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2)
11일류 검사의 여행(2)
“검사님이 길잡이를 찾은 손님이지?”
“그렇습니다만.”
“만나서 반가워. 난 라쟈. 검사님을 안내해 줄 길잡이야.”
“…당신이 말입니까?”
“왜? 불안해?”
“예.”
겨우 열두셋으로밖에는 안 보이는 까무잡잡한 피부의 소년을 보며 나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어린아이가 길잡이일 줄은 몰랐다.
물론 다른 곳은 어린 길잡이도 드물지 않지만, 내가 가려는 곳은 남부 밀림 안쪽. 그 위험한 곳에 아이를 데려가려니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안심해, 나한테는 밀림은 집 같은 곳이니까.”
“집에서도 사고로 죽을 수는 있습니다.”
“그렇게 치면 하늘 아래 죽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
할 말을 없게 하는 반론이었다.
그런 내게, 라쟈는 결정타를 가했다.
“참고로 마지막 마을까지 길을 아는 길잡이는 나랑 하르바뿐이거든? 그런데 하르바는 다른 일이 생겼다고 하더라.”
“…그렇습니까?”
“응. 정 불안하면, 하르바가 일 끝날 때까지 기다리다 가도 돼. 난 이미 선수금 받았으니까.”
선택의 어디까지나 자유라는 듯.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말하는 소년.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끝에 나는 결국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결국 라쟈에게 길 안내를 맡겼다.
어차피 나는 수행을 위해 이곳에 온바.
안전한 여행 따위, 처음부터 바라지도 않았다.
그렇게 어린 길잡이라는 위험을 감수한 채, 나는 결국 남부 밀림에 발을 들여놓았다.
적지 않은 불안 요소를 가지고 출발한 길.
하지만 정작 길을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스스로의 판단이 잘못돼 있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검사님, 거기 늪이거든? 한 번 빠지면 끝이니까, 내가 밟은 곳만 잘 따라와.”
맨땅과 도저히 구분되지 않는 낙엽조차 빨아들이는 늪지를 지날 때도.
“이거 발라 둬. 독충이 잘 안 모여들 거야.”
시도 때도 없이 몰려드는 벌레들을 향긋한 방충제로 깔끔하게 쫓아낼 때도.
“머리를 조심해. 몰래 숨었다가 위에서 덮치는 게 특기인 놈이거든.”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본 적 없던 흉악한 맹수의 기습을 먼저 발견했을 때도 라쟈는 길잡이로서 훌륭하게 제 역할을 다했다.
단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불안 요소라고 생각했던 것이 부끄러울 만큼.
오히려 불안 요소가 된 건 내 쪽이었다.
실수로 엉뚱한 곳을 밟아서 늪에 빠지거나.
방충제를 잘못 써서 독충을 모이게 하거나.
소란을 일으켜 맹수 무리를 끌어들이는 등.
계속 문제를 일으켰으니까.
사고뭉치 갓난아기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라쟈는 오히려 감탄 반, 떨떠름함 반 섞인 눈으로 나를 보았다.
“저기, 검사님. 늪에서 어떻게 나온 거야?”
“빠지자마자 반대쪽 발로 늪을 밟았습니다.”
“…보통은 그대로 발이 빠지지 않아?”
“그만큼 더 빨리 밟으면 됩니다.”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데스 쉐도우’에서 암살자로 교육받을 때, 몸을 가볍게 하는 훈련은 기본이었다.
심지어 물 위를 달리는 훈련 있었으니까.
물론 특수하게 만든 신발을 신어야 하기는 하지만, 출렁거리는 수면에 비해 겨우 늪 위를 뛰는 것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검사님, 방금 벌레들이 왜 후드득 떨어진 거야?”
“벴으니까요.
“…베었다고? 저 많은 벌레를? 전부? 검으로?”
“예, 나름 좋은 수련이 됩니다.”
솔직히 말하면, 오히려 좀 아쉬운 편이었다.
독충이라고 해 봐야 결국 벌레.
모레를 베는 수련보다는 훨씬 쉽다.
게다가 ‘데스 쉐도우’에서 독에 대한 내성을 기른 내게 독충은 별로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즉사하는 독충이라면 좀 더 긴장감이 생길 텐데.
아쉬운 일이었다.
“검사님. 이거 전부 몇 마리야?”
“세보지 않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서른 마리는 넘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안 지쳐? 저 많은 맹수를 혼자 다 베어 놓고도?”
“별로 많은 수는 아니니까요.”
아무리 사나워 봤자 결국은 짐승.
정예 암살자 100명을 한자리에서 베고 몇 날 며칠에 걸쳐 그 잔당과 사투를 벌였던 ‘데스 쉐도우’의 싸움에 비하면, 이 정도는 기껏해야 딱히 힘든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내가 사고를 치면 칠수록 라쟈는 오묘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리고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물었다.
“…검사님, 진짜 사람 맞아?”
“사람이 아니면 뭐로 보이십니까?”
“약을 잘못 먹었거나, 인체 개조당한 적 있는 가짜 인간?”
“유감이지만 아닙니다.”
“진짜…?”
내가 겪은 고난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라쟈와 떨어져서 홀로 밀림을 헤매거나, 식량을 잃어버려서 벌레와 독사를 잡아먹거나, 폭우 때문에 강에 휩쓸릴 뻔한 등.
3년간 대륙을 돌았지만 이토록 험난한 곳은 처음이었다.
라쟈가 길을 잘 안내해 주지 않았다면 정말 목숨이 위험했을지도 몰랐을 만큼.
어째서 남부 밀림이 최악의 험지로 불리는지 몸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던 나날이었다.
하지만 어떤 고난에도 끝은 있는 법.
슬슬 남부 밀림에 익숙해졌을 무렵, 우리는 마침내 쉴 수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두 번째 마을에 온 걸 환영해.”
수많은 굴이 뚫린 절벽에 둘러싸인 채, 그 사이에 발판을 박아 이어 놓은 개미집과 같은 마을을 보며 나는 무심코 물었다.
“두 번째 마을, 입니까?”
“응, 남부 밀림에서 두 번째로 깊은 마을.”
“…여러 의미로 알기 쉬운 마을 이름이로군요.”
“이곳에서는 마을이 망가지는 일이 많거든. 마을 몇 개가 한꺼번에 못 쓰게 된 적도 있고.”
“그렇습니까?”
“응. 그때마다 이름을 짓기는 귀찮잖아? 그래서 그냥 순서대로 부르는 거야.”
“과연, 남부의 풍습이라는 거군요.”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곳까지 오며 직접 겪어 보았다시피 남부 밀림은 더없이 험난한 땅.
불 때문이든, 병 때문이든, 홍수 때문이든 천재지변이 닥칠 위험도 꽤나 많을 것이다.
당장 이 마을만 해도 군데군데 잔해가 보이는 게 몇 번은 무너진 적 있는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도 이렇게 멀쩡히 마을을 재건해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는 주민들을 보면 인간의 생명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이 갔다.
그렇게 마을을 둘러보던 도중.
나는 문뜩 의아함을 느꼈다.
“라쟈. 두 번째 마을 사람들은 혹시 제국인을 싫어합니까?”
“딱히 그렇진 않은데. 왜?”
“왠지 절 피하는 느낌이 들어서 그렇습니다.”
특별히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갈색 피부의 남부인이 많은 이곳에서 제국인인 나는 여러모로 눈에 띄는 편이었다.
실제로 남부에 온 이후, 지나가던 이들은 한 번씩쯤은 나를 힐끔 돌아봤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달랐다.
이 마을에 들어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를 보는 주민들이 한 명도 없었으니까.
“글쎄, 그냥 바쁠 때라 그런 거 아닐까?”
“바쁠 때, 입니까?”
“응. 이제 곧 사냥 대회가 있거든. 첫 번째 마을부터 마지막 마을까지 공동으로.”
“열두 마을 공동이라면, 꽤 큰 대회군요.”
“맞아. 게다가 이번에는 중요한 손님도 있으니까.”
라쟈의 설명에 나는 수긍했다.
실제로 주민들은 모두 바빠 보였으니까.
그 얼굴이 어찌나 진지하던지, 축제에 목숨을 건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싱글거리며 그런 사람들을 지켜보며 중, 문뜩 생각났다는 듯 나를 돌아본 라쟈.
“검사님도 대회에 참가해 볼래?”
“외부인도 참가할 수 있습니까?”
“특별한 참가 자격은 없거든.”
라쟈의 제안을 잠시 생각해 본 끝에 나는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래? 그거 아쉽네.”
내 목적은 어디까지나 검을 수련하는 것.
사냥 같은 것에 허비할 시간은 없었다.
사냥꾼들을 상대로 사냥 기술을 겨뤄 봤자 결과는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렇게 두 번째 마을에서 휴식을 취한 후, 나는 다시 밀림 안쪽으로 향했다.
호수 위에 떠 있는 세 번째 마을을 거쳐 지하에 숨겨진 네 번째 마을을 지나, 강가에 지어진 다섯 번째 마을을 넘어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밀림은 더욱 험해졌고, 제국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온갖 기괴한 재액과 짐승들이 매일같이 나를 덮쳐왔다.
그래도 나는 걸음을 돌리지 않았다.
역경으로 감을 쌓고 격전으로 몸을 단련하며 검의 완성을 위한 걸음을 꾸준히 내디뎠을 뿐.
하지만 그런 나의 고되지만 평온하던 여정은 여섯 번째 마을에 도착한 순간, 급변하게 되었다.
* * *
두꺼운 아름드리나무를 깎아 만든 울타리로 둘러싸인 여섯 번째 마을은 지금까지 본 어떤 마을보다 튼튼해 보였다.
하지만 정작 안전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끄아아아아아아악!!”
여섯 번째 마을이 안전한 곳이라면 이런 비명이 울려 퍼질 리 없었으니까.
도적인가? 아니면 맹수?
며칠이나 밀림을 지나온 끝에 도착한 마을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들은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앞으로 달려 나갔다.
“라쟈, 여기서 기다리고 계십시오.”
“응?”
울타리 때문에 안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 비명만 들어도 위급 상황인 건 분명한 일.
만약 늦으면, 희생자가 생길지도 몰랐다.
문제는 마을을 둘러싼 울타리.
본래 외적을 막아야 할 그것이 어째서인지 입구가 무너짐으로써, 마을 사람들을 가둬 둔 죽음의 벽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달려가던 기세 그대로 검을 뽑아 휘둘렀을 뿐.
만약 다른 검사가 이런 짓을 한다면 보통은 손목이 부러질 것이고 일류 검사라도 흠집만 남기는 게 고작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S. R. 라바일.
일격 필살의 삼대 검류 중에서도, 대륙 제일의 강검을 계승해 온 라바일가의 후예였다.
으득.
온몸의 근육을 활시위처럼 긴장시켜 검을 으스러지도록 단단히 움켜쥐고, 달리며 지면을 세차게 내디딤으로써 체중을 발끝에서 손끝으로 움직인다.
그리하여 굳어 있던 근육이 해방되며 쏘아진 화살처럼 터져 나온 힘을, 체중의 흐름으로 증폭해 검에 담아 휘두른 순간,
콰아앙!!!
산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입구를 막은 울타리의 잔해가 와르르 무너졌다.
“…헤?”
마치 하늘을 나는 돼지라도 본 것처럼 뒤에서 들려온 얼빠진 소리를 흘려 넘기며 무너진 울타리를 넘어가, 사람들을 대피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막상 마을에 들어선 순간.
나는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몸이 좌우로 쪼개진 노인의 시체, 갈비뼈가 남김없이 뽑힌 청년의 시체, 사지가 잘려서 밧줄에 걸린 여인의 시체, 몸 없이 머리만 탑처럼 쌓인 아이들의 시체.
그 외에도 피투성이의 시체, 내장이 튀어나온 시체, 눈이 뽑힌 시체, 불타는 시체, 시체, 시체….
얼핏 봐도 수십 구가 넘을 듯한, 무수한 시체로 새빨갛게 물든, 마을의 모습은 참혹 자체.
검사로서 숱한 죽음을 보아 온 나조차 숨 쉬는 것을 잊을 정도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내가 굳어 버린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으적, 으드득. 쩝.
“끄헉, 끄으윽…!”
좀 전 비명을 지른 장본인인 듯.
눈을 까뒤집고 경련을 일으키는, 본래 중후한 체격이었을 장년인.
그의 활짝 열린 가슴팍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상체를 훤히 드러내고 하체만 겨우 가린 괴한의 모습이 나를 얼어붙게 했다.
저 괴한이 뭘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에.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신 꿈틀거리는 괴한의 울대와 그때마다 경련하는 장년의 사지는.
무엇보다 등을 스치는 오한은, 머리가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나에게 본능적으로 깨닫게 했다.
이것은 ‘포식’의 광경.
인간이 인간을 산 채로 잡아먹는 현장이라는 것을.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이미 괴한을 향해 달려들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부우웅!
“……!”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검은 괴한을 베지 못했다.
막 검이 닿으려던 순간, 괴한이 튕기듯 뒤로 물러났기 때문이다.
타다닷!
두 발과 두 팔을 꺾듯이 놀려 바닥을 기듯이 나로부터 빠르게 멀어지는 그 모습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벌레.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 상리를 벗어난 움직임이었다.
나는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빠르게 괴한을 쫓았을 뿐.
하지만 기어코 괴한을 따라잡아 다시 검을 내뻗은 순간.
카아앙!
나는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본래라면 괴한의 목을 베어 냈어야 할 검.
그것이 기묘하게 휘어진 칼날에 튕겨 나왔기 때문이다.
…쿠크리(Kukri)?
제국 검과는 명확하게 다른, 남부 특유의 유선형의 단검을 이용해 내 검을 흘려 낸 괴한은 공중제비를 넘듯이 화려하게 몸을 뒤집어 지면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나는 섣불리 괴한을 추격하지 못했다.
좀 전에 괴한과 검을 마주친 순간, 검사로서의 감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괴한은 단순한 미치광이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검을 다룰 줄 아는 검사.
그것도 방심하면 내 목숨을 위협할 수도 있는, 일류 검사라는 것을 말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은 하나의 단어였다.
남부 밀림에 들어오기 전.
하르바에게 들었던.
그의 가슴에 무시무시한 검상을 남겨 둔,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숲의 망령.
“…샤하타?”
내가 무심코 입에 담은 이름을 듣고 괴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물고 있던 내장 조각을 꿀꺽 삼키며 입꼬리를 스윽 올려, 붉은 이빨을 드러냈을 뿐.
그 피투성이의 괴한을 보며, 나는 이해했다.
이자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설령 한때는 인간이었을지 몰라도, 이제는 한낱 사람을 잡아먹는 귀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식인귀를 앞두고 내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당신이 누구고, 왜 이런 짓을 벌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만은 말해 두겠습니다.”
나는 똑바로 검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히죽거리는 괴한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제 이름은 S. R. 라바일.”
단지 명예를 떨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라바일 가문의 후예이자 한 명의 검사로서.
그리고 한 명의 인간으로서 반드시 응징해야 할 괴물에게 검을 겨누며, 나는 나직이 말을 끝맺었다.
“당신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할 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