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d Carry Support RAW novel - Chapter (171)
결전
현은 우선 마음을 가라앉혔다.
공감을 발동하기 전엔 스스로를 한계까지 미치게 만들 필요가 있었지만, 전투를 앞둔 지금은 다시 이성을 되찾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상태창.’
속으로 읊조리자 현의 눈앞엔 수많은 문장들이 떠올랐다.
[공감이 발동하는 동안 ‘어둠의 검’이 ‘혼돈의 검으로 변경됩니다!] [‘혼돈의 검’은 ‘그림자 방패 Lv.9’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사용 가능합니다!] [혼돈의 검]-시전자의 의지에 따라 시공간을 가릅니다.
-불어넣은 초월력에 비례한 만큼의 의지를 행사할 수 있습니다.
-해당 스킬은 다른 방식으로 강화할 수 없습니다.
-[공감력/1000]초 동안 지속됩니다.
(소모 초월력 : 1000 ~ ∞)
설명을 자세히 읽을 시간은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천사 하나가 코앞까지 다가온 상태였으니까!
현은 그 즉시 붉은 대검을 내리그었고.
그 다음 순간 일어난 일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뭐지?’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자신은 그저 천사의 머리위로 검을 내리그었고.
수직으로 그어진 선을 경계로 공간이 양분되어 있었다.
한쪽은 빛, 또 한쪽은 어둠으로.
지상과 지하, 양쪽 세계에 절반씩 발을 걸친 천사는 검을 뻗은 자세 그대로 움직임을 멎은 채였다.
마치 이 세상에서 그의 시간만 멈춘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천사. 칠흑과 광휘를 절반씩 머금은 그 모습은 흑백의 날개를 지닌 ‘조화’의 초상화 같았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절반 중 어두운 부분이 천사의 몸뚱이 반쪽과 함께 사라져 버렸고.
털썩. 세상에 홀로 남은 나머지 반쪽 몸뚱이는 힘을 잃은 통나무처럼 쓰러졌다.
주위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천사의 시체 반쪽이 빛으로 흩어져 가고 있음에도, 모두의 시선은 현의 손에 들린 붉은 대검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세상을 가르는 검.
방금 그 검이 일으킨 현상은 여태껏 아무도 겪어보지 못한 것이었기에.
“…….”
현은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
정적 속에서 차분히 스킬 설명을 마저 읽어 내렸다.
우선 스킬의 지속시간부터.
자신이 만들었던 혼돈의 검이 고작 2~3초 만에 사라진 까닭은 어둠의 검에 비해 지속시간이 너무도 짧기 때문인 듯하다.
뭐, 별로 상관없는 일이다.
공감이 발동한 이후부턴 본 적도 없는 초월력이 모여가고 있으니까.
그렇다, 공감이란 본래 세상 모든 이의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
자신은 조화를 섬기는 모든 인간들을 등에 업고 있는 셈이었다.
이 순간에도 어마어마한 공감이 쌓이고 있을 테니 평소엔 사용할 엄두도 내지 못했던 스킬들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으리라.
아니, 1초마다 일정 비율의 초월력이 저절로 감소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가능한 한 초월력을 낭비해야만 했다.
잠깐 머리를 굴려 본 현은 일단 자신의 스펙부터 상승시키기로 했다.
라딕스 섬에서와 마찬가지로, 스탯 증폭을.
[5000의 초월력으로 ‘반신화’를 사용합니다!] [주의! 루이즈가 보유한 마기가 부족합니다!] (-20,395,812) [증폭의 효과가 약화될 수 있습니다! 이대로 진행하시겠습니까? Y/N]우우웅.
그 순간, 갑자기 새까만 기운이 이마에 일렁였다.
의아함을 느끼던 순간 의식을 통해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도와주지.」
아까도 한 번 들었던 악마의 목소리.
슬쩍 옆을 돌아본 현은 칠흑의 날개를 지닌 남자가 자신에게 손을 뻗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부족한 건 전부 채워주마. 마음껏 날뛰어 봐라.」
‘그렇군.’
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숍 계급의 악마.
400레벨의 루이즈보다 더욱 거대한 마기를 지닌 존재가 무한정 마기를 공급해 준다면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방금 전 읽은 설명에 따르면 ‘혼돈의 검’을 발동하는데 마기는 필요하지 않았다.
스킬을 강화시키는 ‘가호’.
스탯을 증폭시키는 ‘반신화’.
초월력에 마기가 함께 소모되는 스킬은 이 두 개가 전부였으니 말이다.
[5000의 초월력으로 ‘반신화’를 사용합니다!] [60초간 모든 스탯이 500% 증가합니다!]‘이렇게 하면….’
[5000의 초월력으로 ‘혼돈의 검’을 사용합니다!]‘훨씬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겠지.’
다시 한 번 붉은 대검을 손에 들었다.
공감력을 6배로 늘렸으니 혼돈의 검도 방금처럼 쉽게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천사의 검술, 강화.’
[1000의 초월력으로 ‘천사의 기초 검술’을 강화합니다!]속으로 읊조린 현이 허공을 베는 순간.
화악!
문자 그대로, 공간이 갈라졌다.
허공에 생겨난 균열을 경계로 위쪽은 백색, 아래쪽은 흑색으로 나뉘었다.
같은 곳에 놓인 두 세상은 사실 전혀 다른 공간.
그 경계선에 닿은 존재들은 조금 전 절반으로 갈라졌던 천사처럼 시간이 멈춘 듯 정지했고.
스스스-!
백색과 흑색이 원래대로 이어진 뒤에야 다시 시간을 부여받은 듯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공격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후웅! 후웅!
붉은 검이 그어질 때마다 세상은 계속해서 잘게 갈라져 나갔다.
가로로, 다시 세로로, 혹은 대각선으로!
어느새 현의 앞쪽은 무수한 경계선이 그어진 흑백의 격자처럼 변했다.
그리고 잠시 후, ‘혼돈의 검’ 지속시간이 끝난 뒤.
현의 어깨 위로 무수한 빛의 알갱이들이 안개비처럼 사르르 내려앉고 있었다.
“…….”
현은 잠시 검을 멈추고 상황을 파악해 보았다.
비숍 이상의 천사는 그렇게 많이 죽이지 못했다.
소멸한 것은 대부분 서번트, 혹은 플레인 계급의 하위 천사들.
그 이상의 계급의 고위 천사들은 미지의 힘을 목격하자마자 눈에 띄지 않는 장소까지 꽁무니를 뺀 듯했다.
‘루이즈는… 아직도 깨어나지 못했나?’
악몽에 빠진 루이즈와 동화했을 때, 그녀가 느끼던 감정의 여운은 아직도 생생했다.
초월자는 다른 초월자에게 공감을 전할 수 없다.
공감이 발동되어도 루이즈로부터 전해지는 감정만은 완화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문득 현은 두려워졌다.
아무리 자신의 과감한 결단이었다고는 하나, 루이즈가 영영 저주에서 깨어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었다.
…적어도, 그녀가 돌아올 때는 슬픔과 절망이 조금이라도 덜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돌아와라.”
현은 이젠 얼마 남지 않은 루이즈의 부하들을 역소환시켰다.
부름을 받은 마물들은 칠흑의 구체가 되어 현의 몸속에 빨려들었다.
세상을 통째로 절단시키는 혼돈의 검은 피아를 구분하지 않는다.
자칫 실수로 루이즈의 부하들을 죽이지 않으려면 그들을 모두 불러들이는 편이 좋았다.
천사와 발키리들이 도망지고, 마물의 군대까지 사라지자 전장은 너무도 고요해졌다.
슬쩍 돌아보니 뒤쪽에 남은 사람은 고작 세 명 뿐이었다.
살론, 세세리, 그리고 상처 입은 악마 하나.
‘나머지는… 다 죽었나.’
뒤늦게 친구목록을 살펴 본 현은 라티스의 상태 또한 오프라인으로 바뀌어 있음을 확인했다.
접속을 종료했을 리는 없으니 전쟁 중에 사망했을 확률이 높았다.
웬만해선 살아남을 실력이 되는 그가 죽었다는 것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희생했을 거란 뜻.
아인과 타르타르도 없으니 쉐이드 길드의 간부진들 중 생존자는 자신과 살론 뿐이었다.
현은 살론에게 마지막 지시를 내렸다.
“둘은 조금 멀리서 따라와요.”
“멀리서?”
“제 근처에 있으면 위험할지도 모르거든요.”
“으음… 알겠다.”
살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 현이 펼친 능력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감히 끼어들 만한 전투가 아니란 사실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제부터의 전쟁은 자신의 영역 바깥인 것이다.
“그리고 세세리.”
“넷…!”
“천계를 빠져나가는 즉시 이걸 사용해.”
현은 세세리에게 귀환 스크롤를 던져 주었다.
세세리도 쉐이드 길드 소속으로 등록되어 있으니, 공간이동이 가능해지는 즉시 프라이빗 룸으로 귀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잘 따라와요.”
파앙! 파앙! 현은 바람을 터뜨리며 천계의 출구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전부 도망쳤기 때문인지, 더 이상 앞을 가로막는 천사나 발키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위험하군.”
옆쪽의 악마가 중얼거린 것은 통로에 놓인 무수한 빛의 고리들을 가로지르던 때였다.
“천계를 나가는 문이 막혔다.”
“뭐…?”
천사들은 도망쳤지만, 그렇다고 녀석들이 아무 짓도 해두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한참을 달리던 현은 곧 자신이 같은 장소를 맴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빌어먹을 새끼들이 귀찮은 짓을 해 둔 모양이군.”
“…….”
현의 머릿속엔 복잡한 생각들이 떠올랐다.
지금쯤 대규모 강림 마법이 완성되었을까?
비숍, 로열, 어쩌면 빛까지 등장했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더 서둘러야 했다.
“…괜찮아.”
“뭐라?”
“아직 나갈 수 있어.”
잠깐 무언가를 고민하던 현은 끝없이 반복되는 빛의 고리로 이루어진 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다시 상태 창을 확인했다.
지상으로부터 전해지는 공감은 이곳까지 닿고 있다.
초월력은 계속해서 모여든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천계와 지상이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
또한, 완전히 다른 선의 세계가 아니라면 혼돈의 힘으로 그 벽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뜻이었다.
‘혼돈의 검!’
[30000의 초월력으로 ‘혼돈의 검’을 사용합니다!]다시 한 번 붉은 대검을 뽑아들었다.
어째선지 아까보다 더욱 진해진 색채는 이제 붉은 빛이 아닌 보랏빛으로까지 보일 정도였다.
“그게 무슨….”
그 응축된 힘을 느꼈는지, 곁에 서있던 악마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천사와 악마는 공감을 다루는 힘, 즉 초월력에 민감하다.
부우우웅! 격하게 진동하는 대검에 얼마만큼의 힘이 응축되어 있는지 직감할 수 있었다.
“완전한 초월자도 아닌… 존재가….”
고작 한 명의 인간이 행사하는 상식을 넘어선 힘.
미친 듯이 떨리는 검에 담긴 힘은 비숍의 악마인 자신조차 감히 다룰 엄두를 내지 못하는 힘이었다.
‘이거라면…’
혼돈의 검.
설명에 따르면 그 검은 시공간을 절단한다고 한다.
또한, 시전자의 의지에 따라 그 힘이 무한대로 늘어난다고 한다.
만약 그 말이 맞다면.
‘벨 수 있다!’
현은 아무것도 없는 전방을 겨누고 수평으로 검을 휘둘렀다.
허공을 베는 데는 아무런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고, 무언가 걸리는 느낌도 없었다.
얼핏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칼부림.
하지만 그 사소한 몸짓이 일으킨 결과는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잠시 후 정적이 끝나고.
콰아아아아!
우레와 같은 폭포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천계의 벽을 구성하던 물질이 흩어지자, 원래의 형상을 복구하기 위해 신성의 안개가 쏟아져 내리는 것이다.
“열렸어!”
그와 동시, 현의 눈이 번쩍였다.
갈라진 천계의 틈 사이로 드러난 광경을 목격한 순간이었다.
틈 사이로 펼쳐진 새하얀 구름은 분명 지상에서 올려단 하늘의 풍경!
“서둘러, 닫히기 전에!”
하지만 신성의 안개는 순식간에 부서진 공간을 봉합하며, 천계의 틈을 메워가고 있었다.
현은 틈이 완전히 닫히기 전에 힘껏 뛰어올랐다.
슬쩍 돌아보니 양팔로 세세리와 살론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날아가는 악마의 모습이 보였다.
비교적 스펙이 낮은 둘이 천계를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 광경을 보고 나서야 현은 안심하고 속도를 높였다.
간신히 잡아낸 기회, 기적과도 같이 찾아온 힘으로 멸망을 앞두고 있는 지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
공작들의 연합군이 방어하고 있는 남극의 하늘다리.
하늘과 지상. 천공과 심연의 팽팽한 접전의 승기는 갈수록 천공으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사령관인 바히미르가 잠시 자리를 비운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기 때문.
대부분 심연의 존재들은 낮에 그 힘이 약해진다.
특히 언데드 계열의 마물들, 혹은 어둠의 수하들에게 하늘에 떠있는 태양의 존재는 너무도 치명적이었다.
“아침이로군….”
스코타나토스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번쩍이는 그의 안광도 지금은 태양빛에 가려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희미해졌다.
“여기…까지…인가.”
상황은 그야말로 최악.
리치들의 눈동자를 통해 어딜 살펴봐도 패전. 패퇴. 패배밖에 보이지 않았다.
“다시… 긴 잠에 빠져들… 때로구나.”
변화가 시작된 것은 바로 그 순간.
갑자기 태양 옆에 검은 반월이 떠올랐다.
대낮에 위성이 떠오르다니?
그것도 검은 색의 위성이라니?
하늘의 이상현상을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스코타나토스였다.
“저건… 무엇… 이지?”
태양과 나란히 위치한 ‘검은 반월’을 바라보는 스코타나토스의 안광이 깜빡거렸다.
빛 사이에 홀로 떠있는 어둠.
태양과 함께 내리쬐는 칠흑의 조각은 너무도 이질적이었기에.
‘저건 위성이 아니다….’
스코타나토스는 곧 깨달았다.
검은 반월은 점점 그 크기가 커져가고 있다.
정체불명의 뭔가가 이쪽으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반월이 하늘의 절반을 뒤덮을 정도로 커지자 주위에서 싸우고 있는 다른 이들도 ‘이변’을 알아챘다.
칠흑의 조각은 점점 커지고, 커지다가….
화아악!
남극의 하늘다리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이게 무슨…!’
그 순간, 모두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난데없이 주위가 칠흑으로 뒤덮여 버렸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칠흑은 아니었다.
검은 태양이 내리쬐고 붉은 공기가 가득한 장소.
‘여기는 설마… 지하… 인가…?’
이곳은 심연의 공작들에겐 너무도 익숙한 세상이었다.
허나, 안광이 차차 밝아져가는 와중에도 스코타나토스는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아무런 전조도 없이 세상이 통째로 가라앉을 수가 있단 말인가?
‘아니… 건너편은 여전히 지상이다…!’
스코타나토스는 곧 하늘을 가로지르는 보랏빛의 경계막을 발견했다.
그 경계를 기점으로 위쪽은 빛, 아래쪽은 어둠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당연하다. 같은 공간에 두 종류의 세상이 담기는 것은 누구도 본 적이 없을 테니.
설마 누군가의 검격이 이런 일을 벌였으리라 생각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 순간, 누군가의 중얼거림이 침묵이 내려앉은 좌중 아래로 울려 퍼졌다.
“어둠이시다….”
“크하하, 어둠께서 힘을 완전히 되찾으신 거야!”
와아아아!
웅성거림은 함성이 되어 순식간에 심연의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빛이 지고, 어둠이 떠오른 전장.
천공의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진 반면 심연의 사기는 단숨에 치솟았으니 한순간에 기세가 역전되는 것은 필연이었다.
“…….”
소란 속에서도 계속 위를 올려다보던 스코타나토스의 눈동자가 일순간 번쩍였다.
지상과 지하를 나누는 보랏빛 경계 위를 비행하는 두 악마의 실루엣을 포착한 것이다.
아니, 한쪽은 악마가 확실하지만 다른 한쪽은 천사인지 악마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함께 나타났기에 둘 다 악마라고 추측한 것이다.
“그렇…군.”
곧 깨달았다.
가장 오랫동안 살아온 공작인 스코타나토스는 남들이 모르는 지식 몇 가지를 알고 있었다.
“혼돈… 인가.”
양쪽의 날개를 모두 지닌 초월자는 시대의 의지에 따라 천사도, 악마도 될 수 있다.
그러니 저 분이 바로 혼돈!
그렇게 결론을 내려던 스코타나토스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읊조렸다.
“아니… 지금은 ‘조화’라는 이름이겠군.”
쿵. 스코타나토스는 바닥에 지팡이를 꽂아 넣는 찰나.
그의 발밑에서 칠흑의 마법진이 순식간에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후우웅- 후우웅-
마기가 소용돌이치는 마법진 위에서, 해골 공작은 조화에게 제사를 바치기 시작했다.
미약한 힘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길 바라며.
***
힘으로 천계를 찢고 빠져나온 직후.
‘안 돼…!’
현은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루이즈로부터 전해져 오는 의식이 급격히 희미해졌기 때문이었다.
「루이즈!」
영혼대화로 소리쳐 봐도 묵묵부답.
로열의 악마가 사용한 마법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바로, 본인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감정을 선사하는 악랄한 저주다.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의 악몽에 잡아먹혀 결국엔 스스로를 잃어버린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 위험한 저주를 걸어 달라 부탁한 이유는 루이즈의 자아가 평범한 인간을 부쩍 상회하기 때문이었다.
라딕스 섬에서도 혼자만 멀쩡했던 루이즈다.
그 정도로 정신력이 강하다면 웬만한 악몽은 쉽게 극복해 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어째서 루이즈의 의식은 점점 가라앉아만 갈까?
대체 어떤 두려움과 절망이 그녀의 영혼을 잡아먹고 있기에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는 것인가?
‘칫…!’
당장이라도 루이즈를 쉬게 만들어 주고 싶지만, 그럴 순 없다.
공감을 유지하는 가장 큰 매개체는 루이즈의 감정이니까.
동화를 해제하는 동시에 공감이 끝나버릴 가능성이 존재하는 이상 계속해서 루이즈의 몸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오래 끌 순 없어!’
하늘에 열린 무수한 통로들.
그 중 가장 큰 문을 통해 빛의 대천사가 강림하리라.
그리고 전쟁의 판도를 뒤집을 방법은 오직 빛을 죽이는 것밖에 없었다.
‘조금만 더 가면…!’
입술을 깨물며 지도를 펼쳤다.
지니가 알려준 덕분에 대천사가 강림할 만큼 큰 통로를 사전에 발견할 수 있었다.
이후, 천계를 빠져나오자마자 악마 한 마리를 데리고 전속력으로 날아가는 중이었다.
그렇게 잠깐을 달려 지도에 표시한 지점에 도착한 찰나.
‘찾았다!’
목표를 발견한 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바다의 상공.
수천의 발키리 떼가 하늘을 뒤덮은 가운데 한 명의 남자가 지상을 내려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공감의 힘은 충분하다.
스탯 증폭, 스킬 강화를 위해 필요한 마기도 끊임없이 공급되고 있는 중.
빛의 대천사를 목표로 온 힘을 다해 검을 내려 그었다.
그 순간.
키이이잉-!
세상에 균열이 일었다.
모세의 기적처럼, 양쪽으로 갈라진 바다에선 한 쌍의 폭포가 마주보며 낙하는 가운데, 세상은 흑과 백으로 나뉘었다.
‘…!’
“…….”
절반으로 갈라진 세계의 하늘 위.
밝은 쪽의 하늘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남자가 거대한 크리스탈 날개를 펼치고 있었고.
칠흑으로 물든 쪽의 하늘 위엔 마찬가지로 크리스탈의 날개를 지닌 현이 바람장벽을 밟고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둘은 서로의 정체를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현은 자신도 모르게 어떤 이름을 중얼거렸다.
“루미테시엘.”
“…!”
그 찰나 남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예고 없이 번쩍인 그의 검에서 광휘가 쏘아졌다.
허나, 닿지 않는다.
현에게 작렬하던 빛줄기는 둘 사이에 존재하는 보랏빛의 경계를 마주치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세상을 건너뛰는 것은 빛의 속성에 포함되지 않은 까닭이다.
“위험한 힘이로구나.”
남자가 현에게 말했다.
대천사의 목소리가 지상에 메아리칠 때마다 바닷물이 웅웅거리며 튀어 올랐다.
“허나, 혼자서는 사용할 수 없는 힘이로군.”
“…….”
“오늘은 전력을 다해야겠구나.”
화아악!
빛의 검이 새하얗게 타오르는 순간, 현은 숨을 삼켰다.
갑자기 주위에 향기가 피어올랐기 때문이었다.
라디에트가 죽고, 파피가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에도 맡았던 향(香).
맞아, 이건 자아가 불타는 냄새다.
“반드시 너희를 없애야겠어.”
“….”
현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생각한다.
너희… 라는 건 이쪽이 두 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그가 진짜로 죽이고자 하는 대상은 아마도 루이즈일 것이다.
2세대 인공지능이 굳이 자아를 불태워 가며 유저의 목숨을 노릴 린 없으니까.
루이즈가 없으면 이쪽도 혼자선 공감의 힘을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거겠지.
‘생각하자… 이길 수 있는 방법!’
빛의 대천사를 마주보며 현은 잠시 심호흡을 했다.
동화로 전해지는 감정은 시간이 갈수록 불안정해지고 있어.
이제 루이즈가 혼자 깨어날 수 없다는 건 확실해졌다.
지상의 전쟁을 막기 위해서, 그리고 루이즈가 악몽에 삼켜지는 것을 구해내기 위해서라도 자신은 한시 빨리 빛을 쓰러뜨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 이길 수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이번 싸움에 모든 걸 걸 수밖에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단숨에 끝내주지.”
속전속결. 그건 이쪽도 원하는 바야!
쩌어어어엉!
서로간의 검이 충돌한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
바다 위의 전쟁.
원칙상으론 1대1의 결투일 테지만, 전쟁이라 불러도 위화감이 없는 까닭은 전쟁의 결과가 둘 사이의 승패에 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콰아아아아!
천둥이 몰아치고 다시 바다가 뒤집혔다.
세상이 수십, 수백 번이나 갈라지며 하늘은 순식간에 거미줄같은 균열로 가득 차 버렸다.
“큭…! 뭐야… 어디서 들리는 소리야?”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하는 건가…?”
신에 필적한 이들의 싸움이 시작되는 동시 지상에서 벌어지던 전쟁은 대부분 멎었다.
고막이 터질 듯한 굉음에 NPC들은 귀를 틀어막았고, 유저들은 볼륨 설정을 줄였다.
곳곳에서 전쟁을 중계하던 드론들이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북극의 방어전을 승리로 이끈 몇몇 고위 NPC들이 플라이를 사용해 소란이 벌어지는 바다 위로 다가가려 했지만, 어마어마한 신력의 폭풍을 마주하고 곧 접근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 마도국의 마법병대장만이 간신히 근처까지 다가가 망원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천리안과 같은 시야 확장 계열 마법.
‘저 자들은….’
바다 위의 하늘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넋을 잃은 것도 잠시.
마법병대장은 재빨리 고급 통신용 수정구를 꺼냈다.
주위에 마나폭풍이 몰아치는 탓에 간단한 통신 마법을 발동시키기 위해서도 최상급 결계를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우우웅. 이윽고 마법진이 빛나는 순간.
그의 눈에 비춘 장면들이 수정구에도 똑같이 비추기 시작했다.
앞으로 수천 년 역사에 남을 장면들이 녹화되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
[10000의 초월력으로 투명화를 사용합니다!] [지속시간동안 완벽하게 기척을 숨길 수 있습니다!]보이지 않는 혼돈의 검이 세상을 갈랐다.
촤라라락! 파도가 바다 위를 질주하는 것처럼, 칠흑같은 어둠이 공간을 달리며 하늘을 집어삼키자 구름 위의 태양도 칠흑에 묻혔다.
‘할 수 있다.’
세상을 지배한 완연한 어둠에 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태양을 없애는 것은 빛을 상대하는데 가장 유효한 전략이다.
빛의 대천사의 가장 큰 힘은 태양으로부터 기인하기 때문이다.
물론, 상대도 가만히 있던 것은 아니었다.
대천사는 자신의 세상에 다가가는 권능을 지니고 있으니.
번쩍!
빛의 검이 어둠을 갈라낼 때마다 햇빛이 어둠을 가르고 들어와 지상을 비추었다.
하지만 그것은 현의 상정 내.
태양이 드러나면 새로운 어둠을 덧씌우면 그만일 뿐이다.
화악! 잠시 밝아졌던 바다가 다시 한 번 칠흑으로 물들었다.
‘루이즈의 심정을 너도 좀 알겠지?’
처음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알 수 있다.
이 싸움의 구도는 자신에게 매우 유리하다.
빛은 세상의 경계면을 뚫을 수 없지만 혼돈의 힘은 시공을 뛰어넘어 모든 것을 벨 수 있으니까.
문제는 아직 한 번도 유효한 공격을 성공시키지 못했다는 점이었지만, 현은 마음속에 솟아오르는 초조함을 애써 억눌렀다.
‘실수하지만 않으면 돼…!’
[5000의 초월력으로 그림자질주를 강화합니다!] [다음 3회의 이동속도와 이동거리가 대폭 증가합니다!]현은 공간의 사이에 몸을 집어넣었다.
흑백의 틈새를 빠져나오는 순간 어둠속에 감춰져 있던 빛의 모습이 드러났다.
[80000의 초월력으로 천사의 검술을 강화합니다!]그리고,
세계를 산산조각 내는 소리가 울려퍼진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혼돈의 검이 세상을 양단했다.
모든 것을 무(無)로 흩어버리는 혼돈의 검은 형체를 지니지 못한 추상적인 것들까지도 베어버리기에 누구도 맞받아칠 수 없다.
그렇기에 빛의 대천사 또한 그대로 어둠에 휩싸이는 듯 했으나, 현은 공격을 멈추지 않고, 어둠에 삼켜진 전방을 향해 끊임없이 검을 휘둘렀다.
허공에 한 획, 한 획 검을 그어, 공간은 더욱 잘게 나누었다.
‘생체리듬 가속!’
겉으론 침착해보였지만, 사실 현은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공감이란 본래 인간이 사용할 수 없는 힘.
감정의 격류에 미쳐야만 공감을 다룰 수 있으니 스스로를 광기로 몰아넣어야만 했다.
‘루이즈를 살리려면….’
그래서였을까? 절대적인 존재를 앞에 두고서도 현의 머릿속은 루이즈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눈앞의 전투보다, 루이즈의 의식이 희미해져가는 것이 더욱 신경쓰였다.
그래, 루이즈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울 필요가 없었어.
저주에 걸릴 필요도, 슬픈 악몽을 꿀 이유도 없었겠지!
빛의 대천사, 저 녀석만 없었다면. 지상을 소각하려는 마음을 먹지 않았더라면…!
‘저 녀석을 죽여야 돼!’
검을 쥔 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세상에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 없다면 자신은 주저하지 않고 어둠을 택하리라.
그렇기에 어둠을 없애려는 빛을 죽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심을 마친 현이 행동을 개시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촤아아악!
굉음과 함께 현을 중심으로 양쪽의 바다가 증발했다.
난도질된 세상의 틈새로부터 빛의 검격이 작렬한 것이다.
다행히 현은 혼돈의 검을 쥐고 있어 멀쩡했으나, 증발로 인한 연쇄작용까진 막을 수 없었다.
‘…!’
현이 눈을 부릅뜬 순간, 바닷물이 순식간에 기화되며 어마어마한 압력이 발생했고.
콰아앙!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며 현의 몸은 사정없이 자리에서 튕겨나가고 말았다.
치이익! 치이이익-!
사방에서 들끓는 수증기는 순간적으로 불꽃 이상의 온도로 상승해 거꾸로 몸이 뒤집힌 채 날아가는 현에게 지속적인 피해를 가하고 있었다.
피해가 누적되는 와중에도 현의 눈동자는 한 곳만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흑백으로 점철된 세상 속에서 무지막지한 공격을 날린 대천사가 날개를 펴고 실루엣을 드러냈다.
여전히 고고해 보이는 저 모습.
하지만 현은 자신의 공격이 유효타가 되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대천사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빛의 성격은 난폭할 만큼 직선적이니 저 표정이 연기일 가능성은 없었다.
‘됐어. 통한다.’
주먹을 꽉 쥐었다.
감히 누가 빛의 몸에 상처를 입힐 수 있을까?
대천사의 권능을 뚫어낸 것은 아마도 자신이 최초.
힘이 한참 부족하긴 하지만, 공격이 그에게 닿았음은 분명했다.
힘만 충분하다면 인간의 공격으로 빛의 대천사를 소멸시키는 것 또한 가능하다는 뜻이다.
‘죽일 수 있어!’
잠시 가슴에 손을 대봤다.
아직도 심장은 미친 듯이 두근거리는 중.
현은 자신의 안에 있을 루이즈에게 미안함을 전하는 동시, 그녀의 의식이 조금만 더 버텨주길 부탁했다.
‘앞으로 조금만 더…!’
마음의 준비를 마친 현은 잠재력의 역행서를 사용했다.
유저의 스킬 포인트를 원래대로 되돌리는 그 아이템 말이다.
[모든 일반스킬이 초기화되었습니다!]순식간에 백지가 된 스킬트리.
현은 몇 번이나 연습한 대로 2개의 슬롯들에 스킬들을 순식간에 채워 넣었다.
첫 번째 슬롯엔, 무력화의파장, 혼돈의 검, 그림자 질주 등의 필수 스킬들을.
그리고 두 번째 슬롯엔 거의 모든 포인트를 투자해 딱 하나의 스킬을 새로 익혔다.
[후세(後世)의 기도 Lv.0]-당신의 갈망과 가장 가까운 미래를 불러옵니다.
-60초 동안 미래의 존재들로부터 공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60초가 지나면 보유한 ‘초월력’은 마이너스(-)로 표기되며, 빚을 모두 청산하기 전까진 초월력을 다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주의 : 역사가 어긋나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그대가 지닌 혼돈의 능력을 전부 잃어버리는 동시, 그 힘으로 이루어낸 현상들까지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니….)
카오틱 룰러로 전직한 이후 생겨난 동시에 ‘시간’ 계열의 트리에 존재하던 스킬이다.
현은 언젠가 자신이 공감을 다루게 되면 어떤 스킬을 사용할지 미리 생각해 두었다.
이것은 그 때 보아둔 스킬들 중 하나.
인간과 천사 사이에 존재하는 압도적인 ‘시간’의 차이를 일순간 없애주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무엇이지?”
빛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갑자기 인간의 영혼과 연결된 무수한 끈들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저 인간이 무슨 짓을 한 것인가?
혼돈의 힘은 전지전능하다는 빛의 대천사에게도 미지의 영역이었다.
“뭐긴….”
현은 작게 중얼거리며 상태창을 살폈다.
순식간에 차오르기 시작한 초월력은 10만… 벌써 100만을 넘어섰다.
이것은 미래로부터 주어진 힘.
조화를 섬기는 자들이 자신에게 빌려준 힘!
당장 이 세상을 멸망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힘이었지만… 딱히 고양감이 일지는 않았다.
60초가 다 지나기 전에 반드시 상대를 죽여야 한다는 신중함이 더해질 뿐이었다.
“널 없앨 기술이지.”
파앙!
허공을 밟고 튀어나가는 찰나 혼돈의 검을 뽑았다.
완연한 보랏빛으로 일렁이는 검신은 아까처럼 떨리지도, 웅웅거리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너무도 고요하기에 오히려 검의 위력을 짐작할 수가 없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이 스킬을 잘못 사용하면 혼돈의 힘을 통째로 잃어버린다고 했다.
아스리안 유저, 아니 세상 그 누구라도 자신이 이뤄온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을 두려워하는 법.
하지만.
‘잠깐만 기다려.’
지금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드디어 기나긴 루이즈의 악연을 끊어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그래, 나는 그저 캐릭터일 뿐이지만, 루이즈에게 이곳은 전부나 마찬가지인 세계.
캐릭터와 루이즈, 둘 중 하나만을 택하라고 말한다면 굳이 망설일 필요가 있을까?
설령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좋아.
혼돈의 힘을 다시 쓰지 못한대도 상관없다.
루이즈를 살릴 수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반드시 빛을 죽일 것이다!
‘금방 구해줄 테니까!’
혼돈의 검이 무언가에 닿는 순간.
파치치칭!
산산조각나는 소리가 나며 세상이 어두워졌다.
유리가 깨지는 것 같기도, 금속이 갈리는 것 같기도 한 소리.
순식간에 발밑의 바다가 사라져 버린 걸 보면 자신과 빛은 지상도 지하도 아닌 ‘다른 세상’에 진입한 건지도 모른다.
베었나?
어떻게 베었지?
스스로 움직인 과정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머릿속엔 무빙이나 스킬 순서 등의 세세한 컨트롤을 신경 쓸 만한 이성이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그저 본능적인 움직임.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자신은 어떤 식으로든 혼돈의 검으로 빛을 베어냈고.
아아아아-!
빛의 대천사는 날개 윗부분이 찢겨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고 있다는 것.
초월자의 날개는 자아를 상징한다.
오래간 쌓아온 힘이 담겨있기 때문에 쉽게 상처를 복구할 수도 없다.
그렇기에 날개를 베어낸 것은 다른 부위의 상처보다 더욱 큰 의미를 지닌다.
[인간으로서 대천사에게 첫 상처를 안겨주었습니다!] [그대의 업적은 영원히 전설로 회자될 것입니다!] [모든 스탯이 +30 상승합니다!] [날개 잃은 천사는 그 상처를 복구하기 전까지 천계로 복귀하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의 성향이 심연으로…….]순식간에 화면 하단에 쏟아져 내리는 메시지.
현은 그 모든 문장들을 무시했다.
싸움에 필요하지 않은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걸론 모자라.’
상대는 세상을 지탱하는 6개의 기둥 중 하나.
그런 존재를 세상에서 소멸시키기 위해선 이보다 훨씬 더 큰 힘이 필요했다.
현은 더 기나긴 미래를 상상했다.
후세(後世)의 기도.
스킬 설명에 따르면 자신은 갈망하는 미래로부터 힘을 빌려올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몇 달, 아니 몇 년 뒤까지의 미래를 전부 이 순간으로 가지고 온다면!
[500,000의 초월력을 사용합니다!] [‘천사의 기초 검술‘이 ’태초의 검‘으로 변화했습니다!](간략) : 거리에 상관없이, 베고자 의지하는 것을 벨 수 있습니다.
[472,035의 초월력을 사용합니다!] [공급자의 마기가 전부 소모되었습니다!] [‘무력화의 파장’이 ‘신살(神殺)의 오라’로 변화했습니다!](간략) : 보호 계열 권능을 무효화합니다.
도중에, 바다가 사라져 버린 이유를 깨달았다.
이곳은 지상도 지하도 아닌 장소.
혼돈의 검은 현상계(現象界)를 갈라 황천의 문까지 열어낸 것이었다.
처음으로 빛의 얼굴에 당황이 떠올랐다.
그야 당황할 만도 하겠지.
혼돈의 권능으로 열어낸 이 세상에서는 자신의 권능 대부분이 봉인될 테니까.
루이즈가 5년간 태양을 피하고, 다시 5년 동안 천공을 피해 다녔던 것은 빛의 권능 때문이었다.
‘이제 남의 권능에 휘둘리는 기분이 얼마나 X같은지 알겠지?’
현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시간의 흐름조차 잊은 채 움직임을 이어나갔다.
본능에 맡기는 것은 자신의 특기가 아니지만,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지금은 그 편이 좋을 것 같았다.
팔을 자르고, 다리를 자르고, 허리를 짓이기고, 머리까지 부순다.
그럴 때마다 빛은 괴상한 비명과 함께, 부서진 형체들을 복구해 나갔다.
인간이라면 한참 전에 죽음에 이르렀을 상처를 회복하는 모습은 가히 불사신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듯했지만.
현이 본격적으로 날개를 집중공격하기 시작하자 그마저도 한계가 다가왔다.
‘이게 마지막.’
현은 상태 창을 확인했다.
미래로부터 빌려온 힘이 사라지기까지 남은 시간은 10초.
마지막으로 모든 힘을 소모해 혼돈의 검을 다시 발동시켰고.
[27,185,733의 초월력으로 ‘혼돈의 검’ 발동합니다!]고통에 몸을 뒤틀고 있는 빛을 향해 그저 휘둘렀다.
곧바로 후속타를 이어갈 생각이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빛의 대천사 루미테시엘이 영원한 안식에 잠들었습니다!] [다음 대의 빛이 나타나기까진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레벨 업!] X5메시지를 통해 대천사의 소멸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재차 들려온 파열음.
공간이 부서짐과 함께 현은 황천을 벗어나 지상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주위는 어두운 밤이었다.
해일을 일으키던 바다는 온데간데없고, 나무와 풀벌레 우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아….”
문득 위를 올려다본 현은 옅은 신음을 흘렸다.
절반으로 갈라진 밤하늘의 풍경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빛을 소멸시킨 그 마지막 일격은 황천의 경계를 뚫고나와 백색의 띠를 가로질러 우주까지 나아간 듯했다.
하늘에 떠있던 일루나와 글루나 또한 위아래로 분리되어 있었다.
만약 부서진 잔해들이 새로운 궤도를 찾는다면 아스라는 이제 4개의 위성을 가지게 되는 셈이다.
「현, 그쪽은 어떤가요?!」
지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조금 들뜬 목소리였다.
「천계의 문이 닫히면서 천사들이 사라지고 있어요! 천인들도 전부 후퇴하고 있고요!」
현은 잠시 귓속말 수신을 거부로 설정했다.
지금은 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기에.
바로, 루이즈가 정신을 차렸다는 것이다.
다행이었다. 자꾸만 루이즈의 의식이 희미해지고 있어서, 이대로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닐까 두려웠었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조금 이상한 느낌도 들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이런 기쁜 오산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었으니까.
일단 사과부터 해야겠다.
아무리 경황이 없었어도, 갑자기 악몽을 꾸게 만든 건 내 잘못이었으니.
팟! 너무도 루이즈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현은 곧바로 동화를 해제했다.
“현…?”
루이즈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 멍한 표정이었다.
마치 환상이라도 본 것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자신의 손을 쥐었다 펴고선, 다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네 개로 갈라진 위성들이 루이즈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이것은… 꿈이 아닌가?”
“…아니야.”
“정말로…? 진짜 현이라고…?”
“응.”
이쪽으로 손을 뻗는 루이즈.
현은 루이즈가 자신의 뺨을 만지도록 내버려 두었다.
루이즈의 목소리는 아직도 애처롭게 떨리고 있으니까, 어떤 악몽을 꾼 건지는 물어보지 않는 게 좋겠지.
이어서 현은 사과하려고 했다.
미리 말해주지도 못한 채 악몽의 저주를 걸어버리고 말았던 것에 대해서.
하지만 바로 그 때.
‘응…?’
현은 숨을 삼켰다.
루이즈의 등 뒤에 새까만 크리스탈의 날개가 생겨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화가 덜 풀려서 조화의 날개가 남아있는 건가?
잠시 말도 안 되는 착각이 떠올랐지만 절대 그럴 리는 없었다.
루이즈의 어깻죽지에 달린 한 쌍의 날개는 분명 칠흑의 크리스탈.
오직 대악마만이 지닐 수 있는 어둠의 날개였다.
“루이즈… 네 뒤에 그건….”
띠링!
마침 들려온 알람음.
현은 그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느껴졌다.
동시에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꿀꺽, 현은 침을 삼키며 메시지를 읽어 내렸고.
어느 순간, 심장이 멈추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멈추고 싶어.
그런 의지와는 상관없이 메시지는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