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114
114.
이린의 말은 사람들이 잡혀 있는 곳을 알아내 가능한 먼 방향 여러 곳에 불을 내서 주의를 끌고 자신이 가능한 유인하겠다는 뜻이었다. 방금 이린의 경공을 봤으니 반대할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이린이 데리고 있는 청아와 홍아라면 불을 지르는 것도, 끄는 것도 어렵지 않겠지. 이린이 그 둘을 몸에서 떼어 놓지 않는 한 위험해질 가능성도 한없이 낮아.’
예전에 이린은 홍아에게도 영약을 먹일 거라 했었다. 그렇다면, 청아가 주위를 얼려 버리는 것처럼 불을 뿜을 거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사실 홍아가 아니더라도 불을 지르는 건 비교적 쉬운 일이었다. 끄는 일에 비하면.
하지만 그건 자신이 청아와 홍아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기에 납득하는 것이지, 위험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었다.
“불이 나면 아무리 뇌물을 많이 받았어도 와 볼 수밖에 없을 거예요. 불로 산채의 위치도 알릴 수 있고요. 저분들에게도 조금 협조를 구할 테니 걱정 말아요.”
이린은 산적들의 옷과 무기를 빼앗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자들을 가리켰다. 가족들이 끌려가 있다 보니 위험하더라도 부상 입은 몸으로 이린을 도와 산채를 찾아 나설 듯했다.
“그리 위험한 일을 소저에게 맡기고 갈 수는…….”
“당장 저보다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이 있지요. 안 그런가요?”
“…….”
어쩐지, 도무지 말로 이길 방법이 생각나질 않았다.
“제가 걱정되신다면 빨리 돌아와 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이린은 청휘를 등 떠밀었다. 그 목소리에는 어쩐지 거절할 수 없는 힘이 있어 결국 청휘는 이린이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여전하구나.’
위험해 보여도 제 몸을 사리지 않고 움직이는 저 거침없는 성품이 아니었다면, 분명 그날 자신을 구하는 위험한 일도 하지 않았을 테지. 걱정과 동시에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린이 예상한 대로 남궁세가의 이름을 내세우자 일은 수월했다. 그리고 청휘가 관병들을 기다리는 대신 먼저 숲으로 돌아가고 있을 때, 적절하게도 어두운 하늘에 불길이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무사해야 할 텐데.”
이미 남궁청운 덕분에 한차례 본의 아닌 산채 토벌을 해 본 남궁청휘에게는 어지간한 산적들이 이린에게 상대가 되지 못할 거란 확신은 있었다. 하지만 세상일이 그렇게 예상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 법이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청휘가 화재 현장에 도착해 목격한 장면은 그의 예상과 정반대로 벗어나 있었다.
“무슨 일이……?”
붙잡혀 온 사람들을 괴롭힐 틈이 없을 정도로, 시선을 끄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나. 산채 주변에는 여기저기 산적들이 쓰러져 있었고 산채도 위쪽이 어느새 반 가까이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붙잡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도망치고 있었다.
이린과 함께 발견한 사람들처럼 피를 흘리고 부상을 입은 사람들도 있었고, 다친 곳은 없지만 겁에 질려 울고 있는 이들도 보였다.
“어떻게 된 겁니까?”
“아, 아까 그 소협이시군요! 왜 혼자 오신 겁니까?”
도망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눈에 익은 사내를 발견하고 말을 걸자, 사내는 청휘를 알아본 듯 관병들이 오지 않았나 두리번거렸다.
“곧 뒤따라올 겁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저희도 잘 모릅니다. 아까 그 소저께서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하셔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사람들이 빠져나와서…….”
“!”
사내의 말에 남궁청휘는 미간을 좁히며 산채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관병들이 오는 방향을 가르쳐 주고 사람들에게 그쪽으로 도망가도록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산채는 생각보다 제법 규모가 있었는데 복도에는 이미 산적들이 여기저기 쓰러져 있었다.
‘모두 한 사람의 솜씨다.’
정확하게 급소를 공격한 솜씨는 깔끔했다. 아마 좁은 길목을 이용해 홀로 여럿을 차근차근 상대한 듯했다.
‘이린의 실력이 뛰어날 거란 예상은 했지만 이건 너무…….’
아무리 봐도 초심자의 흔적 같지가 않았다. 그야 자신도 어릴 적부터 검을 들었지만 사람을 베는 일은 없었으니 사람을 처음 벨 때는 아무래도 주저함이 남곤 했는데 산적들의 몸에는 그런 흔적도 없었다. 군더더기도, 망설임도.
타닥- 타다닥-
“침입자다!!”
“불을 지른 게 네놈이냐??”
나무로 만든 건물의 여기저기가 화재로 무너지는데도 산적들은 침입자를 발견하자 무기부터 들고 달려들었다. 마음이 급한 청휘가 비키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역시 통하지 않았다.
“바쁘니까 좀 비켜!”
“죽여라!!”
오면서 본 싸움의 흔적을 참고삼아 청휘 역시 좁은 지형의 이점을 살려 사내들을 공격했다.
‘역시 그렇게 쉽게 되지는 않는데.’
산적들은 남궁청휘의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오면서 본 흔적처럼 깔끔하게도 되지 않았다. 청휘는 안으로 들어오기 전 보았던, 붙잡혀 있던 포로들의 상태를 떠올리며 망설임을 털어 내고 검을 휘둘렀다.
제법 규모가 있는 산채라 무공을 익힌 이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런 걸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청운 형 덕분에 이런 막무가내 현장을 처음 겪는 것이 아니었던지라 수년간 가문에서 굴려진 몸은 상관없이 착실하게 산적들을 쓰러트리고 나아갔다.
“연…… 소저! 어디 계십니까!”
저도 모르게 이린의 이름을 부르려다 멈칫한 청휘는 주위를 살피며 달렸다. 이린이 어디로 갔는지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쓰러진 산적들이 있는 곳은 이상하게 건물이 살짝 젖어 있었기에 청휘는 그것이 이린과 함께 있는 청아가 한 일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었으니까.
‘왜 혼자 이렇게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거야.’
그렇게 불안한 마음에 달려간 막다른 복도 끝 방에 들어선 청휘의 눈에 범상치 않은 덩치의 사내가 들어왔다. 그리고 곧 그 사내는 실 끊어진 인형처럼 스르륵 무너지며, 그 앞에 서 있던 이린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린의 검은 뽑혀 있지도 않고 얌전히 검집 안에 있었다.
“!!”
“마침 적절한 때에 도착하셨군요. 남궁 소협.”
청휘는 이린의 차분한 목소리에 더 놀라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다치신 곳은,”
“전 괜찮아요.”
이린은 핏자국이 남아 있는 청휘의 검에 한번 시선을 두고는 쓰러진 사내의 허리춤에서 달그락거리는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이 방까지 오는 도중에 쓰러져 있는 산적들은 모두 소저께서 하신 겁니까?”
“아니요. 마침 운 좋게도 지나가던 어느 협객께서 도와주셨답니다. 못 보셨나요?”
“……그런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만.”
이린의 손에 들린 것은 열쇠였다. 이린은 그대로 방 한쪽 구석으로 가 무언가의 자물쇠를 열었다.
“괜찮니? 이제 나와도 괜, 아, 맞다. 잠시만.”
이린은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방구석에 굴러다니던 모포로 쓰러진 사내를 덮었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는 철장 안에는 아이들 서너 명이 눈물을 흘리며 숨죽이고 있었다.
“너희들 부모님이 찾고 있으니 어서 나오렴.”
“정, 말요?”
구석에서 훌쩍이던 아이들은 한참을 안에서 웅크리고 있었던지 제대로 일어나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보다 못한 이린이 아이 하나를 안아 들고 청휘에게 내밀었다.
“잘됐네요. 오신 김에 애들 좀 받아 주세요.”
“네? 네.”
“읏차. 아가는 언니랑 가자. 아야야. 머리카락 잡아당기면 안 돼. 너희는 걸어갈 수 있겠니?”
“네.”
이린이 가장 어린아이를 꺼내 안아 들자 큰 아이들은 다리를 바들바들 떨며 몸을 일으켰다.
“아이들을 찾으러 들어오신 겁니까?”
“네. 아이들만 따로 끌려갔다는데 아이들은 무서워서 도망도 못 갈 테고. 그런데 저런 곳에 가둬 뒀을 줄은 몰랐어요.”
복도로 나온 이린은 멈칫하며 아이들의 앞을 가렸다.
“착하지~ 어두우니까 옆에 보지 말고 언니 등만 보고 따라와야 한다?”
능숙하게 아이들을 달래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산적들을 요령 좋게 피해 가는 이린의 뒤를 따르며 청휘는 일단 일이 무사히 끝났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됐어. 이제 아이들이 부모한테 돌아가는 것만 확인하면 이린과 제대로 통성명이라도 해 봐야지.’
그런 청휘의 마음을 놀리기라도 하듯, 아이들을 데리고 산채 밖으로 나가 하늘을 확인한 이린은 놀라 소리를 질렀다.
“앗!!! 지금, 몇 시쯤 됐죠??”
“네? 아, 아마 슬슬 해시(亥時: 저녁 9~11시)쯤 되었을 겁…….”
“저, 가 봐야 해요! 뒤를 부탁해요!!”
“네에???”
허둥지둥 청휘의 품에 아이를 안겨 주곤 이린은 그렇게 바람같이 사라져 버렸다.
‘이게 대체 무슨 꼴이야.’
청휘는 이린이 달려간 방향을 향해 황망하게 손을 뻗으려다 품에 들려 있는 아이를 깨닫고 한숨만 푹 내쉬었다.
뒤따라가기에는 품에 안겨 있는 아이들과 이 아이들의 부모, 그리고 도망친 사람들, 아직도 남아 있을지 모를 산적들의 잔당들이 신경 쓰이는 데다 관병들을 불러온 것도 자신이라 이곳을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청휘는 모처럼 만난 이린을 그대로 놓쳐 버렸다.
뒤처리를 끝낸 청휘가 일행이 머물던 객잔으로 돌아온 건 다음날 정오가 넘어서였다. 경공을 쓸 기운도 없어 근처의 객잔에서 시체처럼 쉬고 겨우 돌아온 참이었다.
“소협께서 오시면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남동생의 안위 여부 따위는 궁금하지 않은 듯 간결하게 적힌 쪽지를 구긴 청휘는 이미 자신의 짐까지 같이 정리되어 있는 것을 알고 분통을 터트려야 했다.
“하…….”
하지만 여기엔 그 장본인도 없고, 눈앞에 있는 것은 죄 없는 점소이뿐이니.
“옷 한 벌만 사다 주실 수 있을까요? 목욕물 준비도요.”
“물론입죠, 소협!!”
인간관계의 무상함을 느끼며 그래도 돈주머니라도 들고 나온 게 어디냐는 생각으로 자신을 달랜 청휘는 우선 어제 미친 듯이 달리고 산적들을 상대하느라 피와 땀으로 더러워진 옷부터 벗어 던지고 싶었다.
‘분명 집에서 나올 때는 내 핑계로 나왔던 거 같은데 말이지.’
목욕하고 나온 청휘는 겨우 한숨을 돌리고 어디인지도 모르는 시연향을 물어물어 찾아가며, 자신이 어제 저녁과 오늘 오전에 오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는 걸 깨닫고 한탄했다. 몸이 피곤한 것보다도 정신적 피로가 너무 컸다.
‘이린 얼굴은커녕 통성명도 못하고 헤어지고, 산적 토벌은 어쩐지 내 공이 되어 있고.’
붙잡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오는 것만도 꽤나 힘들었다. 어쩐지 산적 토벌한 셋째 형이 뒤처리는 안 하고 그냥 방치하고 튀더라니. 다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이 시연향이라는 곳, 어제 형님이 말한 그…… 설요라는 무희가 있는 곳 아냐? 출입 금지당했다더니 무슨 수로 들어갔지?’
만날 거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하더니 뭔가 묘안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대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지.”
순간 울컥해서 입 밖으로 소리가 튀어나가자 청휘는 제풀에 놀라 입을 막았다. 어젯밤 바람처럼 사라지던 이린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언니는 어디 간 거냐고 묻던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귀신에 홀린 게 아닌가 생각했을 지경이었다.
“여기가 시연향인가?”
“송구합니다. 공자. 저희는 지금 예약된 손님이 아니면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드디어 도착한 시연향은 겉으로만 보아도 평범한 곳 같진 않았다. 범상치 않은 검을 차고 있는 청휘의 옷차림과 몸가짐을 본 문지기가 정중하게 앞을 가로막자, 청휘는 난감한 듯 눈썹을 찌푸렸다.
“안에 일행이 있는데 찾을 수 있겠습니까?”
“말씀해 주시면 안에 말씀 올리겠습니다.”
“남궁……수연과 제갈수원이라는 이가 안에 있는지 물어봐 주겠습니까?”
“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청휘는 남궁청운의 이름을 대려다 혹시 형이 정체를 숨기고 들어간 게 아닌가 싶어 얼른 수연과 제갈수원의 이름을 댔다. 드문 성씨는 아니지만 유명세가의 성이 나오니 움찔한 문지기가 안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곧 제갈수원이 뛰어나와 청휘를 반겼다.
“형님! 이제야 온 거예요?”
안에서 나온 손님이 청휘를 끌고 들어가자 문지기들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본채로 들어가며 제갈수원이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대체 밤새 어딜 갔다 이제 와요? 형님이 밤놀이 간 것도 아닐 테고.”
“헛소리 말고. 지쳤으니 그 얘긴 나중에 하자. 그런데 여긴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청휘의 물음에 제갈수원은 핫, 하고 헛웃음을 치더니 히죽거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어릴 때부터 좀 그랬지만 어린애 같지 않은 말투로 속닥거렸다.
“우린 미끼였어요, 아무래도 처음부터 여기 오기로 계획되어 있었던 거 같더라고요. 청운 형님이 그런 큰 그림을 그려 놨을 줄이야. 다시 봤어요.”
“대체 뭔 말이야, 어떻게?”
“이야아, 그 무희가 꼼짝 못하는 약점을 잡았더라고요.”
“아니 그러니까 미끼니 약점이니 그게 무슨 소리야.”
제갈수원에게 끌려가며 어리둥절해하는 청휘의 귀에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무희의 무대가 가까운 모양이었다. 여러 겹으로 가린 휘장 너머 너울거리는 그림자만으로는 뭐가 뭔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남궁청운이 무대가 잘 보이는 좋은 자리에 앉았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무대 가까이에 익숙한 남궁청운의 얼굴이 보였으니까.
그리고 그 옆에는, 자신의 일행이 아닌 눈이 번쩍 뜨이는 미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 사람은 청휘도 아는 사람이었다.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