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313
◈ 헌원 (8)
사대금강이 실없게 웃는다.
미리 머릿속으로 투로를 짜던 정연신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후배에게 인자하시구나.’
앞서 군유린과 유현이 자신의 내상을 눈치챘다. 원적 대사라면 흘깃 본 것만으로 상태를 파악했을 것이다.
굳은 얼굴로 비무를 청했을지언정 기파의 강도는 정연신과 비슷했다. 내공을 맞춰서 손을 섞겠다는 의미. 깊은 수양을 쌓은 승려다웠다.
심지어 저 웃음은 외조부에게서 많이 봤다.
안면 근육이 어떤 기제로 움직이는지 몰라도 간질거리는 느낌으로 다가오곤 했던 얼굴. 마연적이 그를 볼 때 간혹 짓던 표정과 비슷했다.
가끔은 묘하게 부끄러웠으나, 소림의 사대금강이 똑같은 표정을 짓는 걸 보니 정연신 자신이 편협했던 게 분명하다.
‘심무련주의 딸과 손을 잡았는데, 내 기수식만 보고 마음을 푸신 건가……?’
참된 노승이다.
정연신의 눈에 경탄이 어렸다.
정가장은 소림과 마찬가지로 하남성에 자리해 있었다.
신야현의 모든 아이들이 소림사의 명성을 듣고 자랐다.
숭산에 터 잡은 천년 사찰의 사대금강이면, 그들에게는 무공을 쓰는 부처와 같았다. 우상이란 말로도 표현하기 힘들다는 의미였다.
크흠.
돌연 원적이 헛기침을 뱉었다.
“시주를 보고 있자니 팔에서 힘이 빠집니다. 내외상을 고루 치유한 뒤에 손속을 나누는 게 옳을 듯하군요. 소승이 섣불렀습니다.”
역시― 정연신은 내심 짧게 뇌까렸다.
‘넓은 그릇을 지니셨구나.’
마광익주의 얼굴에 호의가 서린다. 천년 소림의 오래된 승려는 과연 어린 시절 생각했던 그대로였다.
활불에 가깝다던 명족 노승들. ‘백보신권 놀이’를 하던 마을 아이들을 멀리서 부러워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는 조금 의기양양해졌다. 나는 직접 뵀다고.
“밤바람이 찹니다. 모닥불로 가시죠.”
정연신이 손을 뻗어 안내했다.
마광익주와 사대금강의 비무가 불발됐다.
…그렇게.
다시 모닥불에 둘러앉은 다섯 사람의 표정은 제각각이었다.
유현이 안도와 아쉬움이 섞인 한숨을 내뱉는 한편, 사마수사 전백은 고개를 낮춘 채 주변의 눈치를 살폈고, 불현듯 자신의 뒷머리를 벅벅 쓰다듬은 군유린은 어떤 고민에 빠진 듯 입꼬리를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사대금강 원적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불꽃이 땔감에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한 와중이었다.
‘저건 역천의 재능이다.’
마광익주는 정말로 법력을 연성했다. 믿기 힘들어도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다.
십팔나한에 속한 소신승 각정과 더불어 불법을 공부했다 하나, 명족으로서는 찰나에 가까운 시간을 들여 척마멸사의 법력을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반대도 가능할 터였다.
자질의 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온갖 창조를 일삼는 대종사. 파사현정의 기운을 역으로 멸하는 경파를 뽑아낼 만했다.
백도 정파의 무공이라고 약점이 없을까.
지금 모닥불 너머에서 묘한 박자로 한쪽 발을 흥겹게 까딱이는 소년은, 장차 무수한 문파의 천적이 될 수밖에 없다.
저기서 작게 움직이는 발 아래로 수많은 무인들이 무릎 꿇을 터였다.
‘실제로 당대 마광익주의 행보는 불패에 가깝다지.’
특히나 두 번째로 만나는 적에게는 절대로 패하는 법이 없다 했다. 원적이 숭산에서 하산한 이래 짧게 들은 풍문이 그랬다.
언젠가 심각한 사안으로 대두될 문제였다. 당장 원적에게도 그렇게 와닿았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심무련주의 여식과도 손잡는 자가 천고의 자질을 지녔다.
민생을 귀히 여기는 한편, 강호를 극단적으로 천시하는 입황성의 고위 인사가 말이다.
원적은 제 자신을 땡중으로 여겼다. 승려이기 이전에 미망을 헤매는 무인, 언젠가 다시 나타날 천마에게 대적하고자 주먹과 봉술을 닦는 복수귀.
그리고 지금 강호의 심대한 위협을 마주했다. 어찌 처신해야 할까.
‘아미타불.’
점점이 새겨진 계인 아래로 매끄러운 미간에 주름이 졌다.
그때였다.
“스님, 이거 드십시오.”
마광익주가 모닥불에 굽고 있던 버섯을 건넸다.
“겨울 느타리버섯입니다. 풍미가 아주 좋지요.”
세심한 손길하에 불을 쬔 듯 노르스름했다.
원적은 얼떨결에 받아들며 마광익주를 힐끗했다. 눈을 반짝이는 모습이 나이다운 모습으로 보였다. 화산잠룡 유현과 이야기를 나눌 때와 같이.
괴팍한 노승에게는 별달리 인상 깊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저 고소한 향기가 마광익주의 정갈스러운 품행과 어우러지는데, 앞서 드러낸 법력의 파편들이 투명한 바람을 타고 함께 끼쳐 오는 게 문제였다.
사대금강 원적이 충만함에 미소 지었다. 무엇이 어찌 되든 어떠하랴.
“시주의 호의가 기껍군요.”
“저랑 계실 때는 묵언수행에 임하시는 듯했는데…….”
유현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서.”
그 모든 광경을 물끄러미 눈에 담고 있던 군유린이 입술을 뗐다.
무릎에 팔을 대중 얹은 자세가 언제라도 도를 뽑기 용이해 보였다. 그녀는 어떤 경우에도 경계를 거두지 않았다.
“이 일행이 어떻게 되는 건지 모르겠는데. 저 친구는 나랑 같이 살문을 치기로 했다고.”
“같이 가도 되나?”
“안 돼.”
“심무련주의 자식한테 물은 게 아냐.”
유현이 입황성의 친우를 바라봤다.
마찬가지로 정연신을 흘깃한 군유린이 투덜거렸다. 고용주는 나라고.
“아직도 날 동행시킬 마음이 드나? 구파와 교분이 있는데.”
정연신이 물었다. 순간 군유린의 눈이 번뜩였다.
“소의 목을 칼로 썰든 언월도로 썰든 무슨 상관이야? 난 살문이란 고기만 얻으면 돼. 너 정도 되는 고수의 협조가 있으면 어떤 변수가 생기든 상관없을 거야.”
“내게 배반당하면?”
“내 팔자려니 해야지. 근데, 차라리 살수 나부랭이들의 눈먼 독침에 맞고 죽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난 나랑 밥 먹은 사람들의 성품을 잘 보는 편이야. 배경이나 신분 따위보다 내 눈을 믿지. 넌 칼을 거꾸로 겨누지 않아. 겸손하고, 공명정대하고, 또 진솔하니까.”
그녀의 얼굴에서는 광기마저 비쳤다. 어찌 자란 걸까.
오라비의 목을 베고 심무련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야망이 그대로 묻어나왔다. 기백이 엄청났다.
정연신은 입을 다물었다.
실로 고절한 안법을 접했다. 구구절절 진실인 얘기를 대하고 보니 할 말이 없었다.
“애초에 네깟 게 뭘 하겠냐. 여기 있는 면면이 얼마나 어마어마한데.”
피식 웃은 유현이 품에서 웬 목함을 꺼냈다.
“스승님이 전하라고 하셨어. 그런데, 지금 네 호흡을 보아하니 당장 먹진 못하겠다. 하단전 축기에 관여하는 영약이라서… 기운을 받아들이는 혈도가 건강해야 해. 아니면 독약이나 다름없지.”
스윽.
그대로 정연신을 향해 내민다. 목함의 틈새로 향긋한 내음이 번져 왔다. 다소 영묘한 기운과 함께였다.
정연신은 천천히 목함을 받았다.
나무 감촉이 따스했다. 유현과 율하낭랑의 마음처럼.
“감사하다고 전해 드려. 장문인께는 은혜만 입는다.”
“오히려 네가 스승님을 구해준 격이라고 하시던걸.”
유현이 슬쩍 웃어 줄 때였다.
“영약? 그러고 보니 너, 협조해 주는 대가로 요상약을 얘기했지.”
군유린이 아무렇게나 깎인 작대기 하나로 모닥불을 휘적거렸다.
“너 정도 되는 인물에게 단약이 하나도 없다는 건… 아무래도 좀 이상하지? 용모는 척 봐도 귀공자인 데다 보검을 들고 다니고, 어검술에도 입문할 만큼 고절한 검공을 지녔는데.”
지나가듯이 얘기한다. 태연한 어조였다.
그녀의 입장에서 대업이라 할 만한 일이 진행되기 직전이었다.
앞서 안목을 얘기했음에도 긴장한 듯했다. 개울가의 돌다리를 두드려 보는 모습으로 보였다.
“…….”
침묵 속에서 정연신과 그녀의 시선이 맞닿았다.
돌연 군유린이 피식 웃었다.
“굉장히 흉폭한 용이 있다고 해도, 그놈의 역린을 건드리지만 않으면 마른 땅에 비를 뿌려 주는 법이지. 태생적으로 비구름을 몰고 다닌다고 하니까. 재앙도 사람이 대하기 나름이라고 했어.”
정연신은 깨달았다. 양쪽 모두 서로의 신분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약이라.’
행낭에 둔 요상약은 이미 대부분 섭취했다.
제갈가주가 남긴 기예의 여파가 약효를 초월했다. 행낭에 있던 단약이 겨우 두 알 남을 때까지 큰 차도가 없을 정도였다.
보급이 더 필요해진 것이다. 그래서 요상약을 말했다.
“사정이 있다.”
“음, 그럴 수 있지. 실례했어.”
탁.
작대기로 모닥불을 몇 번 때린 군유린이 입꼬리를 올렸다.
대충 고개를 끄덕인 정연신은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허전한 품을 느끼면서였다.
안쪽에 넣고 다니던 요상단 주머니도 있었지만, 격전 중에 모조리 뭉개져 버렸다.
절세고수의 공격초가 정연신이 두른 내공 방벽을 무시하다시피 했다.
일격의 허용이 곧 관통상으로 이어질 정도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제갈가주의 출수는 현세에 구현된 지옥에 가까웠다.
절세 영역.
정연신은 부쩍 느꼈다. 정말로 제대로 된 호신강기가 필요하다고.
‘괜찮은 공력 구조를 언제쯤 발견할 수 있을까. 제대로 짜내야 하는데…….’
신공이 아니면 원숭이의 실뜨기에 불과했다.
옷으로 따지자면 재질의 발명에서 막힌 셈이다. 육신과 기운의 움직임을 방해하기는커녕 보조해 주면서 방어력을 자랑할 갑주.
태생적으로 자신의 몸과 감각에 걸맞는 내공 방벽이야말로 최고의 호신강기일 터였다.
비단과 삼베 따위는 눈에 차지 않는다. 이미 천금무고의 상층부에서 얻은 호신기가 전신을 둘러싸고 있기에 더욱 그랬다.
어검과 함께 성취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너무나 명백하다.
장차 살문에서, 원적 대사에게서 어떤 영감을 얻을 수 있을까.
“내일 해뜨기 전에 출발하자고.”
“이 몸 또한 당분간 어린 시주와 함께하겠소.”
기이한 일행이 만들어졌다. 눈 쌓인 숲에 드리운 땅거미 속에서 온갖 입장이 얽혔다.
* * *
“이쯤이면 되겠다. 멈춰라.”
동굴에 울린 것마냥 굵직한 목소리였다.
세 사람이 설원에 내려섰다. 온통 순백인 곳인데 발자국 하나 남지 않았다.
칠사도는 답설무흔의 보신경으로 눈길을 사뿐히 디뎠다. 붉은 순혈포의 밑단이 유난히 짙은 다홍빛으로 흔들린다. 그녀의 속내를 비추는 것처럼.
‘잘 넘어간 거지?’
발밑까지 내려오는 털옷을 걸친 사내를 힐끗했다.
엄청난 거구였다. 어림잡아도 칠 척은 될 법한 키부터 압도적이다.
심무련주 군위후(君違珝)의 뒷모습.
서서히 기세를 개방하는 모습이 사람 같지 않았다.
기질적으로 그랬다.
마치 수백 문의 화포를 세워둔 성벽을 보는 듯했다.
범접이 불가한 건 물론,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처럼 다가올 정도다. 다른 누구도 아닌 칠사도가 느끼기에 그러했다.
그녀는 생각했다. 어떻게든 도망쳤어야 했나?
‘아냐, 태사에게 개수작 부리지 않는지 확인했어야 해. 이게 최선이 맞아.’
태원에서, 발걸음조차 아름다운 태사의 자태를 음미하고 있을 때.
별안간 등 뒤로 심무련주가 현현했다. 능공허도로 대기를 가른 듯 별다른 기척조차 없었다.
기겁할 수밖에 없는 일.
칠사도에게는 더욱 그랬다.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다.
만신창이가 된 태사와 심무련주의 만남이 이루어져선 안 됐다.
대방파의 주인이란 것들은 저열하기 그지없어서, 제 손에 넣지 못할 재능을 접하면 분지르고 보기 마련이었다.
그녀의 발에 밟혀 죽은 혈염교주가 생전에 어린 태사의 명줄을 끊고자 했듯이.
태사의 기파가 미약해진 게 천만다행이었다. 내상이 얼마나 심한지 법력의 편린조차 느껴지지 않는 게, 얼핏 보기에는 그저 출중한 후기지수에 불과했다.
십삼천 심무련주에게는 날파리 같은 존재.
그리 생각하면 홀로 얼굴이 붉어지다가도, 그녀답지 않은 안도의 숨결이 흘러나왔다.
심무련주는 입을 다문 백서군을 의아하게 여긴 듯했다.
칠사도를 특별히 호의적으로 대하지 않으면서, 그저 특유의 무시무시한 압박감으로 그녀들을 앞장세워 태원에서 멀어졌다.
백서군과 더불어 논검을 몇 마디씩 주고받곤 할 때도 칠사도에게는 따로 말을 걸지 않았다.
그저 기세로만 행로를 강제했다. 혈염교의 절세기재를 볼모로 잡은 것처럼.
강호 절대자들은 괴인이다. 아무도 사고방식을 이해하기 힘들다.
칠사도는 개의치 않았다.
뇌리가 태사의 안위로 가득 차 있었다. 태사와 심무련주의 조우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심무련주가 태사를 발견치 못한 걸로 족했다.
그럼 된 거다.
그렇게 생각했다. 다홍색 어깨 아래, 새까맣게 내려온 머리칼의 끝단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면서.
사락.
‘이제 어떻게 빠져나간담……?’
그녀가 짐짓 능청스러운 몸가짐을 보일 때였다.
찰나지간에 눈앞이 새하얗게 변색됐다. 설원의 색깔과 다르다. 인식하기도 전에 무지막지한 충격이 가해졌다. 무언가가 압도적인 속도로 짓쳐 든 것이다.
콰아아아앙―!
일격을 느낀 뒤에야 굉음이 터졌다. 칠사도는 격한 바람을 느끼면서 의식을 붙잡았다.
입술까지 올라온 핏물이 느껴졌다. 심무련주가 어깨로 밀어 친 것이다. 극강의 고법(靠法)이었다.
콰악!
두 발을 눈바닥에 박고도 한참을 밀려났다. 순백의 설원에 기다란 고랑이 두 줄기 생겼다. 길이가 족히 수십 장에 달했다. 심무련주의 신형이 점으로 보일 정도였다.
허나 그의 목소리는 지척에서 들렸다.
“박쥐들의 보신경은 천하일절이지만.”
후욱―!
어느새 다시 칠사도의 뒤편에 등을 보이고 자리했다. 극도로 쾌속한 보신경이었다.
발걸음이 현묘하다기보다는 무시무시한 주력으로 거리를 격하는 느낌인데도 엄청나게 빨랐다.
“이제 그 발을 엉뚱한 곳으로 놀리기 힘들겠지. 어떤 경우라도.”
시야를 둘러싸다시피 한 설원은 몹시 환했다.
“네 마라굉혈공은 시대에 뒤처진 잡공이다. 진기 도해가 널리 알려져 있으니, 도주를 포기하는 게 좋다.”
심무련주만이 할 수 있을 법한 얘기였다.
고절한 강자들이 이틀에 걸쳐 이동한 참이다. 심무련주는 절대자로서 극강의 무위를 지니고도 굉장히 철저했다.
모든 변수를 배제하는 성정. 그가 익힌 무장휘황공(無張輝晃功)도 상대의 회피를 용납하지 않는 둔법(鈍法)의 극의라 했다.
멀리서 백서군이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심무련주의 문초는 거침없이 시작됐다.
“고하라. 무슨 연유로 내 여식을 지켜봤나.”
“뭔 개소리야?”
“네 심장의 박동이 몹시 평온하구나. 진실임을 알겠다.”
칠사도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 괴물 놈은 사람을 다루는 데 도가 텄다고.
“다음으로 넘어가면.”
절대적인 음성이 느릿하게 이어졌다.
“입황성의 섬예가 있겠구나. 내 여식과 함께 있던 놈.”
순간 그녀의 움직임이 멎었다.
실제로는 심장이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맛봤다. 칠사도는 일부러 입술을 움직여 매끄러운 호선을 그렸다. 제법 짜릿한걸.
“너네 심무련, 하오문이랑 붙어먹었니?”
“망둥이 같은 네가 내 검존을 예우한 이유를 짐작하고 있다. 출신이 신야현의 정가장인 까닭이지.”
심무련주가 말을 이었다.
“네가 입황성의 본성까지 들어가 패협을 할아비라 불렀다는 사실도 접했다. 좀처럼 믿기 힘들었으나, 산서의 혈귀들을 죽이기 전에 네 입으로 떠벌렸다더군.”
“거기서 살아 나간 애들이 좀 많긴 했지. 다들 날파리 같아서 말이야.”
“네가 섬예란 애송이를 각별히 여긴다는 걸 안다. 본좌도 예의주시하고 있다.”
“네 모자란 자식한테 가르침이라도 내려 줄까 봐? 그 애, 지금 목이 멀쩡히 붙어있는지 확인해야 할걸. 내 태사는…….”
그녀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묘한 분위기를 느낀 탓이다.
지금 이 머릿수만 많은 무공 군세의 왕은 음흉한 속내를 숨기고 있다. 태사의 신변에 직결되는 흉계를.
“계속 얘기하라. 연화나타에 대한 모든 걸 말해라.”
“…딱히 더 아는 게 없는데?”
저벅.
등 뒤에서 눈 밟히는 소리가 울렸다.
칠사도를 향해 몸을 돌리는 기척이 무거웠다. 몹시 육중한 느낌이 대기를 흔들었다.
“삶에 대한 혈귀들의 집착을 안다. 처참하게 죽고 싶으냐.”
혈염교의 최고위 사도에게 내뱉는 말이 허언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상대는 십삼천주다. 무엇이든 가능한 것이다.
그가 칠사도의 뒤에서 물었다.
“정녕 고할 말이 없는가?”
“응.”
핏물로 새빨개진 그녀의 미소가 짙어졌다.
“난 모르겠어.”
그때.
불현듯 칠사도의 시선이 먼 능선으로 향했다.
“아……?”
그리고 눈을 치켜떴다. 그녀의 어깨가 크게 움츠러들었다.
“할아버님!”
후웅―!
설원 바닥이 거대한 동심원의 형태로 파였다.
전에 없던 공력 파동이었다. 색채 없는 기파가 그들의 옷자락을 소름 끼치게 훑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