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has become the older brother of the villainess RAW novel - Chapter 47
47화. 사람도 사령도 도서관에서는 정숙 (4)
황태자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책부터 내밀었다. 그는 내가 내민 책을 보고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별일이군. 겁쟁이 시에라가 임무를 완성하다니.”
“예, 겁쟁이 시에라가 해왔습니다.”
내가 이죽거리며 답변하자, 황태자가 웃었다. 성격 나쁜 놈이 착한 척하고 웃으니까 무척 기분이 나빴다. 놈이 못생겼었다면 기분이 더 나빴겠지만, 잘생겼기 때문에 기분이 더, 더, 더 나빴다.
“마수 토벌에 관한 자료도 찾았나?”
“아…….”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저었다.
맞다, 그걸 핑계로 들어갔던 거였지. 완전히 정신이 팔려서는 다른 짓만 하다 왔다.
“앞으로 황실 도서관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권한을 주지.”
“정말이십니까?”
“어느 정도의 제약은 있겠지만.”
“감사합니다!”
황태자는 내가 건넨 책을 펼쳐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그러고는 책에 눈을 고정한 채 내게 말했다.
“이번 마수 토벌은 중요한 기점이 될 거야.”
“예에.”
나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지만, 직급이 낮으니 어쩔 수 없이 들어주기로 했다.
“최근 이상한 마력이 감지되고 있다. 이 책에 적힌 전설과 무관하지 않을 거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자, 봐.”
황태자가 내게 책의 한 페이지를 들이밀었다. 책에 얼굴이 짓눌릴 정도가 된 나는, 고개를 뒤로 물리며 그가 가리키는 구절을 더듬더듬 읽었다.
“대지가 무너지면 모든 것이 사라지고, 세상은 영원히 반복한다.”
“그래. 무슨 뜻인지 궁금하지 않나? 나는 이 말의 진실을 파헤칠 생각이야. 은둔자의 땅으로 마수를 몰아내도, 언제 그랬냐는 듯 인간의 땅에서 마수가 발견되지. 나는 이것 또한 ‘반복’이라고 생각한다.”
“반복 말이죠……. 영원히 반복한다라…….”
마치 원하는 엔딩을 보기 위해 게임을 반복하는 플레이어를 얘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착각인가? 아니면 정말 관련이 있는 걸까?
“예상은 했지만 책이 온전하지 않군.”
황태자의 말대로 책의 어느 부분은 불에 탄 흔적이 있었다. 오래 전에 탄 것이 아니라, 얼마 전 불에 그을린 듯했다. 까슬까슬하게 일어난 종이에 살짝 온기가 남아 있었던 데다가, 황태자가 손을 대고 나서야 검게 바스라졌기 때문이다.
이 또한 분명 테네리페가 한 짓이다. 테이데와 카나리아가 입에 불을 물고 있었던 건, 이렇게 책의 몇몇 부분을 태우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부분이었죠?”
“세 명의 신에 관한 이야기. 태초의 신이 낳은 세 아이. 들어봤나?”
“…….”
자꾸만 듣게 되는 이야기였다.
“환각의 마녀, 폭풍의 마녀, 시체 포식자. 이 셋 말씀이시겠죠.”
“…….”
황태자는 책을 덮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을 돌렸다.
“이 정도만 해도 도움이 됐다. 고맙군.”
그러나 나의 마음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사령 사건은 완전히 해결된 게 아니었다. 테이데와 카나리아가 마음을 잘못 먹으면 황실 도서관에서 불꽃축제가 열리게 생겼다고!
“전하. 이대로 다 해결된 건 아닙니다. 4황자님의 마법 가루를 뿌리긴 했지만,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됐다. 이 이상 관여하지 말도록.”
황태자의 태도는 완고했다.
“예에, 뭐 뜻이 그러시다면.”
나는 어깨를 으쓱인 뒤, 마지막으로 건네줄 물건을 꺼냈다.
“드리겠습니다.”
무표정하던 황태자가 놀라며 인형에 손을 댔다. 그러나 손끝이 닿자마자 그는 손을 물렸다. 그리고는 놀랐던 표정도 갈무리해버렸다.
“이건 어디서 찾았지?”
“도서관 구석에 있었습니다.”
덧붙여서 리드라는 마녀가 이걸 원하고 있다고 말할까 말까 고민하던 찰나, 황태자가 내 고민을 덜어주었다.
“네가 알아서 처리해라.”
“예? 하지만…….”
나는 인형을 요모조모 살펴봤다. 어디로 보나 황실 어린애의 장난감이었다. 스카프처럼 둘린 손수건은 말할 것도 없고, 소재도, 마감도 고급이다.
“주인을 찾아드려야 하지는 않고요?”
제가 처리하면 일이 수월해지긴 하지만요.
“내 것이다.”
의외의 답변이었다. 4황자의 장난감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는데. 나는 장난감과 황태자를 번갈아 쳐다보며 마음에 물음표를 띄웠다.
“나를 약하게 만드는 물건이다. 처분하도록.”
“그럼 이게……. 전하의 약점인가요?”
너무 노골적으로 물어봤나? 하지만 약점이면 좋겠다. 어쩐지 이 낡은 인형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약점?”
황태자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점이라 생각하고 싶으면 그렇게 생각해. 도서관의 사령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더군.”
도서관의 사령들이라.
어쩌면 황태자가 이 인형과 관련된 환각을 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태자는 도서관에 들어가는 걸 무서워했다. 아니, 카모마일의 말을 빌리자면 ‘괴로워’했다.
그렇다면 이 장난감이 황태자의 약점이라는 소리인데. 그렇지만 이걸 대하는 태도를 보면 또 약점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무슨 사연이 있는 장난감인 건 확실히 알겠다.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제가 알아서 처분하죠.”
도서관에 불을 지르지 않는 대가로 마녀 리드가 원한 건 소중한 추억이 담긴 물건.
이게 만일 저 냉정한 황태자의 물건이라면, 황태자가 저 모양 저 꼴이 되기 전, 순수하던 시절의 추억이 담겨 있을 게 분명했다.
어쩐지 마녀가 내가 가진 것 중 원할 만한 것은 이것뿐이다 싶었거든.
황태자는 그런 소중한 순간을 떠올리기 싫어하는 모양이다. 성격이 저 꼴로 험악해진 원인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소중한 기억일수록, 들여다보기 고통스러워지는 경험을, 원래의 삶에서 나도 충분히 겪어봤다. 동생이 죽고 나서 말이지.
인형을 보며 복잡한 심경을 느끼고 있던 그때, 황태자가 말했다.
“책을 찾아온 보상을 주지. 원하는 게 있나?”
“꽤 비싼 보상을 원합니다, 전하.”
나는 씨익 웃으며, 내 뒤에 멀뚱히 서 있는 피핀을 턱짓했다.
“저 녀석의 검이 필요합니다.”
“검? 그 정도는 글러토니 공작가에서도 충분히 구할 수 있을 텐데.”
“물론 그렇지만, 황태자 전하의 충실한 벗, 헬리오헬리안 경의 상단에서 구할 수 있는 검이라면 보다 값어치 있는 보상이 되겠죠.”
내 말에 헬리오가 코를 씰룩이며 못마땅한 눈치를 보였다. 하지만 황태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헬리오를 향해 손짓했다.
“해달라는 대로 해줘.”
황태자 녀석, 생각보다 좋은 놈일지도.
***
황태자의 집무실을 나오자, 카모마일과 헬리오까지 한자리에 모였다. 헬리오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피핀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황태자 전하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지. 내가 이럴 때 일을 대충 하는 성격은 아니거든. 마수 토벌을 갈 때까지 우리 상단에서도 손꼽힐 만큼 좋은 검을 찾아보지.”
피핀이 꾸벅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고, 나는 “나한테 감사해야지, 피핀” 하고 내가 생각해도 치사한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참! 이왕이면 제가 쓸 무기도 구해다 주면 좋겠는데요.”
“어떤 무기를 다룰 줄 아는데?”
“그 어떤 무기도 다룰 줄 모르는 사람이 다룰 만한 무기로.”
“미친놈…….”
만족스러운 거래가 아닐 수 없었다.
어디 보자. 황태자의 허락도 떨어졌겠다, 나는 다시 도서관에 돌아가 보려고 하는데…….
“아까 그 인형 말이야.”
금방 자리를 벗어날 줄 알았던 헬리오가 나를 붙잡았다.
“왜 그러시죠?”
“어떻게 할 셈이야?”
헬리오는 머뭇거렸다. 그러자 카모마일이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기웃거렸다. 나는 대단히 숨길 것도 없기에 인형을 보여줬다. 그러자 카모마일의 얼굴도 굳어졌다.
“이건…….”
진짜 황태자의 약점인가? 두 부하의 얼굴이 이렇게 흙색이 되다니 말이야.
헬리오는 카모마일과 뭔가 쑥덕거리더니, 비장한 얼굴로 내 어깨를 두드렸다.
“공작, 잘 부탁해. 황태자 전하의 명령이라면 역시 어쩔 수 없지.”
“도대체 이 장난감이 뭐길래 다들 그렇게 유난인 겁니까?”
내가 장난감을 흔들어 보이자, 두 사람이 어쩔 줄 몰라 했다. 마치 귀한 도자기라도 보는 듯한 태도였다.
카모마일은 한숨을 팍팍 쉬면서 날카롭게 설명했다.
“그건 황태자 전하께서 어릴 적 좋아하시던 인형이야.”
뭐, 이 정도는 예상했다.
“그리고 인형이 두르고 있는 망토는, 돌아가신 황후 마마의 손수건이지. 두 분께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증거라고…….”
“아.”
황태자의 반응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약점이라 생각하고 싶으면 그렇게 생각해. 도서관의 사령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더군.’
황태자가 도서관에서 본 환각은 분명, 세상을 떠난 그의 어머니와 관련돼 있을 것이다.
그러니 약점이 아니지만 약점이었던 것. 약점이라 생각해도 되지만, 본인은 더 이상 얽매이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당신한테 맡겼으니, 당신이 처분하는 건 마땅한 일이지. 하지만 함부로 버리지는 말아줘. 황태자 전하는 그런 걸로 약해지는 어린애가 아니라지만…….”
인형을 내려다본 뒤에, 나는 대충 주머니에 넣었다. 내 손길이 거칠다고 생각했는지 황태자의 두 부하가 안절부절못했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이는 게 전부였다.
나까지 괜히 감상에 젖으면, 애써 이 인형을 포기한 황태자가 우스워지는 게 아닌가.
내가 악역을 자처하긴 하지만, 패륜의 선을 밟으면서까지 악랄해질 결심은 아직 못한 모양이다. 돌아가신 어머니와 보낸 추억이라. 잊기 힘들 텐데.
황태자가 안쓰러운 것만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나는 어렴풋이 느껴지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부모의 정을 모를 시에라에 대한 연민이 뒤섞여 마음이 복잡했다.
이럴 땐 해야 할 일을 하며 머리를 식히는 게 제일이다.
“전 도서관에 한 번 더 가보겠습니다. 그리고 이 장난감은…….”
여섯 개의 눈동자가 초롱초롱 나를 향했다. 피핀까지 나를 반짝거리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가족에 관한 일이라면 피핀 또한 한 사정 하니까.
“내가 책임지고 좋은 곳으로 보내줄 테니 다들 걱정 마시지.”
뭔가 악역 같은 말투로 쏘아붙인 뒤, 피핀을 버려둔 채 홀로 도서관으로 향했다.
***
레크로파다스가 있었던 장소로 돌아가자, 역시나 거울 속에 리드라는 마녀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는 책을 읽는 듯하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귀신처럼 웃었다.
“불, 지를까?”
“험상궂은 말 하기는.”
“농담이었어.”
나는 인형을 들고 거울 가까이 가져갔다. 리드가 천천히 걸어왔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녀가 미칠 듯이 장신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으로 키가 큰 사람이 아니었다. 농구 선수라면 발꿈치를 드는 것만으로도 덩크슛을 할 수 있을 정도의 키다.
리드는 거울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나와 달리 거울을 통과하며 거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희고 길쭉한 손이 인형을 낚아채기 전에, 나는 인형을 뒤로 숨겼다. 그리고 키다리 마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당신이, 환각의 마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