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251
외전 1화
그 사람을 처음 만난 건 아버지가 혼례를 올린 다음 날이었다.
정작 혼례 당일은 찾아온 사람이 너무 많았던 데다가, 다들 은연중에 자신과 형제들이 새 신부 근처를 알짱거리는 걸 꺼렸기에 그저 먼발치에서 바라본 것이 전부였다. 그나마도 붉은 천으로 얼굴까지 가리고 있어 어떻게 생겼는지도 보지 못했다.
[잘 부탁해요. 셋째 아드님.]제갈세가에서 왔다는 젊은 새어머니는 몸을 숙여 어린아이의 시선에 맞춰 인사를 건넸다.
미인이라고 쑥덕대는 소리는 여기저기서 들었지만 정말, 태어나 처음 보는 미인이어서 남궁청운은 새어머니를 무시하라던 형들의 당부도 잊은 채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은 뭐가 그리 기쁜지 환하게 웃었고, 남궁청운은 그 후에 형들에게 끌려가서 부당하게 두들겨 맞아야 했다.
[그럼 이렇게 찾아오면 또 혼나지 않겠어요?] [그런 것에 굴하면 사나이가 아니지.]내가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가슴을 두드리며 당당하게 말하는 소년을 마주한 여인은 소년이 오기 전 엿본 흐린 얼굴이 제 착각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여기저기서 아버지의 후처로 들어온 여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여러 가지 말을 늘어놓았지만, 남궁청운은 그리 귀담아듣지 않았다.
사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벌써 10년도 넘었으니.
그 정도 혼자 지냈으면 새 부인을 들일 만도 하지 않은가?
어차피 내가 고수가 아닌 여인과 혼인하면 부인이 더 일찍 죽을 텐데 당연히 재혼해야지.
평생 혼자 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나는 나중에 절대로 독수공방은 안 할 거다.
아버지의 혼인 소식에 부정적인 반응인 형들에게 당당하게 그리 말한 남궁청운은 어린놈이 발랑 까졌다고 두들겨 맞았다.
사실 친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선명히 남아 있는 형들과는 달리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흐릿했던 어린 남궁청운에게 새어머니라는 젊은 여인은 그저 호기심의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남궁청운의 귀에 들어오는 온갖 부정적인 말들을 온전히 믿기엔 이 새어머니는 너무 다정했으며…… 언제나 혼자였다.
[보통은 친한 몸종이라도 데려올 텐데. 친구도 없나 봐.] [어머나, 그러게요.]당시 자신은 그런 막말을 상대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는 철없는 아이였고, 여인은 그런 말도 재밌는지 차와 다과를 대접하며 피식피식 웃었다.
게다가 언제나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 제갈윤정이 활짝 웃는 것은 자신과 있을 때뿐이어서, 남궁청운은 시간이 날 때면 몰래 여인을 찾아 다과를 얻어먹곤 했다.
[하지만 역시 형님들에게 혼나면 안 되니까 무리해서 자주 찾아오진 말아요.] [내가 찾아오는 게 싫어?] [그럴 리가요.]형들이 아무리 혼을 내도 굴하지 않는, 부루퉁한 얼굴을 한 소년의 옷매무새를 만져 주던 여인은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는 비밀을 하나 가르쳐 주었다.
형들과 꽤 나이 차이가 있던 막내 남궁청운은 동생이 생긴다는 말에 뛸 듯이 기뻐했다. 아니, 실제로 폴짝거리며 뛰어다니다 물건을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기뻐요?] [엄청!!] [고마워요.]뭐가 고마운지는 몰라도, 남궁청운은 자신에게만 중요한 비밀을 알려 준 제갈윤정에게 약속했다.
[동생이 태어나면 내가 지켜 줄게!] [후후. 셋째 아드님만 믿을게요.]동생을 지켜 주겠다는 말에 큰 의미는 없었다.
그저 어린 아기는 약하다는 것 정도야 알고 있었으니 나온 말이었을 뿐.
아마 제갈윤정 역시 어린아이의 말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으리라.
[내 동생은 분명 남자아이였던 거 같은데 왜 여아 옷을 입었어요?] [귀엽지 않아?] [귀엽긴 합니다만…….]제갈윤정을 닮아 귀여운 얼굴의 아기는 머리를 양 갈래로 묶어 구슬 장식을 달고 있어 아장아장 걸을 때마다 차르륵 구슬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것뿐만 아니라 입고 있는 옷까지 누가 봐도 여아의 옷이라 남궁청운은 복잡한 기분으로 동생을 안아 들었다.
[꼬마야. 내가 네 형이란다. 이제 슬슬 형아 정도는 불러야지?] [흐아?] [그래, 형아.]동생이 태어나고, 제 발로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자라는 동안 남궁청운 역시 성장했고, 이 모자(母子)가 세가 내에서 어떤 처지인지 자연히 깨달을 수밖에 없는 나이가 되었으니까.
[휘야. 네가 조금 더 크면 이 형님이 큰형들 몰래 세가 밖으로 데리고 나가 주마.] [응. 형아.]무공을 익히느라 전처럼 자주 찾지는 못해도 종종 찾아와 놀아 주는 형을 남궁청휘도 제법 잘 따랐다.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모자를 찾는 날이 줄어들면서 사이도 다소 소원해졌지만.
‘아마 기억도 못 할 테지.’
하지만 자신은 기억하고 있었다. 남궁청휘가 젖먹이 아가였을 때부터 지금까지.
마지막으로 본 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젠 어릴 적의 그 귀엽고 깜찍하던 동생 대신 시꺼먼 사내놈만 남았지만 그래도 동생은 동생이었다. 형님들과 마찬가지로, 어느 쪽도 죽지 않기를 바랐다.
‘나를 원망하려나. 아니, 감사해야지.’
제 어머니를 살리고 사지(死地)로 떨어진 형님의 마지막 청이니 아마 큰형과 작은형은 무사할 것이다.
애초에 그리 모진 놈이 되지도 못하니.
그리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지며 물속에 잠겨 있는 것처럼 묵직하게 느껴지던 눈꺼풀이 스르륵 들어 올려졌다.
“으……?”
눈을 두어 번 깜박이자 흐릿하던 시야가 선명해지며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뭐야, 이 낡은 집은?’
처음 떠오른 생각은 몹시 1차원적이었다.
멍하니 빈궁함이 묻어나는 천장의 작은 집을 바라보던 남궁청운은 몸이 천근만근 무겁다는 사실과 함께 자신이 방금 전까지 의식을 잃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시에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도.
‘……여긴 어디지?’
분명 제갈윤정을 구하고 절벽에 떨어진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이후의 기억이 없었다.
멍하니 눈만 깜박이는데 작은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아저씨 눈 떴다.”
“??”
“할아버지, 할머니! 아저씨 깨어났어요!”
고개를 돌릴 기운도 없어 눈동자만 움직여 소리가 난 방향을 좇자 자신을 보며 눈을 깜박거리다가 뛰쳐나가는 어린아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누구지?’
아는 얼굴인가 싶어 기억을 더듬어 보았으나 원래 아이들과는 그리 인연이 없다 보니 떠오르는 바는 없었다. 자신이 알 만한 남궁세가 쪽 아이들이 이런 허름한 곳에 있을 리는 없고.
“깨어났소?”
얼마 후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낯선 노부부였다. 아이는 할아버지 뒤에 숨어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무공을 모르는 일반인이군.’
굽어 있는 허리와 주름진 피부, 거친 말씨. 어딜 보아도 평범한 산골의 노부부였다.
“정신이 드시오?”
“……그렇소.”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목소리에 미간을 찌푸리자 노파가 능숙하게 수저로 입가에 물을 흘려 넣어 주었다. 익숙한 자세를 보아하니 자신이 꽤나 오랜 시간 보살핌을 받은 모양이었다.
“구명지은(救命之恩)을 입었습니다.”
“구명지은은 무슨, 우리도 부탁받고 한 일이니 나중에 그 사람에게 제대로 인사하시우.”
“네?”
“치료비와 약값을 대신 지불해 주신 분이 계시거든.”
아니었음 이런 늙은이들이 이렇게 병수발까지 들었겠냐며 노인은 혀를 찼다.
“그게…… 대체 누굽니까?”
“있소. 그런 맘 좋은 사람이. 참, 돈도 안 되는 일에 이리 인심을 쓰는데 왜…… 아니, 나중에 찾아올 테니 자세한 얘기는 그때 듣든가.”
제대로 답해 줄 마음이 없어 보여 남궁청운은 다른 것을 물었다. 노부부는 누구고, 여기는 어디인지. 자신은 지금 어떤 상태인지 등.
그 질문에 답을 해 주는 것은 불퉁한 태도의 노인 대신 그 부인이었다.
부부는 약초꾼으로 이 산에서 약초를 캐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지명을 들은 남궁청운은 내심 안도했다.
‘이런, 생각보다 꽤 멀리까지 떠내려왔군.’
그때 절벽에서 떨어졌던 걸 생각하면 그래도 그럭저럭 납득할 수 있는 위치였다.
“참, 혹 연락을 전해야 할 분이 계신가?”
노파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지만 제 처지를 떠올리곤 곧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딱 봐도 사연이 있어 보이는 얼굴에 노부부는 작게 한숨을 쉬며 그를 위로했다.
“곧 약값을 대 준 이가 데리러 올 테니 염려 마시고 쉬시오. 효아, 방해하지 말고 나오렴.”
“네에.”
“고맙소.”
노부부가 아이를 데리고 나가고, 혼자 남은 남궁청운은 한숨을 내쉬며 제 지나온 인생을 반추했다.
“딱히 잘못 살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만…….”
이런 때에 맘 편히 부를 수 있는 이가 하나 없다니 이거야말로 인생을 헛살았다는 소릴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믿을 사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절벽에서 떨어진 이후 남궁세가가 어찌되었는지 알 수 없으니 누굴 부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도 이리 살아남은 것을 보면 하늘이 무심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어쩌면 내가 이대로 사라지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지.’
아버지와 남궁청휘가 함께 있었고, 인질로 잡힌 제갈윤정이 무사하니 명분도 부족한 형들이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형들이 죽지는 않더라도 처벌은 피할 수 없겠지만, 자신이 있다면 어찌 대해야 할지 난처해할 것이다. 냉혈한 아버지 말고, 동생이.
그렇게 생각하며 남궁청운은 다시 눈을 감았다.
* * *
“워낙에 강골이니 망정이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벌써 황천길 갔을 사람인데, 벌써 일어나지 말고 좀 더 누워 있게.”
바깥일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약초를 손질하던 노인은 수상한 기색을 눈치챘는지 자기는 여기 처박혀서 바깥일은 잘 모른다고 둘러댔다. 덕분에 아직 제대로 운신할 수 없는 남궁청운은 답답할 따름이었다.
“아저씨, 아저씨, 효아랑 놀아요.”
“모르는 사람한테 놀아 달라고 하는 거 아니란다. 꼬마 아가씨.”
머리를 양 갈래로 묶은 꼬마 아가씨는 남궁청운이 마음에 들었는지 눈을 뜬 그날부터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훗, 애들도 보는 눈이 있는 거지.’
딱히 아이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이제 겨우 지팡이에 기대 비틀거리며 걸어 다닐 수 있게 된 환자 입장에서 주변을 알짱거리는 어린아이의 존재는 영 불안했다.
“쯧쯧, 효아! 이리 오지 못해?!”
“싫어요. 아저씨랑 놀래요!”
이곳에서 신세 진 지 여러 날이 지났으나 아이의 부모가 보이지 않는 걸 봐선 아이는 조부모와 지내는 모양이었다. 늘 바쁜 할머니 할아버지와 지내다 말 잘하는 젊은 청년이 나타났으니 아이가 달라붙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본인도 심심한 처지라 아이의 종알거림이 싫지 않은 남궁청운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누워 있으려니 좀이 쑤셔서. 약초꾼이라더니 꽤 귀한 약초들도 보이는데 어디에 팔고 있소?”
“뭐, 거래하는 상단이 있소.”
“상단이라. 흐음, 여기는 호남이니…… 혹시 남궁세가라든가?”
남궁세가라는 말에 약초를 다듬던 손을 잠시 멈춘 노인의 시선이 남궁청운을 향했다.
“혹 남궁세가와…… 아는 사이시오?”
방금 전까지 명백하게 귀찮아하던 노인의 수상쩍은 기색에 남궁청운은 말을 돌렸다.
“워낙에 유명한 집안 아니오? 건너 건너 아는 사람 성씨가 남궁씨이긴 하니 아는 사이라면 아는 사이지만.”
“……그렇소?”
두 사람 사이에 묘하게 어색한 공기가 흐르는 와중 종알거리는 어린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남궁세가? 효아 들어 본 적 있는데.”
“효아!!”
갑작스런 노성에 놀란 아이는 그대로 울음을 터트렸다.
“흐아앙!!”
“아니, 왜 아이를 울리고 그러시오? 효아, 울지 마라.”
“……우리 같은 촌부들이 그런 대단한 곳과 무슨 연이 있겠소?”
노인은 제 손녀를 달래지도 않고 그 말만 내뱉은 채 입을 꾹 다물었다.
‘이건 또 뭐야.’
아무리 부상을 입어 제 상태가 아니라 해도 알 수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노인은 분명 남궁세가라는 이름에 미세한 살기를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