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289
◈ 연꽃 (8)
언가제일권, 권무공 언화련.
무림맹회의 개파대전 때 화산 천주진인 다음으로 고강한 상대였다.
제갈세가에서 청기린의 시신을 빼돌려 섬예 무공의 흔적을 파헤쳤고, 그 파훼식이 제갈가주의 연인인 권무공에게 전해졌다고 알려져 있었다.
실제로 당대 마광익주는 그 비무 당시에 상당히 고전했다. 환강마저 우습게 파훼당할 정도였다.
정연신은 그토록 까다로웠던 자를 담담히 마주할 수 있게 됐다.
고작 몇 달이 지났을 뿐인데도 그에게는 수십 년에 가까운 세월이었다.
정연신에게 인식되는 시간과 무공 성취가 모두 그러했다.
“…….”
언화련은 대답하지 않았다. 산서귀가의 대공자를 혼절시키고는 언제 대노했냐는 듯 차분한 기색을 드러냈다.
명경지수. 초고수의 평정심이었다.
눈빛이 깊다.
그녀의 동공이 햇빛을 빨아들였다. 눈동자가 몹시 새까맸다.
엄청난 진기로 진주언가의 안법을 발동시킨 것이다.
내공 화후만으로는 정연신 이상인 듯한데, 고르게 닦인 공력이 전신에 맺혀 언제든 강력한 초식을 내지를 수 있을 만한 상태로 보였다.
그런데도 정연신을 살피는 눈에 꺼림칙함이 어려 있다.
상단전을 활성화시킨 극강의 권사로서 미증유의 절초를 느낀 걸까.
“무공이 늘었다…?”
그녀가 마광익주의 말을 되뇌었다.
긴 눈썹을 치켜올리는 모습이 불쾌해 보이지 않는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새삼스레 깨달은 듯했다.
적개심을 느끼기보다 옛날의 어떤 기억을 더듬는 모양새였다.
스아아―
초고수들의 대치다. 투명한 겨울 호수를 훑고 지나가는 바람 속에서 햇볕이 더욱 쨍해졌다.
두 사람이 지닌 공력이 대자연의 기운에 비할 바 없이 짙었다.
정자에 자리해 있던 젊은 호족들이 수군거렸다.
“귀가의 굉천광도가 한 수에… 방금, 술병 아니었나? 초고수는 갈댓잎으로도 백 명의 목을 벤다더니.”
“참으로 명불허전이시군. 헌데 저자가 누구길래……?”
“공야 가문의 빈객인 걸로 압니다. 일전에 혈귀들을 격살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던.”
“그거야 당연히 알고. 내 말은 언가의 고인께서…… 음.”
권무공 언화련의 언행은 확실히 묘했다.
현천문주 검운비와 구면으로 보이는데, 팔대세가의 존엄한 호족이 낭인과 안면을 트는 일은 좀처럼 이루어지기 힘들다.
사는 세계가 다른 까닭이다.
그때 언화련이 다시 입술을 뗐다.
“네 말본새가 기이하구나. 내 팔을 한 번 그 지경으로 만들었다 하여 백전백승할 줄 아는 게냐. 그 연배로 승승장구해 온 아해답다. 오만할 자격은 있으나, 네 허를 찌를 수 있는 초고수들 앞에서는 객기임을 알아라.”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는군. 하수를 칭찬했는데.”
정연신은 허리춤의 검 손잡이를 쓰다듬으며 여유를 가장했다.
뒤편에서 대공녀 공야정이 짧게 헛숨을 들이켜고, 이공자 공야수가 겁 없이 탄성을 터뜨리는 순간에도 기감을 크게 일으켜 주변을 훑었다.
‘언가제일권은 내 무위를 알아.’
제갈가주와 함께 문파를 새로 연다 했다.
기재들을 살펴 빼내고자 하는 자리에 불현듯 나타난 자신을 지대한 변수로 받아들였을 터다.
허나 그는 섣불리 종극뢰를 시전해선 안 된다. 악수림과 손속을 섞을 만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단 몇 호흡뿐이다.
제갈가주를 상대할 때, 최적의 순간을 가늠하여 발동해야 한다.
‘언가제일권에게 낭비할 수는 없어.’
몹시 큰일이었다.
입황성의 손발이 부족한 것이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닌데, 근래에는 본성을 지키던 악수림마저 임무에 차출될 만큼 여유가 사라졌다.
십삼천과 팔대세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까닭이라 했다.
자색들은 그들만의 임무를 맡아 떠났다.
외조부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신검단주 역시 내상을 회복하자마자 온갖 말로 바뀌어대는 풍문으로만 소식을 접할 수 있게 됐다.
지원은 없다. 임무 성공이 생존과 직결된다.
“오라.”
정연신이 말했다. 이미 대치 상황에 놓였다. 당장은 강하게 나가는 수밖에 없다.
언가제일권에게 제갈가주가 있다면, 자신에게는 입황성 신검단에서 지원이 왔을 가능성을 상기시켜야 했다.
화악!
순간 언화련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갑작스레 면전에 나타났다. 그녀가 디딘 땅 밑에서 강렬한 진동이 움터 정연신의 발치까지 번져 왔다.
엄청나게 빨랐다. 간격에 목숨을 거는 권법가 특유의 보신경이었다.
동시에 정연신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우웅, 하는 공명음과 함께 상시 발동에 돌입한 절기의 힘이 대기를 일그러뜨렸다.
그는 이제 일격 무공의 시전에 있어 삼화취정과 동일한 상태를 만들 수 있다. 언화련이 정연신의 팔뚝을 밑에서 짚은 채 경악을 드러냈다.
환강.
콰아아아앙―!
그녀의 어깨 위에서 터졌다. 무시무시한 장력이 그녀의 강인한 육신을 흔들었다. 산발한 머리칼이 반대편으로 크게 휘날렸다.
‘여전하군. 투로가 짧고 팔 힘이 강해.’
정연신은 차분한 눈으로 다음 출수를 생각했다. 딱딱한 감촉이 팔꿈치 위를 휘감고 있었다.
굳은살이 가득 박인 언화련의 손아귀가 팔뚝을 비껴 올려 환강을 파훼한 것이다.
호흡과 기파를 한 수에 파고든 노련함이 진주언가의 제일권다웠다.
굳은살을 갑옷처럼 둘러친 무형의 호신강기도 한층 더 단단해져 있었다.
괜찮다. 몇 번 가격하면 산산조각 날 터다. 반대쪽 손에 장전된 환강은 아직도 손바닥 노궁혈에서 들끓고 있다.
스윽.
정연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왼손으로 언화련의 손목을 움켜쥘 때였다.
“…아주 오싹하구나. 허나 네 대비가 충분치 않다면 더 손을 섞어선 안 될 것이다. 그의 이목을 끌게 될 테니까.”
한때 진주언가의 차기 가주였던 그녀가 예스럽게 말했다. 지근거리에서 눈을 마주한 채였다.
‘뭐지?’
그는 불현듯 언화련의 기질이 바뀌었음을 느꼈다. 어째서인지 초탈해 보였다. 더 이상 정연신에게 시선을 두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반대쪽 손을 쥐었다 펴고 있는데, 힘 있는 품행에서 무도(武道)를 걷는 권사의 기질이 묻어나왔다.
제갈가주와 야합하기 전에 지니고 있던 본연의 모습일까.
그러고 보면 그녀는 정연신이 신분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터였다. 그런데도 별달리 얘기하지 않았다.
못마땅한 기색으로 산서 호족들의 술잔을 받다가, 무공이 늘었다는 말을 듣고는 기색을 진지하게 바꾸기만 했다.
그동안 제갈가주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너와 다투고 싶지 않구나. 아직 이르다. 그래, 본좌는 아직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지…….”
“헛소리는 삼도천을 건너서 해라.”
정연신은 그녀의 손목을 쥔 손에 힘을 가했다.
쿠웅―
두 번째 환강이 연이어 둔중한 울림을 발했다. 진주언가의 호신강기를 찢어발기기 직전이었다. 강격의 연환이다.
누구라도 경악할 만한 신기. 언화련의 두 눈에 무슨 연유인지 모르게 맺혀 있던 초연함이 경탄으로 물들었다.
그때.
정연신이 불현듯 손을 뗐다.
휘이이―
경파의 무색 파편들이 손등을 스치며 흩어진다.
시전의 전조만으로도 언화련의 손목을 감싼 호신강기를 산산이 풀어 헤쳤는데, 주변에서 그들을 뚫어지게 응시하던 산서 호족들이 크게 기겁했다.
마광익주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그는 거대한 눈길을 느끼고 있었다. 전신의 솜털이 곤두섰다.
‘복룡환생 제갈가주.’
부채를 쥔 절대자의 시선.
아직은 시야 바깥쪽이다. 눈길의 편린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허나 기척만으로도 거대한 성벽이 무너져 내려오는 듯했다.
실로 초월적인 존재감이었다. 자색에 비견된다는 말이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여기서는 놓아 다오. 나중에 결판을 짓자. 곧이다.”
언화련이 말했다.
사박.
경악 어린 시선들 속에서,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얼어붙은 듯이 서 있던 공야 남매가 언가제일권을 힐끔거리다가 정연신을 따랐다.
* * *
산서의 일부 호족들은 주기적으로 회동을 가졌다.
굉천광도 귀일태가 주축이 된 모임이었다.
비무대회의 우승이 유력한 고수이자 산서귀가의 가주 대리로서 자연스레 무리의 중심이 됐다.
언가제일권에게 당한 일로 체면이 상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일어난 뒤 그녀에게 맷집을 칭찬받으며 술 한 잔을 올릴 수 있었고, 팔대세가 초고수의 손속에 혼절한 일은 망신거리가 되지 못했다.
‘본연의 일에 집중하면 된다. 권무공의 뒤에는 제갈가주가 있어. 비무대회에서만 이기면 돼.’
팔가주는 인간이 아니다. 사람의 껍질을 벗은 인신(人神)으로 봐야 한다.
그의 비호를 얻은 뒤에는, 산서에서 귀가의 이권을 공고히 다지는 것쯤이야 여반장이다.
실전의 전투 감각이 뛰어난 기재로 인정받아 제갈가주의 술법 무공을 배우면 된다.
‘본가가 그자의 휘하에 들어간다면, 신생 문파 월성문(越城門)의 문하에 들기만 하면…….’
귀일태는 명예를 잃고 퇴역한 대장군의 자식이다. 보다 넓은 천하를 바라봤다.
그러자면 공야세가의 영향력을 줄이는 게 먼저였다.
근래에 공야세가의 빈객으로 들어온 낭인 검운비가 두각을 드러내고서는 야합의 필요성이 더욱 짙어졌다.
일인전승 현천문의 무맥을 알아내고자 동분서주하는 이들이 많았다.
몹시 중요한 일이었다.
공야 소가주보다 낮은 연배에 그만한 무공 수위를 지녔으니, 대공녀 공야정이 재치가 번뜩이는 수법을 배워 비무대회에서 드러낼 경우를 상정해야 했다.
날벼락 같은 과제다. 공야세가의 무공만은 모두 파악한 뒤이기에 더욱 그랬다.
“본가에서도 연원을 알아내지 못했소. 말투를 보면 하남 출신인 듯한데, 그쪽은 소림사가 두려워 비선을 뿌리기도 힘들고…….”
“하남성에 이르기까지 사람을 쓰는 일 자체가 효율이 없소. 거리가 몇 리 길이오? 개방이나 여령, 하오문도 아니고.”
“애초에 시일이 부족하지요. 송구합니다, 굉천광도.”
“그게 어찌 여러분의 탓이겠소? 괘념치 마시오. 내게도 크게 다르지 않으니.”
귀일태를 비롯한 다섯 남녀가 공야세가의 외원을 걸었다.
윤기로 반짝이는 비단 의복 밑으로 잘 짜인 가죽신이 뽀드득거리는 소리를 내는 가운데, 눈 내린 땅에 흐릿한 발자국이 줄지어 새겨졌다.
사박.
그들의 발소리에서 몸에 밴 자신감이 묻어나왔다.
굳이 꾸미지 않아도 품행에 스미는 호족들의 기질. 어려서부터 수련한 보신경이 가볍고도 호기로운 걸음을 만든다.
겨울날에도 푸른 솔잎들로 울창한 화원이 그들만의 세상에 가까웠다.
“공야정의 기도가 조금쯤 바뀌긴 했소. 아무래도 괜찮은 수법을 전수받은 모양이외다. 공력을 전에 없던 방식으로 운용할 만한…….”
“그렇다 해도 이번 비무대회는 귀가 대공자의 연회라고 봅니다. 본디 낭인은 고절한 무공에 기대기보다는 경험과 감각으로 힘을 쌓는 자들 아닙니까? 공야세가의 깊이 있는 무학에 비하면, 도리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격이겠지요.”
“명가의 무맥이 세월에 빛바래지 않고 이어지는 이유가 있지. 광야에서 구르다 나온 수법은 세월과 더불어 완전해진 무학을 감당할 수 없소. 장기전으로 가면 필승일 거요.”
“헌데, 그 빈객이 낭인인 건 확실합니까? 언 대협과 면식이 있는 자가 어찌…….”
“홀로 일가를 이룬 낭인이 맞을 거요. 안하무인에 가까운 말본새로도 알 만하고, 언 대협께서 내 물음에 딱히 부정하지 않으셨으니.”
이어지는 말들이 조심스러웠다.
오성과 통찰력에 자신이 있는 만큼 언행에 주의를 기울일 줄 아는 것이다.
인적이 없음을 확인했는데도 그랬다.
“뭣하면 내가 확인해 보겠소. 일전에는 술에만 집착하는 눈치던데, 만찬에 초대하여 식사 예법을 살펴보면 될 거요. 일개 낭인이 존귀한 법도를 배웠으리라 생각지 않소. 지저분히 먹겠지.”
귀일태가 담담히 말했다.
그때였다.
“어어? 양귀비 선배, 뭐 해요! 둘러서 가야지! 쟤넨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임무! 임무 생각해요! 여기서 엮이면 안 된다고!”
웬 소녀가 숨죽여 쥐어짜 내는 듯한 목소리가 울렸다.
“지금, 웬 놈이……?”
호족 일행이 눈매를 검날처럼 벼렸다.
제각기 병장기를 휘감는 손아귀에서 강대한 공력 파동이 일어난다. 귀일태가 먼저 발을 움직이는 순간.
“다시 얘기해 봐라. 잘 안 들렸다.”
허공에서 나른한 음성이 울렸다. 허나 대꾸할 틈이 주어지지 않았다.
쾅! 쾅! 쾅! 쾅! 쾅!
연이은 충격파가 반투명하게 겹쳐졌다.
귀일태를 비롯한 다섯 사람의 뒤통수에서 발경력의 파편들이 폭발했고, 그들은 일격씩 강타당한 순간 개구리마냥 엎어져 버렸다.
때아닌 소란이 엄청나게 컸다.
저벅.
그들의 중앙에 홀연히 내려선 사내가 짝다리를 짚고 섰다.
“천것들이.”
발치에서부터 눈이 녹아내린다. 우물거리는 입매 주변으로 흐린 김이 연초처럼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