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s being mistaken for a soccer genius RAW novel - Chapter (90)
‘시나브로’라는 말이 있다.
언뜻 듣기엔 영어나 이탈리아어 같기도 하지만, 순우리말이다.
꽤 좋아하는 단어다.
그냥 뭔가 어감이 좋다고 할까.
시나브로, 시나브로.
뜻은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이라고 한다.
피렌체에도 시나브로, 봄이 찾아왔다.
“흐음-”
상쾌한 봄 향기를 폐 깊숙이 밀어 넣으며 훈련장으로 향한다.
겨울 동안 온통 회색이었던 피렌체는 어느새 푸른색으로 얼룩덜룩해져 있다.
“안녕. 오늘도 열심히 해.”
“안녕하세요.”
매번 오고 가는 길, 매번 마주치는 얼굴들이지만 오늘따라 남다른 느낌이다.
원래 봄이 그렇다.
봄이란 새로운 시작이니까.
물론 유럽의 시즌은 여름에 시작해 여름에 끝나지만, 내게 봄은 새로움이다.
사실, 그래서 나는 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새로움, 새 출발.
다른 사람들에겐 듣기만 해도 설레는 단어들일지 모르지만··· 내겐 아니었으니까.
내겐 설렌다기보단 무서움에 가까운 단어들이었다.
왜일까 생각해 보면, 글쎄.
한국에 있을 때부터 그랬다.
그땐 봄이 오면 곧 새 학기가 시작된다는 의미였고, 봄이 오는 기분이 들면 나는 또 학교에 가서 새로운 친구들과 함께 부대껴야 한다는 생각부터 들어 걱정이 태산이곤 했다.
거기서 학습이 된 탓일까.
나는 봄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작년 이맘때도 마찬가지였다.
딱 이맘때, 겨울에서 봄이 될 때 나는 피렌체에 왔다.
피렌체에서 맞는 첫 번째 봄도 나는 반갑지 않았다.
그때의 내겐 회색의 풍경만 눈에 들어왔지, 싹 트는 푸르름을 눈치챌 여유가 없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가 내 눈엔 흑백처럼 보였을 뿐인 거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분명 여전히 날씨는 쌀쌀한 편이고, 눈에 보이는 풍경도 붉은 벽돌들을 제외하면 회색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글쎄.
내 눈엔 작게 싹을 틔워내고 있는 푸르름이 먼저 들어온다.
나는 봄을 꽤 반갑게 느끼고 있었다.
“Buongiorno! 좋은 아침이야, 그렇지?”
단골 과일 가게 주인 아저씨가 봄 같은 인사를 건네오고, 나는 미소로 화답한다.
밖은 봄이 올랑말랑이지만, 이곳엔 확실히 일찍 봄이 찾아왔다.
부쩍 알록달록해진 과일들이 저마다 싱그러움을 자랑한다.
“자, 오늘은 이것도 가져가.”
“뭐예요?”
“올해 첫 자연산 딸기. 너 주려고 매대에 안 내놓고 숨겨 놨지.”
항상 사던 대로 바나나를 비롯한 과일 몇 개를 담는데, 아저씨가 딸기가 든 봉투를 건넨다.
날 주려고 숨겨 놓으셨다니, 그렇게까지 하실 필욘 없는데.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하나 머리를 긁적이고 있으니 아저씨께서 말한다.
“어라. 딸기 안 좋아해? 당분이 너무 많나? 몸 관리하는데 별로인가?”
“아, 아뇨. 딸기 좋아해요.”
“그래? 그럼 다행이네. 하하!”
딸기 좋아한다고 하자 아저씨가 환히 웃는다.
사실 좋아하진 않지만 싫어한다고 말하기엔 왠지 미안한 눈빛이었다.
나도 이 정도 눈치는 있다.
“올해는 봄이 엄청 일찍 왔지 뭐야.”
기분 좋게 뒷짐을 지고 문 앞에 선 아저씨가 밖을 바라본다.
한껏 봄 내음을 들이마신 아저씨는 나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이러다 백합도 일찍 피겠어. 아, 아니지. 이미 피었잖아. 여기, 이렇게 아름다운 백합이. 하하! 덕분에 딸기도 착각하고 일찍 나왔구나. 여름에 피는 백합이 이렇게 만개했으니, 자기가 늦잠을 잔 줄 알았을 거야.”
“···”
그렇게 말하며 내 어깨에 손을 올리는 아저씨에게, 나는 속으로 감탄한다.
지금은 그저 배 나온 동네 아저씨로 보이지만, 이 아저씨도 이탈리아 남자였다.
내가 여자였다면 심장이 콩콩 뛰었을지도 모르겠다.
···남자라서 정말 다행이다.
“몸은 좀 어때? 힘들지?”
그러나저러나, 아저씨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날 앞에 두고 축구 이야기를 시작하신다.
이번 주 경기는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지, 다들 컨디션들은 괜찮은지.
나는 성심성의껏 대답하는 것으로 항상 챙겨주시는 덤에 대한 보답을 한다.
“아, 근데 말야. 이번에 한 토탈리 풋볼 봤어?”
“···그게 뭐예요?”
“티비는 잘 안 보는구나. 그 있어. 배 나온 아저씨들 나와서 축구 얘기 떠들어 대는 거. 거기에 네 얘기가 나오더라고.”
“···제 얘기요?”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 끄덕임에서 왠지 뿌듯함이 느껴진다.
“우리 피렌체의 자랑, 리가 세계 최고의 재능이라더라. 전문가라는 양반들 눈도 나랑 별다르지 않은 모양이더라고.”
“하하···”
“말로는 전 세계 공격수 중에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던데, 열 손가락이 뭐야. 내가 볼 땐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고.”
훈련장은 걸어가는 걸로 충분한데.
무려 비행기까지 태워주시는 아저씨 덕에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인다.
하지만 비행기는 이제 막 이륙을 했을 뿐이다.
“대단해, 대단해. 전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니.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거잖아. 나도 마찬가지지. 신의 선택을 받은 분께서 항상 내 가게를 찾아주시니까.”
···온몸이 간지럽다.
“뭐 보니까 챔피언스 리그 때문에 세리에가 위기다 뭐다 말들이 많던데, 내가 볼 땐 아냐. 세리에 대표가 나가서 깨졌으면 위기가 맞지. 근데 이번엔 대표가 안 나갔잖아. 우리가 없으니 이번 챔스는 무효야.”
···어째 지우와 똑같은 말을 하시는 아저씨다.
“다음에 꼭 보여줘야 돼. 알겠지? 이탈리아 최고의 팀은 우리 피오렌티나라는 걸.”
“···그럴게요.”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하자고. 나는 피렌체의 과일이 최고라는 걸 알리고 있을 테니, 너는 피렌체의 백합이 최고로 아름답다는 걸 유럽에 알리도록 해줘. 이걸 우리만 알고 있을 수는 없잖아.”
씨익 미소를 짓는 아저씨에게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런.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았네. 그럼 잘 가!”
“내일 또 올게요. 딸기 잘 먹겠습니다.”
꾸벅 아저씨께 인사를 한 뒤, 두둑한 과일 봉투를 옆구리에 끼고 훈련장으로 향한다.
그러면서 아저씨가 해준 말을 곱씹어 본다.
신의 선택을 받았다니.
슬슬 성당에 한번 나오라고 말씀하실까 봐 상당히 긴장했다.
“흠.”
그나저나, 이 딸기는 훈련장 냉장고에 잘 넣어 놨다가 집 가서 지우나 줘야겠다.
지우는 딸기를 좋아하니까.
ㆍㆍㆍ
와아아아아아─
관중들의 옷차림이 눈에 띄게 가벼워진 무렵, 우리는 AS 로마를 홈으로 불러들였다.
“주도권 꽉 잡고 풀어나가 보자! 우리가 지배해 보자고!”
“챔스 가자!”
“오케이!”
“포르자-!”
“비올라─!!”
파이팅을 외치며 각자의 자리로 흩어진다.
다들 오늘따라 의욕이 더욱 넘치는 모습이다.
모두 압도적인 승리를 원하고 있다.
지난 전반기 때, AS 로마와 꽤 어려운 경기를 펼치며 간신히 무승부를 거두었던 우리였다.
나도 그때의 기억이 난다.
쉽지 않은 경기였다.
어쩌다 보니 나는 상대 에이스와 빈번하게 부딪혀야 했고, 굉장히 고전했었다.
그 때문에 나 스스로에게 화가 많이 났던 기억이 있다.
단순히 제 플레이를 못 했기 때문이라기보단, 제 플레이를 하지 못한 걸 나이 탓으로 돌리며 핑계만 대는 내 모습이 추하게 느껴져서 화가 났었다.
축구를 하면서 나 스스로에게 그 정도로 실망했던 건 그때가 아마 처음이지 않을까.
덕분에 그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 있었고, 오늘은 다른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언젠가 감독님이 한 선배를 혼내면서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한 번은 실수지만, 그게 두 번이 되면 실력인 거라고.
무슨 상황에서 그 말이 나왔던 건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왠지 모르게 훅 꽂혔던 말이다.
한 번은 실수고, 두 번째부터는 실력이다.
리그가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눠져, 한 팀과 두 번의 경기를 치르는 시스템인 건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 시스템이 마음에 든다.
실수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과거에 붙어본 상대와 다시 붙을 때, 느끼는 게 많기 때문이다.
마치 지우를 매일 볼 땐 느끼지 못했지만, 3년 만에 봤을 땐 달라진 걸 느꼈던 것처럼.
몇 달 만에 다시 붙는 상대도 내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느끼게 해주니까.
시나브로 흘러가는 시간을 느끼는 건 어렵지만, 오늘 경기를 통해 나는 시간은 흘렀음을 확인하고 싶다.
삐이이익-!
휘슬이 울리고, 공을 뒤로 보내면서 경기를 시작했다.
*
AS 로마의 주장, 로렌초 펠레그리니는 지난 리그 11라운드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주제 무리뉴라는 걸출한 명장과 함께 새 시즌을 시작한 로마는, 당시 쾌조의 출발을 보이며 기세를 올리고 있던 중이었고.
펠레그리니 본인 역시 최상의 폼을 자랑하고 있던 때였다.
한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부상도 모두 나은 상태였고, 몸 상태도 최상일 정도로 좋았다.
그때의 기분으로만 놓고 본다면 누구든 상대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 찍어누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던 당시의 펠레그리니였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서 피오렌티나를 홈으로 불러들여 경기를 치렀었다.
그리고 펠레그리니는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선수들도 다 이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는데,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선수에게 매우 고전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단순히 고전이라는 말로 퉁치기엔 너무 주관적인 평가일지도 모른다.
경기는 비기긴 했지만, 개인의 활약을 일 대 일로 놓고 비교해 봤을 때.
자신의 패배가 분명했으니까.
그러나 더욱 충격인 건, 그 선수가 고작 열여섯 살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후에 알고 보니 그 경기가 1군 데뷔 후 3번째 경기였다고 했다.
대체 이게 무슨 재능이란 말인가.
두려움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정말로 두려웠던 부분은, 녀석의 전반과 후반이 눈에 띄게 달랐다는 점이었다.
그래. 뭐, 전반전엔 자신이 판정승을 거뒀다고 볼 수도 있었다.
볼 경합에서도 꾸준히 이겼고, 주도권을 계속 쥐고 있으며 경기를 이끌기도 했으니까.
전반엔 그저 이 친구 앳된 얼굴에 비해 공 좀 차네, 정도가 솔직한 감상이었다.
다만 후반전이 시작된 뒤, 녀석은 다른 선수가 되어있었다.
훨씬 더 빠르고 재치 넘치며 시야가 넓은 선수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후반을 녀석에게 내어줬다.
그 잠깐 사이에 녀석은 실시간으로 성장했고 자신을 찍어누른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 펠레그리니는 조금 두려운 마음이 컸다.
전반전에서 후반전으로 향하는 그 잠깐 사이에도 그렇게 성장을 해버리는데, 과연 지난 몇 달간 녀석은 얼마나 더 성장을 했을까.
그 날이 워낙 인상 깊어, 꾸준히 멀리서 지켜봐 왔기에 알고는 있었다.
당시엔 녀석을 아는 사람이 몇 명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모두가 알 정도가 되었다.
그러니 무섭게 성장했으리라는 것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다.
허나, 경기가 시작되고.
공을 잡은 이지안과 처음으로 맞닥뜨린 펠레그리니는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지난 11라운드로부터 지금까지.
시간이 꽤 흘렀다는 것을 말이다.
타타탓-!
마치 자석으로 붙인 듯, 공을 발에 붙이고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이지안을 펠레그리니가 바라만 본다.
발을 쓸 수도 없고, 손을 쓸 수도 없었다.
그 몇 달의 시간 동안 격차가 이렇게나 벌어졌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