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has become the older brother of the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236
236화. 문 앞에 미련을 쌓아두면 통행에 방해가 되잖아요 (3)
다짜고짜 데이터 관리창을 열어달라는 나를 다들 미친 사람 보듯 했다. 하지만 리드만큼은 내 이 황당한 말을 기다렸다는 듯 책을 덮었다.
“지금까지 반복되어 온 기록은 심연의 주인도 건드릴 수 없지. 이 모든 기록을 조율할 수 있는 권한은 외부에서 온 너에게만 주어진 거야.”
리드의 옷자락이 크게 펄럭였다. 리드는 검은빛을 띤 몹시 음침한 책 한 권으로 변해버렸다.
“책? 책이었다고?”
나는 눈앞에 펼쳐진 책에 가까이 다가갔다.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을까…….”
조언이라도 들어볼까 해서 주변을 둘러봤는데, 이상하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다들 나와 함께 있었는데 말이다.
[네 인간 일행이라면 모두 원래 있던 공간에 남아 있을 거야! 아하하핫!]왠지 재밌는 일이 벌어진 것 같다며 라기아가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아까 있던 공간에서 갑자기 우리만 격리되었는데 너는 느끼지 못한 모양이지? 가만 보면 너도 참 둔하다니까? 아하하하!]“칭찬 고맙다…….”
안 그래도 나도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시험해 볼 참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거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게 바로 이 책. 나는 내 몸보다 커다란 책의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겼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아.”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훑어봤는데, 적혀 있는 건 한 글자도 없었다.
“뭐지? 분명 세이브데이터 어쩌고 해서 나타난 상황이잖아.”
[으음. 좀 더 쉽게 설명해줄래?]“미안하지만 나도 상황을 잘 몰라서.”
책장을 한참 넘겨보던 나는 무심코 문 앞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
게임의 세이브데이터라고 정체가 밝혀진 책들이 여전히 잔뜩 쌓여 있는 게 보였다.
“의미심장해 보이는 책은 비어 있고, 정리되어 있지 않은 데이터는 잔뜩 쌓여 있다……. 이 말은 곧, 제대로 저장된 데이터가 없다는 뜻이야.”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제대로 저장되지 않았다는 건, 결국 저장할 일만 남았다는 뜻이다. 이렇게 간단할 수가.
나는 주머니와 주변을 더듬거리며 펜을 찾았다.
“제대로 된 세이브데이터 하나만 만들어 두면 저기에 있는 것들은 모두 통합돼서 사라질 거야. 그러니까 이 깨끗한 공간에…….”
[아까 너희가 하는 대화를 들었는데 말이야. 엄청난 양이라면서. 전부 옮겨 적게? 어느 세월에?]“하긴. 내가 하나하나 적을 필요는 없으려나.”
나는 펜을 찾는 것을 멈추고, 펼쳐진 책 위에 두 손을 얹었다.
“게임에서 저장만큼 중요한 부분이 또 없지. 내가 나서서 저장하겠다고 하기 전에, 저장할 거냐고 물어봐 주는 게 당연한 거 아냐? 자, 어서 물어봐. 특별히 대답해주지.”
자신만만하게 외치자 책이 아닌 내 상태창이 반응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저장하시겠습니까?]선택지는 당연히 두 개였다.
예, 아니오.
나는 잠시 ‘아니오’에 시선을 두었다. 만일 내가 저장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지?
어쩌면 다시 공작부인의 장례식장으로 가는 마차 위에서 눈을 뜰지도 모른다. 유치가 빠지지 않은 달리아와 눈이 마주치고, 나를 염려하는 알베르토의 흰 눈썹이 움찔거리는 걸 구경하고…….
처음부터 시작하면 지금보다 더 강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더 빨리 라기아를 얻고, 오키드가 타이머스를 배신하기 전에 잡아내고, 운이 좋다면 시작하자마자 은둔자의 땅으로 와 이 지점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부분도 분명히 있었다.
‘데미안을 멀쩡히 돌려놓을 수 없다면, 가장 중요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데미안의 상태는 악화될 뿐이고…….’
어찌 보면 지금이 최선이다. 나는 망설임 없이 ‘예’를 택했다.
화아악- 상태창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백지장에 빼곡히 글자가 적히기 시작했다. 내가 알아볼 수 없는 문자였지만, 어떤 내용이 적히고 있는지는 왠지 알 것 같았다.
변신한 리드의 책장에 내용이 들어찰수록, 문 앞에 쌓여 있던 책의 숫자가 줄어들었다. 꽤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었지만, 워낙에 많은 양이었기에 소요되는 시간이 적지 않았다.
책에 팔을 기댄 채 종이를 톡톡 두드리다가, 나는 기대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리드. 책으로 변신했어도 대화는 가능해?”
[저장하는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된다는 거야, 안 된다는 거야……. 궁금한 게 있는데. 만일 내가 저장하지 않는다면 어땠을까?”
“…….”
빠르게 새겨지는 까만 글자를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다가, 나는 불쑥 중얼거렸다.
“데미안이 망가진 과거까지 삭제할 수 있었다면……. 그런 것도 가능했을까?”
혹시 저장하지 않는 편이 좋았으려나. 저장하겠다고 결심하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건 아닐 겁니다. 오, 아닐 거예요…….”
대답은 다른 곳에서 나왔다. 거대한 책 아래에서 종이를 여러 장 포개 든 요정이 고개를 저으며 나타났다.
“넌…….”
“리드 님의 하인 펠릭스입니다. 아까도 보셨겠지만. 리드 님이 이 모습이 된 건 오랜만이라서……. 혹시 모르잖습니까. 리드 님이 배가 고프셔서 잉크가 부족해진다거나……. 저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봉사하는 거니까요.”
“아까 한 말은 뭐야?”
펠릭스는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리드의 표지 아래에 끼워 넣으며 말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과거는 삭제할 수 없습니다. 과거를 치우기 위해서는 저장하는 수밖엔 없었어요. 그 권한은 외부에서 온 당신에게만 있었고요. 사실 다른 한 분에게도 권한이 있었습니다만…….”
“과거를 왜 삭제할 수 없다는 거야? 이렇게 저장할 수 있으면, 지울 수도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물론 그렇죠. 하지만 본인이 만들어간 과거만 지울 수 있어요. 지금껏 우리 도서관에 쌓여 있는 과거는, 심연의 주인께서 저장하지 않고 방치해둔 것들이죠. 왜냐하면 그것이…….”
펠릭스는 주변을 둘러보며 아주 조용히, 누군가 듣는 것처럼 경계하며 말했다.
“대지의 죽음을 인정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셨으니까요.”
“그 악마가 일부러 저장하지 않았구나. 저장했다간 자신이 되살리려는 존재가 죽었다는 게 기정사실이 되니까…….”
“그래서 지금까지는 이 모든 것들을 데미안 님이 먹어 치웠습니다. 고된 일이었죠. 그런데 데미안 님이 망가진 이후에는 이렇게 도서관 앞에 치우지 못한 과거가 잔뜩 쌓이게 된 겁니다. 이제는 우리도 한숨 놓겠군요. 자꾸만 똑같은 과거가 반복되는 탓에 새 장서를 놓을 자리가 없었거든요.”
지금껏 도서관의 출구를 꽉 막고 있었던 건 심연의 악마가 남긴 미련이었다. 자신이 바꾸지 못한 과거가 사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생긴 미련.
어느새 저장이 마무리됐는지, 책에 문자가 쓰이는 속도가 느려지더니 멈췄다.
“마지막 장을 넘겨보세요.”
펠릭스가 말한 대로 다음 장을 넘기니, 상태창이 떠올랐다.
[숨겨진 스킬의 잠금이 해제됩니다] [관리자] [권한이 있는 인물을 지휘할 수 있습니다] [권한 확인하기] [권한을 확인할 수 없는 장소입니다]상태창이 연신 떠오르며 이런저런 소리를 냈다. 나중에 이 공간을 떠난 다음에 시험해 보면 좋을 듯했다.
“외부인만이 가질 수 있는 기술입니다. 사실 리드 님은 다른 분도 오실 거라고 기다리고 계셨는데……. 아직 오지 않으셨네요.”
“다른 분? 나 말고 외부인이 올 수 있단 말이야?”
펠릭스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제는 비어 버린 문 앞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곳에 있는 기억을 심연의 주인께서 지워버리지 못한 이유는, 외부의 존재가 간섭한 탓입니다. 그 존재를 리드 님은 줄곧 기다렸는데…….”
나는 검은 책을 가득 채운 글자를 다시 살폈다. 릴리가 읽었을 때, 이 글자는 게임 패드를 조작한 움직임 하나하나를 기록한 것이었다.
나를 제외한 이 게임의 플레이어.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건 내 동생뿐이다.
“내가 한 기록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여기 기록돼있는 건 주영이가 게임을 플레이한 흔적이었다.
하긴. 이 게임, 망겜이니 뭐니 하면서도 질리도록 했지. 밤을 새우면서 일러스트를 모으고, 캐릭터 설정을 파고들고, 고민하고. 게임 패드를 누르던 주영이는 분명히 살아 있었다. 그 생생한 순간이 이 세상에 그렇게 많이 쌓여 있었다. 지우지도 못하고, 치우지도 못한 채 그대로.
나는 글자 위를 손톱으로 살짝 긁적이다가 물었다.
“가끔 여기 놀러 와도 돼?”
의외의 질문이었는지, 펠릭스가 미간을 찡그렸다.
“너희가 심연의 악마 편이라는 건 알아.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어. 일이 적당히 평화롭게 풀리면, 이곳에 종종 놀러 오게 해줘. 도서관 말고 이 공간 말이야. 그리고 나는 읽을 수도 없는 이 책을 들춰보고 싶어. 자주는 말고. 아주 가끔.”
“흐음.”
펠릭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도서관에서 무슨 책을 읽을지는, 오는 사람 맘이죠.”
그가 리드를 확 덮었다. 그 순간 세상이 확 껌껌해지는 듯하더니 다시 밝아졌다.
“나으리? 괜찮으세요? 멀뚱히 서서……. 라기아는 왜 그렇게 이상하게 들고 계세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피핀이 나를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녀석을 밀치고 문 앞을 확인하자, 그 많던 책들이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좋아!”
“어! 책들이 다 어디 갔지?”
“그러게요? 손으로 다 옮겨야 할 줄 알았는데…….”
모두의 시선이 나를 거쳐, 소파에 앉은 리드를 향했다. 리드는 다시 멀쩡히 키 큰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와 책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잘됐네. 이제 문을 열고 나가면 되겠어.”
타이머스가 거울을 깨버린 이상, 돌아갈 곳은 없었다.
“가지.”
애당초 돌아갈 생각이 없었는지, 타이머스가 앞장서 걸었다. 릴리가 경쾌하게 나가 문을 열자, 길게 뻗은 복도가 보였다. 무척 넓고 천장도 높았는데, 낙엽이 굴러다니는 등 관리되어 있지 않다는 인상을 줬다.
그건 그렇고.
이다음에 있는 건 아마 거인 클로버. 도서관에 오기 전 만난 요정의 주인이 있을 것이다. 클로버는 실의에 빠진 상태니 우리와 싸우려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문제는 심연의 악마였다.
“잠깐만요! 저 너머에는 거인의 정원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곳에서 심연의 악마를 만날지도 몰라요.”
“그래서?”
타이머스가 태연하게 물었다.
“그래서라뇨?”
“와. 기대된다. 심연의 악마라면……. 전하. 만일 제가 그의 목을 벤다면 추가수당도 주십니까?”
릴리가 장난스럽게 타이머스에게 말을 걸었다. 타이머스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나만 현실적으로 반응하는 것만 같다.
다들 긴장해야 하는 거 아니야? 곧 최종 보스를 만나게 된다고!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