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311
◈ 헌원 (6)
* * *
강호에 널리 알려진 절세고수를 상대한 뒤였다.
후유증이 상상을 초월했다.
감내해야 할 일이었다. 본래는 한참을 올려다봐야 할 존재를 기어코 죽였으니까.
당시의 정연신은 제갈가주의 자웅신편을 받아낼 때마다 뼛속까지 스미는 충격량을 감당했다.
경력의 파편 한 조각조차 천 근의 힘으로 다가왔다. 화경으로 흘릴 수도 없었다. 그럴 틈이 존재하지 않았다.
어깨에 입은 관통상이 백미였다.
절세고수의 일격은 몹시 고차원적이다. 타격 한 번이 외상으로 끝나지 않는다.
내가중수법. 전신 경맥으로 흘러들어온 경파가 체내를 찢었다.
정가동공이 없었다면 거동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악가창의 파훼법을 들고 온 제갈가주에게 대적한 악수림의 경지를 실감시키는 일이었다.
근육 뭉치의 회복마저 더디다.
술법 신공이라는 자웅신편의 효용이라 했다. 보혈대주 진 선배가 당한 바 있다.
정연신의 세맥과 혈도는 탄력을 잃었다. 태원까지 당도하는 일이 다소 고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한편, 한계까지 쥐어짜인 광륜은 만전 때와 비교도 되지 않게 느릿한 속도로 회전하고 있다.
축기량부터 급감한 참이다. 회복에 시간이 필요했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심무련주의 딸로 짐작되는 군유린과 그 수하를 눈앞에 두고.
우웅.
미세하게 몸을 떤 젓가락이 손 틈새를 벗어났다. 상단전의 영성을 꽂아 넣어 백회혈 아래의 뇌와 일치시킨 직후였다.
경이로운 신비다. 정연신은 머릿속으로 기다란 질감을 느꼈다.
‘이걸로 되는 건가……?’
나무젓가락과 칼의 형태가 아른거린다. 검신이 젓가락을 덮어씌울 듯 말 듯 했다.
허나 정말로 겹쳐지지는 않았다. 뇌리에서 합일되는 순간 만천화우 이상의 힘이 움트리란 직감이 오는데도 그랬다.
이유는 짐작이 갔다. 선룡이화결은 상단전을 크게 쓰는 공부다.
제갈가주를 격살할 때 처음 시전되면서 백회혈을 혹사시켰다.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것이다.
괜찮다.
우웅.
젓가락 한 짝이 그대로 떠올랐다. 주인의 미간에 겨누어진 부채를 향해 둥실― 하고.
정연신에게 학익선을 들이댄 사내의 반응이 반 호흡 늦었다.
옆에 선 군유린이 눈꺼풀을 크게 들어 올릴 때, 그는 대답을 종용하는 것마냥 정연신과 시선을 맞추다가 뒤늦게 움찔했다.
“무슨 사술을…!”
“정파 꼰대 같은 소리! 그딴 거 아냐 멍청아!”
수하와 주인의 대화는 다급한 와중에도 만담 같았다.
순간 정연신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젓가락에 실린 힘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곧바로 느낀 까닭이다.
만전 상태로 펼치는 만천화우의 발산 구결만 못하다. 대(對)절세고수전의 여파를 방증하는 일.
권무공 언화련에게서 영감을 얻은 권법초를 무리해서라도 펼쳐야 할까. 어린 점소이가 보기 끔찍할 텐데.
그때였다.
정연신의 표정에서 무엇을 지레짐작한 걸까.
“잠시만!”
돌연 미간을 일그러뜨린 군유린이 등 뒤로 양손을 가져간 직후, 그녀의 손에서부터 커다란 회색빛이 떨어졌다. 대도(大刀)의 칼날 잔영이었다.
굉장히 빠르게 뽑아 내린 발도가 거칠디거친 곡선으로 낙하했다. 빛바랜 초승달마냥 흐리게 명멸하면서.
스아악―!
“끄아아아아!”
핏물이 솟구쳤다. 옆에 있던 수하의 팔이 학익선을 쥔 그대로 잘려 나간 것이다.
툭, 하고 떨어진 팔뚝의 옆선을 타고 이어진 혈액에 하얀 부채가 붉게 물든다. 급작스럽게 벌어진 광경이었다.
후웅!
발도와 동시에 일어섰던 군유린이 씁쓸한 얼굴로 대도를 한 번 털어냈다.
사방으로 튄 핏방울들이 나무 바닥에 스민다. 검붉게 흩어진 모양새가 다소 끔찍했다.
옆에서 끅끅거리던 수하의 얼굴도 인상적이었다.
짧은 순간 동안 혼란을 감추지 못하다가, 이내 무언가를 깨달은 듯 삽시간에 두 눈의 초점을 되찾고는 신음을 삼켰다.
세 호흡도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객잔의 적막이 더욱 짙어졌다.
“사람 보는 안목이 없으면.”
군유린이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입술을 뗐다.
“당연히 죽어야 하는 게 맞는데… 출수는 안 했으니까 팔로 봐주라.”
“못 한 거지.”
“그러면 할 말이 없긴 한데, 잘 받들던 주인한테 주력 무공을 잃은 셈이니 더 비참하지 않을까? 적과 싸우다 팔 잘린 것도 아니잖아. 얼마나 수치스럽겠어? 심지어 우린 사파거든. 얜 이제 내 전속 시종 아니면 밥 벌어먹고 살기 힘들 거야. 체면 따지기로는 썩을 사마외도가 정파보다 더한 거 알지?”
다소 비굴한 말이 명사수의 속사처럼 쏟아져나왔다.
턱, 턱.
그녀가 사내의 정강이를 연신 걷어찼다.
어떻게든 수하를 살리고 싶은 걸까. 힐끗힐끗 정연신의 눈치를 보는 모습이 제갈가주보다는 사람다웠다.
수하는 군유린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치명적으로 들린 듯, 눈살을 움찔거리다가 스스로 표정을 싹 고치곤 넙죽 엎드렸다.
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한 어깻죽지가 경련으로 부들거린다. 밑바닥의 나뭇살 사이사이에 스미는 대량의 출혈과 함께였다.
그런데도 품행만큼은 굉장히 정갈했다.
“이 전백(田魄)이 고인을 몰라뵀습니다! 감히 청컨대, 인자무적(仁者無敵)의 그릇으로 부디 죽을죄를 사하여 주십쇼!”
몹시도 처량해 보인다. 고압적인 태도가 완전히 사라졌다.
정연신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군유린… 심무련주의 자식이 맞나?’
기괴한 자들이다. 사마외도의 진면모를 본 듯했다.
핏줄이 사실이라면 강호에 드문 거물일진대 사리 판단이 날붙이처럼 정확하고 빨랐다. 난세를 헤쳐 나갈 군왕의 자질이 비칠 정도였다.
그는 짧게 내뱉었다.
“꺼져라.”
“미려하면서도 바른 친구였구만. 손속이 아주 자비로워.”
군유린이 손가락을 튕겼다.
퉁―
순간 공기를 기다랗게 이지러뜨리며 날아간 지풍이 전백이란 사내의 어깨 부근을 쳤다.
둔탁한 소리가 나자마자 쏟아지던 핏물이 급격히 멎는다. 지혈의 한 수였다.
비틀거리는 수하를 일별한 군유린이 다시금 정연신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가 양쪽 팔꿈치를 올리고 손깍지를 꼈다. 거친 옷자락이 탁자를 쓸어내는 소리가 침묵을 깬다.
“우리 이름 모를 친구는 대협의 그릇을 가졌구나. 네 눈짓에 점소이가 꾸벅하고 도망가는 것도 봤어. 사람을 온전히 사람으로만 대하는 거지. 그렇게 겸양이 몸에 뱄으니 어검술에 입문하고도 무덤덤할 수밖에. 오만과는 거리가 한참 멀고, 다만 주변을 두루 신경 써 줄 만큼 세심할 뿐이야.”
‘안법인가?’
정연신이 속으로 놀랄 만큼 옳은 말이 이어졌다.
“이 참황적도(斬凰赤刀)의 눈은 정확하지. 그래서 제안하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조심스럽게 말이야.”
화악.
속삭이듯 얘기하던 군유린의 몸에서 반구 형태의 공력 파동이 번진다. 탁자 주변을 둘러싸는 기막을 친 것이다.
곧이어 허공에 떠올라 있던 젓가락이 정연신의 손안으로 돌아오는 사이, 그 모습을 경탄 어린 눈으로 바라본 그녀가 재차 입을 열었다.
“너 같은 인물이 이름을 알리지 않았을 리 없어. 연고지에서 먼 곳까지 온 거 맞지?”
“통찰이 제법이군.”
정연신은 무심히 대꾸했다. 자신의 성품에 대한 분석을 들을 때부터 내심 감탄하고 있던 차였다.
그는 입황성 흑색이다. 심무련주의 직계를 보고 지나칠 수는 없다.
둘 중 하나는 해야 한다.
지금도 몸을 저릿저릿하게 만드는 내외상을 무시하고서라도 군유린을 추포한 뒤 정보를 뽑아내든, 계속해서 신분을 드러내지 않은 채 심무련의 정통 무공을 파헤치든.
“내 눈은 틀리지 않는다니까.”
그의 칭찬에 씩 웃은 군유린이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방금 수하의 팔을 날린 인물로 보이지 않는다. 품행이 출신을 짐작게 할 정도다.
‘봉황을 베는 붉은 도’란 별호를 지닌 그녀는 사도 십삼천의 직계가 맞았다.
“태원에 연고가 없는 강자. 너 같은 사람이 필요했어. 물론 염려 마. 정파 꼰대들이 부끄러워할 만한 대인(大人)한테 몹쓸 거래를 제안하진 않을 테니까.”
“네 언행이 마음에 든다. 지껄여 봐라.”
정연신이 담담하게 말했다.
세가들로 말미암아 정파에 환멸이 난 참이다.
구파의 선도 수행자들을 비롯해 무림맹주 현소백과 청기린, 선룡을 보지 못했다면 백도 정종이란 말을 근본부터 무시했을 터였다.
“말본새 봐. 쑥스러워하긴.”
참황적도 군유린의 입매에 맺힌 웃음이 짙어졌다.
“여하튼, 네가 태원에 걸음한 이유는 궁금하지 않아. 강호 유람차 여기에 왔든, 비무행을 다니는 중이든 말야. 다만 태원에서 잃을 게 없는 인물이란 게 중요해. 내가 곧 살문을 칠 거거든.”
“뭐라고?”
“망할 아버지가 곧 여기에 당도한다고 했단 말이지. 후계 싸움에서 이기려면 우리 존귀하신 부친께 잘 보여야 해. 모용세가와 손잡았던 살문쯤 되면 아주 훌륭한 진상품이고. 마음 같아선 아버지가 조부께 그랬듯 나도 아버지의 목을 치고 싶긴 한데…… 내 무공 수위로는 그게 힘들어. 한참 멀었지.”
중얼중얼대는 목소리에서 거친 광기가 묻어나왔다.
별세상이었다. 전대 심무련주가 검성에게 참살당한 직후, 심무련 내부에서 권력 투쟁이 있었다고 했다.
그 와중에 당대 심무련주인 군왕무제가 제 부친의 목을 꺾었다는 일화는 굉장히 유명했다.
“무공의 증진이든 명성을 높이는 거든, 살문 정도면 괜찮은 상대일 거야. 지금 산서는 제갈가주랑 연화나타란 괴물들이 쓸고 지나가서 무맥의 씨가 말랐거든. 음? 그러고 보니 입황성의 연화나타도 너처럼 어리댔는데? 어검술을 연마했다는 풍문은 없었지만…….”
“알고 있다. 그보다, 살협은 협객이라고 들었는데.”
“그놈 한 명뿐이야. 나머지는 볼 것도 없이 사마외도지. 소문주의 지위로 원로들과 맞서는 형편일걸? 뭐어, 살협이란 놈이 인물은 인물이긴 해.”
“자세히 아는군.”
“내 사문이 좀 대단하거든. 무슨 인연인지 몰라도 황실이 공납을 면제해 준다니까? 내가 지금 맡은 문파도 일개 분파일 뿐이야. 살문을 멸문시키는 데에도 꽤 많은 전력이 투입될 거고. 걔넨 이미 움직였어.”
서로의 신분을 숨긴 두 사람이 대화를 이어나갔다.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팔 한 짝에 기겁한 손님들이 객잔을 빠져나가서, 지금 이층에는 군유린의 주종과 정연신뿐이었다.
햇볕을 희게 스치는 먼지들이 고요했다.
“협조만 해 준다면 따로 후하게 사례할게! 금은보화든 뭐든 말만 해.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도를 기가 막히게 쓰는 절세미인도 있어. 언감생심 못 찔러본 감이지만… 내 스승님이거든.”
“영약을 줄 수 있나? 효험이 뛰어난 요상약으로.”
“물론 준비할 수 있지!”
당장 가지고 있단 말을 하지 않는다. 강탈당할까 저어한 탓일 터였다.
기괴한 사고방식과 달리 영악했다. 초면의 고수에게 내밀한 계획을 얘기할 수 있는 배포와 자신감마저 갖췄다.
성향이 제법 잘 맞았다. 정연신의 마음을 편하게 할 정도였다.
지닌바 거친 품행과 상대의 성정을 정확히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모두 그랬다.
군유린이 입꼬리를 올렸다.
“크게 다쳐서 그런 거지? 우리 전백이랑 다른 피 냄새가 나.”
관통상의 혈향을 맡은 걸까. 정연신이 어깨에 입은 상흔은 아직도 수시로 벌어진다.
앞서 권법초를 펼칠까 고민한 찰나에 곧바로 반응한 어깨의 삼각근이 상처를 터뜨린 참이었다. 자질이 사람 같아도 문제였다.
정연신은 말을 돌렸다.
“길은 알고 있나? 살문까지.”
품속의 백연이 기나긴 날갯짓으로 그를 인도해 줬으나, 막상 도착하고 보니 태염룡의 기파가 느껴지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헌원창과 신소빈의 공력 파동도 찾지 못했다.
‘몸 상태를 괜히 전해 줬어.’
청명과 백미려에게 하던 대로 상처를 숨김없이 쓴 탓이다.
자신들의 몸이나 신경 써야 할 하수들이 대주의 신변을 염려한 듯했다. 태염룡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 할까.
허나 심무련이 살문을 노리고 있다. 안심하기 힘들다.
“분파로 짐작되는 안가들의 위치만 대략적으로 알아. 내 사문에서 펼친 천라지망에 운 좋게 걸린 놈이 불었거든.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다 알게 되겠지. 분파들부터 싸그리 정리하면서 본파까지 밀고 갈 거야.”
대도를 등 뒤로 탁― 꽂은 군유린이 사나운 미소와 함께 얘기했다.
정연신은 천천히 입술을 뗐다. 홀로 고통을 삼키고 서 있는 그녀의 수하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으면서.
“제안을 수락하지.”
* * *
소복거리는 소리와 함께 걸은 지 이틀째였다.
탁, 타닥.
세 사람의 발자국이 남은 관도 한쪽.
크게 피어오른 모닥불이 춤추듯 어른거렸다. 이따금씩 터지는 불티를 하얀 눈이 집어삼킨다.
군유린은 사냥에 능했다. 품에 쟁여 둔 육포들이 무색하게 온갖 짐승들을 잡아 왔다. 정연신이 땔감만 구해 와도 될 정도였다.
“그 하얀 검 말이야, 처음부터 눈길을 끌었는데. 검법만 연마한 건가?”
“권각도 쓰지.”
“어검에 입문한 초고수가 권각까지?”
“기본 정도만. 투로가 복잡하지 않아서.”
“눈부신 겸양이야. 네 성품은 역시 사마외도와 어울리지 않아. 정사지간이나 정파가 맞지. 제대로 된 길을 걷고 있구나?”
“네 안법도 몹시 고절하다.”
정연신은 나무둥치에 대충 기댄 채 군유린의 말에 대꾸했다.
강호의 만남은 바람처럼 잇닿았다가 멀어진다 했다.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지는 않고자 했는데도 제법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왼손으로 부채를 든 전백은 계속해서 정연신의 눈치를 보며 시종처럼 굴었다.
“헤헤, 나으리, 땔감이 좀 부족한 듯한데… 물론 나으리께선 한서불침의 지고한 경지에 이르셨겠지만, 고귀한 살갗에 찬바람은 좀 그렇지 않습니까?”
“알아서 해라.”
“그리합죠!”
문사풍의 외팔이 미남자가 몸을 돌릴 때였다.
쾅―!
그의 몸이 대뜸 옆으로 꺾이더니 강하게 튕겨 나갔다.
순간 허공을 반투명하게 강타한 경파가 꽃잎처럼 이지러졌다. 웬 소년의 낭랑한 외침과 함께였다.
“소림의 영물은 과연 천하제일이군요! 스님, 이쪽입니다!”
“아미타불.”
화산과 숭산.
필연과 우연이 엮였다. 험준한 산악 냄새가 그들을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