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ants to Become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84
제84화. 도발
도발.
상대의 마음을 자극해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유도하는 행위.
상대의 본성을 끌어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수단이다.
물론 뒷감당을 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말이지.
이 가식적인 후보와 쭉 대화를 나누다 보니, 살짝 오기가 생겼다.
내가 등신도 아니고, 전생에 저런 미소의 가면을 하루가 멀다고 본 인간으로서, 저 미소가 진심에서 비롯된 것인지 구분 못 할 것 같은가?
그래서 도발을 한번 해봤다.
이 정도 자극이면 저 가면이 구겨지지 않을까 싶었는데,
“저를 죽이러 오셨다라…….”
어째 부족했던 모양이다.
베누스의 미소는 잠시나마 움츠러들긴 했지만, 완전히 일그러지진 않았다.
“지금 그 발언, 제가 어찌 받아들여야겠습니까?”
“물론 농담으로 들으셔야죠.”
나는 당연하지 않냐며 다리를 꼬았다.
“뭔가 베누스 후보만 계속 웃는 상황이 이어지길래, 같이 좀 웃어 보자는 마음에 수위 높은 농담을 던져봤습니다. 혹시 기분 나쁘셨습니까?”
그는 전혀 아니라는 듯, 입꼬리를 바짝 올리더니 아예 박수까지 쳤다.
“마족을 당황하게 하는 재주가 뛰어나시군요. 이사벨 후보와 세나 후보도 그런 점에 넘어가신 걸까요?”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네.
어쨌든 그는 도발엔 넘어오지 않았다.
이에 나는 꼬았던 다리를 바꿔 꼰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지금 영지를 꾸리고 있습니다.”
“영지라. 본격적으로 세력을 구축하시겠다는 건가요?”
“이사벨 전 후보가 말하길, 현 후보들 중 영지를 가장 잘 운용하는 후보가 둘 있다고 하던데, 그중 하나가 바로 베누스 후보라더군요.”
“그럼 나머지 한 명은 다일 후보겠군요? 예전부터 명성이 자자했던 그와 같은 평가를 받았다니, 영광입니다.”
“그래서 베누스 후보만의 영지 운용 노하우를 좀 배워볼까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다소 의외긴 해도 흥미로운 목적이라 생각한 걸까?
베누스는 입술을 내밀며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목적 자체는 굉장히 흥미롭습니다만, 제가 그걸 충족시켜 드릴 수 있을진 미지수군요. 노하우를 배우고 싶다고 하셨는데, 전 사실 영지 운용과 관련해선 노하우라고 할 만한 게 없거든요.”
정말로 없는 걸까, 아님 있는데 가르쳐 주기 싫은 걸까?
어쩌면 정말 없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급 들었다.
“차라리 저와 함께 영지를 둘러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직접 두 눈으로 보시고 깨달음을 얻으시는 편이 벨져 후보에게도 더 좋으실 거라 봅니다만?”
“영지의 주인께서 직접 안내해주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죠.”
-똑똑
“베누스 님. 말씀하신 식사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때 문 두드림과 함께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딱히 배고프다고 한 적은 없는데, 밥도 대접이라고 미리 준비한 모양이다.
“이야기는 차후에 하도록 하고, 우선 식사 먼저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벨져 후보를 위해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들이 식으면 곤란할 테니까요.”
“그러시죠.”
먼저 일어서 문을 나가는 베누스를 바로 뒤따라 나갔다.
나가자마자 대기 중이던 메이가 쪼르르 달려왔다.
“어떠셨어요, 벨져 님?”
“특별한 수확은 없었어. 넌 어땠니?”
메이는 돌연 주변 눈치를 살피더니, 입을 가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청 불편했어요. 다른 분들에게 말을 걸고 싶어도 뭔가 인형을 보는 듯한 기분이어서…….”
충분히 알 것 같은 기분이다.
지금도 우릴 안내하겠답시고 동행하는 이 마족들만 봐도 얼굴에 어색함이 한가득했다.
흠.
저것부터 먼저 깨봐?
나는 앞서가는 베누스의 등을 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제 안내를 자처했던 도로시란 여자가 그러더군요. 베누스 후보와 이라 가문의 일원들이 마족들에게 살 방법을 알려줬기에, 이렇게 잘 살 수 있는 거라고…….”
“하하. 방법을 알려줬다고 해서 그걸 응용할 수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전 그들이 삶의 의지를 잃지 않고, 열심히 살았기에 이런 부족한 영지에도 잘 적응할 수 있던 거라 봅니다.”
“그럼 적응 못 하고 영지를 떠난 마족은 없었습니까?”
잘 나아가던 베누스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이에 나는 물론 뒤따르던 시종들 역시 걸음을 멈췄다.
어째 공기가 무거워지고 있음이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살며시 눈동자를 돌리며 시종들의 낯빛을 고루 살펴봤다.
미소 자체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변한 건 그 위쪽.
눈에 차오른 감정까진 차마 숨길 수 없었는지 전부 동공이 거세게 흔들렸다.
일부는 앞장선 베누스의 눈치를 보는 이도 있었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요.”
침묵 끝에 입을 연 베누스의 목소리는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곧 천천히 고개를 돌린 베누스는 특유의 가식적인 미소를 내게 다시 한번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 정도 주어진 삶에 만족을 못 해선, 어딜 가도 못 살지 않을까요?”
예, 아니오로 하면 깔끔할 대답을 이렇게 애매하게 돌린다는 건,
이번 도발은 조금 성과가 있었단 뜻이 되지 않을까 싶다.
목적을 달성한 나는 구태여 더 묻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준비된 식사 테이블로 향했다.
안내한 자리에 앉으니, 목에 냅킨을 둘러주러 젊은 시녀가 다가왔다.
“아, 난 괜찮아.”
“예?”
“난 이런 거 불편해서 잘 안 하니까, 저기 있는 내 퍼밀리어만 해줘.”
시녀는 당황한 듯 잠시 머뭇거렸다.
“아, 알겠습니다.”
이내 고개를 숙이며 물러나던 시녀는,
-쨀그랑.
팔을 잘못 움직인 나머지, 내 앞에 있던 물컵을 쳐서 엎어버리고 말았다.
그 덕에 내 무릎 쪽으로 물이 쏟아졌다.
“죄, 죄송합니다!”
깜짝 놀란 시녀는 바로 무릎을 꿇으며 사죄했다.
“아, 이 정도야 괜찮…….”
괜찮다며 고개를 돌린 나는 그만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사죄를 위해 무릎을 꿇고 있는 시녀는 현재 테이블 밑으로 모습이 가려진 상태다.
그래서 오직 나만이 이 시녀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근데 이건 뭘까?
손으로 입을 비틀지 않는 한 쭉 유지될 것 같던 시녀의 미소가 어느샌가 종잇장처럼 구겨져 있었다.
귀한 손님을 모신 자리에서 실수를 범했다는 것에 당황한 걸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볼 땐 그 이상이다.
이건 그야말로 죽음이 목전 앞에 왔음을 깨닫고, 온갖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힌 절망의 얼굴이다.
“저, 정말 죄송합니다! 제,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고작 물 쏟은 거 가지고, 무슨 죽을죄를 지었다는 걸까?
살짝 당황한 나는 시녀의 팔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난 괜찮아. 가서 닦을 거나 갖다 주……!”
-쐐액!
느닷없이 고막을 자극한 살벌한 소리에 본능적으로 손이 움직였다.
-콱!
“벨져 님!”
얇고 차가운 감촉과 함께 찌릿한 감각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깜짝 놀란 메이의 외침은 덤.
나는 천천히 눈동자를 돌려 손이 잡힌 물체를 확인해보았다.
식사용 나이프.
손잡이가 아닌 날 쪽을 잡은 바람에 출혈이 좀 일어났다.
정체를 확인한 나는 이번엔 이 나이프가 날아든 방향으로 눈동자를 돌렸다.
“아…… 미안합니다. 벨져 후보를 노린 건 아니었어요.”
안다.
이 나이프는 나를 향해 날아오지 않았다.
내가 아닌, 정확히 테이블 밑에서 일어나는 시녀의 목덜미 쪽으로 날아들었다.
내가 손을 들어 막지 않았다면,
이 시녀는 죽었겠지.
어이가 없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지 아는가?
앞선 두 번의 도발에도 끄떡없던, 저 가증스러운 미소의 가면이,
“귀한 손님이니 분명 잘 모시라고 했거늘, 어찌 이런 무례를 범해버리는 건지…….”
처음으로 일그러진 광경을 보고 있다.
겨우 내게 물을 엎질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에 나는 판단할 수 있었다.
이 분노의 종주, 베누스 이라라는 놈이 어떤 본성을 지니고 있는지.
이 녀석을 소위 지구식 진단명으로 판단을 내리자면……,
분조장이다.
* * *
한편, 역병의 조사를 위해 아직 근원지에 남아있던 코흐와 도로시.
나무껍질, 잎, 흙 등 주변의 자연 지물을 채취한 코흐는 그것들을 작은 유리병에 각각 담아냈다.
그러곤 정체불명의 보라색 약병을 꺼내더니, 지물을 담은 병에 하나하나 채워 넣기 시작했다.
이윽고 조사가 끝났는지, 한숨과 함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끝난 겁니까?”
그 광경을 여태 지켜보던 도로시가 물었다.
“예. 이젠 반응을 지켜보는 일만 남았습니다. 아직 역병의 균이 힘을 완전히 잃지 않고, 지물에 남아있는 상태라면, 액체의 색깔이 붉게 변할 겁니다.”
“그런 수상한 물 따위로도 확인이 가능한걸, 베누스 님께서 못 보셨을 리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겠죠. 저도 부디, 색이 변하지 않길 바라고 있습니다.”
못마땅한 시선으로 약병을 보던 도로시는 문득 마른침을 삼켰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색이 변한다면…. 그땐 어쩌실 겁니까?”
“우선 조사를 허락해주신 베누스 님께 알려야겠지요. 그다음엔 함께 의논을…….”
“떠나세요.”
코흐는 어벙한 눈으로 도로시를 돌아봤다.
“방금 뭐라고?”
“떠나시라고 했습니다. 지금 당장 적림을 벗어나 최대한 먼 곳으로 도망가세요. 그리고 만약, 당신 말대로 그 물의 색이 정말로 변한다면…….”
“변한다면?”
“다른 마왕 후보에게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하세요. 60년 전 마계 대륙을 위협했던 역병이, 재확산될 가능성이 있다고요!”
갑작스러운 발언에 코흐는 혼란을 금치 못했다.
“가,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잔말 말고 가라면 가세요! 이 땅의 주인은 당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겁니다!”
“그럼 벨져 후보님에게라도…….”
도로시는 급기야 코흐의 멱살까지 붙잡았다.
“그 후보는 어차피 이 적림을 떠나지 못해요! 제 발로 단두대에 올라서서 목을 내민 거나 마찬가지라고요! 남의 목숨은 운운하기 전에 자기 목숨부터…….”
“뭘 그리 주절주절 떠들고 있지?”
그때, 도로시의 뒤로 낯선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도로시는 곧 죽을 사람처럼 창백해졌다.
바로 고개를 돌린 그녀는 낯선 이의 얼굴을 볼 새도 없이 바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베누스와 비슷한 적발의 짧은 머리카락을 지닌 우락부락한 체형의 마족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 오셨습니까, 라비에 님?”
베누스의 퍼밀리어이자, 그와 같은 피가 섞인 형제.
라비에 이라였다.
* * *
-피이잉
상처 부위를 휘감은 치유의 빛이 벌어진 살집을 들어가 봉합을 시작했다.
치유 후, 별다른 이상까지 없음을 판단한 메이는 자랑스럽게 미소를 내보였다.
“다 됐어요. 벨져 님.”
간단한 상처였다곤 하나, 역시 마법이 편하긴 편하다.
괜히 약이니, 붕대니 바를 필요 없이, 몇 초면 완벽하게 치유되니 얼마나 좋아?
“고마워 메이야. 역시 내 퍼밀리어네.”
메이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밥 먹으려다 피까지 보게 된 상황에서 식사를 지속할 순 없을 터.
치유 및 휴식을 핑계 삼아 방 하나를 달라고 요구하자 베누스는 흔쾌히 응해주었다.
솔직히 침 정도만 바르면 알아서 나을 상처라 이럴 필요까진 없었지만,
내가 아닌 다른 이를 위해 따로 자리를 마련했다.
“진정이 좀 됐어?”
내가 물으면서도 아니란 생각이 들어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방에 들어온 이후 바닥에 붙인 무릎을 좀처럼 떼지 않으려 하는 여인.
조금 전 내 무릎에 물을 쏟았던 바로 그 시녀다.
가만히 놔뒀다간 어떤 일을 당할지 몰라서 같이 데리고 들어왔다.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까 일로 사과나 받자고 데려온 거 아니야.”
“예. 압니다…….”
말은 할 수 있는 걸 보니, 정신을 완전히 잃진 않는 모양이다.
“상황이야 어쨌든, 난 네 손을 희생해서 네 목숨을 구해줬어. 그러니 너도 보답을 좀 해줬으면 하는데…….”
“예. 절 원하는 대로 부려주시지요.”
부리는 것까진 아니고. 끽해야 몇 가지 질문에 답만 좀 하면 된다.
그런데 이 시녀,
아무래도 내 말을 잘못 이해한 모양이다.
시녀는 표정 변화 하나 없는 채로 일어나더니, 갑자기 주섬주섬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걸 의미한 게 아닌데?”
“그럼. 원하는 걸 말씀해주시지요.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대신…….”
시녀의 표정에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허나 속에 꽁꽁 감춘 감정이 끝내 차오른 듯,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모든 일이 끝나시면……, 절 고통 없이 죽여주세요!”
기어이 내 손을 붙잡으며 애원하는 시녀의 눈에선,
“다신 베누스 님을 보지 못하도록……!”
가식이라곤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