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s First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229
천하제일 시한부 (229)
“검마의 장보도.”
묵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마를 일검에 베어 내고 마교를 떠난 뒤 자취를 감춘 한 사내.
훗날 세인들은 그를 검마라 불렀다.
마교가 눈에 불을 켜고 그를 쫓았지만, 십여 년간 그는 자신을 뒤쫓는 마교 무리를 모조리 죽여 없애고 완벽히 세간에 자신의 흔적들을 지워 냈다.
그리고 수백 년이 흐른 지금, 그의 심득이 담긴 마공서가 나타났다, 그의 무덤이 발견됐다 등등 수많은 거짓 정보들이 난무했다.
하지만 그중에 진짜는 없었다.
조금만 수상해도 이건 검마의 장보도가 아닐까? 하는 사람들의 억측이 만들어 낸 거짓 정보들이었다.
그렇게 수백 년이 지나면서 검마는 전설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전설이 된 사내의 심득이 묻힌 곳을 가리키는 장보도가 서희의 몸에서 나타났다.
물론 난 완벽히 믿지 않았다.
그것이 검마의 장보도인지, 헌원가로 향하는 열쇠인지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풀어 봐야지만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검마의 무공은 완벽히 마공의 지배를 벗어났다. 소림의 항마공도 완벽히 마기를 배제할 수는 없는데 말이지.”
묵야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는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우리 살문에도 전해져 오는 이야기가 있었다. 수백 년 전 살문의 시조가 되는 구류마검께서는 검마를 딱 한 번 조우했었다고 했다.”
“오호, 그런 이야기가 있었나? 살문에?”
난 적잖이 놀랐다.
사실 검마에 대한 이야기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나 역시 마공의 지배에는 완벽히 벗어난 몸이기 때문이었다.
“마교는 검마의 무공을 통해 마기의 치명적인 단점을 없애려 하는 거고, 다른 이들은 그의 비상식적인 강함을 동경해 찾는 거지.”
“이해한다, 무인이라면 더 높은 상승의 무학을 동경하는 것이 이상할 일은 아니니까.”
묵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당시 구류마검께서는 그를 암습하려다 실패했다고 전했다. 검마는 이미 수백 장 내에 들어선 구류마검의 기척을 알아차렸고, 검을 뽑지도 않은 검마의 기세에 굴복했다고 했다.”
“기세만으로 제압됐다? 너무 허황되는군. 구류마검이라면 당시 아홉 개의 학파를 모두 정리한 천하제일의 살수가 아니던가?”
“맞다.”
묵야가 미간을 찌푸렸다.
“오로지 사람을 죽이기 위해 태어난 살수조차도, 그 극한의 경지에 올라선 살성도 검마의 앞에서는 하룻강아지 신세를 면치 못한다고 한다.”
“그래, 지금 여기서 검마의 위대한 업적을 늘어놓으려는 건 아닐 테고. 그 얘길 꺼내는 이유는?”
“구류마검께서는…… 검마의 무공을 견식하고 다시는 살행을 하지 못하셨다. 절대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되는 무공이라고도 평하셨지.”
“허.”
탄식이 절로 나왔다.
“호환이라고 들어 봤나?”
“호랑이에게 걸려 어찌어찌 살아난다 해도 그 기세에 짓눌려 시름시름 앓다 죽는 것을 말함인가?”
“구류마검은 딱 그렇게 돌아가셨다. 검마를 조우하고 정확히 한 달도 되지 않아 장기가 뒤틀리고 칠공에서 피를 토하시며 쓰러지셨지. 그리고 깨어나지 못하셨다.”
구류마검은 엄청난 강자다.
살문을 창시한 초대 살수라고 평하기도 하고, 살성이라고 불렸던 유일무이한 자였다.
그의 무공은 얼마나 강했겠는가?
그런 구류마검이 그저 기세만으로 짓눌려 앓다 죽었다?
“진법을 해진하면 우리가 그렇게 될 수도 있다 보는가?”
“아니, 더 큰 혼란이 들이치겠지.”
“저것이 검마의 장보도일 확률은?”
“구류마검께서 말미에 남기신 유언이 있다.”
묵야의 두 눈이 잘게 흔들렸다.
“무공이 사람의 경지를 초월해, 이미 신의 반열에 든 자, 그 누구도 믿지 않아 자신의 몸에 직접 검으로 진법을 새겼다고.”
이건 알지 못했던 사실이다.
“나 역시 믿지 못했다. 어떻게 자신의 몸에 진법을 새길 수가 있겠는가? 생문과 사문만 해도 수백 가지가 넘는 혈맥을 짚으며, 단 한 치만 어긋나도 죽을 수 있는 몸의 주요 사혈들을 가로지르는 그런 미친 짓을.”
“……검마는 할 수 있었군. 인간의 경지가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맞다.”
묵야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남긴 심득으로 향하는 가르침을 몸에다 직접 새겨 놓고, 훗날 후대에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후손들에게 그 여지를 남겨 놓았다라고.”
“…….”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묵야의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서희에 대한 이야기다.
몸에 진법을 새길 수 있는 이는 무림 역사상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물론 검마를 제외하면 말이다.
“하지만 그 진법은 내 아버지께서 새기셨다 들었다.”
“드러나지 않게 만드신 걸 거다. 눈으로 보였던 진법을 네 아버지께서는 감추신 거란 말이지.”
“…….”
머릿속이 쿵, 하고 울렸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아버지께선 독에 중독되셨다 했다. 갑자기 미쳐 버리셨다고도 했지. 내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돌아가신 지 수년은 지난 뒤였고.”
“동생의 나이가 몇이지?”
“지금 스물여섯이다.”
“스물여섯…… 아버지가 돌아가신 해는?”
가만히 기억을 더듬었다.
“듣기로는 내가 돌아오기 몇 해 전이라고 들었다. 삼년상을 치른 지 꽤 된 것 같았으니 어림잡아도 오 년은 되지 않았을까?”
“오 년이라…… 얼추 비슷하지 않은가?”
묵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인간의 기맥은 성인을 기점으로 완벽히 굳어지고 단단해진다. 그래서 무공을 어릴 때부터 가르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들 말하지.”
“서희가 성인이 되었을 때…….”
아차 싶다.
묵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독이 아닐 수도 있었겠군.”
“아무튼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알아듣겠나?”
묵야의 말에 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한 대비책도 없이 무작정 진법을 해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열쇠.’
아버지께서 내 기억 속에 박아 놓은 암시 한 조각.
그것은 바로 서희의 몸에 새겨진 진법에 대한 아버지의 설명이었다.
아버지는 진법을 열쇠라고 표현하셨다.
그것이 헌원세가를 찾아내는 열쇠, 또는 그곳에 닿기 위한 열쇠.
해석은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무튼 뜻은 같다.
“좋은 뜻으로 해 준 말이니 참고하지.”
“해진할 생각인가?”
묵야의 물음에 난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방법을 찾아봐야겠지.”
“알았다.”
묵야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여화를 찾아봐야 할 듯싶었다.
* * *
여화는 주씨세가에서 가장 바쁜 사람 중 하나였다.
난 조심히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
“안에 있나?”
“응.”
여화의 짧은 대답에 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을 풍경을 확인한 나는 대번 인상을 찡그렸다.
“……난장판이네.”
방에는 여러 진법들의 도해도와, 총해 그리고 여화가 그린 것으로 보이는 진법도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여화는 그 한가운데에 앉아 전신에 먹을 묻혀 가며 뭔가를 그리고 있었다.
“뭐 하고 있는 거지?”
“세가에 설치한 환상진이 묵야에게는 먹히지 않은 것 같아서. 조금 보완하려고.”
“음, 묵야가 특별한 거니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자존심 상해.”
여화의 고집은 대단하다.
난 그녀의 말투에서 그녀를 말릴 수 없음을 느끼고 그냥 자리에 앉았다.
“서희의 몸에 새겨진 진법은? 알아낸 거라도 있어?”
“어려워. 잘못 건들면. 기경팔맥. 터져.”
살벌한 말이었다.
기경팔맥이 다치는 것도 아니고 터진다는 것은 곧 죽을 수도 있다는 말과도 같았기에.
“방법이 없나?”
“찾아보고 있어.”
여화는 말과 함께, 내게 슬쩍 서책 한 권을 건넸다.
“이게 뭐야?”
내 물음에 여화는 시선도 주지 않고 짧게 답했다.
“서희. 몸에 있는 진법도.”
“이걸 내가 본다고 아나?”
“단순한. 진법도가 아니야.”
난 그녀의 말을 들으며 서책을 펼쳤다.
첫 장은 서희의 왼쪽 팔목부터 새겨진 진법도였다.
손목을 시작으로 길게 뻗어 나가기 시작한 진법은 교묘하게 혈맥을 따라 쭉 이어져 있었는데 혈점들의 위치가 모조리 사혈을 가리키고 있었다.
“미쳤네.”
깊이.
깊이가 단 한 치만 달라져도 피를 쏟으며 죽을 것이다.
현재 중원에서 진법이라면 여화를 따를 자가 없다.
그런 여화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고절한 진법이다.
‘검마가 진법에도 조예가 깊은 자였나?’
생각은 근본부터 시작했다.
검마는 한 자루 검으로 마교의 말단 무사에서부터 구마의 직위를 받은 전대미문의 괴물이었다.
심지어 자신을 거둔 천마조차 일검에 날려 버리고 그 삼엄한 마교를 탈출까지 했다.
그럴 정도로 무공이 고강했다면 한평생 무공만 수련해도 부족할 터였다.
‘아니다.’
난 천천히 서책을 넘겨 보던 중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하나같이 사혈을 가로지르는 진법도의 선들의 굵기가 조금씩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난 곧장 여화를 향해 물었다.
“이 선의 간격이나 먹물의 색이 일정하지가 않은데? 일부러 그런 건가?”
“아니, 똑같이. 따라 그렸어. 내가 보이는, 선들.”
말을 하는 여화의 두 눈이 희미하게 백색으로 빛났다.
그녀는 기운의 실체를 눈에 투영시킬 수 있다.
그런 여화가 본 것이니만큼 정확할 것이다.
‘그렇다는 말은…….’
난 다시금 서책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 선들이 단순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
‘조금 더 깊게 베어 들어가면 먹물의 색이 깊어진다. 얕으면 얕은 대로 먹물의 색이 옅어지는 거고.’
만약 예전이었다면 이 미묘한 차이를 쉽게 알아보지 못했을 거다.
여화가 그런 것처럼 나도 그냥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을 수도 있단 말이다.
“이건…… 무공이로군. 진법으로 보이는 무공의 구결이야.”
내 말에 여화가 하던 것을 멈추고 내 옆으로 바짝 다가섰다.
“이게. 무공?”
“어, 확실해.”
난 다시 처음부터 손목부분부터 그려진 진법도를 훑었다.
그러고는 여화를 향해 종이를 찾아 달라며 손짓했다.
“서책은 나뉘어 있어서 한 번에 그려 봐야 돼. 이 선들을 이을 수 있게 크게 한번 그려 보자고.”
“좋아.”
여화의 호기심이 발동됐다.
그녀는 즐거운 듯, 작게 미소를 머금고는 깨끗한 종이를 뭉텅이로 들고 왔다.
“서희의 체격에 맞춰서 그릴 거야, 집중 좀 해 줘.”
“응.”
여화는 붓을 들었고, 난 천천히 빈 종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내가 짚은 부분을 여화는 잔떨림조차 없이 완벽하게 따라 그려 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왼쪽 손목부터 시작해서 발끝까지 모조리 다 그려 내기까지 꼬박 두 시진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이 소모됐다.
“후, 이건가.”
난 가만히 방바닥에 펼쳐진 진법도를 살펴봤다.
서희의 체격에 맞게 배치된 종이에는 완벽하게 서희의 몸에 새겨진 진법이 그대로 그려져 있었다.
“오차, 조금씩 있어.”
여화의 말에 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충분히 감안하고 파악할 수 있으니까.
“확실하다.”
난 한눈에 느꼈다.
“이건 무공이 맞아. 그것도…… 검마는 오른손잡이였던 모양이군.”
우연인지는 몰라도 서희의 왼쪽 손목이 바로 그 시작점이었다.
검마는 자신의 왼쪽 손목을 기점으로 진법을 그려 나간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의 심득을 남겨 놓았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장보도 따위가 아니로군. 이건 그냥…… 하나의 무공을 남겨 둔 거야. 그것도 검공.”
검마의 무공.
난 천천히 선의 굵기에 따라 깊게 호흡하고, 옅게 호흡하고를 반복하며 진기를 움직여보았다.
“길이의 척촌간이 애매해. 확실히…… 그려서 따라 할 수 없는 거야, 이건.”
직접 서희를 봐야했다.
그 전에는 아예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 우연히 곤륜에서 얻은 기연 때문에 일은 순조롭게 풀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