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361
◈ 십전(十全) (2)
귀명패왕, 마광익주, 풍군.
귀명패왕과 풍군이 마광익주를 앞뒤로 가둔 형국에, 여타 쌍왕삼군이 그들을 내려다보는 상황.
“…….”
정연신은 한 손으로 천천히 검신을 쓸어내렸다. 일전에 부러진 북명검처럼 끊임없이 교차하는 물결무늬가 느껴졌다.
비기라고 알려진 당문 특유의 단조법에서 비롯된 문양인 듯했다.
‘재질은 진은광.’
이곳에서만 나는 철이라 했다.
기병(奇兵)이었다.
이 척하고도 반 정도의 길이에, 손잡이까지 은빛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검면에서 은은한 광채가 끊임없이 흐르는 모습. 섬예 무맥의 어떤 무공을 쓰든 수족처럼 움직이리라는 느낌이 왔다.
길들일 필요가 없는 검이었다.
“저리 빠른 이기어검은 오랜만에 보는데. 암야전주의 십리일살과도 견주어 볼 만하겠어.”
“쌓인 세월이 두껍지 않군. 하늘이 저런 자를 입황성에 내렸다는 것은…….”
“말코는 말코란 말이지. 어리다는 말을 어렵게도 해.”
머리 위에서 울렸다.
전대 황보가주 신수혜왕과 곤륜파 암군의 대화였다. 산등성이 쪽의 큰 바위에 누워있는 개방 귀군의 음험한 시선도 느껴졌다.
모든 게 보이지 않는 압박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정연신은 그저 눈꺼풀을 살짝 들어올리기만 했다.
그가 보는 인물은 면식도 없는 여타 쌍왕삼군이 아니라, 스스로 입황성의 순천익주를 죽였다고 말한 방파의 원수였다.
귀명패왕 팽여란.
하아― 하아―
관통당한 배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점차로 멎고 있다.
보이지 않는 공력 파동과 함께, 그녀의 입술 양쪽으로 하얀 김이 흘러나와 허공에 스몄다.
복부 동맥과 비유혈(脾腧穴), 척추뼈가 온갖 내장과 함께 뜯어졌을 텐데도 천천히 허리를 펴는 모습이 기이했다.
여전히 한 손으로 들기 힘들어 보일 만큼 커다란 대도의 손잡이를 감아쥔 채였다.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연기가 어느새 주변을 희끄무레하게 물들이고 있는 게, 언제라도 치명적인 도초가 뻗어나올 듯했다.
절대자였다.
‘무공을 일으켰군. 오호단문도.’
정연신은 그녀의 상태를 꿰뚫어봤다. 삼화취정을 드높은 성취로 연마한 인물.
어검의 일격을 당하자마자 무색 진기로 등허리 안에 뼈의 형상을, 뱃속에는 내장의 구조를 만들어냈다.
진기를 유형화시키는 경지가 극한의 생명력을 자아내는 것이었다.
엄청난 축기량과 내공 기예.
정말로 고절한 강자는 쉽게 죽지 않는다더니, 이만큼 광활한 진법의 공간에서 가장 큰 세를 자랑하던 인물답다.
하지만 오래 살기는 힘들 것이다. 공력이 사람의 뼈와 살을 무한적으로 대신할 수는 없을 테니.
“이 무슨…? 팽 매? 팽 매……!”
애타는 외침.
풍군 이시명이었다. 정연신의 등뒤에서 검가로 입은 내상을 수습하던 와중에 팽여란의 치명상을 한 발 늦게 받아들였다.
천하의 전대 팽가주가, 선계의 귀명패왕이 바깥 강호에서 온 입황성의 애송이에게…?
말이 되지 않는다.
방금 전에 쌍왕삼군의 등장을 목도하고 도망치듯 하산하던 구경꾼들이 하나둘씩 경공 질주를 멈추고 엄청나게 놀란 기색으로 뒤를 돌아볼 만큼.
“전대의 팽가주면, 연배가 얼마나 되지?”
문득 정연신이 물었다.
“…….”
풍군은 대답하지 않고 그를 노려보기만 했다.
검의 간격과 틈을 살피는 모양새. 분노에 섣불리 몸을 맡기지 않는 게 귀명패왕의 수족이라 알려진 노강호다웠다.
그들의 머리 위, 한참 높은 나뭇가지 위에 쪼그려 앉은 신수혜왕이 씩 웃었다. 정연신은 기척만으로도 그 입꼬리의 움직임이 태염룡과 닮았다는 걸 느꼈다.
“굳이 춘추를 헤아리는 게 무용할 만큼 많은 편이다.”
전대 황보가주가 말했다.
속내를 헤아리기 힘든 인물이었다. 하지만 정연신은 별달리 신경 쓰지 않았다.
“늙은이의 입이 방정이었군.”
그는 팽여란과 시선을 마주하며 입술을 뗐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내공호흡을 길게 들이쉬고 있었다.
쌍왕삼군이 모두 모인 탓에 섣불리 출수하기 힘든 정연신의 상황을 이미 헤아린 듯했다.
정연신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의미없는 여생을 편히 보낼 수도 있었을 텐데… 마광익주의 면전에서 또다른 대주의 죽음을 조롱하다니.”
“네 이놈!”
등뒤 쪽에 있던 이시명의 노기가 폭발했다.
화악―!
정연신은 자신의 등허리를 향해 짓쳐드는 발길질을 느꼈다. 경파가 몹시 거셌다. 일순간 대기가 사납게 갈라지며 옷단부터 누를 정도였다.
풍군의 풍화사륜각.
정연신이 바라던 대로였다. 쌍왕삼군이 한데 모여 앞날을 내다보기 힘든 대치를 이룬 지금, 어떻게든 귀명패왕과 풍군부터 제거하고 봐야 했다.
‘죽어라.’
정연신은 그대로 허리를 틀었다.
몸의 회전을 따라 공기를 가르는 왼쪽 손바닥에 살기가 실린다.
환강으로 짧은 시간에 쳐 죽일 셈. 청년의 모습을 한 소년은 동료 대주의 죽음으로부터 평정심을 지키지 못했다.
내색하지 않을 뿐, 마음이 메마른 땔감의 불길처럼 거칠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때.
귀명패왕 팽여란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녀는 강호를 오랫동안 보아 온 노고수였다. 생각지도 못한 사신이 찾아와 무인의 목숨을 앗아가는 광경을 수없이 봤다.
예측을 불허하는 강자의 난입, 그날따라 유난히 제대로 풀리지 않는 초식, 적의 출수를 앞두고 헛기침처럼 한 발 늦게 반응해버린 본신의 공력…… 언제나 하루살이처럼 사라질 수 있는 강호 무부의 명줄을 몹시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의 최후는 오늘이다.
팽여란은 경사스러운 날에 전조도 없이 찾아온 죽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무인의 벗이었다.
그녀는 어떤 쾌락처럼 밀려오는 항거불능의 최후를 온전히 느꼈다.
‘허나 허망하게 갈 수는 없지.’
동귀어진이라도 해야 마땅했다. 저 입황성의 애송이만큼 수려한 청년이라면, 더불어 삼도천을 건널 동무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죽음의 강을 건너다 무료해지면 첩으로 꾀어볼 수도 있을 터였다.
그녀는 자신을 앞에 두고 돌아서는 청년을 향해 대도를 겨눴다.
‘감히.’
앞서 팽여란은 몇 번의 손속을 교환함으로써 정연신을 적수로 인정했다.
천림대주의 외침을 듣고도 고개를 돌리지 않은 이유. 마광익주가 지닌 사람 홀리는 낯짝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우우웅―
다섯 겹의 공력 파동이 반투명한 고리의 형상을 띠며 도극을 감쌌다.
오호단문도의 마흔다섯 초식을 한 번의 출수로 일으킬 때 현현하는 경파. 귀명패왕이 금시문주의 번천참룡식을 깨기 위해 수십 년을 고련하여 얻은 절초였다.
공월무. 용현굉천포(龍現轟天砲).
지금의 몸상태로는 두어 번 쓰는 것만으로 죽음에 이르겠지만, 다른 수법으로는 입황성의 절세 미청년을 길동무로 데려가지 못할 것이다.
팽여란이 삶의 끝자락에서 만난 대적자는 그만큼 고강했다.
‘함께 가자.’
눈웃음을 지은 그녀가 천천히, 아주 느릿하게 도를 내뻗었다. 이시명이 뒤를 막고 있다. 일격의 정교함에 힘을 써도 될 터였다.
앞뒤를 점했을 뿐인데도 사면초가란 말이 어울리는 형국.
“……!”
순간 정연신을 가운데 두고 발을 뻗어 가던 풍군 이시명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분명히 팽여란의 도초를 느꼈을 마광익주는, 지극히 짧은 순간에 오히려 몸을 더욱 빠르게 회전시키고 있었다.
유려하게 휘돌면서 검을 쥐지 않은 손바닥으로 무시무시한 나선형의 광풍을 뿜어내는 모습. 풍군 이시명은 순간적으로 정연신이 누구를 노리는지 헤아리지 못했다.
‘어디가 타점이지…?’
장법의 궤적이 너무 길다. 저렇게 이시명의 발등을 비스듬히 지나치는 투로는 풍화사륜각을 받아내지 못한다.
이 순간 이시명이 없다는 가정하에, 놈의 등뒤에 있는 팽여란을 노리고 회전력으로 공격초를 가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그때였다.
“……!”
마광익주의 존재감이 너무 강대했던 까닭에 눈치채지 못했다.
뒤늦게 퍼뜩 고개를 든 이시명이 거대한 그림자에 삼켜졌다.
호통처럼 울리는 의념. 심어(心語)다. 삼화취정의 상태와 막대한 축기량이 마음속 외침을 사자후처럼 격발시키는 것.
천림대주 하후위진이 풍군을 향해 무지막지한 속도로 떨어져 내렸다.
―온몸의 십이경맥 중 족태양방광경(足太陽膀胱經)만 다시 살펴보셨으면 합니다. 허리 아래의 대장유혈(大腸兪穴)을 살짝 열고, 앞쪽의 복직근에 힘을 실어보시면 진기의 운용 방법이 달리 보일 겁니다. 세맥이 제 스스로 발경에 준하는 움직임을 냅니다.
극도로 짧은 초속(超速)의 시간.
이마를 훤히 드러낸 하후위진의 머릿속으로 후배의 조언이 흘렀다. 그 이야기는 정연신의 입에서 나올 때부터 이미 어떤 구결에 가까웠다.
명족답지 않게 큰 체구를 타고난 하후위진은 보신경이 약점이었다.
그는 후배의 구결을 곧이곧대로 따르며 수련을 거듭했고, 끝내 오늘날에 이르렀다.
‘제때 닿을 수 있다.’
그의 큼지막한 눈이 아래를 향했다.
지척이었다.
쿠궁―
팽여란이 내뻗은 도극의 주변 대기에 반투명한 지진이 크게 일어난 뒤, 풍군의 발끝이 정연신의 목덜미에 닿기 직전.
하후위진은 엉덩이의 대둔근과 골반 근육에서 힘을 풀었다.
동시에 오른쪽 허리의 신유혈(腎兪穴)로 옮긴 내공을 전신의 경맥으로 폭발시키듯 퍼뜨렸다.
그간 연마해 온 후배의 조언대로.
―그렇게 하면 족저근막까지 내려온 공력이 제 스스로 탄력을 지닙니다.
그는 섬예 무맥의 일좌가 되었다.
화아아아악!
발끝에 육중한 경파가 실린다.
순간 거구에서 터져 나온 희끄무레한 충격파가 주변의 흙먼지를 사방으로 밀어냈고, 그 사이로 벼락이 내리치듯 떨어진 하후위진의 가죽신이 풍군의 무릎을 짓밟았다.
‘어느새……?!’
콰드득―
이시명의 눈이 경악으로 흔들리는 사이.
일순간도 멈추지 않은 정연신은 그대로 몸을 한 바퀴 돌리고 있었다. 그 회전력을 완전히 왼손에 실어내면서.
‘전사경, 환강.’
팽여란이 도를 치켜든 직후부터 하후위진의 조력을 예상했다.
본성의 흑색 선배다. 걸리적거리는 놈을 치워주리라는 데에 어떤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는 어느새 눈앞으로 당도한 팽여란의 도격 경파를 향해 손바닥을 갖다댔다.
다섯 겹으로 쌓인 고리 형태의 진기.
태풍을 다듬은 것마냥 격한 무채색의 기류를 품고 있었다.
정연신은 지체하지 않고 환강을 터뜨렸다.
콰아아아아아앙!
순간적으로 대기가 일그러졌다. 일격의 여파에 뒤집어져 거대하게 치솟은 흙의 파도 너머로 팽여란의 얼굴이 보였다.
희미한 웃음기를 띤 채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용현굉천포’를 받아 보라고.
‘더 있군.’
정연신의 눈이 가늘어졌다.
다섯 개의 고리.
그것들은 정연신의 장력에 닿자마자 자신의 형체를 풀어내며 수십 개의 파편으로 화했다.
그리고 이 순간 짓쳐들어오고 있었다. 하나하나가 호랑이의 혼백인 것마냥 거친 파공성을 터뜨려대면서.
금시문주가 가지길 원했던 신공비기, 만천화우와 놀랍도록 닮은 모습.
정연신의 것과도 달랐다.
모든 파편들 속에 일정한 투로가 존재했다. 전부 제각기 다른 궤적을 그리면서 빛살 같은 속도로 전신의 요혈을 노렸다.
엄청나게 복잡했다. 귀명패왕이 쌓은 세월이 엿보일 정도였다.
실제로도 그랬다.
팽여란은 풍류에 취한 한량처럼 도를 이리저리 휘저으며 과거를 떠올렸다.
그래야 했다. 공월무는 세월이 쌓아주는 비기다. 요결이 살아온 과거에 존재했다.
‘제법 즐거웠지.’
마음에 드는 남녀와 밤을 보내고 술 한 잔을 들이켠 뒤에 눈을 감으면, 오호단문도의 날카로운 궤적이 멍하게 비워진 머릿속을 호퀘하게 노닐다가 다음 경지를 뚫어버리곤 했다.
귀명패왕은 그렇게 한 발씩 정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오로지 금시문주 하나를 바라보면서.
쿠우우우우―!
무지막지한 울림에 대기가 물결치는 가운데.
‘마흔다섯.’
정연신은 시퍼런 안광을 번뜩였다.
시천법을 통해 삽시간에 전달되는 정보. 미세하게 상하좌우로 움직인 눈동자가 모든 궤적을 시야에 담았고, 정연신은 머릿속으로 그 파편들에 실린 힘과 방향을 모조리 헤아렸다.
뇌리에 선명한 별자리가 새겨지는 느낌이었다. 그는 검을 올려치면서 무의식중에 생각했다. 내 반응 속도가 이렇게 빨랐던가?
사아아악!
그의 검이 한 줄기 백광을 남기며 사라졌다.
순간적으로 검신에서 발끝까지 전달된 진동이 땅에 균열을 일으켰고, 정면의 대기가 쩌저정― 갈라지면서 용현굉천포의 백색 파편들을 사방으로 튕겨냈다.
미처 제대로 받아치지 못한 대여섯은 핏물을 튀기며 정연신의 살갗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그가 일검으로 흐릿하게 일으킨 칼바람을 그대로 뚫어버리면서.
“오호단문도는 아홉 초식씩 다섯 편으로 묶여 있지. 총 마흔다섯의 도초다. 저건 웬만한 담량으로는 정면에서 받아내기가…….”
높디높은 나뭇가지 위였다. 비무대회의 도박꾼마냥 느긋하게 읊조리던 신수혜왕의 말이 멎었다.
어느새 고요해진 산길.
제대로 된 손속의 교환이 끝났다.
검을 비스듬히 내려쥔 정연신의 삼보 앞 거리에 팽여란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온몸에 수십 개의 구멍이 뚫린 채였다.
“잘 봤다.”
정연신이 입을 열었다.
“덕분에 수십 년을 채웠군.”
“…….”
마주한 그들의 주변으로 하얀 민들레씨들이 아롱아롱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앞서 정연신이 올려친 검과 함께 치솟은 것들.
만천화우의 흔적 위로 햇빛이 잘게 부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