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s First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18
천하제일 시한부 (18)
“너 뭐 하냐?”
초영과 얘기를 나누던 중, 느껴진 기척에 밖으로 나와 봤다.
그랬더니 보인 광경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살려 주십시오.”
익숙한 기척은 바로 진청운이었다.
그는 내 집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곳에 장원이 있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뭘 살려 줘?”
“신기검단주…… 주서진 대협, 아니십니까?”
진청운이 슥 나를 올려다보았다.
“맞는데, 대협은 아니야.”
내가 고개를 저었다.
난 쭈그리고 앉아 가만히 진청운의 눈을 바라보았다.
대체 얘가 뭘 잘못 처먹었길래 뜬금없이 이런 행동을 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서희 소저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아니, 좋아한다는 것을 넘어서 평생, 함께 하고픈 생각까지…….”
“이런 ×새끼가.”
아, 이거구나.
이래서 살려 달라 한 거구나.
난 곧바로 주먹을 치켜들었다.
한데, 뭔가 이상했다.
진청운의 눈빛에는 조금도 주눅 든 기색이 없었다.
아무리 기운을 싣지 않았다지만, 내 이름을 알고 있음에도 이런 반응이라니?
‘아비보다 낫군.’
진대용은 기세를 찔끔 내보이기 무섭게 완벽한 저자세로 화했다.
한데, 그 아들놈은 달라도 뭔가 달랐다.
“휴…… 그래. 서희를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건데 뭐, 어쩌라고?”
“저희 아버님을 비롯해서 흑호방 사람들은 모르지만, 전 알고 있습니다.”
“아, 짜증나네. 그니까 뭘, 알고 있냐고. 뭘, 뭘!”
대체 이 동네는 어떻게 생겨 먹은 동네기에 계속 두 번, 세 번씩 말하게 하는 걸까.
나처럼 성질 급한 사람들은 진즉에 복장 터져 죽어 버렸을 것이다.
“정천맹이 작정하고 대협의 소문을 축소시킨 것을요. 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대협이 혈사를 종식시킬 때…… 또한 천마를 죽이실 때도요.”
“…….”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내가 천마를 죽인 사실을 아는 자는 진랑과 백 의원을 제외하고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야말로 극비리에 나 홀로 움직인 것이었고, 마교 입장에서도 쪽팔려서라도 어디 소문을 내지 못하는 편이었으니까.
우두둑!
어찌해야 하나 고민할 때였다.
절로 주먹을 움켜쥐었나보다.
서슬 퍼런 살기에 진청운이 다시금 고개를 숙이고 애원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대협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생각했기에…….”
“왜? 대체 왜?”
“처음부터…… 대협에게 존경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웃기는 말이다.
이놈은 날 존경했다면서, 내 얼굴을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내가 죽인 사람들 중, 흑도의 인물이 가장 많다.
진청운은 흑도의 인물이다.
그런 이가 나를 존경한다?
어불성설.
“까고 있네. 네가 날 존경해?”
“믿고 말고는 대협의 자유입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어쭈, 이 새끼 봐라?
은근슬쩍 대화의 주제를 바꿔가며 내 관심을 이리저리 흩어 놓는다.
화법을 제대로 배운 놈이 틀림없다.
“지금 중요한 것은 흑호방이…… 아니, 제가 감히 신기검단주를 치려 합니다.”
“…….”
이건 뭐 하는 상황이지?
그러니까…… 지금 이 오합지졸이 감히 이 몸에게 선전포고 하는 건가?
“신기검단주께 생사비무를 청하는 바입니다.”
맞구나, 허.
진청운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대로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무슨 개수작일까 싶어, 기척을 돋궈 주변을 샅샅이 훑어봤지만 걸리는 감각은 없었다.
즉, 진청운은 혼자 이곳에 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랑 싸우자고? 네가?”
무슨 뜻인지는 대충 알 것 같았다.
지금 이놈은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흑호방이 내게 덤빈다면 어떤 꼴이 날지 파악도 끝난 상태일 테고.
그렇다는 것은 제 목숨을 담보로 흑호방만은 살려 달라는 건데.
그래, 좋다. 좋은데…….
“다 좋은데, ×발. 짜증나게 앞에 대사는 왜 한 거냐?”
하필이면 서희를 걸고 넘어지다니, 이거 졸렬한 새끼 아니야?
그리 말하면 내가 뭣 좀 봐줄까 봐?
“다들 곡해합니다. 제가 흑호방 출신이라…… 제 행동거지에 포장을 하나 더 씌워 바라봅니다.”
난 가만히 진청운이 하는 말을 들어주었다.
“제 본뜻은 그런 것이 아닌데…… 그런 것이 아닌데도 말이죠. 물론 제 행동에 심각한 잘못이 있었을 수도 있겠죠.”
얼씨구, 이젠 하소연까지?
“대협께 덤벼도 죽고, 살아 돌아가도 죽습니다. 차라리 대협의 손에 죽는 것이 더 명예로울 듯합니다.”
“하, 거 참. 드럽게 불편하네.”
동정을 구하는 건가 싶었다.
그래서 고깝게 보았다.
하지만 또 저리 굽신대며 정중하게 말하는 태도를 보자니, 그 진심이 조금은 전해진다.
“좋아, 응하지.”
“감사합니다. 대협.”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청운은 자신의 허리춤에 걸린 검자루에 손을 가져다 댔다.
‘썩, 괜찮단 말이지.’
서희를 생각한다면 백 번 천 번 찢어 죽이고 싶다.
하지만 그건 내 개인적인 감정이고.
“하나만 물어보자.”
“말씀하십시오.”
“너 사람 죽여 봤냐?”
내 물음에 진청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대답은 짧았다.
“얼마나?”
“세지 않아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기십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흠, 잔인한 말이지만 무림인으로 살면서 수십 정도 죽여 봤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었다.
심지어 적다면 적은 축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 대답을 들으려 한 것이 아니었다.
본 질문은 지금부터였다.
“사람을 왜 죽였냐?”
왜.
왜 사람을 죽여야 할까.
손에 검을 잡은 그 순간부터 들었던 의문이었다.
또한, 어느새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살인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무인’이 되어 있었다.
“제가 하고자 하는 일에 방해가 되면 죽였습니다.”
“마두로구나, 그럼 너는.”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내 물음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진청운이 뭔가를 파악하곤 이내 피식 웃었다.
“그렇습니다, 마두입니다.”
“그래, 그런 마음가짐이 바로 마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대사지. 한데 말야, 그 많은 사람들을 죽였을 때 기분은 어땠느냐?”
진청운이 미간을 오므렸다.
또 잠시 고민하던 진청운이 마저 입을 열었다.
“아무 생각 없었습니다.”
“좋구나.”
까득!
진청운의 대답을 다 듣고 난 이를 세게 악물었다.
난 정의롭지 않다.
아니, 오히려 난 마두에 가깝다.
나 또한 필요에 의해, 내 앞에 거치적거리는 놈들 수백, 수천은 죽여 왔으니까.
그렇게 한 까닭은 오직 하나였다.
살기 위해서.
“넌 죽을 것이다, 내게. 네 소원대로 생사비무를 해 주지.”
“감사합니다.”
죽음을 초월한 자의 태도인가?
한껏 여유로워진 진청운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네 목숨을 빌미로 흑호방을 살리려 했겠지?”
“뭐, 제가 죽고 난 다음 어떻게 하실지는 대협의 소관에 달린 일이겠지요.”
“그렇겠지, 그러니까 난 네가 죽든 말든 흑호방을 몰살시킬 거다. 네 아비가 내 세가를 풍비박산 냈으니.”
내 말에 진청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씨세가에 관한 것은 오로지 진대용만이 알고 있었다.
“넌 죽었다, 오늘부로. 그리고…….”
난 진청운을 바라보며 목을 손으로 긋는 시늉을 보였다.
진청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네가 새로운 흑호방의 방주다.”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 웃음을 보며 진청운이 물었다.
“왜…… 왜? 어째서? 그럼 흑호방은…….”
“난 덤벼 오는 놈들은 모조리 죽일 거야. 그게 누구든, 나 싸우는 거 좋아하거든?”
내 말에 진청운이 입술을 꾹 깨물고는 귀를 기울였다.
“살릴 수 있으면 살려 봐, 그럼 인정해 주지. 서희를 좋아한다는 그 마음가짐이 진심이라는 것을.”
“…….”
진청운이 말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동정……하십니까?”
“아니.”
고개를 저었다.
“왜 널 살리느냐고? 그러고 싶으니까.”
사실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진짜 마두였다면, 죄책감을 느꼈다며 흐느끼며 동정표를 사기라도 했겠지.
그랬다면 난 감사하게 직접 목을 잘라 냈을 거고.
잔인하겠지만, 이것이 무림인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취하고자 싸운다.
진 자는 죽는다.
그러니까 살기 위해……검을 든다.
구구절절한 사연 같은 거?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죄책감을 읊어봐야 이미 죽인 사람들의 목숨이 살아 돌아오는가?
그저 난 정당하게 검을 들었을 뿐이라고 자기 합리화를 통해 모든 상황을 정당화시킨다.
그것이…… 무림인이다.
“아, 서희를 좋아하겠다는 그 진심은 인정하겠다는 거지. 둘 사이를 뭐, 좋게 본다는 것은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라.”
가장 중요한 말을 꼭 강조해서 넣어 주었다.
* * *
저녁이 되었다.
타닥! 탁!
마당에 땅을 파고 장작을 넣어 모닥불을 피웠다.
초영이를 시켜 시전에서 어린 암퇘지 한 마리를 사 왔다.
그걸 꼬챙이에 끼워 두고 자리에 앉았다.
내 맞은편에 앉은 진청운의 낯빛은 어두웠다.
“이제 얘기를 해 보자.”
청운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 반반하던 얼굴이 피죽도 못 먹은 것처럼 거무죽죽했다.
아무래도 마음고생이 심했던 모양이었다.
“생각은 정리했냐?”
“이미 방향은 낮에 결정했습니다.”
초영은 고기를 타지 않게 구우면서도 이쪽으로 귀를 한껏 기울였다.
“좋아, 그건 됐고.”
흑호방의 새로운 방주가 된다.
그것은 곧 진청운의 아비인 진대용을 죽이겠단 말이었다.
진청운은 제 아비를 죽이겠단 말에도 선선히 승낙했다.
이제 그 이유를 들어 볼 차례였다.
“사실 대협의 가문을 풍비박산 낸 곳이 저희 흑호방이었단 사실은 몰랐습니다.”
“몰랐다라…… 그래. 이해해 보지.”
진청운은 흑호방의 소방주다.
소방주가 가문의 일을 모른다는 말이 퍽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저랑 아버지의 사이는 좋지 않습니다. 애초에 저는 후계위도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찢어 죽였습니다. 모든 형제들을 다.”
진청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마도 당시를 회상하는 듯했다.
“모두 죽였습니다. 형제들을…… 그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내가 어떻게 알아. 너희 가문의 일을.”
“저는 사실 혼인을 한 적이 있습니다.”
뜬금없는 충격 고백이었다.
뒤통수가 얼얼했다.
아니 혼인도 했단 새끼가 내 동생을…… 그럼 첩이 되는 건가?
스륵.
난 옆에 놓인 꼬챙이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살기를 감지한 진청운이 화들짝 놀라 손을 저었다.
“끄, 끝까지 들어 주십시오. 대협!”
“후우, 말해 봐.”
가까스로 진정한 난, 화를 삭이며 자리에 앉았다.
“가문만이 알고 있는 일입니다. 또한 치부기도 하고요.”
“서론이 길다.”
또다시 슬쩍 꼬챙이를 치켜들었다.
그제야 진청운의 말이 빨라졌다.
“막내며느리를 탐하는 시아비, 동생의 여자를 탐내는 형제…… 들어 보셨습니까?”
“…….”
속에서 울컥 무언가 솟는 느낌이었다.
구역질이 났다.
진청운의 말은 계속됐다.
“예, 자결했습니다. 제 부인은 그렇게 죽었습니다. 발표된 사인은…… 병사입니다. 병으로 죽었답니다.”
“…….”
“그래서 죽였습니다, 형제들을.”
진청운은 담담했다.
진청운으로서는 분통 터질 일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원래 그래.”
뭐라 위로를 해야 될지 모르겠다.
그런 속사정을 알고 나니, 여태껏 참고 있는 진청운이 대견해 보일 지경이다.
“가족이란 것이…… 너무 가깝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상처를 주기도 하거든. 그만큼…… 선을 쉽게 넘어 버리니까.”
“이제 믿으십니까? 그런 아버지기에…… 이미 선을 넘어 버린 저와 아버지 사이였기에, 저는 아무런 권한도 없는 이름뿐인 소방주였습니다.”
“그래, 그래.”
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말을 믿지 못한 것이 조금 미안해졌다.
“아무튼…… 그래도 사죄드립니다.”
진청운이 어느새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를 땅에다 처박았다.
“저희 가문이 대협의 가문을 멸한 건 진정 사실이니까요. 제가 대신해서 사과드리겠습니다.”
“됐어.”
난 진청운더러 일어나라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청운은 쉽사리 일어서지 않았다.
“좋아, 믿어 보지.”
확실해졌다.
주씨세가가 몰락한 까닭이 삼거리파나, 사망회 따위가 벌인 일이 아닌 흑호방이 벌인 짓이었다는 것을.
보통 때 같았으면 마교에 쳐들어간 그때처럼 당장 흑호방을 찾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쓰읍.’
가슴이 시큰거렸다.
심장이 콱 막힌 듯 울렁이면서 뒷골이 싸하게 땡겨 왔다.
독이 터져 나오려 몸이 내부에서부터 발작하는 증세.
며칠 전부터 내기를 사용한 대가로 얻은 부작용이었다.
“대협, 괜찮으십니까?”
내 안색이 좋지 않았는지 진청운이 얼른 내게 다가왔다.
그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냈다.
“괜찮아.”
이 격렬한 통증은 금방 사라졌다.
하지만.
‘점점 고통의 강도가 심해진다.’
아무래도 내기를 조금 더 봉해야 할 듯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