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s First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17
천하제일 시한부 (17)
사흘 뒤.
진대용은 눈이 부시는 느낌에 눈을 번쩍 떴다.
어두컴컴한 공간을 벗어나 그는 외딴 숲길에 버려져 있었다.
‘풀려난 건가?’
온몸을 속박하던 포박은 모조리 풀린 상태였다.
아무래도 간밤에 잠들었을 때, 이곳으로 옮겨진 듯했다.
“크하하!”
진대용은 풀려났다는 기쁨에 주변이 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웃어 젖혔다.
“듣고 있나! 너희들…… 사람 잘못 건드렸다! 내 반드시 모조리 찾아 찢어 죽여주마! 크하하하!”
숲이 떠나가라 외치며 진대용이 이내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는 무리가 있었다.
“괜찮을까요?”
“괜찮다.”
광흑 분타주와, 그의 수하 개방도였다.
진대용이 기척을 감추자 광흑 역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우리가 따르는 초영님께선 신기검단주를 택하셨다. 그럼 우리 또한 최선을 다할 뿐.”
“명심하겠습니다.”
광흑 분타주의 말에 개방도가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둘의 모습 또한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 * *
진대용은 단숨에 흑호방으로 돌아왔다.
“크흐흐.”
그는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수하들의 보고에 의하면 사흘 전부터 귀면탈혼의 존재가 사라졌다고 한다.
‘역시 난 똑똑해.’
처음에는 놀랐다.
신기검단주, 주서진.
그 위명은 쟁쟁히 들어 왔다.
흑련에서도 웬만하면 정천맹의 신기검단과는 마찰을 피하라고 전 흑도계열의 문파에 전문이 하달될 정도였다.
그렇게 위험한 자.
하지만 진대용은 그런 주서진을 이용해 정적을 해치웠다.
“신기검단주, 네놈 역시 가만둘 순 없지.”
귀면탈혼은 귀면탈혼이고, 수하들 앞에서 그를 위하는 척 생색내기라도 보여 줄 차례였다.
이럴 때를 대비해 흑련의 일 장로와도 진한 연을 쌓았던 것이 아니겠는가.
‘역시 난 머리가 좋아.’
진대용은 스스로를 대견하다 여겼다.
그 긴박한 순간에, 신기검단주를 목전에 두고도 용케 살아 돌아온 것.
또한, 그를 이용해 자신의 정적을 제거한 것까지.
“다들, 모였느냐!”
진대용이 대전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곳에는 총 사백이 넘는 흑호방의 무인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충!”
일제히 구령과 함께 무사들이 진대용을 향해 부복했다.
동시에 진대용의 곁에 또 다른 사내가 조용히 다가섰다.
그는 진대용의 아들이자 차기 소방주로 내정된 진청운이었다.
“쯧.”
진대용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한차례 혀를 찬 뒤, 다시금 무사들을 향해 돌아섰다.
“오늘 우린!”
진대용이 손을 번쩍 치켜들며 소리쳤다.
무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진대용을 향했다.
“주씨세가를 친다!”
“…….”
조용했다.
무사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웅성거렸다.
느닷없이 주씨세가를 친다니?
다 망해 가는 그곳을 왜 굳이?
그들은 이런 생각들로 가득했다.
“주씨세가의 삼남이 가문으로 돌아왔다. 그는 복수를 말한답시고 본 방의 장로인 귀면탈혼을 납치해 죽였다.”
진대용의 말에 장내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내부에서는 비록 서로 척을 지었을지언정, 어쨌든 귀면탈혼과는 같은 식구인 이들이다.
당연히 열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사실입니까?”
흑마대주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진대용 역시 사뭇 화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다.”
“흑혈대주님은 어디 계십니까?”
흑마대주의 물음에 진대용이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푹 떨구었다.
“신기검단주의 계략에 휘말려 모조리…… 죽었다.”
정적.
싸늘한 긴장감이 주변 사위를 휩쓸었다.
흑마대주와 흑랑대주의 기세가 돌변했다.
“신기검단주라…… 하셨습니까?”
그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래, 신기검단주.”
“그는 정천맹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놈이 바로 주씨세가의 삼남이었다는 거다.”
진대용의 말에 이번엔 무사들 사이에서도 소란스러움이 일었다.
그만큼 신기검단주라는 이름에서 나오는 압박감은 엄청난 것이었다.
“흠, 조금 신중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방주님.”
“그리 걱정할 것은 없다.”
진대용이 콧방귀를 뀌었다.
이미 신기검단주, 즉 주서진에 대한 정보는 다 알아본 참이었다.
“귀향했단다, 이제는 정천맹 사람이 아니란 얘기도 되겠지.”
“흠, 그래도 그는 너무 위험합니다.”
흑마대주가 굳은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시잖습니까? 그가 이룩한 업적들…….”
물론 진대용으로서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물론 우리가 모조리 덤벼도 이기지 못할 수도 있지.’
그만큼 주서진은 강했으니까.
심지어 눈앞에서 자신의 친우였던 흑혈귀마가 죽고, 자신마저 무력하게 당했었으니까.
하지만.
“들어오시지요.”
진대용이 대전의 문을 향해 나직하게 소리쳤다.
이윽고 대전의 문이 열리고 한 꼬장꼬장하게 생긴 노인이 안으로 들어섰다.
키는 칠 척쯤 될까 말까 한 작은 키에 흰 수염이 난 꼴이 꼭 어린애가 노인으로 분장한 듯한 우스꽝스런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를 아는 흑호방의 무사들은 차마 웃지 못한 채,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흥, 지랄들 하고 있구나.”
노인은 자연스럽게 무사들 틈을 가로지르며 진대용이 있는 상석으로 걸어 나갔다.
“여기 앉으시지요.”
진대용은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었다.
방주나 되는 인물이 굳이 이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한 까닭은 따로 있었다.
바로 이 노인이 흑련의 일 장로, 왕윤문이었기 때문이다.
“아, 암영노제?”
“저분이라면 신기검단주라도 충분히 잡을 수 있겠는데?”
단순히 그의 등장만으로도 무사들의 사기가 올라갔다.
그만큼 왕윤문이라는 고작 세 글자 이름에서 나오는 위력이야말로 실로 대단하다고밖에 평할 수 없었다.
“너희끼리 신기검단주를 뭐 어쩌고 어째? 신중? 웃기는 소리.”
왕윤문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진대용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놈이 정천맹을 나온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방심할 순 없다. 너희끼리라면 무조건 필패. 허나, 내가 도운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
왕윤문이 씩 미소를 머금었다.
“자, 그럼 일단 생각을 해 보자. 난 네게 분명 그 계집을 달라 했었다, 주서희인가 뭔가 하는 그 계집.”
“송구합니다. 그 계집이 워낙 신출귀몰한지라…….”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진청운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주서희라면…… 설마?’
백운객잔에서 일하던 여인이자, 자신이 한눈에 반해 버린 그 아리따운 소저의 이름이다.
‘망해 가는 가문의 여식이라던 게…… 설마 주씨세가를 일컫는 말이었다니.’
그제야 서희의 반응이 자신에게 왜 그리 차가웠었는지 명확해졌다.
“좋다, 계산을 다시 해 보자.”
왕윤문이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그 계집년과 함께, 장원까지 넘겨받아야겠다. 그래야 계산이 맞질 않겠느냐? 이 몸이 벌써 몇 년째 기다려 주었으니.”
“물론입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진대용이 조건을 달았다.
“장원을 넘기고 주씨세가에 관련된 모든 토지와 재산을 드리겠습니다. 다만, 신기검단주를 잡았다는 그 위명만은…… 순전히 저희 공으로 해 주십시오.”
“호오, 정녕 그것뿐이면 되겠느냐?”
“예, 장로님. 저희는 검마의 장보도가 뭐고 필요 없습니다. 그걸 발판 삼아 흑련의 한 축이 되고 싶을 뿐.”
진대용이 이렇게까지 말했다면 이미 계산은 끝난 셈이었다.
왕윤문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오늘 밤, 시작하자.”
“알겠…….”
“저, 아버님. 그리고 왕 장로님.”
진청운이 다급하게 앞으로 나섰다.
“감히 예가 어디라…….”
“말해 보거라.”
벌컥 화부터 내는 진대용과 달리 왕윤문은 새삼 이채를 띠고 진청운을 바라보았다.
“이번 건은 제가 맡고 싶습니다.”
“뭐라!”
진대용의 얼굴이 붉어졌다.
노기로 인해 혈압이 점점 치솟기 시작했다.
“끝까지 들으라 하지 않았나?”
왕윤문이 진대용을 향해 외쳤다.
그의 은은한 기파에 진대용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좋다. 네가 맡아보거라.”
왕윤문이 씩 웃었다.
그가 진청운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단, 실패한다면?”
“실패한다면…….”
진청운이 망설였다.
잠시간의 생각을 끝낸 진청운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자결하겠습니다.”
“쯧쯧, 네 목숨 누가 중히 여긴다고. 그딴 건 필요 없고…… 실패한다면 너희 흑호방은 내 것이다, 알아들었느냐?”
“명심……하겠습니다.”
진청운이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그대로 대전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왕윤문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재밌는 놈이구나. 제 아비랑은 달리, 능히 범천의 자질을 가진 자라.’
* * *
“어이 식모.”
심심했다.
그래서 난 초영이를 데리고 실컷 놀려 주는 중이었다.
이렇게 귀찮게 한다면 제 발로 나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품고 선.
“심심하십니까?”
물론 초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흑호방의 움직임을 보고드렸잖습니까, 뭔가 대비를 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초영이 불만이 가득한 투로 중얼거렸다.
“그따위 오합지졸 오든가 말든가.”
난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초영에게 말을 해 주지 않는 것뿐.
분명 진대용은 왕윤문과 접선했을 것이다.
전부터 왕윤문은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었으니, 기회다 하고 덤벼들 테고.
그럼 나야 좋지, 뭐.
“신기검단주께서 강하신 것은 잘 알았습니다. 하지만 흑호방은…….”
“또 그 소리네. 지겹지도 않냐?”
어째 말하는 방식이 저리도 일정할 수 있을까?
“이봐, 후개님.”
나는 자세를 고쳐 앉고는 초영을 가까이 불러들였다.
초영이 다소곳하게 내 앞에 시립했다.
“아 또 예전 생각나네, 똑바로 앉아.”
그 모습이 꼭 과거 내 수하들을 보는 것 같아 짜증이 일었다.
“말씀하세요. 전 이게 편합니다.”
“지금 내가 무림에 뭐라 소문나 있지?”
“음…… 어떤 부분을 말씀하시는지 파악을 못 하겠군요. 이를테면 성격적인 부분에서인지, 무력 부분이라던지 자세히 물어주시겠습니까?”
이거 말하다 보니 은근 탐이 난다.
가문을 재건하려면 꼼꼼하고 매사에 충실한 총관이 꼭 필요했다.
이 후개야말로 총관의 자질이 충만한 인재가 아니던가.
“그래, 내 별호는 뭐냐? 대체.”
내가 기억하는 별호는 단 하나였다.
바로 마교가 지어 준 혈광성.
애초에 혈사 이후엔 외부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기에, 소문을 전혀 듣지 못했으니까.
“보통은 신기검단주라는 직책으로 많이 불리셨고…… 저희 정파 쪽에선 꽤 많은 별호로 불리셨습니다. 신기검, 화명검, 등천비룡 등등…….”
“오, 등천비룡? 그것 좀 멋있네.”
꽤 느낌 있는 별호가 있구나 생각하니 새삼 신기했다.
나도 모르는 내 별호가 그리도 많았다는 사실에.
“그럼 어떻게…… 좀 이름이 알려진 축인가?”
“당연하죠. 서열 백 위 권에 거뜬히 들어가 계시니까요. 어지간한 문파에선 별호만 외치셔도 당장 대접을 받으실 수 있을 테니까요.”
“흠, 그래도 백 위라…… 기분이 조금 나쁘네.”
물론 그 수많은 무림인들 중 서열 백 위권에 들었다는 것은 충분한 영광이었다.
하지만 이 특유의 호승심이 발동했다.
“그럼, 그 누구더라? 제 별호가 이름보다 유명하다던 노망난 노친네가 하나 있었거든, 그 누구지? 검…… 검천신장인가? 그 노인은?”
“거, 검천신장?”
초영의 표정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새삼 도도하던 그녀의 표정이 저리 변할 수도 있다는 것에 놀라웠다.
“무림 내 절대자, 혹은 천외천의 존재로 일컬어지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분들은 삼신과 삼강으로 총 여섯 분이 존재하시지요.”
“거창하네.”
“그중 검천신장은 삼신 중 검의 좌를 맡고 계신 분입니다. 실제로 활동하고 계신 지조차 의문일 정도로 조용하신…… 혹, 만나 보셨습니까? 그분을?”
초영의 말이 많아졌다.
나는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글쎄.”
쉽게 알려 줄 순 없지.
삼 년 전 만났던 그 괄괄한 노친네가 꽤 대단하신 양반이었다는 사실을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자 그것보다는…….”
난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밖에서 꽤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손님이 왔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