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264
◈ 무서(武書)의 주인
일 년 전, 십삼천 여령주가 후계자에게 명했다.
―무림을 두루 공부하거라. 천하가 넓다.
큰 계략으로 움직이던 차였다.
소령주는 새삼스럽지 않은 이야기를 새로이 받아들였다.
그의 사부는 언질 한 번에 특별한 의중을 담곤 했다.
저의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곁에 두지 않았다. 전대 소령주가 다섯 명일 정도였다.
오래된 입황성 멸문의 대계를 이루고자 동분서주하던 와중이었으니, 마땅히 황실의 검부터 살피는 게 옳았다.
섬예 정연신을 알게 됐다. 입황성과 남궁세가의 생사결 비무를 기점으로 해서다.
업적이 놀라웠다. 비무의 승리 따위가 아니라, 그만한 적수의 호의를 샀다는 데서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청기린 남궁세진은 여러 대방파의 작은 주인들이 강호 질주의 경쟁자로 여기던 인물이다.
앞을 다투는 호걸들의 세상에서 인망과 자질로 앞서나가던 자. 환강이란 이름은 다른 경쟁자들이 살아서 얻지 못할 유산이었다.
섬예에 대한 혈염교 칠사도의 행적 또한 사마외도의 젊은 무인들에게 질시를 일으켰다.
입황과 남궁이 벌인 일의 시발점이 그녀가 자행한 섬예 납치였다.
헌데 정연신은 멀쩡한 신색으로 이전보다 강해진 채 돌아왔다. 두 사람의 이후 행적을 살펴보면 겹치는 동선마저 일부 존재했다.
―그녀는 본래부터 요주의 인물이었습니다. 무인으로서 터무니없이 일찍 완성되었는데도 혈염교에서 가장 고귀한 피를 타고나지 않았습니까. 진혈지체 태생으로 천하 모든 혈공의 우위에 있으니, 자질이 대종사에 준한다는 풍문을 지닌 섬예와의 접촉은…….
―알아만 두지요. 지금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소령주는 여러 보고들을 사무적으로 받아들였다.
―입황성주가 직접 현현하여 혈염교 본단을 멸문시킨 판국이니, 섣불리 모함 따위를 벌였다간 그녀의 시선이 이쪽을 향하는 수가 있어요. 아직은 때가 아닌 거죠. 어차피 성주와 천하목의 쇠락은 머지않았습니다. 구태여 등선 직전의 무신(武神)을 자극하지 말고, 양양보다는 신강을 살피세요. 그 소교주 말이에요.
―명을 받들겠습니다.
명나라 강호를 압제하는 입황성의 시대.
무법자들이 기를 펴지 못했다. 뭇 글귀와 서책에서 얻는 지혜가 무공만큼 귀히 대우받았다.
여령은 둘 모두를 중시했다. 음모와 협잡에 능한 대방파였다.
소령주도 그러한 기질을 이어받았다.
글자와 검을 동시에 다루는 자에게 으레 깃드는 오만이었을까. 혹은 강호 질서의 바깥에서 들어온 존재를 주시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전대 소령주들의 실각을 보고도 섬예의 비범함을 조금쯤 외면했다. 청기린과 칠사도? 사문이 쇠한 자들 아닌가.
강호의 하늘은 넓다. 무수히 많은 혜성을 지녔다. 신예의 등장이란 빈번히 벌어지는 일이었다.
지녀서는 안 될 자세로 사부의 과제를 미루었고, 섬예가 흑색 장포를 입은 뒤에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탐독하는 자세를 가졌다.
제삼자의 위치였다. 사마외도 십삼천의 작은 주인은 자신의 옹졸한 민낯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여유롭게 섬예의 일을 해결하고자 했다.
―황실의 새로운 검이 이리 강해져선 아니 될 노릇이에요. 삭초제근하지요.
그리고 지금에 이르렀다.
콰아아아아―!
여령 비전의 암동월시법(暗動越時法)이 짧은 순간을 수십 번 쪼갰다.
안구에 투영된 상이 겨우 뇌리에 와닿고 말 시간.
신형이 분절된 듯 보이는 마광익주가 수왕문주의 오른팔을 베어올리고, 곧장 일 합 승부를 걸어 소령주를 지키던 호법의 상반신마저 갈라낸 직후였다.
설원에 새하얀 폭풍이 일어나 햇볕을 산란시키고 있었다. 살갗을 저미는 충격파가 실로 무지막지했다.
섬예 정연신.
소령주의 시야를 채우며 급격히 커져 온다.
이 순간이 워낙 찰나에 가까운 까닭일까. 너울지지도 못한 채 번개마냥 뻗친 흑색 옷자락이 인상적이었다.
거대한 벼락의 연꽃이 그 몸을 감싼 채 무색으로 일렁이는데, 누가 봐도 괴력난신에 가까웠다.
섬예는 뒤돌아 승부의 결과를 확인해 보지도 않았다.
그래도 되었다. 실제로 여령에서 무위로 손꼽히던 호법은 방파대전 결전병기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으니까.
그녀는 자신의 소령주를 향해 눈을 돌리다 쓰러졌다. 즉사였다. 끝내 시선이 마주치지 않았다.
소령주는 불현듯 의문했다.
‘혼자서 입황성 흑색에 맞설 초고수들을 몇이나 베는 거지?’
그리고 자신에게 물었다.
‘내가 싹이라고 했나? 저자를 일컬어…….’
영천검귀의 어검 한 수를 도움받는다 하여 귀백신검을 격살할 수 있는가?
상극진기를 지녔다는 가정하에 섬서제일마와 승부를 결할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하늘의 실수에게만 허락된 기량이다.
저도 모르게 마음 깊이 가라앉혔던 것.
소령주는 비로소 시기와 질투를 온전히 실감했다. 무시무시한 전율로써 질주해 온 검광과 함께였다.
대적 불가. 열이 뻗치도록 수려하고 앳된 얼굴이 금세 가려진다.
새까만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무심히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압도적이었다. 시퍼런 빛줄기가 벼락처럼 눈앞을 가득 채웠다.
푸확―!
* * *
능선을 타고 눈발이 휘날렸다.
새하얀 산바람에 깃든 마른 솔잎들이 서로 부딪치고 떨어진다. 산등성이의 설원 위로 선명히 끼치는 겨울 소리.
싸움이 멎었다. 입황성 흑색을 논할 만한 초고수 둘이 쓰러진 이후였다.
극강의 검객이 눈바닥에 머리를 묻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소령주가 강호를 독보하는 데 크게 일조한 자가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몹시 서늘한 죽음이었다.
한쪽에서는 수왕문주 위세혁이 눈을 까뒤집은 채 비어버린 오른쪽 어깻죽지를 쥐고 있었다.
몸 자체가 완전히 굳은 채 죽음에 이르렀다. 마광익주가 발한 검격의 여파가 중상을 심화시킨 것이다. 무지막지한 고통에 명줄을 놓은 모양새였다.
그리고 소령주가 바닥에 몸을 누였다.
“크, 크하…….”
귀공자의 비단 옷자락이 대각선으로 갈라져 있었다. 검격이 뇌전처럼 거침없이 달려간 흔적이었다.
소름 끼치도록 날카로운 궤적에서 핏물이 배어 나왔다. 돌이키기 힘든 치명상. 이 세상과 저승길 삼도천을 이어 붙이는 검로였다.
소령주는 한차례 각혈한 뒤에 겨우 입술을 뗐다.
“어찌하여, 일격에 참하지 않았지……?”
“천년하수오.”
정연신은 담담히 대답했다.
전신을 둘러쳤던 종극뢰의 꽃이 사라진 뒤였다. 지금의 기량으로는 더 오래 잡아두기 힘들었다.
장 체내에서 혈도를 조이고 세맥을 찢을 기세로 일어나는 고통부터 견뎌야 했다.
‘아파.’
그는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 적들은 아직 지천에 깔려 있으니, 허장성세라도 부려야 마땅했다.
“말해라. 어디에 뒀지?”
“크, 크흐… 여기서 내가 죽는다 해도, 당신이 패검종주를 감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야. 어찌 피해서 산을 내려온다 해도… 우리 령주께서 복수에 임하시겠지. 애초에 이 일… 내 스승께 명을 받았다.”
“고맙다.”
“……!”
정연신은 눈을 부릅뜬 소령주의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놈의 품에서 영묘하게 흘러나온 기운을 느끼자마자 목곽을 잡아채 올렸다.
가까이에서 시천법을 발동하고 있던 차였다. 기운의 흐름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과연, 괴물이 따로 없군…….”
소령주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얻는 게 끝이 아냐. 오히려, 강호에서는 그게 시작이지. 지키는 게 더 문제일 거다. 화산파 장문인도 걸음했다 하던데…… 화산검절이 병상에 누운 지금, 네게 영초를 허락할지 모르겠군.”
“한 뿌리가 아니지 않나? 내 길벗이 말하길, 영초로 향하는 지맥이 이어진다던데.”
“…….”
돌연 언급된 약초꾼 장순일의 기척이 뒤에서 움찔거렸다. 정연신은 개의치 않고 검을 들어올렸다. 천천히 말을 덧붙이면서였다.
“병을 줬다고 약까지 함께 선사하는 경우는 좀처럼 없던데, 네가 하늘보다 너그럽군.”
“사람의 속을 뒤집는 데 일가견이 있다더니…… 끝내라.”
소령주가 입매를 비틀어 올린 순간이었다.
푸욱 하는 소리가 스산하게 울렸다. 북명검이 놈의 몸통을 꿰뚫고 눈바닥에 내리꽂힌 것이다.
입황성의 무인들의 손속은 군부 못지않다 했다. 정연신도 마찬가지였다. 조카의 목숨을 이용한 십삼천 소천주에게 내릴 자비는 없었다.
놈의 등 주변으로 붉은 핏물이 스민다.
고수들의 귓가에는 눈 녹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소령주의 자그마한 웃음과 함께였다.
“마광익주… 당신은 싹이 아니야. 신령스러운 영초다.”
“뭔.”
“그리고, 강호에서 자라는 영초는 대개…….”
누군가의 손에 뽑히기 마련이지. 소령주는 말을 채 잇지 못했다. 마광익주가 복부의 검을 역수로 뽑아 올린 까닭이었다.
크나큰 신음이 토해졌다. 기력을 완전히 잃어가면서, 색색거리는 숨소리만 내뱉었다.
소령주는 툴툴 웃었다. 내 질시는 끝이 없군.
사박.
정연신은 말없이 몸을 돌렸다. 놈의 숨이 끊어지는 순간을 확인한 뒤였다.
북명검을 크게 한 번 털어냈다.
후두둑.
핏물이 일직선으로 흩뿌려진다. 수왕문과 십삼천의 무인들 일부가 지레 놀라 뒷걸음질 쳤다.
광활한 지방에서 강자로서만 행세하던 놈들이 보일 행태가 아니었다.
종극뢰가 그만큼 인상적이었던 걸까. 산등성이에 남아있던 백도의 무인들도 몸을 사리는 눈치다.
어차피 그들에게 눈길을 줄 여유는 없었다. 휘두름 한 번조차 크나큰 반동을 선사하는 판국이었다.
수백 개의 바늘이 팔 안쪽을 찌르는 듯한데, 거슬리는 고통을 감내하자니 다른 인물들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강한 척 다리를 옮겨야 했다.
“가자.”
멀리 서 있던 장순일과 북궁 남매를 향해 말했다.
이번에는 양쪽의 반응이 반대로 갈렸다. 빙궁 귀족들의 표정은 장순일과 달랐다.
그저 벙찐 약초꾼 소년과 같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뚜렷한 이목구비로 몹시 큰 감흥을 드러냈다. 동경마저 다소 비칠 정도였다.
“언제고 얼음 궁궐에 방문해 줬으면 해.”
“궁주께서도 고드름 칼보다 날카로운 성정을 억누르실 거다.”
네 사람의 걸음은 조용히 이어졌다.
누구도 감히 추격해 오지 못했다.
한동안 뽀드득거리며 눈 밟는 소리만 울렸다. 새하얀 발자국들 뒤로 고즈넉한 적막만이 따라붙었다.
* * *
법력으로 진법을 뚫고 나왔다. 북궁 남매의 새삼스러운 탄성을 뒤로하고서였다.
짧게 얻은 여유는 오래 가지 못했다.
투명한 장막이 걷히는 순간, 또다시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경파의 충돌음이 요란했다.
높이 자란 측백나무와 소나무 가지에서부터 눈덩이들이 떨어져 내렸다.
천년하수오의 풍문에서 촉발된 싸움이 끝으로 향하고 있었다.
“피해! 피해라!”
“도망치는 게 옳아! 저건 대적 못 한다!”
“혈염교의 사사도(四使徒)다!”
수백 개의 기척이 잡초마냥 지천에 널린 가운데, 유난히 사이한 기파가 크게 요동치며 올라오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속도였다. 큼지막한 박쥐처럼 산만한 공력 파동이 재빠르게 넘실거렸다.
가파른 산세를 평지마냥 질주한다. 차라리 날아오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인데, 그 동선이 정연신 일행을 향해 있었다.
거의 일직선에 가까웠다. 엄청나게 예민한 감각도를 연마한 듯했다.
죽어 나가는 기척이 무수히 많았다. 발길을 한시도 늦추지 않으면서 한 수에 십수 명의 목을 날려댄다.
혈염교의 네 번째 사도라고 했다. 실로 당연한 무위다. 그래서 문제였다. 지금의 내상으로는 승부를 장담하기 힘든 까닭이었다.
“몸을 피해.”
정연신이 말했다. 눈매를 가라앉힌 채였다.
건너편 언덕을 바라봤다. 저기에서 올라올 것이다. 생사의 갈림이었다.
“그리고.”
그는 재차 입을 열었다. 일행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행낭을 향해 짧게 손짓했다.
차라라락―
손아귀에서 만천화우의 진기 파동이 요동쳤다. 행낭 안에서 끌려 올라온 서책들이 책장을 펄럭이며 허공에 떠올랐다.
약초꾼 장순일은 입을 살짝 벌렸다. 정연신의 주변을 감싸고 휘도는 서책이 묘하게 신비로웠다.
“순일아, 가문의 원수가 사파라고 했지. 한 권 가져가라. 도움이 될지도 몰라. 영초는 못 준다.”
“네, 네……?”
장순일이 멍하게 되물은 순간.
건너편 언덕에서 큼지막한 충격파가 울렸다.
쿠웅!
경공 질주에서 비롯된 반동이었다. 붉은 장포를 걸친 신형이 비조처럼 솟구쳐 오른다. 흑단처럼 새까만 머리칼을 지닌 사내였다.
“제대로 왔어.”
핏물을 응축시킨 듯 붉게 번들거리는 눈이 일행을 훑었다. 양팔로는 핏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다.
전신에 막강한 기파를 두르고 있는데, 반투명한 소용돌이에서 핏빛 기류가 드문드문 번뜩였다.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듯했다.
실제로 놈은 수십 명을 일거에 죽이고 올라왔다.
입황성의 흑색 초고수들도 만전을 기해야 할 존재였다. 상대가 혈염교의 사사도라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용모파기가 모자란 감이 있군! 화공 놈을 필히 죽여야겠어!”
허공에서 유쾌하게 소리친 사사도가 정연신을 내려다봤다. 이를 드러낸 미소가 굉장히 간악해 보였다. 어느 때라도 과감한 출수를 불사할 듯했다.
“태사여, 교주의 위계를 사칭하는 자가 그대를 노리고 있는데, 나와 함께 가지 않으면…….”
그때였다.
웅―
하늘이 어두워졌다. 땅 밑에서는 적빛이 차올랐다.
꿈결처럼 위아래로 맞닿는다. 중심에 사사도의 허리가 있었다. 마치 지평선 같았다.
어스름히 길게 펼쳐진 경계선을 타고 불그스름한 노을이 피어났다. 사사도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자하신공……!”
순간, 그의 몸이 둘로 나뉘었다.
푸확!
핏물이 꽃잎마냥 흩날린다. 끔찍한 광경이 고매한 기예로 다가올 정도다. 몹시 몽환적이었다.
정연신은 사사도의 최후를 확인하지 못했다. 소리 없이 곁으로 다가온 매화의 향기를 신경 쓰는 게 옳았다.
화산 장문인, 성화검신 율하낭랑의 기척이다. 맑은 숨결과 함께 흘러나온 속삭임이 귓전을 스쳤다.
“멸절사마총람 초고. 섬예 저(著). 사도 십삼천 편……?”
마광익주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그녀가 보는 부분을 알아챘다. 주변으로 펼친 서책들 중 한 권에 적힌 목차일 터였다. 여섯으로 이루어져 있다.
一. 패검종
二. 혈염교
三. 심무련
四. 십전문
五. 순마련
六. 여령
“이게 무슨……?”
율하낭랑의 음성에 의구심이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