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109
◈ 신공 (3)
“저는요?”
여명의 희미한 빛과 함께 얼굴을 들이민 소녀가 있었다.
고양이마냥 살금살금 침소의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정연신은 신빈빈인 줄 알고 출수할 뻔했다.
눈망울이 더 컸다. 직속 후배인 신소빈이었다.
신빈빈과 신소빈. 근래에 마광익과 순천익으로 갈라졌다 해도 신씨세가에서 어린 시절을 연마한 자매다.
기척이 유사했다. 정연신이 운기에 더 침잠해 있었다면 정말로 손을 뻗었을 것이다.
마침 운기조식을 마친 그는 가부좌를 풀고 일어섰다.
‘곧바로 출발하면 돼.’
시간이 됐다. 약조한 대로 모두 모여 있을 터였다.
“섬예 선배, 저는요?”
신소빈은 그가 마광익 전각을 나설 때까지 졸졸 따라왔다.
마광익의 무명제자들이 정연신을 배웅하는 순간에도 그의 얼굴만 바라봤다.
“형, 다 쥐어패고 와야 해!”
“사천 촌놈들이 거치적거리면 모조리 베어줘! 마광결이 얼마나 고절한지 보여 주면서 말이야!”
“다른 오라비들도 꼭꼭 데려와 줘요. 명명(明明) 오라비랑 창 오라비가 보고 싶어…….”
청명과 헌원창을 입에 담은 소녀의 음성이 구슬펐다. 청명은 마광익에 오래 있었다.
명족으로서 용모까지 빼어난 덕에 무명제자들에게 애칭으로 불렸다.
헌원창 역시 특유의 넉살 좋은 성품으로 인기가 많았다.
정연신은 아이들을 묵묵히 한 번 쓸어본 뒤에 문을 나섰다.
순간 신소빈이 그의 소맷자락을 슬쩍 잡으면서 따라왔다.
“저도 데려가 줘요. 꼭 도움이 될 테니까.”
“아이들을 보살펴야지.”
그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신소빈의 눈매가 시무룩하게 내려가는 가운데, 정연신의 곁에 있던 태염룡이 거들었다.
“보모 역할로 남았던 거 아니었나? 애들 무공도 봐 주고. 뭐, 막내가 다 그렇지. 아…… 혼잣말이외다.”
“무명제자가 지금…….”
“다 큰 철족만 한 계집애가.”
“뭐라고?”
둘이 티격태격하는 사이에도 정연신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이내 입황성의 정문에 당도했다. 순천익의 두 사람이 먼저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남궁화신과 신빈빈이었다.
“빈빈. 어디까지 따라올 참이지?”
문득 고개를 돌린 남궁화신이 무심한 표정으로 물었다. 허나 신빈빈의 기색은 태연했다.
“사천까지요, 가가.”
“무명 아이들이 붙잡았을 텐데.”
“내가 가겠다는데 어쩌겠어요? 걔네 수발을 들어줄 시종과 무인들을 가문에서 들여왔으니, 난 분명히 내 할 몫을 한 거예요. 걱정거리가 없죠.”
그녀의 얼굴은 몹시 도도했다. 허나 위풍당당한 태도는 거기까지였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정연신을 본 순간, 신빈빈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삽시간에 온갖 감정들을 내비쳤다. 두려움과 무력감은 물론, 옅게 홍조를 띤 신색에서 수치심마저 보였다.
소년은 생각했다. 남궁화신에게 저간의 사정을 들은 모양이라고.
굳이 더 나눌 이야기는 없다. 정연신은 남궁화신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남궁 소협.”
“정 소협.”
마주 답례한 남궁화신이 다시 입을 열었다.
“본 무력대의 수장이 소협이오. 기강이 바로 서야 마땅하니, 혹여라도 임무 수행 중에 우리 순천익 무사들이 항명하는 일이 생긴다면, 본인이 나서서 참하겠소.”
성품이 올바르다 하여 유약하지는 않다. 칼처럼 벼려진 모습이었다.
신빈빈 역시 고개를 푹 숙인 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예.”
정연신은 짧게 대답하고 그들을 스쳤다.
옆에서 신소빈이 제 언니의 얼굴을 생경하게 바라보는 한편으로, 태염룡이 남궁화신을 묘하게 응시했다.
“오랜만이군.”
“그렇소.”
청기린 남궁세진이 태염룡의 친우였다고 했다. 남궁화신과 태염룡 또한 안면이 있어 보였다.
정연신은 문득 태염룡이 남궁세진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졌지만, 우선 뇌리 한쪽으로 밀어뒀다.
스스스―
열린 시야로 한가득 들어오는 기파의 향연이 엄청났다.
정연신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공력과 함께 기백을 내보인다.
섬예 일맥의 무사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약조한 시간보다 이르게 왔는데도 전원이 자리한 듯했다.
푸르륵거리며 투레질하는 준마들도 함께였다. 이미 모든 채비를 마친 것이다.
“종사.”
“오셨나이까.”
그들의 포권은 기관 장치 같았다.
모아 쥔 양손을 올리면서 고개를 숙이는 몸짓이 동시에 이루어졌는데, 소림사의 십팔관문에 있다는 금강동인(金剛銅人)을 떠올리게 했다.
견식이 없음에도 어렴풋이 저렇지 않을까 싶었다. 존중을 담은 품행이 사뭇 장중해 보일 정도였기에.
“허어. 정말이로군.”
대총관 임진명이 탄식했다.
무사들만 모인 게 아니었다. 총관부 문사들이 구출대를 배웅하기 위해 왔다.
어젯밤 되돌아온 정연신에게 출행 명단을 받고, 긴가민가하면서 조건부 재가를 해 준 참이었다.
명단의 인원이 사실이라면 임시 무력대로 인정하겠노라고.
“섬예 무맥이라…….”
고개 숙인 무사들을 본 대총관은 자신의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입황성 천금무고에 무공을 증여한 이들이 적지는 않았으나, 이처럼 사람 한 명을 종사로 모시는 일은 없었다.
대총관이 정연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 소협.”
“예, 대총관.”
“복귀 시에 이들을 온전히 데려오시고, 소협의 성취와 공적이 더욱 커진다면…….”
머릿속으로 무슨 광경을 떠올린 걸까.
일순간 대총관의 눈에서 이채가 번뜩인 듯했지만, 그는 끝내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저었다.
“부담을 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임무 출행을 정식으로 허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연신은 즉각 대답했다. 대총관이 빙그레 웃었다.
“임시 무력대인 만큼, 마광익의 귀환을 바라는 의미에서 ‘환익대(還翼袋)’로 명명하지요. 최선은 마광익과 동반 생환, 차선은…… 흉수들의 신원을 찾아내는 것. 두 가지로 문건을 올리겠습니다.”
“둘 모두 해내는 게 맞겠습니다.”
정연신이 대답했다.
무던한 목소리에 스민 살기를 느낀 건지, 일순간 기감이 예민해 보이는 몇 사람이 몸을 흠칫했다.
실제로 소년은 대총관이 언급하지 않은 세 번째를 염두에 뒀다.
‘복수.’
대총관은 별달리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본성이 건재하다는 걸 알리는 것 역시 중요하지. 이 천고의 기재가 거기까지 해낼지, 혹은 험한 사천 땅에서 다 함께 쓰러질지는 아직 모를 일이나…….’
이미 청색고수다. 독자적인 동선을 가져가도 무방한 위계였다.
거기에 새로운 무맥을 만들어내고 있다.
총관부에서 임무를 재가할 수는 있으나, 정연신의 행동강령마저 멋대로 규정할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입지가 아득히 높아졌다.
대총관은 어느새 몸을 돌려 멀어지는 섬예의 등을 응시했다.
이내 그 뒤를 따르기 시작한 정식무사들의 뒷모습이 하나둘씩 더해졌다.
무복 옷자락들이 스치는 가운데, 여러 허리춤의 검파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울렸다.
표한 풍취가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대총관 임진명의 입술이 살짝 떨어졌다.
“정 소협.”
“……?”
정연신이 살짝 돌아봤다. 대총관의 말이 이어졌다.
“성주께서는 지금 북경에 올라가 계신데, 제자에게 전언을 보내셨습니다. 오늘 새벽에 도착했지요.”
“…말씀해 주십시오.”
“여기 있습니다.”
대총관의 품에서 돌돌 말린 종이가 나왔다. 그가 정연신을 향해 서찰을 슬쩍 던졌다.
내공이 실린 듯 곧게 날아온다.
섬예 일맥의 무인들이 분분히 몸을 피했다.
곧장 종이를 잡아서 펼쳐 든 정연신의 눈동자가 내용을 훑었다.
해서(楷書)의 글씨체로 쓴 글귀였다. 단정하면서도 유려했다.
[빚어낸 흐름에 의념을 담으라. 신공(神功)으로 호흡한다면 검은 위계에 오르리라.]“…….”
그녀의 영롱한 음성이 귓전에 울리는 듯했다. 묘한 기분이었다.
“뭐라 쓰여 있누?”
고개를 빼꼼 내민 태염룡의 머리채를 신소빈이 끄집어당겼다.
과격한 몸짓과 별개로 눈망울에 우울함을 담은 그녀가 말했다.
“섬예 선배, 몸조심히 다녀와요.”
“그래.”
입황성주의 두 번째 가르침을 품에 넣은 정연신이 몸을 돌렸다. 마침내 출정이었다.
* * *
두두두!
말발굽 소리가 천둥 같았다. 익숙해진 소음이었다. 준마 위에서 보름을 넘게 들었으니.
‘고마웠다.’
정연신은 눈을 까뒤집은 말의 목덜미를 쓰다듬어주었다. 동시에 준마의 등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기동수단의 전환이다. 사천은 길이 험했다. 이제부터는 경공이 효율적이었다.
파악!
짓밟은 땅 밑에 발자국이 새겨졌다.
소년의 등 뒤로 함께 날아올라 떨어져 내린 무사들도 곧장 경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다 왔어.’
정연신은 생각했다.
사천성 기주부를 주파하고 있었다. 동쪽에 있는 호광성에서 사천성 초입에 닿았다는 의미였다.
그동안 쉴 새 없이 말을 바꿔 탔다. 마지막 역참에 닿기도 전에 체력이 다한 말들은 방금 모두 버렸다.
파악! 파아악!
주저 없이 대지를 찍어대는 달음박질이 쏜살같았다.
청명이 알려준 몸놀림의 묘리를 경공에 녹였다. 대기를 질풍처럼 찢어발기면서 질주하는 보신경이었다.
소년을 추적하듯 뒤따르는 고수들의 기파도 화려했다. 입황성 환익대였다.
사천 촉도(蜀道)에 진입한 이후 알음알음 입소문이 퍼졌다.
웬 입황성의 고수들이 무서운 기세로 사천성을 횡단하고 있노라고.
“이보쇼, 임시 대주.”
오른편에서 태염룡이 얼굴을 불쑥 들이댔다.
무한정으로 불어난다는 태양신맥의 공력에, 정연신보다 오래 연마한 황보세가의 절학 성취.
경공을 펼치면서도 몹시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말해.”
“이제 곧 당도할 텐데, 미리 알아 두실 게 있소.”
“얘기해.”
정연신의 짧은 대답에 태염룡이 흐릿하게 웃었다.
“임시 대주의 배려대로 편히 말하겠소. 음, 이 몸의 처지에 관한 얘기인데.”
“…….”
“아시다시피 내 빌어먹을 가문이 거하게 사고를 친 탓에, 입황성이 황보가를 반역죄로 다스리지 않았소? 이러면 원래는 소가주쯤 되는 화상이 살아남을 수가 없단 말이지.”
그것에 대해서는 정연신도 조금쯤 궁금했다.
아무리 앞날이 유망한 기재라 해도, 태염룡은 단명이 정해진 자였다.
심지어 그 사실이 널리 알려지기까지 했다. 태양신맥이란 이름으로.
“사로잡혀서 죽을 날만 기다리던 중에, 어찌어찌 살아나오긴 했지. 헌데 아직은 본인의 입지가 몹시 애매하단 말이오. 막말로 입황성에서 본인을 신뢰하는 이가 얼마나 되겠소? 입황성주의 명령을 믿는 거지. 얼마 남지 않은 삶을 불신 속에서 살아간다? 이거 정말 유쾌하지 않은 거라오.”
“……그래서?”
“가치를 증명해야 한단 말이지. 우리 섬예 나으리 앞에서.”
태염룡의 웃음이 짙어졌다. 그가 정연신의 옆모습을 보며 말했다.
“내가 무슨 꼴을 하든 놀라지 마시오.”
“…….”
그렇게 반나절을 더 질주했다.
태염룡의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는 그때서야 알 수 있었다.
칼바람이 휘몰아치는 단애 위에 환익대가 당도했을 때였다.
마광익의 종적이 끊겼다는 절벽에, 웬 거지들이 둘러앉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렸습니다.”
주섬주섬 일어선 이들 가운데 거지 청년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추레하게 생긴 얼굴에 기름기가 가득했다. 웬 고기 냄새까지 묻어나왔다.
허나 환익대 무사들 중 누구도 그를 얕보지 않았다. 거지의 허리춤에 매인 끈의 매듭이 여섯 개인 까닭이었다.
“육결(六結). 개방의 작은 주인이로군. 종사여, 저자는 개방 후개(後丐)요.”
정연신을 보필하듯 뒤에 선 홍주검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개방.
흔히 구파일방이라 일컬어지는 대방파 중 일방(一幇)이다.
무공을 익힌 온 천하의 거지들이 모여 그물 같은 정보망을 이뤘다는 방파였다.
“어제, 당문의 쌍둥이 천재가 왔다 갔는데, 오늘은 황실의 보검들이 모습을 드러내는군요.”
양손을 과장스레 펼친 청년 거지, 후개가 말했다.
무림인의 입에서 황실의 보검이란 수식어가 나왔다. 칭찬이 아니었다.
명 황실과 입황성은 대외적인 연계를 부정하고 있으니, 뼈가 있는 말로 받아들이는 게 맞았다.
정연신의 관심사는 아니다. 말꼬투리를 잡을 여유가 없다.
“당문?”
소년은 총관부의 보고서를 떠올렸다.
마침 마광익의 발자취 끝에 당문 절기로 짐작되는 흔적이 남았다고 했다.
중원 전역의 무림인들이 다 알 만한 신공절학, 만천화우가 그것이었다.
“오, 백기린에 태염룡까지. 들은 말이 참말이었군요. 백기린은 용모파기보다 잘생겼고, 태염룡의 양귀비도 싱싱해 보입니다그려.”
후개가 씩 웃으며 환익대를 훑어봤다. 꿍꿍이를 짐작하기 힘든 말투와 품행이다.
정연신의 눈매가 가라앉았다.
그때였다.
타악―!
후개의 뒤통수가 훅 내려앉았다. 어느새 놈의 옆에 선 태염룡이 속삭이고 있었다.
“그래서, 당문의 천재라는 게 누군데? 걔넨 여길 무슨 일로 왔었고?”
“지금 무슨……!”
후개의 억눌린 외침은 완전히 터져 나오지 못했다.
곧장 태염룡의 손바닥이 다시 한번 머리를 후려갈긴 까닭이었다.
이번에는 대기마저 일그러뜨리는 열기가 화악 끼쳤다.
쿵!
후개의 몸이 개구리마냥 철퍽 엎어졌다.
그가 순간적으로 일으킨 무형의 호신기(護身氣)까지 통째로 짓뭉개진 후였다.
땅을 타고 울린 진동이 상당히 강했다.
후개의 머리맡에 태염룡이 쭈그려 앉았다.
“양귀비―쟁이들이 으레 이렇게 헛손질을 하곤 하지. 혹시 처음 보나?”
실실 웃으며 묻는다.
그게 시작이었다. 환익대가 사천 무림에 왔다. 복수의 칼을 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