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168
168.
포박을 푸는 동안 다가오는 수부들을 견제하던 홍유가 그 말에 고개를 돌렸다.
“유나와 백리 사매가?!”
“죄송, 해요, 사저….”
아직 약효가 남았는지 발음이 온전치 않은 은홍이 휘청휘청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침입자들이 설마 납치해 온 여인들을 구하러 온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당황한 눈치였다.
“남궁 소저, 움직일 수 있겠어요?”
“완벽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는요.”
배 안에서 제 검을 찾아든 남궁수연이 이를 악물고 검을 뽑았다. 납치된 이들 중에선 가장 연장자이기도 했고, 가장 실력이 뛰어난 남궁수연은 자신이 도적들에게 납치당했다는 치욕스러운 사실에 분노한 상태였다. 경지가 높은 만큼 회복도 빨랐던 수연은 분노로 붉어진 얼굴로 검을 들었다.
반면에 은홍은 아직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렸기에 홍유는 재빨리 사매를 부축해 갑판 위로 올라가려 했다.
“사, 살려 주세요!!”
“?!”
일행이 떠나려 하자 노를 붙잡고 움직이지 않던 수부들 중 여럿이 다급하게 외쳤다. 왜어(倭語)가 아니었다.
“저희들도 끌려와 강제로… 악!”
말은 알아듣지 못해도 뭔가 이상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홍유를 경계하던 수부들이 중원말을 하는 사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몇몇 사내들의 발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쯧.”
혀를 차며 당자혜가 왜어를 하며 달려드는 이들에게만 우선 비도를 던져 제압하고, 홍유는 은홍을 데리고 수연과 함께 먼저 갑판 위로 올라갔다.
배 위는 난장판이었지만 어느 정도 수습은 된 상태였다.
그리고 어느새, 날이 저물어 하늘에는 흐릿하게 별이 빛나고 있었다.
“다들 무사한가요?”
이린은 이제 몇 남지 않은 해적들을 처리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직 세 사람이 저 배에 있어요.”
“그런!”
처음 일행이 배에 뛰어들어 해적과 싸울 때, 도우려는 듯 가까이 다가오던 다른 배 하나가 서둘러 멀어지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가까이에서 보니 동료들이 지고 있어 얽히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여기 있는 놈들은 우리가 납치된 사람들을 구하러 왔다는 걸 몰랐지만 저쪽은 눈치챘을지도 몰라요.”
인질로 협박하면 구해 내기는커녕 도리어 붙잡힐 수도 있었다.
지금 이 배에 타고 있던 이들만도 족히 50여 명은 되어 보였는데, 엇비슷한 크기의 배이니 분명 비슷한 숫자가 타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아니, 어찌 보면 저쪽이 더 큰 것도 같았다.
게다가 남궁수연과 은홍은 아직 저들이 먹인 약효가 남아 있어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니 엄연히 따지면 전력 외였다.
‘하지만 지금 놓칠 순 없어.’
사린도 백리설도, 이대로 끌려가게 놔둘 순 없었다.
상대편 배와의 거리를 가늠한 이린이 뱃전을 박차고 뛰어들려는 순간, 홍유가 갑판에 있던 갈고리 달린 밧줄을 집어 들었다.
“저는 저 배를 쫓겠어요. 어서 두 사람을 데리고 돌아가서 검각과 일행한테 전해 주세요.”
“홍 소저?!”
문답무용. 해적들이 선상(船上) 백병전(白兵戰)을 위해 사용했던 갈고리들은 멀어지는 해적선에 걸렸다. 해적선이 마침 밧줄에 걸린 배의 무게에 걸려 살짝 기우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홍유가 밧줄 위로 날아올랐다. 손에는 아직 죽지 않은 해적 하나가 들려 있었다.
홍유가 무엇을 하려는지 깨달은 이린이 마찬가지로 뒤를 따랐다. 곡예 하듯 배와 배 사이를 잇는 밧줄을 디디고 달려가는 모습에는 거침이 없었다.
“자혜 언니, 뒤를 부탁해요!”
“이린!”
남궁수연과 은홍의 상태를 돌보던 자혜가 당황해 이린을 불렀지만 이린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뒤로 유영 역시 움직였다.
“당신도 따라갈 건가요?”
“…네.”
자신을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당자혜가 말을 걸자 순간 움찔한 유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혜는 품 안에서 작은 약병 하나를 꺼내 유영에게 던졌다.
“이걸 이린에게 전해 줘요. 만리추종향이에요!”
“알겠습니다.”
“내가 찾아갈 때까지 무사하지 않으면 가만 안 둘 거예요!!”
무표정하던 유영의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떠오른 것 같았지만 세 사람의 모습은 어둠 속에서 순식간에 멀어져 버렸기에, 따라갈 수 없는 당자혜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몸을 일으켰다.
“아래쪽에 있는 수부들은 어떻게 하죠?”
남궁수연의 말에 당자혜가 다른 사람은 들을 수 없게 전음으로 전했다.
-족쇄가 있긴 하지만 저들이 정말 왜구인지 아닌지 우리가 판단할 순 없어요. 행색도 똑같은데 우리말을 한다고 믿을 수 있겠어요? 왜구들과 뒤섞여 있으니 일단 여기 두고 사람을 부르죠. 어차피 저 족쇄는 우리가 못 풀어요.
그 말과 함께 당자혜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불을 붙이고 하갑판에 넣은 후 통로를 닫았다.
“뭐, 뭔가요?”
“수면향이요. 하갑판은 공기가 안 통하는 곳도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파도가… 이 이상 거칠어지지만 않는다면요.”
당황한 은홍에게 적당히 설명한 당자혜는 오들오들 떨고 있는 여인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기본적으로 무공을 익힌 수연과 은홍이라면 몰라도 저 여인들은 아무리 봐도 민간인이었다. 게다가 파도가 이렇게 거친데 배 위에 두고 갈 수도 없었다.
“어휴.”
빨리 돌아가서 알려야 하는데, 이 사람들을 두고 갈 수도 없으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서 돌아가죠!”
“…네.”
남궁수연은 원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과 함께하기는커녕 짐이 되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당자혜는 민간인들로 보이는 여인들을 한 명씩 부축해 뛰어들었던 길 그대로 배를 빠져나왔다.
* * *
모처럼 일행의 여성진들이 모두 빠지자 일행이 향한 곳은 당연히 주루였다.
사린의 보좌들은 지쳐서 먼저 들어가고 호위 몇 명만 함께했다.
“없으면 없는 대로 편하긴 하지.”
모처럼 여동생이 사라지자 마음 편히 술을 마시고 있는 백리한과 달리 연이현은 안절부절 불안해하며 술을 홀짝였다.
“무슨 술을 그렇게 맛없게 마셔?”
“정말 괜찮겠지?”
“이 근방에서 검각의 제자들이 늘 들렀다 가는 곳이야. 게다가 당 소저와 남궁 소저, 네 동생은 그렇게 약하지도 않다고.”
백리한의 말에도 이현은 한숨을 내쉬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지난번에 사고가 있긴 했지만, 그때도 잘 도망쳤을 정도잖아? 네가 그렇게 걱정할 정도로 네 동생이 그렇게 연약하진 않다고. 걱정 좀 어지간히 하지 그래? 그것도 정상은 아니다, 너?”
“맞는 말이야. 자, 마셔 마셔.”
남궁청운과 이현의 벗들은 이현을 둘러싸고 강제로 술을 먹이기 시작했다. 다른 자리에 앉아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는 힘없는 소년들은 그저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다.
이런 문화에 대해 처음 접한 곽천영 역시 그저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근데 너 그것도 의존증이다? 동생 시집가고 나면 어떡하게?”
“시집… 그 아이가 혼인하고, 내가 필요 없어지면 어떻게 하지.”
“뭐래.”
이 자식 돈 거 아냐?
이현의 우울한 목소리에 어처구니없다는 듯 얼굴을 구기는 심여준을 보며 술을 들이켜던 백리한이 키득거렸다.
“나 전에 다른 데서 이런 비슷한 말 들어 봤어.”
“오? 어디서?”
“동네 아주머니 중에… 혼자 몸으로 딸만 넷인가 다섯인가 건사하시던 분이 막내까지 모두 시집보내고 이러시더라.”
“뭐야, 그거. 그래서 그 아주머니는 어떻게 되셨는데?”
“주위에서 걱정했는데 따님 중 하나가 남편이 개차반이라 아이 데리고 돌아오니까 오히려 팔팔해져서 쫓아온 사위를 몽둥이 찜질해서 내쫓으셨다지. 손자 데리고 잘살고 계셔.”
“그럼 결국 답은 데릴사위인가.”
묘한 결론을 내린 아저씨들의 시선이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는 남궁청휘와 곽천영에게로 향했다.
“그렇다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두 분?”
“…….”
“…….”
남궁청휘와 곽천영을 향한 제갈수원의 놀림 섞인 질문에 두 사람은 침묵했다.
“아, 하긴 아직 혼인을 얘기하기엔 좀 이르네요.”
이어지는 침묵에 지친 제갈수원이 황보산에게 다른 말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사실 이쪽도 약혼녀와 의사소통이 전혀 되고 있지 않은 상황이라 혼인 얘기는 술자리 화제치고 너무 무거웠다.
곽천영의 일행들도 어딘지 안절부절못하고 있어 제갈수원은 내심 혀를 찼다.
-언제까지 이 일행과 함께하실 생각이십니까?
-왜, 불만이야?
-저희가 어찌 감히….
-어차피 짧은 유희인데 뭐가 그렇게 문제야?
수하의 걱정 어린 얼굴에 천영은 보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주변에 온통 칙칙한 사내놈들뿐이라 그런가 술맛도 떨어졌다. 그렇다고 여자를 부르는 것도 내키진 않았다.
“뭐야, 너희는 여기까지 와서 바다도 안 보고 돌아가고 싶은가 보지?”
“그건 아닙니다.”
천영의 말에 같은 자리에 있던 청휘와 수원, 황보산의 시선도 그들에게 향했다.
“어차피 돌아가서도 스승님과 단둘이 얼굴 마주해야 하는데 너희라면 재밌겠냐?”
“송구합니다. 그런데 유영은 왜 연 소저에게 붙이신 겁니까?”
“재밌잖아? 이린은 유영을 맘에 들어 하고, 유영이 그런 이린 때문에 당황하는 것도 신선하고.”
“…혹시 정말 데려가고 싶으십니까?”
“글쎄, 가자고 한다고 따라올 거 같지는 않은데.”
“…….”
자신의 말에 침묵하는 수하를 보며 곽천영이 웃었다.
“이래서 노총각 말은 믿을 게 못 된다니까. 스승님 말대로 해 봤는데 미동도 안 하잖아?”
“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너는 일단 얼굴로 밀어붙이면 순진한 소저들은 금방 넘어올 테니 맘에 드는 아가씨가 생기면 적당히 성격 죽이고 돈과 얼굴로 꼬셔라. 세상 경험 좀 있는 아가씨들은 쉽지 않겠지만’이라고. 그런데 아무래도 영 쓸모없는 조언이었잖아?”
“푸훗.”
곽천영의 말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아무래도 천영의 스승은 제자를 몹시 잘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연 소저의 오라버니가 호남제일미남자인걸요. 그럴 만하지요.”
“하.”
제갈수원의 말에 곽천영이 허탈한 듯 웃었다.
이린의 알맹이가 꽤 연상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연이현은 대공자의 얼굴에 익숙한 이들조차 내심 감탄할 정도의 미모였으니 그 여동생이 천영의 얼굴에 무심한 것도 납득이 갔다.
사실 분위기가 달라서 그렇지 남궁청운이나 남궁청휘, 백리한, 청운진인 등도 다들 미남이었으니 그 사이에 끼어 있던 이린의 눈이 하늘에 달렸다 한들 이상할 건 없었다.
“보통은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좋다고 난리던데 역시 눈이 높은가.”
“…….”
뭐라 대답할 말이 없는 수하들은 묵묵히 말을 아꼈다. 이 구역의 정상인을 맡고 있는 유영이 없는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침묵뿐이었다.
묘하게 겹쳐진 침묵의 시점에, 객잔 안까지 괜히 조용해졌을 무렵이었다. 과격하게 객잔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나타났다.
쾅!!
모두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린 곳에는 여인 한 명을 부축한 당자혜가 서 있었다.
“큰일 났어요!”
“당 소저? 왜 이 시각에….”
“백리 소저와 진 소저가 납치당해서, 이린과 유 소저가 뒤를 쫓고 있어요!”
끼긱- 끽-
당자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한가로이 술판을 벌이고 있던 사내들이 놀라 몸을 일으켰다.
“뭐, 그럼 수연은?!”
“저는 무사해요, 운 오라버니.”
남궁청운의 말에 대답하며 뭔가 짐 덩이 같은 것을 질질 끌고 온 수연이 뒤이어 객잔 안으로 들어섰다.
안색이 좋지 않은 수연을 보고 남궁청휘와 청운이 달려가 부축하자 그제야 안심했는지 수연은 몸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설명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어서 태주(台州)로 가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