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520
제520화. 대항마
한편, 버고스 북쪽 내전 지역.
산처럼 쌓인 시체 위로 까마귀들이 내려앉았고, 그 아래에 흐르는 핏빛 강이 온 대지를 적셨다. 병사들이 푹푹 꺼지는 땅을 힘겹게 걸으며 시체를 끌어내리자, 까마귀들이 서럽게 울어댔다.
개중에는 살아남은 자의 울음 역시 섞여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한낱 짐승의 소란에 묻히고 말았다. 비명과 고함 그리고 울부짖음은 그들에게 일상이었기에.
“풍경 한번 작살 난다.”
아탄족의 족장, 에프디람은 장벽 위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처음 버고스로 들어왔을 때는 늦은 밤인지라 상세히 보지 못했건만, 해가 뜬 이후의 세상은 정말이지 처참하다는 말로밖엔 설명되지 않았다.
차라리 해가 뜨지 않길 바라는 게 낫지 않을까. 에프디람의 중얼거림에, 그의 부하인 베노가 덧붙였다.
“균열 아래가 이런 모습이지 않겠습니까.”
“뭐. 비슷할 것 같기도 하고. 러더포드는?”
“아직입니다.”
“더럽게 비싸게 구네, 십새끼. 여기까지 왔는데.”
에프디람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반왕당파의 거점으로 들어온 지 벌써 며칠이나 지났는데, 러더포드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정말 살아 돌아왔는지, 그리고 앞으로 이드갈과 균열은 어떻게 할 건지 확인만 하면 되는 문제인데, 시발롬이.
“혹시, 반왕당파의 수작 아니었을까요?”
“러더포드가 돌아왔다 하면 흩어졌던 세력 결집에 도움 되긴 하겠지. 근데 봤잖아? 이안 히엘로도 비슷한 시기에 돌아왔어. 거짓은 아닐 것이다.”
에프디람이 구불거리는 머리칼을 툭, 튕기는 순간이었다. 인기척이 들려 고개를 트니, 웃옷을 대충 걸친 러더포드가 부하들과 함께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녀는 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치며 러더포드와 무리를 위아래로 훑었다.
“여. 때깔 좋네.”
“에프디람. 오랜만이다.”
“그러게. 어우, 비싸다, 비싸. 얼굴 한번 보기 이렇게 어려워서, 원. 십 년 새 값이 좀 많이 올랐네.”
“여전하군.”
에프디람은 십 년 동안 늙지 않은 러더포드를 찬찬히 살펴봤다. 참나, 이것들 봐라? 이놈이고 저놈이고 그 아래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 미치겠다.
그녀는 다리를 대충 꼰 채로 러더포드를 올려다봤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너, 이드갈 계속 만들 수 있어? 세상이 변한 거 알지? 균열을 억제하는 데 이드갈이 쓰이고 있다. 바리엘 마법사를 견제하는 건 둘째 치고, 균열이 틀어막히고 있단 말이다. 아탄족 족장으로서 그쪽 입장을 정확히 알고 싶은데.”
“균열은 계속 확장될 것이다.”
“아하. 근거는?”
신의 힘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직접 이르시진 않았지만, 러더포드는 그걸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새로운 균열지가 생겨난다는 것은, 대지 아래 잠들어있는 신께서 몸을 일으켰다는 뜻이니까.
“바리엘 중앙 인근에도 의심 지대가 있어.”
“와우, 바리엘 안쪽에?”
에프디람은 한쪽 눈썹만 까딱거렸다. 이걸 믿어도 될지 모르겠다는 낯이다.
“이드갈을 계속 만들어낼 수는 있으나, 균열 활성화를 위하여 유통되는 수를 조절할 것이다.”
“그러니까, 그쪽은 여전히 우리랑 같은 목적이다?”
“길이 같다고 하지. 목적지가 같다고 하기에 우린 너무 다른 곳을 보고 있으니.”
“좋을 대로 생각하세요. 그런다고 본질이 변하나?”
에프디람은 러더포드에게 손을 뻗었다. 이전에도 그러했듯, 앞으로도 잘해보자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는 머리칼만 뒤로 넘기며 내민 손을 내려다볼 뿐이었는데, 뭔가 이상함을 느낀 베노가 검집에 손을 올렸다.
“그런데, 쓸데없는 걸 달고 왔던데.”
“쓸데없는 거라니?”
“이곳에 오기 전, 바리엘 황궁과 마찰이 있었나?”
“아니, 시발. 벌써 그걸 긁어대?”
뭔가 알고 있다는 눈치. 러더포드는 안주머니에서 돌돌 말린 전서를 꺼내 툭 던졌다.
“바리엘 사절단이 보내왔다. 황궁친위대와 아탄족이 국경에서 무력 갈등이 있었다고. 황궁 측에서는 이를 갈무리하고자 네놈들을 쫓고 있으니, 내놓으라 하더군. 이게 무얼 뜻하는지 이해는 하나?”
에프디람은 더러운 걸 집는다는 듯, 두 손가락 끝으로 종이를 집어 들었다.
“하, 진짜 이렇게 나온다 이거네.”
“거절하면, 바리엘은 왕당파와 합세할 것이다. 그렇다고 네놈들을 내놓자니, 방금까지 손 내밀던 게 안쓰러워 난감하구나.”
“지랄하네. 안쓰럽긴 개뿔.”
아탄족의 병력이 아쉬워서 그런 것이겠지. 족장인 그녀부터 시작해, 무리에는 마법사와 마검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범인조차 전사의 기백이 상당하여 전투에서는 필시 도움 될 터.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나가라고? 며칠 동안 간만 보는가 싶더니, 이것 때문에 행차하셨구먼?”
“위험 부담을 안고 갈 만큼, 너희가 가치 있다는 걸 증명하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러더포드가 고갯짓으로 뒤에 서 있는 자들을 가리켰다. 반왕당파의 주축들로, 그들은 짐짓 엄한 분위기를 풍기며 에프디람을 쳐다봤다.
“가치…. 가치라…. 이 자리에서 목 베어주면, 칼날이 잘 든다는 걸 증명할 수 있으려나?”
“저저, 쯧쯧. 야만적이기는.”
“네. 야만인 여기 있습니다. 방금 누구세요? 개새요? 나오세요.”
에프디람이 가운뎃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이르자, 베노가 넌지시 그녀를 말렸다. 오랜 기다림 끝에 이런 취급인지라 이해는 간다만, 상황이 그리 좋지는 않다는 뜻이었다.
서로가 인지했듯 러더포드는 아탄족과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자였고, 버고스를 벗어난다면 바리엘과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베노는 이를 짚어냈다.
“바리엘에서는 아탄족의 협조를 원했습니다. 북쪽에 있는 균열지 관리 등에 관해서요. 수배령을 내리긴 했지만, 이는 저희와 버고스 간의 결탁을 끊으려는 수작. 바리엘로 돌아간다면 제국은 우리를 반길 것입니다. 그리되면 그쪽들 입장에서도 조금 문제 되지 않겠습니까?”
“별을 길잡이 삼아 바람을 좇는 자들이, 제국 아래서 삶을 영위하겠다? 놀랍군. 에프디람, 그사이 생각이 많이 변했어.”
“허세 그만 떨고 적당히 서로 숙이지 그래? 내전으로 다 쓰러져가는 버고스 주제에, 우리라도 없으면 뭐 어떡할 건데?”
에프디람이 날카롭게 노려보며 이르자, 러더포드 위에 서 있던 자들이 어이없다는 듯 헛기침을 해댔다. 그리 수군거리는 것도 잠시, 러더포드는 느긋하게 웃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버고스가 다 쓰러져가는 것은 사실이다만, 우리와 길을 함께 하고자 하는 자들은 너희만 있는 게 아니다.”
“뭐?”
“가이아 대륙에서 바리엘과 클리포포드를 제외한 모두가 힘을 합할 것이다. 바리엘이 찢어지면 찢어질수록, 굶주린 자들은 만족스럽게 포식할 터이니.”
“말하는 꼬라지 보니까 루스웨나는 또 참전이네.”
“지난 과거의 수치를 청산하고자 하는 건 인간의 본성 아니던가?”
“그냥 기억력이 안 좋다고 해. 있어 보이게 말하면 뭐가 달라지나?”
겉으로는 대충 딱딱댔으나, 속으로는 충분히 이해되었다. 이번 기회에 바리엘을 젖힐 수 있다면, 루스웨나는 빼앗겼던 마법사들을 다시 찾아올 수 있고, 현재 오랜 기간에 나누어 배상하고 있는 배상금 또한 거부할 수 있다.
‘게다가 지금 바리엘은 풋내기 황태자만이 유일하게 황실을 지키고 있지. 마법부의 위상 또한 과거 같지 않아. 이안 히엘로가 등장했으니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만, 바리엘을 잘라먹고자 한다면 지금 같은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하완도 참전하나?”
“높은 확률로.”
“확답은 입이 찢어져도 안 하네.”
“대신, 하나는 확실히 해주지.”
“뭐.”
러더포드는 까마귀들이 맴도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이번에는 토올룬에서도 버고스에 힘을 실어줄 것이다.”
바리엘이 버고스를 밀어내면, 그다음은 토올룬이니까. 그들에게는 버고스가 일종의 방어선인 셈이다.
에프디람은 손끝을 잘근잘근 깨물며 고민했다. 그러다가 울컥, 짜증을 담아 중얼거렸다.
“우리가 여기 붙어있다고 한들 문제 있나? 어차피 바리엘이랑 대가리 깨면서 싸울 거.”
“명분. 네놈들이 그 명분이잖아.”
“하아. 그래, 좋아. 뭐 할까? 뭐 하면 되는데? 일종의 친구비 같은 거네, 시발? 쪼잔한 새끼들. 대신 한번 값어치 하면 뒷말 없기다. 말해봐. 뭘 원하는지.”
“우선, 바리엘 사절단의 소재를 파악 중이다. 위치가 밝혀지면, 가서 정리해.”
아탄족이 직접.
그리하면 버고스 입장에서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면서도, 바리엘의 선제공격을 이끌어낼 수 있으니 대외적인 명분 확보가 가능할 것이다.
게다가, 아탄족이 박쥐처럼 여기 붙고 저기 붙을 가능성 또한 사전에 차단.
“어엉. 그리고?”
“바리엘군에 대항하여 선두에 서라.”
“솔직히 말해봐. 네들, 병사 별로 없지?”
“에프디람. 여전한 건 좋은데, 점점 선을 넘고 있어.”
“거참, 아저씨 유머 감각이 뒈져버렸네.”
에프디람은 기지개를 쭉 켜더니, 이내 짧고 깊은 한숨을 탁 내쉬었다. 어쩌겠나? 갈 길은 하나인데.
“그래. 한배 타보자고. 침몰하면 우리 아늑하게, 같이 지하로 가자.”
러더포드가 부하들에게 눈짓하며 등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에프디람이 덧붙여 물었다.
“근데, 왕당파는 어떻게 할 건데? 그쪽 먼저 정리하는 게 맞지 않아? 외세 들어오기 전에.”
“그건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해줘도 지랄이네. 알았다. 알아서 해라.”
에프디람은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렸고, 으드득 어깨를 풀어댔다. 안 그래도 며칠 동안 먹고 누워서 피 냄새만 맡아댔더니 몸이 찌뿌둥한 참이었다. 잘 되었지, 뭐.
“가자.”
볼일을 마친 에프디람과 베노. 둘이 다른 쪽 장벽 아래로 내려가자, 이를 본 반왕당파 신하가 동료에게 속삭였다.
“믿어도 될까 모르겠네.”
“성깔은 저래도 실력 하나는 확실하지. 아마 저기 황궁에 있다는 그 아탄족 마검사도 못 당할 것이네. 마물 먹고 자란 자들과, 그러지 못한 자가 같겠어?”
“으응. 그 망나니 같다는 놈?”
“그래. 아무튼 황궁친위대가 모두 나올 리는 없으니, 아탄족이 전면에 나서준다면 당장 결집 전까지는 충분히 대항할 수 있을 걸세. 어쩌면 그 이상을 해줄지도 모르고.”
* * *
까아앙! 깡깡! 까앙!
“아오! 시끄러워!”
그리고 그 시각.
마법부 장관실 소파에서 곯아떨어졌던 베릭이 베개로 귀를 틀어막았다. 조용하진 않더라도, 이리 시끄러운 적은 없었는데!
몇 번이나 무시하려고 했으나 베릭은 결국 참지 못하고 문을 박찼다.
콰앙!
“뭔데 이렇게 시끄러워!”
“오, 베릭이군.”
“베릭이네. 빠그라진 얼굴은 여전해.”
“베릭, 안녕. 굴에 처박혀서 사는 우리도 해 떠 있을 때와 아닐 때를 구분한단다.”
바글바글, 허벅지까지 오는 키의 데라족 수십 명이 마법부에 모여있었다. 방금 막 도착한 것인지, 하나같이 빵빵한 짐을 어깨에 둘러멘 모습이다.
우왕좌왕, 마법사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들 사이를 헤치며 힘겹게 돌아다녔고, 몇몇 데라족은 망치로 마법부 벽 이곳저곳을 쳐대며 호기심을 맘껏 분출했다.
…저게 바로 소음의 원인이로군.
“마! 왜 시끄럽게 망치로 벽을 치고 댕겨?”
“네 머리를 칠 순 없잖아?”
“이게 보자마자 시비네.”
“자자, 다들. 잠시, 여기 주목 좀 해주십시오.”
그때 등장한 로만드로. 데라족을 통솔하느라 진이 다 빠졌는지, 땀으로 흠뻑 젖은 모습이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팔락이며 외쳤다.
“데라족이 머물며 무기 제작할 영지가 방금 매입되었습니다. 짐은 저희가 옮길 것이니, 먼저 그쪽으로 움직이시지요. 확인해보시고 부족한 게 있다면 말씀하시면 됩니다.”
“오, 그래? 가봅시다!”
“난 좋아! 뭣 하러 밖에서 시간 낭비해? 바로 가서 시작하자고!”
“제일 큰 주물은 내 거다!”
“가위바위보 해!”
“손가락도 다 못 펴는 게.”
우르르. 로만드로의 손짓에 따라 한꺼번에 움직이는 두더지들이라. 꽤 진귀한 풍경에, 마법사들도 멈춰서서는 그 모습을 지켜봤다.
거대한 마차 십수 대가 바쁘게 나가는 와중, 이안이 베릭의 어깨를 가볍게 붙잡았다.
타악.
“이안아! 저 두더지 새끼들 때문에-”
“베릭.”
하소연하는 것도 잠시, 베릭은 이안의 턱짓에 멈칫거렸다.
“잘 잤으면, 짐 옮기자. 일 시작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