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151
151.
‘…제발……하지 않으면….’
온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그럼에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이린은 귀를 기울였다. 머리가 어지러워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이린은 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아빠….’
‘아가, 괜찮다. 괜찮아질 거야….’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힘이 들었지만 이린은 작은 손을 뻗어 힘겹게 아빠의 손을 잡았다.
시야가 흐릿했지만 알 수 있었다.
지금 이린은 아빠의 품에 안겨 있었다.
‘…대신 한 가지….’
누군가가 말했다.
그리고 연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 너…. …으면… 어찌….’
이린은 의식이 몽롱해져 아빠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귓가가 멍해지며, 천천히 의식이 돌아왔다.
‘…꿈?’
멍하니, 이린은 자신이 잠에서 깨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빠 품에 안겨 있었으면 아주 어릴 때인데.’
꿈속에서 자신의 손은 아빠의 손 대신 손가락을 붙잡아야 할 정도로 작았다. 이제는 전혀 기억도 나질 않는 어린 시절의 일일까. 아니면 그냥 평범한 꿈일까.
‘어릴 때 아팠던 적이 있었나,’
분명 기억엔 없는데. 그래서 그런 꿈을 꿨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렇게 침대에 자리보전하고 누워 있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나 무사한 거지.’
멍한 머리로 엉뚱한 생각을 하며 이린은 조심스레 팔을 움직였다.
‘움직인다.’
중독되었을 때 경공 같은 무리한 움직임은 독을 더 빠르게 퍼지도록 하는 법이니, 정신을 잃을 만도 했다. 워낙에 지친 상태기도 했고.
이린은 천천히 몸을 움직이며 몸 상태를 확인했다.
‘괜찮아. 문제없어.’
몸이 다소 뻐근하고 나른했지만 전신이 뜻대로 움직이고 있었고 아무 이상도 없었다.
“후우.”
생각보다 어디 크게 상한 곳은 없는 듯해 이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당 소저가 제때 해독을 한 모양이네. 다행이다. 내가 이렇게 곱게 누워 있다는 건 다들 무사하다는 뜻이겠지?’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기억을 떠올린 이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에 자신이 들은 목소리의 주인은 분명 이현이었다.
‘나 오빠 앞에서 쓰러졌나 본데.’
어쩌지, 오빠 심장마비 오지 않았을까.
꾸물꾸물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오빠가 곁에 있을 줄 알았는데 없는 것을 보면 자리를 비운 모양이었다.
‘누워 있을 땐 괜찮은 것 같았는데.’
역시 후유증이 있는지 몸에 기운이 없어 침상에서 내려오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어느새 해가 진 건지 객실 안은 어두웠지만 물을 찾아 일어난 이린은 탁자 앞에 누군가 앉아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오빠…?’
잠들어 있는지 고른 숨소리만 들려왔는데, 탁자에 기대 졸고 있는 뒷모습을 보니 걸치고 있는 옷이 눈에 익었다. 틀림없이 오빠였다.
이린은 오빠가 얼마나 걱정했을지 모를 수가 없어 섣불리 말을 걸지 못했다.
‘어쩌지, 오빠 진짜 화났을 텐데.’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하던 이린은 문득, 예전에 진사린이 보냈던 서신의 내용을 떠올렸다.
애교로 넘길 수 있는 일인가는 둘째치고, 어릴 적에도 스스로를 린린이라 칭하며 그런 애교를 부려 본 기억이 없는 이린의 내면에서 깊은 갈등이 시작됐다.
그리고 금방 끝났다.
대신 마음의 준비에 시간이 걸렸을 뿐.
‘나는 열일곱, 나는 열일곱, 나는 열일곱, 나는 열일곱, 나는 열일곱….’
열일곱에 하면 안 민망한 애교인지는 제쳐 두고. 자기암시를 반복하던 이린은 이현이 잠에서 깬 듯 움직이기 시작하자, 눈을 질끈 감고 뒤로 다가가 이현의 목을 끌어안았다.
“미안해, 오라버니! 린린이 잘못했어!!”
“!?”
“걱정 많이 했지? 오…빠?”
이상하게 굳어 있는 이현의 반응에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지만 그보다도 몸에서 풍겨 오는 약초 냄새에 놀란 이린이 슬쩍 팔을 풀었을 때였다.
끼익!
“청휘, 너 다쳤다…며……?”
갑작스레 문이 열리고 들어온 남궁수연은 예상치 못한 풍경에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방해해서 미안? 근데 둘이 언제부터 그런 사이가 됐어?”
“?”
남궁수연의 이상한 반응에 몸을 뗀 이린은 자신이 안고 있던 이의 얼굴을 확인했다.
이린이 이현이라 생각했던 이는 오라버니가 아닌,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의 남궁청휘였다.
순간 머리가 띵- 울려 이린은 저도 모르게 있는 힘껏 남궁청휘의 어깨를 확 밀쳐 버렸다.
“으앗…!”
혈교 장로의 팔을 벤 역전의 용사도 여인에게 면역 없는 순진한 소년에 불과했다.
쿵, 쿵, 쾅!
남궁청휘와, 앉아 있던 의자와, 기대고 있던 탁자가 연이어 쓰러지며 요란한 소릴 냈다.
다친 곳을 부딪친 건지 어깨를 감싸고 일어나지 못하는 남궁청휘를 본 남궁수연이 난감한 얼굴로 머릴 긁적였다.
“음, 이린. 쟤 다쳤는데 그렇게 밀치면….”
“어?”
수연의 말에 놀란 이린이 바닥에 맥없이 엎어져 있는 남궁청휘에게 다가갔다.
“다치셨어요?! 괜찮으세요?”
“괜, 괜찮습니다.”
아직도 얼굴이 붉은 청휘가 이린의 손이 어깨에 닿자 지레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덕분에 걸치고 있던 이현의 장포가 떨어지며 어깨와 팔에 칭칭 감아 놓은 붕대가 드러났다. 넘어지며 상처가 벌어졌는지 붉게 피가 번지고 있었다.
“상처 벌어진 거 같은데? 의원 불러올게.”
황급히 방문을 나서는 수연은 걱정스러운 목소리와는 달리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그리고 원인 제공자인 이린은 울상이 돼서 남궁청휘를 부축했다.
“정말 죄송해요.”
“아니, 저기, 제가 조심성 없이 연소저의 방에서 잠이 든 탓이니.”
말이야 바른 말로, 오빠인 연이현 외의 다른 사내가 자신이 자고 있는 방에서 마음 편히 졸고 있을 거란 생각을 못한 것은 이린의 탓이 아니었다.
“열이 있으신 것 같은데, 빨리 침대에 누워 쉬시는 게 좋겠어요.”
“아니, 아닙니다.”
이린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상처 부위를 살피느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는 듯했지만, 현재 청휘는 위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반라 상태였다. 게다가 이린의 손이 어깨 위에 얹어져 있는 지금 청휘는 온몸에 열이 올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연 소저의 자세가, 마치, 저를 덮치고 있는 것 같은데요.
…라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는 남궁청휘가 입을 꾹 다문 채 애써 시선만 피하는데 이린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때문에 다치신 건데. 미안해요.”
당시 이린은 독 때문에 의식을 잃은 상태였으니 남궁청휘가 왜 다쳤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 모든 일의 원흉이 자신이라는 사실은 틀림없었다.
급격히 어두워지는 이린의 낯빛을 본 남궁청휘가 어깨 위에 올라와 있던 손을 붙잡으며 달랬다.
“아닙니다. 이건 그저 제가 아직 부족해서 당한 부상이지, 연 소저와는 아무 상관없으니 심려하지 마십시오. 무엇보다 소저께서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남궁 공자.”
남궁청휘가 부상자 특유의 처연한 분위기와 타고난 미모로 한창 이린을 현혹하고 있을 때였다.
끼익-
“남궁 공자, 상처 벌어졌… 어머나, 실례.”
남궁수연과 만나 상처를 살피러 왔던 당자혜는 묘한 자세의 두 사람과 눈이 마주치자 빠르게 다시 문을 닫고 사라졌다.
“자, 잠시만요. 당 소저!”
“왜… 헉, 죄송해요!”
당자혜가 빠르게 사라지는 모습에 어리둥절해하던 이린은 뒤늦게 남궁청휘의 몸에 눈이 갔다. 그제야 자신이 반라의 남궁청휘와 오묘한 분위기를 연출 중이란 사실을 깨달은 이린이 허둥지둥 당자혜를 따라 나갔다.
문밖으로 나서자 휘청거리는 이린을 본 당자혜와 남궁수연이 서둘러 부축했다.
“괜찮아요? 벌써 그렇게 움직이면 안 돼요.”
“괜찮… 아, 방금 전 일은 오해예요. 상처를 보고 있었을 뿐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이린의 얼굴도 붉어져 있었지만 부상자를 놀리기도 뭣해서 당자혜와 남궁수연은 말없이 시선만 교환했다.
“린아? 벌써 일어났어?”
“아, 오빠!”
마침 이현이 돌아오자 이린이 반사적으로 쪼르르 달려가 오빠 품에 안겼다.
“일어나도 괜찮아? 어디 안 좋은 곳은 없고?”
“괜찮아. 미안, 오빠. 걱정했지.”
“걱정했지, 그럼.”
갑작스럽게 형성된 둘만의 세계에, 이현과 함께 돌아온 남궁청운이 떫은 표정으로 오누이를 빙 둘러 피해 방 앞으로 다가갔다.
“너흰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어어, 청휘 상처가 벌어진 것 같은데 옷을 제대로 안 입고 있어서.”
“아. 그 녀석 짐 너희가 갖고 있던가. 지금 저 녀석 옷 빌려서 걸치고 있으니 옷이 없지는 않을 텐데?”
“아.”
연이현을 가리킨 남궁청운의 말을 듣고, 찰싹 달라붙어 있는 연씨 오누이를 본 두 사람은 아까 그 광경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사정을 알 바 아닌 남궁청운은 다정한 남매의 모습에 빽 소리를 질렀다.
“어이, 거기. 복도에서 그러고 있지 말고 방 안에서 해. 안에서!”
분명 청휘를 살피러 왔는데 얼떨결에 이린을 재진맥하게 된 당자혜에게 확실히 괜찮다는 말을 들은 이현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오빠한테 거짓말하고 위험한 곳에 가고.”
“위험한 곳에 가려 한 건 아닌데….”
이린이 오빠의 눈치를 살피며 작게 항변했지만 이현의 눈빛이 사나웠다.
“차라리 오빠랑 다 같이 갔으면 이렇게 위험한 일을 당하지는 않았을 거 아냐.”
“잘못했어요.”
훈계를 이어 가는 목소리가 점차 젖어 들더니 결국 이현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과연 미인의 눈물은 흉기와 같아, 보고 있던 이들마저 지은 죄 없이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앉았다.
“오빠는 린아에게 그렇게 의지가 안 되는 거니?”
“아니야, 오빠!”
“린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아버지와 오빠가 어떻게 살겠어?”
“잘못했어, 오빠. 다신 안 그럴게, 응? 울지 마.”
결국 남매간의 아름다운 우애를 견디지 못한 이들은 앞다퉈 방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마침 복도에는 애들을 데리고 온 백리한과 청운진인, 심여준이 난처한 얼굴로 서 있었다.
도착한 지는 좀 됐지만 이린이 있는 방이라 일단 남궁수연만 먼저 올려 보내고 자세한 설명을 듣고 오는 길이었다.
남궁청운은 살았다는 듯 애들은 각자 방으로 보내고, 세 사람을 붙들고 내려와 자신의 상식에 대해 재확인했다.
“저게 혼내는 거냐?”
“남의 집 훈육에 대해 다른 사람이 어찌 참견을 하겠습니까.”
“저것도 일종의 미인계죠.”
웃으며 대답을 회피하는 청운진인과 달리, 백리한은 어이없어하며 혀를 찼다.
“백리세가는 저렇지 않은가 보군요.”
“내 여동생은 내가 울면 와서 구경 좀 하라고 동네 사람을 다 불러올걸.”
“미인계가 안 통하니 어쩔 수 없겠군요.”
“우엑? 소름 끼치는 소릴!”
본인이 말해 놓고는 괴로워하는 백리한을 보며 다들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게다가 원래 연이현은 좀, 잘 울어요.”
“잘 울어? 사내놈이?”
“그냥 좀, 몇 번 본 거 같은데. 그렇게 드문 일도 아니고. 뭐, 여자들은 좋아하더라고요.”
“그게 왜 좋은데?”
납득이 안 간다는 얼굴의 남궁청운을 보며 백리한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잘생겼음 뭔들.”
“하긴. 못생긴 놈이 찔찔 짜면 죽이고 싶었겠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는 청운진인이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것을 본 심여준은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사실 연이현이 우는 거야 아무래도 좋은 남궁청운은 다른 의미에서 불안한 마음을 토로했다.
“그런데 연이현 놀라서 이대로 동생 데리고 돌아가겠다고 하는 거 아냐?”
“글쎄요.”
불안해하는 남궁청운의 말에 다들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