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s First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100
천하제일 시한부 (100)
“백귀가…… 당신 손녀딸이라고?”
난 믿을 수 없었다.
“음, 아무튼 저 초상을 보고 말하는 거라면…… 맞네.”
장로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가? 같이해 볼 텐가? 뭐…… 거절해도 상관은 없네.”
“…….”
솔깃한 제안이다.
하오문.
그들은 개방과 같으면서 다르다.
개방처럼 정보를 다루지만 보다 음습한 단체다.
개방은 서로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
하지만 하오문은 그런 것 자체가 일절 없다.
그저 지나가는 행인부터 해서 기생, 점소이, 숙수 등등 너나없이 모두가 원한다면 언제든 하오문도가 되어 정보를 판다.
그런 만큼 하오문이 취급하는 정보는 엄청나게 방대했다.
“싸움에서 정보의 선점은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데 엄청난 도움이 되지.”
장로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하는 부분이다.
“생각이 필요한가?”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매우 솔깃한 제안이긴 하군. 하지만…….”
난 장로를 바라보며 솔직한 감상을 내뱉었다.
“믿을 수가 없어.”
“허허.”
내 말에 장로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지. 본디 이 무림이란 것이 가족조차 쉽게 믿을 수 없게끔 만드는 곳이니까.”
장로는 말과 함께, 내게 뭔가를 툭 던져 주었다.
“변천맥에 대한 조사 자료일세. 우리가 어떻게 그들의 흔적을 잡았고, 또 어떻게 그들을 확정했는지.”
“…….”
난 장로가 건네준 서류 더미들을 받아 펼쳤다.
“이건 그냥 넘겨주겠네. 대가는 바라지 않아.”
“왜지?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가?”
“글세, 그냥…… 손녀를 찾고 싶은 이 할아비의 간절한 마음…… 그렇게 생각하게나.”
난 고개를 끄덕였다.
“좋군. 어쨌든 엄청난 도움이 됐어.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뜻밖의 정보를 얻었거든.”
“그런가? 다행이군.”
“하오문과 함께하는 건 조금 더 생각을 해 보지. 함부로 덥석 믿기에는…….”
“이해하네. 천천히 생각하게나.”
장로는 태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금 책에 시선을 던졌다.
난 그가 건네준 서류 더미들을 들고 그대로 책방을 나섰다.
* * *
서진이 나가고, 장로는 그 자세 그대로 책에 시선을 고정한 상태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장로는 이내 책을 덮고 가만히 책상 위에 있는 나무 조각상을 바라보았다.
손때가 잔뜩 묻은 오래된 조각상이었다.
장로는 그걸 조심히 잡아 갔다.
그의 손이 잘게 떨렸다.
“백귀라…….”
장로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그려졌다.
“살아는 있다는 말인가. 살아는 있다…….”
그가 조각상을 소중한 물건을 품듯, 가만히 품에 넣었다.
“시간이 가기 전에, 꼭 한번 만나야 할 텐데.”
그의 눈이 그리움으로 짙게 물들었다.
* * *
난 재빨리 천하상단으로 돌아왔다.
하오문에서 얻은 변천맥에 대한 정보들과 노진과 흑련주에게 시킨 일들을 대조해 보기 위함이었다.
덜컥!
상단은 조용했다.
서희가 돌아오지 않은 걸로 봐서는 성공적으로 천문길의 시선을 잡아 둔 듯했다.
내가 먼저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히 방문이 열렸다.
―주군.
들어선 이는 노진이었다.
―집무실은 깨끗합니다.
그렇다면 흑련주가 간 총관의 집무실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거기서 의뢰자를 특정하기만 한다면, 어느 정도 가닥이 나올 수도 있었다.
드르륵!
이내 문이 열리고 흑련주가 들어섰다.
그녀가 활짝 웃으며 품에서 서찰 한 장을 꺼내 흔들었다.
“찾았어요. 일주일 전에 의뢰를 넣었더라구요. 경덕진에서 맺은 가계약서입니다.”
난 흑련주가 건네는 서찰을 냉큼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차분히 위에서부터 읽어 내려갔다.
“역시.”
별다른 정보는 없었다.
“금화상단?”
다만 서찰의 맨 마지막 부분에는 금화상단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사실 천문길에게 물어보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긴 했다.
하지만 그리되면 천문길은 또 금화상단에 대해 조사를 해 볼 테고, 시간이 걸린다.
더군다나 주씨세가와 천하상단 간의 신뢰 문제도 걸려있다.
이렇게 비밀리에 움직이는 것이 나았다.
“금화상단이라…… 들어 본 적이 없어. 아마도 유령 상단이겠지.”
내 말에 흑련주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역시 처음 듣네요. 그동안 숱하게 많은 상단주들을 만나 봤어요…….”
“자, 일단 모여 봐.”
내 말에 모두가 머리를 맞댔다.
이러고 있으니 마치 무슨 음모를 꾸미는 것 같이 느껴졌다.
“넌 애들을 풀건 뭘 하건…… 금화상단을 추적한다.”
흑련주에게 지시했다.
흑련주는 재밌겠다는 듯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사실 당한 것이 많았기에 그녀는 칼을 갈고 있었다.
“그리고 노진 너는 서희를 더욱 잘 지켜 줘야 돼.”
변천맥.
그는 가장 먼저 서희를 인질로 잡았다.
내가 뭘 아끼는지 이미 파악이 끝난 상태라는 거다.
“그리고 더불어, 세가 내에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놈들이 있으면 다 잡아들여.”
사실 이 부분이 가장 걸렸다.
내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는 건 측근밖에는 없다.
초영을 비롯해서, 세가 내 무사들.
내가 움직였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주씨세가에 한정된다.
그렇다면 내부에 간자가 있을 확률이 높다는 말도 된다.
―알겠습니다.
노진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씨세가를 본격적으로 노린 거야. 난 그놈 말을 최대한 들어주는 척을 할 거다.”
어쩔 수 없다.
확실히 뒤를 잡기 위해서는 그들의 말을 착실히 들어줘야 했다.
“모쪼록 금화상단 뒤를 캐다가 나오는 이름은 모조리 명부에 올려서 가져와. 그건 내가 알아봐 줄 테니까.”
어쩔 수 없다.
하오문과 손을 잡는 수밖에.
만약 신분을 위조했다면, 하오문밖에는 물어볼 만한 곳이 없었으니까.
“지금 바로 출발할게요.”
몸이 근질거렸는지, 흑련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보통 때라면 쉬고 가라고 하고 싶었지만, 개인적으로 하루라도 더 빨리 찾아내고 싶었다.
‘사륭회다.’
본능적으로 그들이 주씨세가를 멸문시킨 장본인들이란 걸 깨달았으니까.
“신중히 접근해. 작은 것도 의심하고 파헤치고 그렇게 나온 결과만 내게 가져온다. 알겠나?”
“명심하죠.”
―명심하겠습니다.
노진과 흑련주의 대답을 끝으로 우리는 뿔뿔이 흩어졌다.
노진은 서희를 지근거리에서 호위하기로 했고, 흑련주는 곧장 금화상단의 뒤를 추적하기 위해 몸을 내뺐다.
“음?”
그러고 보니 이 자리에 한 명이 보이지 않았다.
난 서둘러 기감을 돋워, 북궁설의 위치를 잡아냈다.
그녀는 후원에 있었다.
“너 뭐 하냐?”
난 곧장 북궁설에게 달려갔다.
그녀는 멍하니 앉아,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하냐고.”
내 말을 듣지 못했는지,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재차 묻고 나서야, 북궁설이 날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 가신 일은 잘되신 건가요?”
“그럭저럭. 그보다 뭐 하냐니까.”
“그냥, 생각 좀 하고 있었어요.”
북궁설의 표정은 시무룩했다.
“뭐 때문에? 표정이 안 좋다.”
“음, 단주…… 아니. 오라버니.”
북궁설이 진지한 어조로 날 불렀다.
“말해.”
“절 곁에 두신 연유가 무엇인가요?”
“그야…….”
빙정 때문이다.
하지만 빙정 때문이라고 했다가는 크게 서운할 일을 만드는 것만 같았다.
북궁설의 표정이 지금 딱 그랬다.
“그냥?”
“그냥…….”
북궁설이 피식 웃었다.
“저번에 살수들하고 싸울 때도, 또 이번에 도적들하고 싸울 때도 느꼈어요.”
그녀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전 아무 도움이 안 돼요. 그런 살수들도 도적들한테도 다치기나 하고.”
“그건 어쩔 수 없지. 제대로 싸워 본 적이 없을 테니까.”
난 충분히 북궁설의 입장을 이해했다.
“그런 제가 절 돕는 분들을 찾아낸들, 그분들의 실망만 더 커지지 않을까요?”
“…….”
자신감이 하락한 모양이다.
“잘 모르겠네요. 세력을 모아서 어떻게 다시 빙궁을 되찾을지. 아버지를 어떻게 구해야 할지도…….”
“생각하지 마.”
난 그런 북궁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가 놀란 눈으로 날 올려다봤다.
“하다 보면 돼. 진심으로 널 위하는 이들을 믿고 그들이 정말 널 위해 움직이는 순간, 보인다.”
확실하게 보인다.
그간 보이지 않던 길들이.
“네가 뭘 해야 할지 확실히 보인다는 말이야. 그 말은 곧 너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과도 같아.”
누구나 마찬가지다.
나 역시 개방의 도움, 주변 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이 자리까지 올라오지도 못했을 거다.
세가를 재건한다?
서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륭회를 조진다?
형을 만나지 않았다면 끝까지 모르고 살아갔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모이고 모여, 지금 이 상황까지 치달은 것이다.
“좋아.”
난 그래도 울적해 하는 북궁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네 문제에 대해 짚어 줄까?”
“…….”
북궁설의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날 돌아보았다.
“저, 정말요?”
그녀의 눈빛이 떨려왔다.
보통 고수가 해 주는 조언은 말 그대로 기연이나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같이 검을 쓰는 입장에서 난 보다 현실적인 조언을 해 줄 수 있었고, 북궁설은 충분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천빙심결.”
가장 먼저 호흡법이다.
“운기 해 봐.”
내 말에 북궁설은 곧장 눈을 감고 그대로 기운을 끌어 올렸다.
여화를 만난 뒤로 특유의 한기는 많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주변이 서늘해지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북궁환을 만났을 때에 그가 천빙심결을 운용하는 걸을 보았다.”
난 천천히 북궁설의 몸 구석구석을 손으로 짚었다.
“운기의 방식에 따라, 같은 심법이라도 천양지차의 효과를 보인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단전.
기운을 축기, 운기 하는 데 있어 시작과 끝이 되는 지점이다.
내가 북궁설의 명치 아래 부분을 손끝으로 꾹 눌렀다.
“천빙심결의 구결 중 흡기하는 구결을 읊어 봐.”
후우웅!!
북궁설의 몸이 잘게 진동했다.
외부 자연지기를 호흡을 통해 내부에 차곡차곡 쌓는다.
그 이후 천빙심결의 인도대로 특유한 색채를 가진 내공심법으로 치환한다.
그 과정은 찰나간에 진행되고, 사라진다.
“여기.”
난 그대로 북궁설의 목 뒤쪽을 짚었다.
“애초에 심법을 잘못 배웠어.”
말 그대로 마구잡이 암기식으로 읽힌 티가 났다.
단전에 연결된 임맥과 독맥.
임독이맥은 보통 상단전까지 연결된다.
상단전은 보통 머리에 있기 때문에 상단전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기운을 남발하면 두통을 동반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북궁설은 임독이맥을 기맥으로써 활용하지 않았다.
기맥은 보통 기가 흐르는 통로이면서, 기운을 보다 가장 효과적으로 치환할 수 있는 주요한 혈점을 가진 신체 기관이다.
기맥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일 할의 힘으로도 적을 죽일 수 있는데, 삼 할 이상은 사용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이것도 문제였지만, 북궁설에게 있어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천빙심결이 너랑 맞지 않는다.”
애초에 이런 호흡법은 여성에게 맞지 않았다.
“여인의 기맥은 보통 사내보다 좁고 가늘다. 헌데 천빙심결은 기맥에 심한 부담을 주는 심법이야. 특히 여인이라면 더더욱.”
북궁환 정도는 되어야 무리 없이 기운을 남발할 수 있다.
하지만 북궁설은 북궁환이 아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는 걸로 하지.”
하루 이틀 잡아 줄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의 검술부터 해서 차근차근 개조를 해야 했다.
“후우.”
운기를 마친 북궁설이 작게 심호흡했다.
그녀가 반짝이는 눈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스승님.”
음?
아무래도 뭔가 깨달은 것이 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