도 보였다. 서로 마주보고 있던 두 사람은 황급히 배 위에 놓아 둔 노를 집어들어 그것을 가까이 당겨 보았다. 두 척의 배 사이에서 힘없이 끌려온 형체가 천천히 뒤집혔다. 침을 삼키며 물 위를 내려다보고 있던 돌석과 춘필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악,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물 위에 떠 두 사람을 올려다보고 있는 것은 젊은 여자였다. 채 감기지도 않은 여자의 두 눈은 어둠 속에서도 기묘하게 번들거렸다. 벌벌 떨고 있던 돌석과 춘필은 마치 귀신 같은 형상을 한 채 떠 있는 여자의 몸을 조심스럽게 뭍으로 끌어냈다. 흰 양장을 입은 여자의 얼굴과 몸은 깨끗했고, 어디에서나 눈에 띌 정도의 미인이었다. 익사체라면 몇 번 본 일이 있었지만 이런 것은 처음이었다. 물에 빠진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아직 살아 있는 양 선명한 눈이 께름칙했다. 춘필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머뭇거리다 여자의 맥을 짚어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절명한 것이 분명했다. 여자의 시신을 앞에 둔 채 침묵하던 두 사람은 조금씩 뒷걸음질을 쳤다.
“수, 순사를 부르지.”
돌석이 애써 입술을 달싹였다. 간신히 고개를 끄덕인 춘필이 경찰서, 경찰서, 하고 중얼거렸다. 돌석은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떼어 경찰서로 향하다 말고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뭍가에 누운 여자가 금방이라도 일어나 뒤를 쫓아올 것만 같은 탓이었다. 뒷덜미를 잡아채는 듯한 서늘한 감각을 애써 떨친 돌석은 춘필을 재촉했다.
“어서 가세, 어서!”
한 점의 빛도 없는 밤거리에 두 사람의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화는 사무실 앞에 도착해 주머니에 넣어 온 열쇠로 문을 열었다. 해경은 어제 저녁 소화가 머물고 있는 향운정으로 찾아와 아침에 사무실에 사람이 없다면 열고 들어가라며 소화에게 열쇠를 맡기고 간 뒤였다. 소화는 사무실 문을 열고는 제일 먼저 닫혀 있는 창을 바깥으로 밀었다. 아침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소매를 걷어붙인 소화는 사무실 구석에 놓인 함을 열어 총채를 꺼내들었다. 까치발을 들고 천장까지 닿을 정도로 높은 책장의 먼지를 털자, 얼마나 쌓여 있었던 건지 먼지가 하얗게 떠올랐다. 콜록거리며 기침을 한 소화는 아예 의자를 가져다 놓고 꼼꼼히 책장의 먼지를 털고 걸레로 닦아냈다. 책장과 책상 위를 싹싹 닦고 바닥을 막 쓸고 있는데, 닫힌 문틈 아래로 접힌 신문이 쑥 들어왔다.
소화는 사무실의 문을 살짝 열어 보았다. 언제 가져다 놓고 갔는지 해경이 구독하는 신문이며 잡지들이 문 앞에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편지가 몇 통 올려진 채였다. 신문과 잡지를 사무실의 탁자 위에 가져다 올려놓은 소화는 잠시 손을 멈추고 해경에게 온 편지의 봉투를 확인했다. 열 통 남짓 되는 편지는 전부 다른 곳에서 온 것이었다. 지역별로 편지를 정리해 해경의 책상 위에 놓아 둔 소화는 청소를 마치고는 탁자 앞의 소파에 앉아 신문을 펼쳐 보았다.
“뭐가 재미있는 일일까?”
중얼거린 소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해경이 소화에게 시킨 일은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아침에 사무실 청소와 정리를 하고 간단한 손님 접대를 담당하는 것이 일단 첫 번째였고, 두 번째는 해경이 구독하는 신문이나 잡지를 먼저 읽어 본 뒤 재미있어 보이는 기사에 표시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글을 읽는 데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기에 그리 힘든 일은 아니었지만,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시키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 수 없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에 소화는 곧 다른 생각을 떨치며 신문으로 눈을 돌렸다. 1면에는 명년도 신규 요구, 총 삼십억 가량 등이 크게 쓰인 채였다. 무슨 말인지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아마 일본 정부의 예산 이야기인 듯 했다. 소화는 다음 면을 넘겼다. 신문을 자주 읽어보지 못한 탓에 작은 글자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으나, 꼼꼼하게 읽으려 애를 쓰니 조금씩 익숙해졌다. 위에서부터 천천히 손가락으로 짚으며 신문을 읽어내려오던 소화는 한 곳에서 손을 멈췄다.
― 여성 한강에 익사
이십이일 오후 열한시경 한강인도교하에는 처녀의 시체 하나가 표착되어 있는 것을 소관 용산서에서 검시한 결과 지난 이십이일 오후 빠져 죽은 시내 연희정 백팔십칠번지 김석(金碩)의 손녀 김명희(金明喜)로 판명되었다는데 김명희는 상당한 부호의 따님으로서 향년 십구세에 교사로 일하는 꽃다운 미인이었으나 이유를 알 수 없이 창졸간에 사망하여 원인을 찾고 있다 한다.
매우 짧은 기사였으나 상당한 부호의 따님, 꽃다운 미인, 이유를 알 수 없이 창졸간에 사망 따위의 단어들이 눈을 끌었다. 이십이일이라면 닷새 전의 일이었다. 한참 그 기사를 보고 있던 소화는 옆에 놓인 펜으로 기사의 박스를 따라 굵은 선을 그어 표시를 해 두었다. 이외에도 전당포 절도 사건이라든가, 멧돼지가 축사를 들이받아 엉망으로 하고 도망쳤다든가, 조선에서 최초로 여자 수영 강습회가 열린다든가 하는 기사들에도 차례로 표시를 하던 소화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잘못 들었나 생각했지만 그 순간 다시 한 번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소화가 물었다.
“누구신지요?”
“여기가 정해경 탐정님의 사무실이 맞습니까?”
앳된 소년의 목소리였다. 머뭇거리던 소화는 문을 열었다. 교복을 입은 소년이 우산도 없이 비를 흠뻑 맞은 채 문 앞에 서 있었다. 깜짝 놀란 소화는 소년을 쳐다보다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저어, 선생님은 아직 사무실에 나오지 않으셨어요.”
“언제쯤 나오시는지 알 수 있습니까?”
소년의 목소리는 매우 다급했다. 소화는 덩달아 초조해져 쩔쩔맸으나, 해경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집이나 연락처를 전혀 알지 못하는 탓이었다. 소화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것을 본 소년이 바싹 말라붙은 입술을 물었다 놓았다 하더니 물었다.
“오실 때까지 기다려도 괜찮겠습니까?”
“아, 네! 이쪽으로 앉으시겠어요?”
소화는 얼른 소년을 탁자 앞의 소파로 안내하고는 성냥을 그어 석유 풍로에 불을 붙였다. 비를 맞은 탓인지 소년이 새파랗게 질려 떨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풍로 위에 올린 주전자에서 곧 물이 끓자, 소화는 차를 내려 소년의 앞에 두며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따뜻한 차니 좀 드셔 보셔요.”
그러나 소화의 말을 듣지 못한 양 소년의 눈은 한 곳에 못박힌 채였다. 소화는 소년의 시선을 따라갔다. 소년은 아까 펼쳐 놓은 채 그대로 둔 신문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소화가 아 참, 하고 신문을 접으려 하자 소년이 신문 위를 누르며 소화를 올려다보았다.
“이 기사에 왜 표시를 해 둔 겁니까? 누가 해 두었습니까?”
소년이 가리킨 것은 한강에 빠져 죽은 여자에 관한 기사였다. 소년이 왜 그런 것을 묻는지 알 수 없었다. 소화를 올려다보는 소년의 눈빛은 절박함에 가까웠다. 소화는 소년의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한 거예요. 선생님께서 신문을 읽다가 흥미로운 사건이 있으면 표시를 해 두라고 부탁하셔서…….”
“……그렇습니까.”
신문 위에 놓인 소년의 손끝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고 있었다. 소화가 재차 차를 권하자, 소년이 그제야 차를 가져다 둔 것을 깨달은 듯 감사합니다, 하고 중얼거리더니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들었다. 손이 떨리는 탓인지 찻잔 안의 물이 요동쳤다. 겨우 두어 모금을 마시고 내려놓은 소년은 손끝을 뜯는가 하면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가 손목에 찬 시계를 연신 들여다보곤 했다. 그 모습에 소화도 절로 동요되어 초조해질 지경이었다. 삼십 분쯤 지나자 소년이 더 참지 못하겠는지 벌떡 일어나서는 구석의 의자에 앉아 잡지를 펼쳐 놓고 있던 소화에게 물었다.
“도대체 언제쯤 나오시는 겁니까? 정말 급한 일인데…….”
“여기 오시는 분들 치고 급하지 않은 사람을 본 일이 없어서요.”
소화가 입을 열기도 전 문이 열리며 해경의 목소리가 날아들어왔다. 우산을 접어 한쪽에 세워놓은 해경은 소화에게 가벼운 눈짓으로 누구냐는 무언의 물음을 던졌다. 소화가 막 입을 열려는 찰나 해경 쪽으로 달려온 소년이 교모를 벗고 해경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김이주라고 합니다. 무슨 일이든 해결해 주신다는 소문을 듣고 왔습니다.”
“숨 돌릴 시간은 좀 주셔야겠는데요.”
이주가 숨이 넘어가거나 말거나 느긋하게 대답한 해경은 입고 있던 프록코트를 벗었다. 소화가 후다닥 다가와 옷을 받아들자 해경이 잠시 놀란 눈치를 하더니 살짝 웃어 보였다. 소화가 해경의 코트를 옷걸이에 걸어 두자 해경이 이주에게 소파를 가리켰다. 이주가 소파로 돌아가 앉자 해경 역시 그 맞은편으로 가서 앉으며 이주에게 말했다.
“경성제이고보(京城第二高普) 학생이시군요.”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주가 놀란 얼굴로 해경을 마주보자, 해경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교모의 마크를 가리켰다. 자신이 크게 놀란 것에 비해 답이 너무 쉽게 나온 탓인지 이주가 아, 하고 멋쩍은 듯 중얼거리며 교모를 잠시 만지작거렸다. 소화가 눈치 빠르게 해경의 앞에도 찻잔을 가져다 놓자 해경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몸을 약간 앞으로 숙였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이주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입술 끝을 몇 번이고 물었다 놓았다. 해경은 이주를 재촉하지 않았다. 몇 분쯤 침묵을 지키던 이주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닷새 전 제 누이가 죽었습니다.”
이주는 아까 소화가 보고 있던 신문의 면을 펼쳐 표시해 둔 기사를 가리켰다. 한강에서 익사한 여자에 관련된 기사였다.
“이 여자가 제 누나입니다.”
해경은 잠시 그 기사를 읽고는 고개를 들어 이주를 보았다. 이주가 한 번 숨을 들이쉬었다.
“……인도교 위에 유서가 있었다고 합니다.”
애써 떨림을 참는 듯한 목소리였다. 해경이 고개를 기울였다.
“자살입니까?”
“그것이, 네, 아니오, 모르겠습니다……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유서의 사본입니다.”
이주가 품에서 흰 봉투 하나를 꺼내 해경에게 건넸다. 봉투와 안의 내용물은 일부 젖어 있었으나 글씨를 알아보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단정한 여성의 글씨로, 특별할 것 없이 어디서나 살 수 있는 괘지에 써내려간 글은 길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오욕을 당했습니다. 그는 나를 달콤한 말로 꼬여냈지만 나는 그 모든 것이 거짓임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나는 그와 혼인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를 이렇게 만든 범인은 그 사람입니다. 나는 일생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불효녀는 언제 다시 부모님의 얼굴을 뵈올지 기약하지 못하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누가 봐도 자살자의 유서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글이었다. 해경이 그 글을 뚫어지게 보고 있는 동안 이주가 입을 열었다.
“경찰은 누나가 자살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해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편지에서 눈을 돌려 이주를 보았다.
“그런데 김 군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게 찾아온 것이겠지요?”
“명희 누나는 결코 자살할 사람이 아닙니다.”
“만나는 남자가 있었습니까? 이것을 보면 남자를 원망하는 듯한데요.”
“누나는 다음달에 결혼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해경은 미간을 좁히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연애를 비관하여 자살하는 사람들은 흔할 만큼 많았다. 그런 기사는 일주일에도 몇 건은 볼 수 있었고, 이런 시대에 딱히 특별하다고 할 수 없었지만 결혼을 한 달 앞둔 신부가 신랑을 원망하는 글을 쓰고 다리 위에서 몸을 던져 죽는다는 건 확실히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
“남자가 배신을 한 겁니까?”
“그게……모르겠습니다. 남녀 사이의 일은 둘만이 아는 것이지만 매형은 결코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이 유서 때문에 매형은 어제 경찰서로 끌려갔습니다. 경찰은 둘이 다투다 누나가 홧김에 자살한 것이 아니냐고 했지만 매형은 지금껏 목소리 한 번 높여 본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가족들도 때문에 모두 황망해하고 있습니다.”
“누나도 자살할 이가 아니고, 매형도 그럴 사람이 아닌데 그럼 어떻게 죽었을까요?”
물음이었으나 기실 그것은 혼잣말에 가까웠다. 해경은 손에 쥐고 있는 글을 다시 한 번 읽었다.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울 정도로 명백한 유서였다. 스스로 죽은 것도, 누가 죽인 것도 아닌데 열아홉의 꽃같은 처녀가 물에 빠져 죽었다…….
해경은 문득 섹스피어(Shakespeare: 셰익스피어)의 희곡 속의 한 장면을 되새겼다. 사랑에 미쳐 버린 아름다운 오필리어가 화관을 든 채 잠자듯 물 속으로 가라앉아 죽어 가는 모습이 떠오른 것은 아마도 우연일 터였다. 해경은 멀쩡하던 사람도 사랑 때문에 광기의 불꽃에 휘말리면 주변 사람은 물론이고 자신마저 태워 버리는 일이 잦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랑의 광기로 설명하기엔 모든 상황이 석연치 않았다. 해경은 이주를 보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유서를 보고 매형을 의심하지 않기 어려울 텐데, 김 군은 매형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 하는군요.”
이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매형은 저희 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입니다. 누구에게나 평판이 매우 좋고 실력도 뛰어난 분입니다. 집은 가난하지만 인성이 바르고 누나에게 헌신적이어서 집에서 결혼을 허락했습니다. 매형은 절대 이 편지에 쓰인 것처럼 누구를 속이거나 누나와 다툴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경찰도 그렇고 부모님도 매형이 누나에게 무슨 못할 짓을 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계셔서…….”
“누나가 자살했다고 해도 이 편지에 따르면 매형에게 일정 책임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해경의 물음에 이주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강한 말투로 부정했다.
“말씀드렸듯 매형은 그럴 사람이 아니며, 저는 누나의 죽음이 자살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명희 누나는 아주 강단이 있는 여자였습니다. 만약 매형이 자기를 속이거나 한 것을 알았다면 파혼을 하면 했지 결코 이런 식으로 나올 사람이 아닙니다.”
“증거가 조작됐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모르겠습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습니다. 그래서 진실을 밝히고 싶어 찾아온 겁니다.”
대답한 이주가 고개를 떨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해경은 흠, 하고 뜻모를 소리를 뱉고는 빈 종이를 한 장 이주의 앞에 내밀었다.
“연락처를 남겨 주십시오. 그리고 무언가 상황이 변하는 게 있다면 즉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례는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하군요.”
간절한 이주의 말에 냉정하게 들릴 정도로 간결한 대답을 하며 말을 끊은 해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앞으로 돌아갔다. 눈치를 보던 이주가 종이에 서둘러 무언가를 적고는 해경을 따라 일어나서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며 사무실을 나갔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소화가 닫힌 문을 보다가 해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런 손님이 자주 찾아오시나요?”
소화의 말에 잠깐 무슨 생각인가를 하는 듯하던 해경이 퍼뜩 고개를 들어 소화를 보고는 웃는 듯한 표정을 했다.
“아마 거의 대부분이 이런 손님일 겁니다.”
대꾸한 해경은 책상 위에 편지의 사본을 펼쳐 놓은 채 한 글자 한 글자를 곱씹듯 다시 읽었다. 자살도, 살인도 아닌 어떤 죽음의 모든 열쇠가 이 한 장의 편지로부터 시작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