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ling village life with herbal elixir RAW novel - chapter 71
설마, 잔소리?
“네. 제가 괜히 불렀네요. 저녁인데.”
-아니요. 괜찮아요. 애 아빠가 도일 씨를 형제처럼 생각하니까요. 저도 도일 씨 덕을 많이 봤고, 저도 항상 좋게 생각해요. 그런데, 사실 애 아빠의 몸이 별로 좋지가 않아서요.
“예?”
나는 무언가 큰 병에 걸렸나 싶어 심장이 덜커덩 내려앉았다.
심각한 말투로 물었다.
“어디가 아픈가요?”
-치질에 걸렸어요.
“치질이요?”
-네. 그래서 혹시라도 애 아빠가 술을 먹거든 도일 씨가 좀 말려주세요. 도일 씨가 주는 술이라면 냉큼 받아 먹을 사람이거든요.
“아..치질이면 고통이 상당할 텐데. 자식이 왜 말을 안 하고….”
-그러니까요. 도일 씨를 워낙에 좋아하니까 또.
“영옥 씨, 걱정하지마세요. 제가 맛있는 것만 먹이고 안전히 귀가 시키겠습니다.”
-네. 너무 감사해요. 매번 제가 도움만 받네요.
“도움이라뇨! 철수가 좋은 아내를 뒀다는 게 저는 너무 좋은데요. 이거 저도 재혼해야겠는 걸요?”
-호호호호호호. 그 말 진심인가요?
아차, 또 말실수.
“아. 그게 아니라.”
-제가 아는 사람 중에 도일 씨랑 동갑이 있는데. 능력도 있고 집도 한 채 있대요. 외롭다고 그렇게 난리를 치는데, 한 번 만나보시겠어요?
“아뇨.”
-어머, 꽤 단호박이시다.
“제가 말실수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혼자가 좋습니다!”
-다음번에 기회가 되거든 제가 자리 마련할 수 있으니까. 언제든지 부담 갖지 마시고 말씀해주세요.
“예. 예.”
-그럼 우리 남편 잘 부탁해요!
“네. 들어가시죠!”
영옥 씨와 통화를 끝낸 뒤, 나는 툇마루에 깔린 술 잔 두 개를 멍하니 바라봤다.
술이라니.
치질 환자에겐 최악이다.
‘몸이 좋지 않으면 말을 하지.’
친구가 부른 다고 냉큼 달려오는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의리?
그런데, 치질은 좀 차원이 다른 문제다.
고통도 고통이지만, 내가 아는 직원 동료도 치질에 걸리고 나서부터는 금주 금연이었다.
그런데도 철수는 나를 위해서 술을 먹자고 먼저 말을 꺼냈다.
이건 엄청난 희생정신이 아닌가.
친구 외롭다고 치질의 고통을 감내하며 술을 먹겠다니.
의리 하나는 기가 막히네.
‘그런데, 세상에 이런 우연성이 있을까.’
반면에, 나는 또 다시 도토리묵의 기적을 맛보았다.
어쩜 이렇게 타이밍이 잘 맞는지.
마침 내가 찾은 특전이 치질의 특전이었기 때문이다.
철수가 우리 집에 오거든, 반드시 치질을 치료할 수가 있었다.
나는 철수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
철수가 우리 집을 찾았을 때, 녀석은 한 손에 봉지가득 막걸리 세 병을 사왔다.
세 병이나?
녀석이 털털한 웃음을 지으며 아픈 걸 내색하지 않은 걸 보니, 오늘 정녕 나와 술 한 잔을 할 생각이었나 보다.
“막걸리를 세 병이나 사왔구나.”
“오냐. 막걸리는 약이잖냐. 오늘 도토리묵하고 마셔보자고!”
철수가 툇마루의 식탁에 깔린 음식과 도토리묵을 보며 말했다.
“이거 오랜만에 도토리묵이네.”
“너도 좋아하지?”
“환장하지. 이건 또 뭐야. 포도하고, 꿀? 호두까지? 안주가 너무 많은 거 아니냐?”
철수가 치질에 걸렸다고 해서 치질의 특전을 발휘하는 음식을 급히 준비했다.
나는 철수를 보며 말했다.
“도토리묵, 포도, 꿀, 호두를 보면 생각나는 거 없어?”
“무슨 생각?”
철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약초 가게를 운영하는 녀석이 도토리묵과 포도, 꿀, 호두가 뭐에 좋은지도 모른다.
나는 얘기를 해주려다가 말았다.
철수의 시선은 툇마루에 깔린 이불 방석으로 향했다.
“야, 툇마루에 무슨 이불같이 큰 방석을 깔아놨냐? 이거 이불 아니냐?”
“맞아. 이불이야. 우리 집에 방석이 좀 얇거든, 그래서 솜이불로 방석을 만들었어. 앉아봐.”
“솜이불로 방석을?”
철수가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철수를 위해서 툇마루의 딱딱한 바닥보다는 솜이불을 반반으로 접어 방석을 만들어줬다.
매우 도톰하여, 구름위에 떠있는 기분이리라.
철수 녀석은 아직까지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얼른 앉아라. 술 한 잔 먹게.”
“그래.”
철수가 두툼한 방석 위에 앉았다.
나름 편안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한결 가벼워 보이기도 했다.
철수가 자리에 앉자마자 도토리묵 한 점을 집어먹었다.
입안 가득 풍기는 도토리 향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 찌릿찌릿 움직인다.
“어우야, 너무 맛있다. 이걸 네가 쑤었다고?”
“어. 맛있지?”
“죽이는데?”
“이것도 먹어봐 포도.”
“포도? 제철포도가 또 기가 막히지.”
“호두하고 꿀도 먹어봐.”
“오늘 따라 많은 걸 맥이네.”
철수가 음식을 오물거리며 먹었다.
한참을 저작하더니 표정에서 무언가 한결 편해진 감이 있었다.
치질의 특전을 발휘하는 음식을 전부 먹었으니, 마법의 힘이 철수의 몸에 깃들고 있겠지.
나는 슬쩍 떠보았다.
“몸이 안 좋아? 표정이 왜 그래?”
“내 표정이 뭐 어때서?”
“어디가 꼭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애매하네.”
“내가 어딜 아파? 약초 먹어서 몸 건강한데. 뭘.”
“숨기지 말고 짜샤. 표정만 봐도 어디 불편해 보이는 데 뭘.”
“아니라니까. 진짜 안 불편하다니까.”
“그래?”
“진짜로!”
철수가 솜이불로 만든 이불을 치우더니 딱딱한 툇마루에 털썩 주저앉았다.
치질의 특전이 담긴 음식을 먹었다고, 벌써 효과가 슬슬 올라오나 보다.
“솜이불은 왜 치워? 너한테 딱 필요할 것 같아서 깔았는데.”
“이제 없어도 될 것 같아. 뭔가. 둥실둥실 떠다니는 기분이라.”
“그래. 알아서 해.”
“크, 오늘 따라 술이 당기네. 술 한 잔 먹자.”
철수가 내게 잔을 내밀었다.
막걸리를 한 잔 따라달라는 시늉인데, 나는 손을 저었다.
철수가 치질을 이겨냈다고 하더라도 영옥 씨와의 약속을 어길 수 없었다.
이제 솔직하게 털어내야 할 때.
“됐다. 술은 무슨 술이냐. 치질 환자가 무슨.”
“……알고 있었냐?”
“어쩜 그렇게 눈치가 없냐? 도토리, 호두, 꿀, 포도를 보면 뭐가 떠오르는 게 없어? 약초가게 생활을 했으면 이 음식을 보면 떠오르는 게 있어야지!”
“하아….이제야 알겠어. 이건 전부 치질에 좋은 음식이잖아.”
“빙고!”
“내가 치질에 걸린 건 어떻게 알았냐? 무슨 신기라도 있는 거냐?”
“맞아, 나는 사람을 보면 어디가 아픈지 다 보여. 그렇게 믿고 있으면 돼.”
“소름이다.”
철수가 자신의 팔에 돋은 닭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지금은 좀 어때?”
“아까보다는 통증이 덜해서 그나마 좀 편해진 것 같아.”
“다행이네.”
“와. 참 신기하네. 아무리 그래도 치질에 좋은 음식을 먹었다고 금방 치질 통증이 사라지냐?”
“완벽한 배합이잖아. 우리 아버지가 어떻게 약초로 사람을 살렸겠어?”
“배합이겠지.”
“맞아. 약초의 배합. 약초의 성질이 서로 조화를 이루면 효능이 상승하잖아? 그러니까 너도 치질에 좋은 음식을 자주 먹어봐. 앞으로 치질에 걸릴 일은 없을 거야.”
“알았어. 참, 정말 대단해.”
철수가 음식을 우걱우걱 집어넣었다.
치질에 좋다니까 또 엄청 나게 먹는다.
그리고 한상을 다 비웠을 때가 돼서야, 배가 부른 듯 툇마루에 퍼질러 누었다.
“휴. 치질에 걸렸을 때는 제대로 눕지도 못했는데. 이젠 옆으로도 눕고, 엎드려도 눕고, 정자세로도 누울 수가 있어.”
“크크크. 행복하냐?”
“치질에 걸려보지 않은 놈은 이 고통을 모를 거다. 똥 쌀 때마다 악악 소릴 질러.”
“그래도 다행이다. 고통이 사라져서.”
“다 네 덕분이다.”
“아냐.”
“응?”
“다 네 덕이야.”
“내 덕이라니?”
“친구 위하는 마음으로 이곳까지 찾아온 네 덕이라고.”
“말을 또 그렇게 해주시나. 고맙게.”
“고마우니까 고마운 거지. 다음번에는 몸이 안 좋으면 바로 말 해. 혼자서 삭이지 말고.”
“오케이. 너도 혼자 있기 적적하면 언제든 불러라. 이 형이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가니까.”
철수가 흐뭇하게 웃었다.
나는 철수에게 하나 더 주고 싶은 게 있었다.
“아, 그리고 철수야.”
“응?”
“제수 씨 보거든, 요거 좀 전해줘.”
“뭔데?”
“화장품인데 최 영감님에게 받은 거야. 여성용 화장품이라 쓰기도 좀 애매하고. 다섯 박스나 받아서 다 쓰질 못 해.”
“이거 신세만 져서 괜찮겠냐.”
“괜찮아. 그리고 아내에게 잘해 줘. 네 아내만큼 속 깊은 사람도 없어.”
“..알았어.”
“나는 이혼을 했지만, 형제 같은 네가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까, 나도 기분이 좋아.”
“너도 좋은 사람 만날 거야.”
“지금이 행복해. 주위에 좋은 사람들만 있으니까.”
철수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너는 정말 긍정적이구나. 내 친구라도 참 배울게 많아. 나는 삶에 우여곡절이 너무 많았던 사람이라. 너처럼 긍정적으로 살진 못했거든.”
“….”
“지금 아내가 없었다면 난 지금도 정착하지 못하고 산만 돌아다니고 있었을 거야.”
“……”
“지난 삶을 생각하면 내 삶은 매번 비포장 도로였던 것 같아. 너희 집에 오면서도 그랬어. 과속 방지턱을 간신히 피했더니 이번에는 비포장도로가 있는 거야. 비포장도로를 달려서 오는데, 치질에 걸린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내 삶을 얼마나 한탄했는지 아냐?”
철수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제 도로 공사가 있었는데, 아직 마무리가 덜 된 탓에 도로가 비포장이었다.
철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치질 환자로써 좀 억울했겠다 싶었다.
나는 무어라 말을 해줄까 잠시 생각에 잠긴 뒤 말문을 열었다.
“원래 삶이 그런 거 아니겠어. 직선의 삶을 사는 사람은 없어. 대부분 곡선이고 비포장도로야.”
“직선의 포장된 도로를 달릴 수는 없을까?”
“그런 삶은 없다는 걸, 반백년 살면서 깨닫지 않았냐?”
“하긴.”
“그리고 삶이 잘 깔린 직선도로라고 한들, 그게 재밌냐? 그게 삶이야? 나는 고속도로를 타는 게 제일 지겨워. 졸리거든. 언제 사고가 날줄 몰라.”
“하하하. 말이 또 그렇게 되네.”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지. 곡선이든 비포장이든 길을 잃지만 않으면 돼.”
“맞아.”
그로부터 나는 철수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술 없이도 이런 속 깊은 얘기를 할 수가 있었다.
술은 대화를 위한 구실일 뿐, 마음을 터놓고 얘기하니 술을 마셨을 때보다 더 진실한 대화를 나눌 수가 있었다.
“즐거웠다. 철수야. 다음엔 경훈이네 술집에서 모이자고.”
“그래. 너도 잘 자고. 화장품 잘 전할게.”
“들어가!”
***
‘이제 도토리묵의 행운은 끝인가?’
도토리묵을 나누어줬더니 어르신들에게 많은 음식을 받았고, 특전을 얻어 철수의 치질도 이겨낼 수가 있었다.
상수리나무가 내게 준 행운은 일단 여기까지인 것 같다.
그런데도 아직 무언가가 남은 찜찜함은 무엇일까.
‘아직 뭔가 남은 것 같아.’
내 시선에는 상수리나무의 가지에 앉은 다람쥐가 보였다.
다람쥐 녀석은 나를 한참동안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나무에서 내려왔다.
“내 어깨위로 올라올래?”
다람쥐가 내 곁을 쌩하며 지나가는 게 아닌가. 나는 다람쥐가 이끄는 곳으로 향했다.
다람쥐가 도착한 곳은 창고로 쓰이는 사랑방이었다.
잡동사니가 많이 쌓여 청소할 엄두도 못내는 곳.
언젠가 청소를 해야지 다짐했거늘.
“다람쥐야 여길 왜 온 거야?”
사랑방의 문을 열어주니 다람쥐가 안으로 쏙! 들어갔다.
널브러진 잡동사니 사이의 작은 틈으로 기어 들어가더니, 한참 동안 나오질 않았다.
“얘가 갑자기 왜 이러지.”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찍, 찍.
다람쥐 특유의 아기 새 울음소리가 들렸다.
“창고 안에 뭐가 있다는 건가?”
찍 찍!
다람쥐가 내 말에 반응이라도 하듯 대답했다.
‘안에 뭐가 있는 것 같기도 한데.’
나는 사랑방 내부로 들어가 잡동사니들을 하나 씩 밖으로 꺼냈다.
오래된 의자, 액자, 시간이 멈춘 시계, 오래된 라디오, 아버지의 옛 군복, 먼지가 가득 쌓인 마대자루, 어머니의 오래된 재봉틀, 색을 바랜 소설책.
여러 가지 잡동사니가 쏟아져 나왔다.
물건을 쏟아내는 중에도 다람쥐가 찍찍거리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사랑방의 물건을 어느 정도 치우자 내부가 다소 훤해졌다.
그리고 나는 매우 허름한 책상 하나를 발견할 수가 있었다.
‘책상은 뭐지?’
가장 구석에 있던 책상이라 눈에 띄질 않았는데, 책상에는 아버지가 청년 시절 찍었던 사진이 보였다.
‘아버지의 책상인가?’
나는 호기심이 일었다.
아버지의 책상이 있는 줄도 몰랐기 때문이다.
서랍을 열자 여러 가지 물건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서랍 안쪽에서 무언가 특별해 보이는 물건을 찾아냈다.
다급히 열어보았다.
그 물건을 보자마자 나는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이 귀한걸!’
우리 집안은 대대로 약초꾼 집안이었다.
감나무의 기억을 통해서 우리 집안의 역사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바였다.
허름한 초가삼간에도 여러 사람들이 찾아와 차를 마시며 약초를 사가는 장면을 감나무를 통해서 보았었다.
그래서 늘 궁금한 점이 하나가 있었다.
300년이 넘도록 터를 떠나지 않고 집안 대대로 약초를 전문적으로 다루었다면, 그 집안만의 특별한 비밀 하나 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찾은 것이 바로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지도인 것 같았다.
어려운 한자가 쓰여 있어 해독이 난해한 점이 있으나, 산삼山蔘과 같은 기본적인 한자 정도는 해독할 줄 알기에, 이 지도는 전국의 명산에 자생하는 약초의 위치를 지정해놓은 지도가 아닐까 싶었다.
‘버섯 지도가 괜히 있던 게 아니었어.’
과거 별채에서 잠을 잘 때 꽃송이버섯이 그려진 지도를 찾은 적이 있었다.
그것은 빙산의 일각이었고, 지금 찾은 지도가 진짜였다.
‘대박이다.’
약초꾼의 약초 지도는 집안 대대로 가보로 내려올 정도로 비밀로써 간수한다.
대부분의 약초는 한 자리에서 자생하며 씨앗을 뿌리기 때문이다.
버섯은 나는 자리에서 곧 잘나고, 산삼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약초의 정보가 기록된 지도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가치로 따지자면, 수십억 원이 아닐까 싶다.
‘문제는 지도가 정확 하느냐는 것.’
지도는 한 장으로 구성된 게 아니었다.
약초마다 지도가 있었는데, 가령, 산삼은 지리산의 뱀사골, 덕유산, 주왕산에 있었고, 가장 최근 채취한 산삼이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이었다.
만약 아직까지도 산삼이 남아 있다면, 횡재한 셈이 아닌가?
심지어 천종이라고 기록된 지도에는 100년 전에 발견하여 채집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어차피 우리 집에서 자생하는 약초가 많아 평범한 약초는 찾아다닐 필요는 없으나, 천종만큼은 달랐다.
덕유산의 매우 깊고 험준한 곳에 있어 누군가 채심하지 않았다면, 반드시 그곳에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숨을 가다듬으며 천종의 지도책을 덮었다.
‘책상을 좀 더 뒤져볼까.’
책상은 화수분처럼 많은 걸 토해내고 있었다. 아버지의 옛 지갑부터 시작해 필기도구까지. 손때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때였다.
내 시선에는 책상 위에 올라가 있는 다람쥐가 보였다.
다람쥐 녀석이 찍찍거리며 내 팔을 기어 올라가더니 내 어깨로 안착했다.
“다람쥐야, 네 덕분이다.”
찍찍!
다람쥐와 함께 책상을 뒤지길 한참.
노끈으로 엮인 오래된 공책을 발견했다.
낡고 헤진 공책을 보며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다.
공책에는 ‘약초원의 수기’라고 쓰여 있었고 아버지가 살아생전 약초원의 일상을 담은 기록이 아닐까 싶었다.
얇은 공책이 꽤나 많이 쌓여 있었다.
‘아버지의 일기장이라니.’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항상 무언가를 쓰셨다.
툇마루에 가만히 앉아서도, 잠들기 전에도, 약초를 다듬다가도, 메모를 하는 습관을 강박처럼 가지셨다.
이걸 봐야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도 잠시, 나는 수기의 첫 장을 펼쳤다.
[장날에 리어카를 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비를 쫄딱 맞고 춥고 배고파 소주 한 병을 마셔 몸을 따뜻하게 했다. 소주 한 병 마셨다고 처가 난리다. 다음부터는 옷을 따뜻하게 입고 가야겠다. 일할 때는 더워도 집에 갈 때는 춥다. 그런데. 껴입고 다니기가 불편하다.]웃음이 나왔다.
춥고 배고파 소주 한 병 마신 것도 귀여웠고, 그걸 나무라는 엄마의 속상한 마음과 따뜻한 사랑이 느껴졌다.
나도 아버지와 같았다.
추운 겨울, 두터운 점퍼 입기를 싫어했고 답답하여 벗어놓고 다녔기에 엄마에게 자주 혼나곤 했으니까.
아버지의 소소한 일상이 담긴 내용도 있는 반면, 엄마에 대한 사랑을 시처럼 써놓은 글도 있었다.
‘아버지와 엄마는 서로를 많이 사랑하셨구나.’
아버지가 일기장을 꽁꽁 숨겨놓은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엄마에 대한 사랑을 기록해놓은 것인데, 누군가에게 보여주기가 부끄러웠던 게 아닐까.
이런 구절도 있었다.
[오늘의 날씨는 맑음이나, 우리 집은 하루 종일 흐린 날이다. 처가 하루 종일 우울한 까닭이다. 회화나무 열매를 구해다가 茶(차)를 만들어 먹였다. 처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마당은 고요하고, 적막하며 꽃과 나무도 생기를 잃는다.]무슨 이유로 엄마가 우울했는지는 적혀 있지 않지만, 회화나무 열매라 함은 여성의 갱년기에 좋은 열매였다.
아마도 엄마가 갱년기를 겪고 있을 때가 아닌가 싶었다.
‘우리 아버지, 완전 애처가였네.’
아버지에게 이런 면모가 있는 줄은 전혀 상상치도 못했다.
그런데 왜 엄마 앞에서는 매번 근엄한 표정만 지으셨을까.
게다가 버럭 화를 낼 때면 호랑이처럼 무서웠다.
‘옛날 사람이라 그랬겠지. 나도 그랬으니까.’
겉으로는 쌀쌀맞아 보이나 속으로는 따뜻하고 다정한 것.
이걸 츤데레라고도 하던데.
생각해보면 나도 아버지처럼 표현을 그리 잘하고 살진 않았던 것 같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러지 않을까.
내 친구 철수만 봐도 그러한데.
‘되게 재밌네.’
아버지의 일기장은 소설 한편을 읽는 기분을 들게 했다.
어느 날 문득 헌 책방을 지나다가 구입한 소설이, 매력적인 이야기로 가득 차서 빠져들게 되는 기분이랄까.
일기 속 주인공이 아버지라고 생각하니 왜인지 이질감이 들고, 반면에 평생토록 몰랐던 아버지의 성격을 뒤늦게나마 알게 되어 기분이 참 묘했다.
‘도저히 덮을 수가 없잖아.’
재미도 재미지만, 공책에 여백이 없음을 통해서도 아버지의 알뜰함을 엿볼 수가 있었다.
한 장 한 장, 글씨가 얼마나 빼곡한지 눈을 부릅뜨고 봐야할 정도였다.
이제 중년이 된 아들이 아버지의 일기를 훔쳐본다는 생각일랑 못하신 걸까.
하늘에서 보고 계시거든 무슨 생각을 하실지 궁금하다.
‘아들이 볼 줄 알았으면 글씨 좀 크게 써놓지 그랬어요. 보기가 어렵네요.’
그렇게 한참을 보다가, 나는 매우 재밌는 일화를 읽었다.
이장님과 관련된 일화였는데, 내용은 짧고 강렬했다.
이장님도 보통은 아니었구나.
좋다고 고추밭서 사랑을 나누다니.
몹쓸 짓을 나누다가 이장님의 아들 경훈이를 낳지 않았을까 싶다.
언젠가 경훈이에게 탄생의 비밀에 대해 알려줘야겠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공책 한 권을 다 읽지도 못 했는데,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마음 같으면 밤을 새워서라도 다 읽어버리고 싶건만, 분량도 대하소설 급이었고, 아버지의 인생을 담은 수기를 속독하듯 읽고 싶진 않았다.
나는 맛있는 반찬을 아껴먹는 다는 심정으로 공책을 덮었다.
끈에 묵인 다른 공책은 먼지를 잘 닦아내 안방으로 옮겼다.
‘재밌는 일이 또 생겼네.’
***
다음날 아침.
낙천적인 성격은 아버지를 닮긴 했지만, 아버지의 강박적인 메모 습관은 물려받지 않았나보다.
나는 왜 일기를 여태 쓰지 않았을까.
변명하자면 삶이 바빴기 때문이고, 현실적으로 생각하자면 삶이 재미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회사생활이 그랬으니까.
지겹고 힘든데, 술에 절어 사는 일상을 굳이 기록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아버지의 일기를 통해서 나의 아버지를 추억하듯, 나의 딸 연이도 그랬으면 싶다.
내가 아버지를 몰랐듯.
연이도 나를 모른다.
‘일기를 써볼까.’
글 써본지가 오래 되어 막상 무엇을 써야할지 모르겠지만, 아버지의 일기장처럼 짧고 간결한 문장으로 시작하면 될 것 같았다.
나는 아침을 간단히 먹고 황궁이 황복이에게 밥을 준 뒤, 나만의 수기를 작성했다.
‘언제부터 시작을 해볼까.’
췌장암에 걸려 시골집에 들어왔을 때부터가 나을 것 같았다.
나는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또박또박 정자로 글을 써내려갔다.
언젠가 연이가 읽을 때면 나이가 들었을 텐데, 큼지막한 글씨로 써야겠지.
한참을 써내려 가다보니 손가락 마디가 쿡쿡 쑤실 정도였다.
‘그래도 재밌네.’
지난날을 되새기며 글을 쓰다 보니 몇 가지 깨달은 점이 있었다.
나는 글쓰기에 재능이 있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는 단 한 번도 고립된 적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시골에 내려와서 지금 이 순간까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많은 일이 있었으니 쓸 얘기가 많았고 거기에서 삶의 지혜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사고의 틀이 넓어졌다고 해야 할까.
‘글을 쓰길 잘했어.’
딸 연이에게 보여주고자 썼던 수기가 결국에는 나의 삶을 더 풍족하게 만들어 주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남은 삶은 일기를 꾸준하게 써봐야겠다.
***
마음 같으면 우리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약초 지도를 챙겨들고 전국의 명산을 돌아다니고 싶건만, 약초원에 찾아오는 손님들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약초원에 오는 손님들을 응대하고 바쁜 하루를 보냈더니 금방 저녁이 되었다.
친구들을 만난 건 경훈이네 술집이었다.
철수는 치질을 완치한 듯 표정이 가벼워보였고, 봉선이는 요즘 집에서 공부만 한다고 하니 살이 좀 불었다.
경훈이는 변함없이 술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나는 친구들에게 일기를 권유했다.
“그래서 하루 종일 일기를 쓴다고?”
“어. 너희들도 일기를 써봐 재밌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