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492
◈ 명족 나무 (4)
* * *
달 없는 밤중.
몹시 커다란 바위를 깎아 만든 평상 위에서 두 사람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주변이 온통 새하얀 눈으로 덮인 까닭에 각각의 몸선이 두드러졌다. 저마다 육신을 극한까지 연마한 거구의 사내들.
한쪽은 거침없이 술잔을 비우고 채우길 반복하고 있는데, 그 반대편의 사내는 큼지막한 도낏자루에 잔을 올린 채 균형을 맞추듯 술의 표면을 물끄러미 응시하기만 했다.
설산이었다.
새까만 밤공기 속에서도 빛이 났다. 지난밤을 채웠던 보름달 대신 적막만 가득한데도 어쩐지 요란스러운 느낌으로.
두 사람의 존재 탓이었다. 그들에겐 월광이 필요치 않았다.
“귀한 두강주가 다 식었구려. 기껏 구해왔더니.”
사람의 상반신만 한 도끼를 수평으로 든 남자, 군마녹림 총채주의 음성은 여느 유생처럼 점잖고 나지막했다. 태백부왕(太白斧王)이란 별호와 달리 광오함이 없었다.
흰 털옷 뒤편으로 단정하게 쓸어넘긴 머리칼에, 몹시 차분한 눈매가 큰 몸집과 조금쯤 어울리는 편이었다.
“제법 시간이 걸리긴 했지.”
쉴 새 없이 잔을 들이켜던 사내가 입매를 비튼다. 짙은 황색 장포를 허리에 묶어 상체를 드러낸 채였다.
구부정하게 앉아있는데도 선명하게 갈라진 복직근 곳곳에 크고 작은 생채기가 가득하다. 그의 전신에선 허연 김이 화아악― 소리를 내며 끊임없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힐끗한 총채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동공이 기반이구려. 그것이 천하제일무공이오?”
“입황성 쌍자색의 도움이 컸다. 많은 영감을 주더군.”
“나는 방금 천하제일을 말했소. 한데 회주는 감히 부정하지 않는구려.”
“그리 비꼬아도 소용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천하에서 으뜸이면 그걸로 된 것 아닌가?”
“쓰는 모습을 지척에서 봤소만… 그래, 제일이란 말을 입에 담아볼 법하오.”
총채주의 어조는 묘했다. 맞은편의 무룡회주 혁련풍월(赫連楓月)을 인정하는 듯 마는 듯 했던 것이다.
하지만 무룡회주는 술에 정신을 놓은 것마냥 흐, 하고 너털웃음을 짓기만 했다. 덩달아 그의 실처럼 가느다란 눈도 슬쩍 휘어졌다.
“흥취가 돋는다. 지금 네 자리에… 달과 함께 오는 무신(武神)이나 북방의 괴물이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감당은 할 수 있고?”
“이 산적 놈아, 네놈도 무인이니 나와 같을 터. 애시당초 군마녹림 총채주의 공월무가 그 둘을 겨냥하고 있음을 모르는 자가 없다. 적어도 물정 밝은 절세고수 중에서는.”
“…본론으로 들어가지. 여령주가 연통을 보냈소.”
“글줄을 길게 읽은 것들끼리 협잡질을 꾸미는 건가? 내겐 오지 않았는데…….”
“그야 회주는 집이 없지 않소?”
“본회가 있지.”
“그 무룡회도 근래엔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낭인들 아니오? 일전에 신검단주를 도모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천하에 발붙일 곳이 어디 있을까. 여하간 여령주의 전언에 따르면, 무룡회가 내 제안을 승낙할 시 십삼천 일곱이 결맹하오.”
“…일곱?”
“그 안에 혈염교와 몽인월이 있으니 사실상 태반을 넘어선다 해도 좋소. 혈염교는 그 지경으로 풍비박산이 나고도 여태 건재하더구려. 근래에 일사도가 천하에 산재한 지부들을 모아 새로이 본단을 만든 뒤 교주 좌에 앉았다 하오. 혈염교 고금제일기재를 교(敎)의 공적으로 몰아버렸다더군. 한편 몽인월은 천하에서 가장 속내를 읽기 힘든 방파지만, 어째선지 여령주는 그들의 협력을 의심하지 않았소.”
군마녹림 총채주는 도낏자루 위에 놓인 술잔을 묵묵히 응시하며 입을 놀렸다.
“거기에 만상수로채가 장강수군(長江水軍)과 신검단 광검대를 격파함으로써 중원을 관통해 버렸고, 우리 군마녹림은 근래에 북방 요족들의 기마무공을 일부나마 얻어 기존의 신공절학을 집대성할 수 있었지. 더하여 여령과 패검종이 있소. 회주마저 결맹에 응한다면, 그 흐름은….”
“천하의 대세다?”
“일개인이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오. 멀쩡히 강호를 활보하는 입황성 자색이 한 명인 지금은 더 그렇지. 아무래도 용 단주는 괴력난신을 막는 데 여념이 없나 보오. 안쓰럽고도 고마운 일이라 할 수 있소.”
스윽.
불현듯 총채주의 도낏자루에서 비취빛 잔이 저절로 둥실 떠오른다. 그 속에 차 있던 술이 별다른 전조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순간 무룡회주 혁련풍월의 눈에 이채가 맺혔지만, 말을 잇는 총재주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여령주는 장차 주씨 황실과 동등한 위치에서 크게 이득을 보는 그림을 그리고 있소. 우리가 난세에 의견을 일치시켜 비선으로 연결되었으니, 이미 반절은 성공한 셈이오.”
“명교는? 소천마(小天魔)가 일궈 놓은 전력이 막강하다고 들었다. 야율가 애송이의 무공도 서장제일이라던데.”
“애석하게도 그쪽으로 간 여령의 사절은 매번 객사한다고 들었소. 마른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든, 별안간 극심한 눈사태가 일어나 인마를 통째로 파묻어버리든. 그쪽 날씨는 참으로 오만하오.”
“그 정도면 범상한 편이지. 우리처럼 제 욕망에 충실한 종자들이 하나로 뭉친다는 게 말이나 되나?”
“지금은 그래야 하오. 흉년과 난세에 휩쓸리지 않고 천하의 흐름을 한 손에 쥐려거든. 금시문, 십전문, 순마련, 그리고 태모산성과 천극문… 신임 자색이 거쳐 가는 사마외도마다 망조가 들고 있소. 무림 호족들을 포함시키면 더 많지. 실로 올곧은 재앙이오.”
“뭐… 유순해 보이진 않더군. 자질은 지금도 믿기 힘든 형편이고. 허나 한 놈이다. 네놈들이 체면 불고하고 나선다면 십삼천주만 여섯을 헤아릴 텐데?”
“종적이 묘연해졌소. 하지만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수도 없으니, 그 친구를 찾기보단 양양을 도모하는 쪽이 나을 듯하오.”
담담하게 흘러나온 이야기.
“음…?”
처음으로 혁련풍월의 안색이 바뀐다. 총채주가 강호의 금기를 입에 담았다.
호광성 양양은 천하 무림의 금역(禁域)으로, 말 그대로 공공연히 방파대전 따위를 논하는 것이 금지된 영역이었다.
다름 아닌 입황성 본성이 자리한 탓에.
스윽.
풍채 좋은 몸을 일으킨 총채주의 눈높이를 따라 술잔이 솟아오르더니, 이내 퍼석 소리와 함께 가루로 화했다.
곧이어 그가 후 하고 입김을 불자 옥빛 분진이 측면으로 휘어지며 네 사람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양팔이 발달한 노파와 두 동강 난 창을 든 중년인, 귀가 긴 청년, 그리고 온몸을 묶은 붕대의 곳곳이 찢겨 화상 자국을 드러낸 괴인까지.
총채주와 무룡회주가 대작하는 동안에도 그 자리에 있었다. 걸터앉았건 한쪽 무릎을 꿇었건, 저마다 어떤 자세로든 머리를 앞으로 향한 채였다.
“언가 쪽은 가주가 아니라 아쉽소. 그나마 이름 있는 장로께서 잡혀 주셨으니 다행이랄까. 악가주께서 이리 계시지 않았다면 자리가 허전했을 거요. 참으로 귀한 몸이오.”
사박.
총채주가 그들의 앞으로 내려섰다. 체구에 비해 나지막한 걸음 소리였다.
육신의 무게를 한 점에 때려 박는 보신경.
곧이어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는데, 네 사람은 그때까지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혈과 아혈을 제압당한 탓이었다.
“소연대주 유 대협께는 용서를 구하오. 보신경이 워낙 신출귀몰하여, 내 운이 닿는 대로 그 다리부터 꺾어놓을 수밖에 없었소. 명백이 신검단의 흑색제일쾌(黑色第一快) 아니시오? 발놀림이 명불허전이었소.”
총채주가 잔잔한 어조로 상대를 높인다. 귀가 큰 미청년은 눈을 부릅뜬 채 그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그리고 명류대주… 미안하오, 천하의 하오문주도 그대의 이름을 모르더군. 여하간 그대의 몰골은 몹시 유감이오. 혁련 회주께서 과감히 손을 쓰는 통에 말릴 새가 없었소. 그래도 이해는 가오. 그대의 은잠술은 악가주의 절초만큼이나 위협적이었으니. 자칫 등을 내줄 뻔했는데, 진실로 그리되었다면 내 모친의 상심이 컸을 거요. 명줄이 얼마나 질기신지 아직 상을 치르지도 않아서.”
긴 이야기가 청산유수인 게, 언행이 여느 유생과 같았다. 어느새 도끼를 어깨에 얹은 채로도 그랬다.
붕대의 괴인은 반응하지 않았다. 총채주 역시 그 앞에서 사박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네 사람의 머리맡을 좌우로 느릿하게 맴도는 모습이었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혁련풍월이 입을 연다.
“입황성의 두 눈을 뽑은 셈이로군. 반격의 효시치곤 제법 큰 쾌거야.”
“정말로 그리 생각하오?”
총채주가 나지막이 되묻자 혁련풍월의 미간이 모였다.
“시원하게 말해라.”
“입황성은 천하 괴물들의 군집이오. 한데 모였을 때의 무력이 강호제일인 것은 물론, 지닌 눈마저 수백 수천을 헤아리지. 천하의 관아가 모두 그들의 비선이니까. 심지어 외딴 마을에 부임한 지현조차 정보원이라 할 수 있소.”
저벅.
방파대전 포로들의 눈앞을 오가던 총채주의 발소리가 불현듯 짙어졌다.
“그 덕에 입황성은 온갖 잡스러운 일까지 귀신처럼 헤아려 무사들을 보내곤 하지. 우리가 그들 못지않은 정보력을 갖춰야 하는 이유요.”
혁련풍월은 손을 내저었다.
“정보원이라… 부패한 관리가 들끓는 흉년에도 그럴까? 당장 붕대 괴물에 다리 긴 놈만 해도 저 지경 아닌가?”
“결코 그들의 저력을 얕봐선 안 된단 거요. 천하를 아우르는 정보력이든, 언제 허를 찔러올지 모를 자색이든. 입황성은 늘 그러했듯 오만할 만하오. 천운이 섬예의 모습으로 그들과 함께하고 있기도 하고.”
“그래서?”
“속전속결이 관건이오.”
총채주가 소연대주 유정명의 머리맡을 지날 때였다.
돌연 귀신처럼 흐릿하게 몸을 튼 총채주의 도끼가 쿠릉― 하고 지진 같은 소리를 내더니 공기를 찢어발기며 내리찍혔다.
퍼억!
박살 난 두개골의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한다.
소연대주의 바로 옆자리였다. 악가주는 머리를 잃고도 한쪽 무릎만 꿇은 자세를 유지했다. 그의 몸은 이미 발치에 부러져 있던 창보다 강건해 보였다.
다시 도끼를 어깨에 짊어진 총채주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졸지에 부대주 자리를 잃게 생긴 입황신창 악 노협께 서신을 보내셨더군. 가주 자리에 앉아달라고… 안 될 일이지, 안 될 일이야. 악가 비전이 그분 손에 들어가서 공월무라도 연성하시면 큰일 아니오? 악가창의 후반부 절초도 없이 그 자리에 오르셨거늘.”
사박.
총채주는 다시금 천천히 발을 옮겼다.
“혁련 회주.”
“말해라.”
“나와 더불어 양양을 범합시다. 내가 생각하기에 기회는 지금뿐이오. 아무리 봐도 광야일멸은 본성과 먼 곳에 있소. 용 단주는 말할 것도 없고.”
“하나 묻지. 나머지 셋도 죽일 셈인가? 영 보기 좋지 않은데.”
“고민 중이오. 아, 여령주와 하오문주 덕에 섬예란 청년에 대해 많은 걸 습득했소. 어렸을 적 자신을 몰래 연모하던 여아가 한둘이 아니었다는 걸 그 친구는 알까? 제 아비처럼 요령이 조금만 있었어도 마을의 골목대장으로 행세했으련만, 그저 이리저리 당하기만 하고… 뭐, 태생부터 입황성의 기질을 타고났던 셈이오. 참으로 신기하지.”
곧이어 눈 밟는 소리가 다시 한번 짙어졌다.
* * *
천하목 내부.
동역이란 마을에서 보낸 정연신의 이틀은 평온했다.
큼지막한 수풀들이 부채처럼 나부끼는 장소였다. 이만큼 푸른 땅을 본 적이 없었다. 중심부인 도시와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내부의 외곽조차 자연지기가 달랐다.
그는 이처럼 청아한 공기를 처음으로 마셔 봤다.
거처로 삼게 된 치천궁백의 벽돌집도 정갈하고 넓었다. 자신 같은 빈객이 머물 만한 객청이 존재했다.
마을 사람들만 다소 이상할 뿐이었다.
치천궁백이 입단속을 시켰다지만, 이따금 정연신의 거처를 올려다보는 눈길에 상당한 거리감이 있었다. 간혹 담장이 뚫리는 듯한 느낌마저 받았다.
한 사람만 친근했다.
자신의 이름을 휘파람으로 소개한 소년이었다.
연배에 비해 볼살이 없어서 앳된 용모임에도 굉장히 수려했는데, 입으로 만들어내는 바람소리가 진짜 이름이라 했다.
천하목 바깥으로 나가서 쓸 가명은 정연신더러 붙여 달란 말과 함께였다.
―혹시 내 스승님의 성함도 가명이야? 위씨 성을 쓰신다고 했는데.
―당연하죠. 여기 출신들은 다 그래요. 바깥에서 나고 자란 씨족이나 진짜 이름을 한자로 쓰죠.
―아.
―그보다 바깥사람치곤 되게 친절하시네요. 제가 들어본 분들은 다 머리 한쪽이 이상했는데… 입황성의 용씨 아저씨만 해도 북명권후(北溟拳侯) 님이랑 일만 초를 겨루면서 마을 사람들을 다 잠들게 했대요. 마 뭐시기 아저씨는 나무 바깥에서 문전박대를 당했는데 맨주먹으로 입구를 부수고 도시로 들어갔다지 뭐예요?
―네가 장성한 어른에 대해선 못 들었구나.
―그런가 봐요.
―나와 관계가 없는 일이란다. 그보다…….
―아, 참. 그분을 어떻게 부르냐면요….
그날 정연신은 한 줄기 아름다운 휘파람을 들었고, 굉장히 순한 인상을 지닌 소년에게 종연(種緣)이란 이름을 선물했다. 처음 만난 인연이란 의미였다.
천하목의 종연은 굉장히 기뻐했다. 많은 이들이 발 딛기 꺼리는 치천궁백의 집까지 들어와선, 베개와 침낭을 비롯해 여러 귀한 물건들을 건네줄 정도였다.
덕분에 평안했다.
이틀째에 치천궁백이 입황성주를 논하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묵묵히 기다리기만 했다. 그날 일어난 일은 정연신의 명경지수와 같은 인내심과 별개였다.
그녀는 바깥에서 직전제자를 받은 입황성주를 지나가듯이 비꼬았고, 두 번의 밤낮을 보지 못한 정연신은 굳이 저절로 튀어 나간 환강을 제지하지 않았다.
그것은 예와 기백으로 천하제일이었던 청기린의 뜻이기도 했다. 강호에 사제지연보다 지엄한 것은 없는 법이었다.
그렇게 또 하루가 흘렀다.
화아아아악―!
실타래마냥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강풍 아래.
정연신은 완전히 폐허가 된 공터 한쪽에 앉아 있었다. 그나마 멀쩡한 벽돌담을 등받이로 삼은 채였다.
본래 소담스러우면서도 정갈했던 거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천하목으로 들어온 지 사흘이 지난 시점이다.
그는 눈꺼풀만 살짝 들어 올렸다.
사박.
맞은편에서 치천궁백이 걸어오는데, 한번 손속을 나눈 이후로 처음이었다. 정연신은 느릿하게 입을 뗐다.
“몰골이 왜 그렇습니까?”
“도망쳐라.”
그녀가 말했다.
무심한 얼굴이 크게 야위어 있다. 어제 정연신과 겨뤘을 때와는 달랐다.
치천궁백은 그날 화살을 유성처럼 쏟아내고도 안색이 바뀌지 않았다.
심지어 여뢰의 검로 속에 갇혀버렸을 때도 눈썹을 치켜올리기만 했는데, 지금 보이는 모습은 피골이 상접한 폐인에 가까웠다. 무언가가 내공을 막대하게 빨아들인 것처럼.
“천하목의 수석호법은 네 명이라고, 엊그제 들은 기억이 있을 거야.”
그녀는 정연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도시의 율법을 집행하는 이들이지. 위계가 나뉘어 있을지언정 무위의 격은 같아. 너희 속세인들은 절세고수라고 부르겠지.”
“이리로 오고 있군요.”
정연신은 뜻 모를 표정으로 대답했다.
실제로 그는 드물게 강대한 기파들을 느끼고 있었다.
용지검공, 북명권후, 치천궁백, 금벽자(金霹子). 천하목의 동서남북을 관할한다는 존재들이다.
이 순간 뿜어내는 공력 파동이 구파의 장문인들마냥 청아한 데다, 그 밀도마저 그들을 연상케 할 만큼 짙었다. 저마다의 별호가 지닌 뜻대로 천재지변이 몰려오는 듯했다.
쿵! 쿠르릉!
이동하는 것만으로 깊은 울림을 동반한다. 천하에서 가장 중요한 땅답다고 할까.
그들은 정말로 절세고수였다.
순간 정연신의 눈매가 여뢰의 검극처럼 날카로워졌다.
“이곳 동역이 파괴되기 전이라면 몰라도, 이젠 말이 통하지 않을 거야. 어서 자리를 피하고 네 스승을 기다리는 게 상책… 객기 부리지 마.”
치천궁백은 그가 몸을 일으키자마자 일보 앞으로 움직였다.
마찬가지로 정연신 역시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무언가에 크게 화난 기색으로, 마치 성벽처럼 우뚝 선 치천궁백을 향해 똑바로 발을 옮겼다. 성큼거리는 소리가 점차로 커졌다.
우우우우웅!
두 사람 사이에서 굵직한 아지랑이들이 뻗어 나와 거세게 출렁인다.
절세고수들의 간합이 부딪친 까닭이다. 그들이 상시로 펼쳐두는 내공의 영역끼리 마찰을 빚는데, 정연신은 자신을 노려보며 대궁마저 꺼내든 치천궁백을 향해 묵묵히 걷기만 했다.
그리고 이내.
사락.
두 사람이 옆으로 스쳤고, 그들의 허리를 두른 요대가 미미하게 맞닿았다. 간합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무인들끼리 자존심을 부렸다고 해도 옳았다. 순간 정연신의 앞섶이 치천궁백의 어깨를 짓눌렀다.
“당신들.”
그가 잇새로 속삭였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우웅―!
정연신의 몸에서 강렬한 기파가 터졌고, 치천궁백은 투명한 햇살마냥 번진 능법광륜기의 법력을 온몸으로 쬐었다.
순간 무심한 표정을 고수하고 있던 그녀의 양쪽 뺨이 본래의 살색을 되찾아 버렸다.
“애송이가 건방….”
치천궁백의 말이 멎는다.
삽시간에 몸이 회복된 까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