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547)
나의 악당들 547화
68. 왕도행(20)
“•••…날아라, 바람아, 눈앞에, 보이 라.”
에포즈가 특유의 밀라늘어 주문을 읊었다. ‘오그슐리조의 기민한 탐색’ 을 그만의 방식으로 풀어낸 것이었 다.
휘루루. 그의 발치에서 시작된 산들바람이 옷자락을 흔들더니 비탈 아래로 퍼 졌다. 겨울밤 산중과는 어울리지 않 는 훈풍이 계곡과 숲, 언덕을 훑었 다.
가시범위를 너끈히 넘어가는 광범 위한 탐지. 천재 마법사라는 별명에 어울리는 솜씨였다.
주문을 마무리한 에포즈가 수인을 거두었다. 언덕배기에 편 야영지에 서 주변을 살피던 나는 어깨를 으쓱 이며 질문했다.
“끄<7”
“아까 보고한 대로입니다. 더 잡히 는 건 없어요.”
“그래, 수고했어.”
지친 기색으로 물러난 에포즈는 칼 에 묻은 피와 기름기를 닦고 있던 미라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미라는 짐짓 엄살을 부리는 남편을 타박하 면서도 물주머니를 열어 건네주었 다.
에포즈의 엄살이 마냥 거짓은 아닌 것이, 그는 야습 직전부터 지금까지 네 번이나 탐지 주문을 외웠다. 소 비한 마나량이 상당할 테니 지치는 게 당연하지. 그래도 덕분에 우리는 인근의 상황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 었다.
반경 4, 5킬로미터 안에 존재하는 사람은 우리 일행과 살아남은 도적 몇이 전부였다. 더 멀리에는 각각 서넛과 스무 명 정도로 이루어진 무 리가 하나씩 있었고.
욕심 많은 밀렵꾼 패거리나 밤길이 어두워 무리를 지은 상인 정도로 예 상되었으나, 확인은 해야 했기에 엘 렌과 뭉치를 보내두었다.
물론 에포즈의 탐지 주문이 절대적 인 건 아니다. 탐지를 회피하는 수 단이 흔한 건 아니지만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니까.
당장 나도 아이스보발트 공성 때 시체 수레 속에 숨어 적 마법사들의 탐지를 피하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 니 당시에 적의 탐지를 무력화 한 것도 에포즈였다.
하지만 이런 산골짜기에 에포즈의 탐지를 네 차례나 피할 정도의 실력 자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나리, 심문 대충 끝났는데요.”
상념을 깨는 골만의 목소리에, 나 는 슬쩍 미간을 좁혔다.
“몇 번을 말하냐, 여기선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엇, 죄송……. 자다 깨서 제가 정 신이 없나 봅니다, 형님.” 녀석은 뻘쭘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 이더니 보고를 이어갔다.
야음을 노려 야영지를 앞뒤로 기습 해온 산적은 총 예순다섯 명으로, 하나도 빠짐없이 죽이거나 사로잡았 다.
우리는 닷새 전 오두엔느에 입항하 며 왕국에 들어섰고, 신분을 숨긴 채 여행 중이었다. 그간 별다른 사 건도 사고도 없어서 이대로 뮬팅엄 까지 평온하게 가나 싶었는데, 오늘 드디어 일이 벌어진 것이다.
“숨만 붙어 있는 자들은 그 자리에 서 처리했고, 좀 멀쩡한 자들만 데 려다 뭐하는 놈들인지 확인을 해봤 는데……
수레에 걸터앉은 채 뒤를 돌아보 니, 경사진 둔덕에는 벌거벗다시피 무장해제를 당한 포로들이 주르르 꿇어 앉아 있었다.
개중 머리가 터져 턱만 남은 시체 가 하나 섞여 있었는데, 심문에 앞 서 만들어둔 본보기였다. 나머지 놈 들은 하나같이 피투성이였으며 겁을 먹은 건지 추위 때문인지 벌벌 떨어 대는 중이었다. 주변에 둘러 선 부 하들, 특히 프리츠와 눈이라도 마주 칠까 고개를 처박은 꼴이 썩 안쓰럽 다.
하지만 경상이든 중상이든 숨이 넘 어가기 직전이든, 어차피 해가 뜨기 전에 나란히 시체가 될 놈들이다. 일행의 기량을 조금이나마 드러낸 상황이니 살인멸구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상대가 무고한 것도 아니 니 마음도 편했다.
“이 자식들, 아무래도 평범한 노상 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뭐 당연한 소리를 하냐. 쪽수가 육십 명도 넘는데 보통 놈들이겠어? 어디서 이름 좀 날리는 놈들이겠 지.”
“그 정도가 아닙니다. 두목이 귀족, 그것도 영주라네요.”
“ 영주?”
내가 의아한 얼굴로 포로들을 재차 훑어보자, 틸로리아가 보란 듯 웬 중년인의 등을 걷어찼다.
“이 자식입니다. 랜토브 아프 토마 로스. 갈레만트의 남작이라는군요.”
“갈레만트? 어제 그 갈레만트?”
“예. 아침부터 쫓아왔답니다.”
간밤에 묵은 성하마을, 그리고 그 성하마을을 포함한 자그만 영지의 이름이 갈레만트였음을 떠올린 나는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 참나.”
뒤를 밟는 놈들이 있다는 사실은 정오가 되기도 전에 진즉 눈치챘지 만, 그게 아침부터 시작된 미행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남작씩이나 되는 놈이 제 영지를 지나는 여행객을 습격했다고?”
“직접 들어보시든지요.”
흥미가 돋아 고개를 끄덕이자, 프 리츠가 그 영주라는 작자의 머리채 를 틀어쥐고 모닥불 앞으로 끌고 왔 다. 그는 무릎을 투창에 꿰인 채라 걷는 게 불가능했으므로, 우악스러 운 손길에 질질 끌려오며 고통에 찬 비명을 질러댈 뿐이었다.
“나머지는, 처리할까요?”
“그래야지.”
골만이 손짓하자 청염의 마귀들 중 에서도 고르고 고른 둘이 짧게 주문 을 외웠다.
엔글리우가 ‘굴착’ 주문으로 얕은 구덩이를 파자 미텔먼, 시모스, 에곤 등이 포로들을 걷어차 그리로 밀어 넣었다.
“제, 제발, 살려주십시오!”
“이봐, 잠깐! 잠깐만 기다리라고! 얘기를 좀-”
“갈레만트의 내 방에 금붙이가 가 득 든 보물상자가 있소! 그걸 몸값 으로 낼 테니,”
운명을 직감한 도적들이 필사적으 로 악을 써댔지만 부하들은 들은 척 도 하지 않았다.
10대 후반에 불과한 셰아와 에곤 역시 얼굴이 약간 창백해졌을 뿐 별 로 동요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세상이다. 열아홉이든 열여덟 이든, 한때 수녀였든 평범한 농투성 이였든, 자신의 목숨을 노린 자들에 게는 무자비한 복수를 선사해야 하 는 것이다.
화륵!
주문을 완성한 칼아인이 입 안 가 득 시뻘건 불길을 머금었다. 포로들 에게 일말의 감정도 없는 듯 파란 불꽃 문신을 두른 두 눈동자는 평소 처럼 무채색이었다.
쿠오오-
엘렌의 증조부인지 작은할아버지인 지가 만들었다는 주문, ‘올나르의 화염 숨결’은 뻗어나가는 거리는 짧 아도 화력은 상당했다. 칼아인이 불 길을 토해낸 지 삼십 초나 지났을 까, 얕은 구덩이에 남은 건 서로 엉 겨붙은 시커먼 덩어리 몇 개가 전부 였다.
“……흐으.”
답답한 숨소리. 내 발치에 내팽개 쳐진 영주가 부하들의 비참한 최후 를 확인하고 보인 반응은 그게 전부 였다.
“남작 나리시라고?”
“그렇, 소.”
잔뜩 경직된 표정을 보니 대화가 어렵겠다 싶었으나, 헛된 생각이었 다.
“오해가, 내 부하가 실수를 한 모 양이오. 다른 무리로, 현상금이 걸린 도적들인 줄 착각한 게지, 멍청하게 도.
아직 생존에 대한 의지를 놓지 못 한 듯 눈깔은 쉬지 않고 데굴거렸고 혀는 민활하기 짝이 없었다.
“이미 들으셨다시피 난 갈레만트의 영주요. 몸값을 낼 테니 살려주시오. 성의 금고에 모아둔 금화만 해도 거 뜬히 오백 장은 넘소. 그걸 모두 드 리지.”
“……금화 오백 장? 시골남작 나부
랭이 주제에 돈도 많네.”
“죽은 놈들의 유산까지 모으면 훨 씬 더 많을 거요. 밤잠 한 번 설친 대가로는 꽤 큰돈이지. 그렇지 않 소?”
말이 끝나기 무섭게 프리츠가 군홧 발로 영주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컥, 케헥!”
“질문은 금지다, 이 건방진 새끼 야.”
철판을 덧댄 신코가 갈비뼈 아래를 깊이 파고든 탓일까. 놈은 한참을 캑캑거리더니 속을 게워냈다.
……아, 드럽게.
내가 미간을 구기며 흘겨보는 와중 에도 프리츠는 아주 당당한 얼굴이 었다. 쌍욕을 동반한 잔소리가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기운만 낭비할 게 뻔했기에 관두기로 했다.
“우리를 노린 이유는?”
“……말씀드렸다시피 오해가,”
“개소리 집어치우고. 목숨이라도 건지고 싶으면 솔직히 말해.”
내 말에서 희망을 발견한 것일까, 그는 마른 입술을 적시며 얼른 대답 했다.
“개인적으로 심부름을 시키는 놈들 이 몇 있는데, 은화를 턱턱 내시는 모습을 보고는 곧장 내게 달려왔더 군. 수레도 묵직하니 건질 게 많을 것 같다면서…… “그게 끝?” “……숙녀분들도. 시골 무지렁이로 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미모들이 아 닌지라.”
이 정도는 예상한 범위였다.
일행의 신분을 숨긴다고 해도 전원 이 얼굴을 꽁꽁 싸매고 다닐 수는 없었다. 열댓 명이 넘는 무리가 죄 다 후드를 푹 눌러쓰고 다닌다면 오 히려 더 시선을 끌 게 될 테니까.
물론 워낙 눈에 띄는 엘렌은 머리 칼과 얼굴을 잘 가리도록 했다. 각 각 동방대륙과 서부초원 출신이라 이질적인 외모를 가진 뭉치와 이오 피야는 평소처럼 잠행 중이라 사람 들의 눈에 띄는 일이 없었고.
하지만 셰아만 해도 나름 곱상한 얼굴이었고 틸로리아쯤 되면 객관적 으로 봐도 미녀에 속했다. 사내들이 꼬이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수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 정도 인원이 여행을 하자면-가끔 마을이나 도시에 들르는 걸 감안해 도-기본적인 짐이 상당했다.
게다가 용병 무리로 위장한 주제에 값비싼 판금갑주나 마법이 깃든 중 병기 따위를 내보일 수는 없는 노릇 이었다. 그렇다고 왕도에서 어떤 일 이 있을지 모르는데 위장용으로 준 비한 허름한 장비만 가져갈 수도 없 었고. 덕분에 수레 하나에는 통째로 장비만 실어야 했다.
두둑한 수레 두 대를 동반한, 반반 한 미모의 여인이 몇 섞인 용병 무 리. 그것이 우리가 최대한으로 위장 을 한 결과물이었다.
프리츠와 칼아인을 비롯해 험상궂 은 인상이 여럿이라 지금까지는 별 일이 없었는데, 이 욕심 많은 강도 남작의 눈까지 피할 수는 없었던 모 양이다.
내가 가만히 생각에 잠긴 모습을 보고 조급증이 돋았는지, 영주는 재 빨리 말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