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545
◈ 강호 인명록 (11)
* * *
대도독의 막사.
명나라 대도독과 신검단주 대리의 접선이 이루어지고 있다. 어떤 권세가든 기함할 광경이었다.
정연신은 북방 지도를 살폈고, 바로 그 자리에서 자금성 자녕궁의 주인을 인지했다. 정확히는 바람결에 스며 있던 그녀의 영성을 느낀 것이었다.
몹시 가까스로.
‘인식하지 못할 뻔했어.’
이기어검, 즉 선룡이화결로 활개를 친 데 대한 대가일까.
그렇지 않다.
정연신의 기감은 여전히 예리하게 곤두서 있다. 불시의 기습을 허용하지 않는 절세 영역의 감각. 북방 호천성을 부숨으로써 온몸이 무거워졌다고 해도 변함없이 건재했다.
그저 태황태후의 시선이 터무니없이 자연스러웠던 것뿐이다. 막사의 천막을 들추며 불어온 바람이 곧 그녀의 눈길이었으니까.
자연지기에 깃든 영성을 손발처럼 부리는 수법.
‘신 선배님은 토기(土氣)였지.’
전전대 신검단주, 신천화의 술법무공은 오행(五行)의 힘을 압도적으로 지배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흙과 바위를 부리는 기교가 특별히 남달랐는데, 신속 교묘함에 있어선 정연신의 칼부림조차 아래로 내려다볼 정도였다.
마찬가지로 마광익주 청명도 비슷한 공능을 지니고 있었다.
―난 바람을 잘 느끼거든.
그가 정연신이 입황성에 들어오기 전부터 마광익 제일의 검객으로 꼽히고 있었던 이유. 강풍이 모든 검격을 뒷받침하기 때문이라 했다.
태황태후의 힘도 그와 동류일 것이다. 다만 그러한 공능을 다루는 수법과 격에서 차이가 날 뿐.
그렇기에 방금 같은 문답이 가능했다.
정연신은 바람결에 전음을 흘려 넣었고, 태황태후는 짤막하게나마 신검단 신검대주와 신검부대주가 같다는 치하를 보내줬다.
역모란 입황성주조차 쉽게 손대기 힘들 수밖에 없는 죄인데도, 이 순간 정연신은 한시름을 놓았다.
‘만사형통.’
그는 태황태후의 시선을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반갑게 받아들였다. 두 흑색 선배의 일이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해결될지도 모르니까.
한편.
“그럼에도 아직 해결된 것은 없습니다. 군문의 만사가 늘 그렇듯 북경 밥벌레들이 문제지요.”
대도독 전우립이 눈가를 신경질적으로 꾹꾹 누르며 말했다.
“북방 전장의 소강상태를 꿀처럼 핥아먹고 있는 것들 말입니다. 황권이 바뀐 시기이니만큼 저마다 누울 곳을 찾아 헤매는 들개가 따로 없을 텐데, 여기서 제가 대대적인 출진을 명했다가는….”
북경이든 북방이든 모두 난리가 날 것이다. 올라오고 내려오는 존재들 틈에 끼여 버릴지도 모른다.
문득 신소빈이 끼어들었다.
“그걸 걱정하기엔 늦지 않았나요? 이미 정 공께서 요새랑 관문을 하나씩 부숴 버리셨는데.”
정연신은 자신의 수제자를 힐끔했다.
순간 눈이 마주친 신소빈의 입꼬리가 고양이마냥 작게 올라간다. 약을 올리는 듯 마는 듯 했다.
그녀가 입술을 달싹였다.
“저도 가문에서 병략을 배웠어요. 아무리 봐도 지금은 몰아쳐야 할 시기 아닌가요? 지금은 호천성도 비었잖아요?”
“그것을 점령하느냐 마느냐가 관건일세.”
섬예무맥의 정통 계승자에 대한 예우인지, 전우립은 신소빈의 말을 자연스럽게 받아넘겼다. 북방 지도가 자리한 탁자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면서였다.
“그대로 두면 작은 국지전이 거듭될 뿐이겠지. 적어도 투신이 다시 나타날 때까지는…….”
투신.
명나라 군부의 일인자가 적대 씨족의 수장을 스스럼없이 신(神)이라고 지칭했다.
평상시 건릉제가 묵인하지 않았다면 있기 힘든 일. 그처럼 전우립의 말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하지만 내가 다시 거병한다면, 그때는 북방은 물론 남녘마저 전장의 삭풍에 휩쓸릴 걸세. 이제 저 자금성의 강대한 황실 고수들은 강호인마저 어떻게든 징집하고자 하겠지. 물론 괴물들뿐인 북방 강호 역시 하나로 뭉칠 테고. 당연히… 후자야말로 가장 큰 문제일세.”
“그러니까, 황군이 움직이면 북쪽 강호도 나라처럼 움직인다는 거죠?”
“맞네, 신씨 친구.”
“그럼 강호인이 나설 차례군요.”
“음?”
“소수의 고수들이 북방 강호에 들어가는 거죠. 호천성과 슬해관뿐만 아니라 점령할 땅이 계속해서 늘어나게요.”
“그건 터무니없이 위험한 일일세. 게다가 그처럼 군부와 가까운 강호인은 천하에 없어. 어떤 무림 고수가 스스로 명부의 등활지옥(等活地獄)에 들어가겠나?”
지옥의 불구덩이.
북방에 대한 전우립의 표현인데, 전혀 과언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정연신 역시 지도를 익히며 온갖 생소한 풍토와 삶, 그리고 북방 강호의 각종 세력과 강자들에 대해 몹시 짧게나마 들은 참이니까.
‘거긴 등활지옥이 맞아. 여러모로….’
그때 신소빈이 생긋 웃었다.
“누가 가냐고요? 우리가 있잖아요.”
“뭐?”
전우립의 반문에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강호인들은 입황성을 관부로 보지만, 관리들은 본성을 강호인으로 봐요. 황실도 대외적으로는 철저하게 신검단을 황군이나 황립 방파로 인정하지 않고요. 우린 이방인이죠. 북방에서도 그럴 거예요. 북도의 ‘강호’ 인명록에 우리 정 공의 이름이 올라가 있는 것만 봐도 뭐.”
“아, 그 인명록…….”
전우립은 그것에 대해 아는 것마냥 말끝을 흐렸다. 동시에 기막이 쳐져 있음에도 막사 바깥에서 웬 전투마의 거친 투레질 소리가 들려왔다.
천하 북도의 존재감. 굳이 천막을 들춰볼 것도 없었다.
그러건 말건 신소빈은 재잘재잘 이야기했다.
“중요한 건 북녘의 양민들을 빼내고 북방 강호를 휩쓸고 올 소수의 강자들이잖아요? 정 공께서는 겸사로 북경이 자발적으로 여의천주와 천룡대주 선배들을 해방시켰으면 하시고요. 이 정도 사정이면 선황께서도 출정을 허락하시지 않을까요?”
“저희가 장성으로 온 이유는.”
곧장 그녀의 얘기를 나지막하게 받은 정연신.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북경이 스스로 제게 여의천과 천룡대를 지원하도록 만들고자 함이었습니다. 오늘 보니 조금만 기다리면 자금성에서 교지가 내려올 것 같은데….”
뒷말을 살짝 얼버무린다. 교지가 왜 내려올 것 같으냐고 물으면 대답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이제 군자의 일이 마냥 옳게만 비치지 않음을 깨닫고 있었다. 마땅히 필요했다고 해도 숨길 것은 숨겨야 한다.
‘…용 선배님은 늘 고독하셨겠어.’
외조부 마연적도.
이제 세상에 없는 신천화도.
저마다 다른 기질로 패도적이었다.
당연히 모두 신검단주 자리가 위태로워질 일을 감수한 적이 있을 것이다. 과거 용희명의 대주 집결령만 해도 그렇다.
그 명령이 북경에서 얼마나 큰 멸시로 돌아왔던가. 어떤 권세가도 신검단주와 오랫동안 말을 섞으려 들지 않았다. 전대 단주인 마연적을 좋게 얘기하는 이도 없었다.
정연신은 이제 그런 길을 걸어야 한다.
북방.
뭇 양민의 시신을 기왓장으로 삼는 괴력난신들의 땅에서.
그것이 신검단주 대리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임무였다.
아무런 정치적 부담도 없이 여의천주와 천룡대주를 빠른 시일 내에 빼내고, 북방의 위협을 미연에 사그라뜨릴 방법.
한편 정연신은 문득 어쩌다 자신이 협(俠)을 당연한 가치로 삼게 되었는지 떠올렸다.
정가장에서 먼 시간을 건너오며 자연스럽게 그리되었지만, 분명히 계기는 있었다.
‘신야현.’
드물게 비옥한 땅.
그는 교지를 기다리며 과거에 잠겼다.
“…….”
전우립과 신소빈은 상념에 든 그를 방해하지 않았다. 두 사람 역시 저마다의 이유로 생각에 잠겨 들었다.
이 자리에서 이루어진 결정은 말 그대로 거사(擧事).
그들은 큰일을 앞두고 있었다.
* * *
진명조와 연소하가 자녕궁에서 쫓겨난 지 하루.
하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거처는 뇌옥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금성 외곽에서 가장 가까운 전각으로, 언제든지 등청과 퇴청이 가능한 곳이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슥, 스윽.
진명조가 고아한 자세로 웬 상소문을 써 내려간다. 붓을 치는 소리는 고즈넉했고, 그 내용은 필묵의 움직임보다 압도적이었다.
―당대 신검부대주 하나의 무게감이 여의천주와 천룡대주를 합한 것 못지않다. 마땅히 죄를 대신 짊어지고도 남는다 할 것이다.
요지는 이러했다.
‘저 상소는 온 세상이 알아야 해. 물론 정 단주님도.’
그렇게 감탄하던 연소하는 난데없이 또 한 번 자녕궁으로 불려 갔다. 진명조가 대충 던져 준 바닷빛 구슬, 보령옥(寶靈玉)을 품에 넣은 채였다.
“새 신검대의 신호탄이다. 낌새가 이상하면, 궁 내부로 들어가지 말고 터뜨려라. 내가 간다.”
“예!”
이번에 부름받은 이는 연소하 한 명뿐이었다. 앞서 진명조가 태황태후에게 드러낸 태도 탓일 터였다.
하지만 신검부대주가 염려한 일은 없었다.
자녕궁으로 들어선 연소하는 궁 내에서도 별다른 적의를 느끼지 못했다. 주렴에 가려진 태황태후의 인영도 잔잔한 나무 조각 같았다.
오히려 그녀는 대뜸 ‘신검단 광예결’에 대한 흥미를 드러냈다.
“다시 보니 또 다르다. 네 몸에 어설프게 내재된 것… 진기 운용이 터무니없이 자유롭구나.”
“예…?”
“삼봉 도인이 전장에서 자랐다면 그런 무공을 만들었을 터. 이리 오라. 그 같은 공부를 배운 자의 시야가 궁금하다.”
“어인 말씀인지 영문을 모르겠습니다만…….”
“북경 연가 태생에, 몹시 영민한 아이라고 들었다. 입황성에 지급된 강호 요인들의 용모파기가 네 머릿속에도 있을 테지. 본다면 바로 알아채리라.”
사락.
주렴 사이로 고목처럼 메마른 손이 뻗어 나오더니, 연소하가 저항할 새도 없이 그의 이마를 짚어버렸다.
“……!”
동시에 연소하의 눈앞이 희끗하게 물들었다. 궁내를 비추고 있던 시야가 화악! 하고 끝없이 치솟더니, 이내 자금성 전역을 아래에 뒀다.
신령스러운 바람과 합일(合一)된 것처럼.
온갖 말소리가 들려왔다. 황실 고수들의 나지막한 대화는 물론, 소리를 한껏 낮춘 일부 대상인들의 속삭임까지.
“허어, 황실 무사들의 면면이 실로 화려하군. 힘들게 자금성으로 들어온 보람이 있어. 하지만 이건… 장성이 크게 비었겠는데.”
“황실의 안법은 천하제일이잖습니까. 투신 찾기에 급급한 요족들이 또 뭉치기 시작하면 이쪽 고수들도 다시 올라가겠지요. 그보다 중요한 건 강호 인명록이 아닌지… 온 천하가 난리일 텐데 말입니다.”
“그야 그럴 만하지. 힘이 전부인 흉년의 강호 아닌가. 원래도 무림인이란 작자들은 저들끼리의 우열에 몹시 민감했네. 이 같은 상황에 그럴듯한 방문(榜文)이 천하 각지에 붙어버렸으니…….”
“그 규모가 또 믿음을 주지요. 듣기론 여령이 풀었다고.”
“여령은 무슨, 빌어먹을 잡것들이지.”
“예?”
“이번 일도 그렇고, 그 잡것들이 해 온 짓거리를 보게. 천하 강호를 교묘하게 분열시키고 있지 않은가? 당장 그 방문이 도처에 붙은 직후 공증인을 낀 비무첩의 양이 얼마나 늘었을지, 난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네.”
“그렇게 볼 수도 있겠습니다. 하긴, 강호인의 자존심이란 때때로 허기마저 우습게 보는 법이니.”
“섬뜩한 꼬락서니야. 아주 음흉해. 여령이란 방파 자체가 북방 강호였던 것처럼….”
“그만, 그만! 여긴 황궁이란 말입니다…! 얼른 호부(戶部)로 가지요. 상서께서 불호령을 내리시기 전에.”
“맞네. 여기서 고관대작의 심기를 더 거슬렀다간 본래 우리가 주기로 한 군량미가 어디까지 늘어날지 알 수가 없으니, 이 또한 빌어먹을 일이지. 그나마 우리의 미곡이 입황성으로도 들어가서 다행….”
“어르신…!”
연소하는 마치 자신이 혼백으로 바뀐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당황하지 않았다. 그 역시 여느 신검대원들처럼 무(武)에 미친 기재였기에.
‘태황태후 전하께서 내 눈으로 세상을 내려다보시는 건가? 이거 기연인데? 느낌을 좀 얻어 가야겠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황금빛 궁궐들 사이를 날아다녔다.
자금성 곳곳의 단아한 길을 거닐던 문무백관은 물론, 제각각 십팔반병기를 패용한 황실 고수들마저 연소하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 인명록, 황군은 없군.”
“우리가 강호 무부들이랑 같나. 이미 무과에서부터 우열이 정해져 있었던 데다, 오합지졸마냥 분열할 일도 없지. 아… 입황성은 달리 취급당한 모양인데. 그치들은 이 방문을 좋아할지 싫어할지 모르겠군.”
“어허, 천박한 말 삼가게. 자네가 입황성 무사보다 우월하다 여기지도 말고.”
“우리끼리지만, 좀이 쑤셔서. 침상이 영 불편해. 차라리 군막의 맨땅이 더 나았어.”
“다시 출정할 때가 올 걸세. 아닌 말로 강호의 절세고수라 한들 그 많은 요족 놈들을 어찌 감당하겠나. 강호를 홀로 걷는 게 습관이 된 자들이니, 북방에선 괴물 무리에게 휩쓸리지나 않으면 다행일 걸세. 어렵게 징집해 봤자 전력으로 쓰질 못하겠지.”
“하여간 이 종이도 우습군. 정작 십대고수(十代高手)가 보이지 않으니, 이게 다 무슨 의미인가.”
“음? 난 ‘여섯’이 안 보이네만.”
“…술법무공이군. 손을 떼. 대영반께 보고드려야겠다.”
연소하는 여의천주와 천룡대주가 갇혀 있을 뇌옥으로 가고 싶었다. 그들의 성품에, 뇌옥을 지키는 간수(看守)들과 원만하게 지낼 리는 없었으니까.
‘특히 여의천주 북궁 선배는….’
지금 뇌옥이 온전하기는 할까.
잡혀 들어간 지 꽤 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때였다.
―내가 이들을 관측할 수 있는 것은 잠시에 불과한데, 네 시선에 깃든 무공이 이자들에게 어찌 반응하는지 봐야겠다. 마음을 붙들어라.
태황후의 음성.
동시에 연소하의 시야가 점멸했다.
화아아아악!
온갖 광경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그의 뇌리에 흘러 들어온다.
무의식중에 발동시킨 광예결의 공능이 그 어지러운 시야를 하나둘씩 정리하는데, 가장 먼저 인식된 존재가 낯익었다.
녹빛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뒷모습.
연두색 비단 허리띠의 틈새로 내려와 있는 것이 검인지 나뭇가지인지 제대로 인식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입황성주라는 것을 알아채자마자, 연소하의 시야는 고스란히 튕겨 나갔다.
두 번째 광경은 그의 눈보다 귀가 먼저 반응했다.
“태조의 늙은 나무가, 쥐새끼처럼.”
허여멀건 안개 속에서 홀로 바둑을 두던 소천무적이 하얗게 웃었다. 그녀가 자신의 머리칼처럼 새까만 흑돌을 탁 내리자마자 시야가 반전되며 밀려 나갔고.
사아아―
어딘지 모를 황야마저 연소하의 뇌리로 흘러 들어왔다. 그곳에는 사람이 없었고, 이따금 검 한 자루의 형상으로 이글거리는 공기만 보였다. 무지갯빛 바람과 함께.
네 번째 장소에선 핏물부터 튀었다.
푸화학!
자줏빛으로 물든 웬 여인의 수도(手刀)에 갈빗대가 콰드득― 하고 박살 난 패검종주. 하지만 그의 눈은 차분한 묵빛이었다.
그는 연소하를 한 번 힐끗하곤, 눈꺼풀을 느릿하게 내렸다. 동시에 그들을 담고 있던 연소하의 시야도 위아래로 감겼다.
다섯 번째는 죽은 요족들의 몸뚱이로 이뤄진 산이었다.
연소하의 시선이 부끄러운 걸까. 삿갓을 푹 눌러쓰며 가볍게 웃는 외팔의 검객. 곧이어 한 손으로 소림사의 방장대사마냥 정중히 반장하면서, 입으로는 무당도사처럼 도호를 뇌까린다.
“원시안진.”
모든 것이 모순인 자의 칼자루에서 황금빛 불티가 파지직! 튀어 올랐다가 그의 발밑으로 사라졌다.
다음 순간 연소하의 시야는 일천 하고도 한 갈래가 더해진 검격으로 산산이 찢겨 나갔다.
‘허어억!’
내심 헛숨을 내뱉은 연소하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시야.
자줏빛으로 펄럭이는 옷자락을 본 순간, 그의 동요가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절세 미청년의 등허리에서 밤공기를 품은 머리칼이 잔잔하게 휘날리고 있다.
청색 장포를 걸친 소녀가 그와 함께였는데, 먼발치에선 거대한 인마 한 쌍이 그들을 따랐다.
믿기 힘들게도.
그들은 장성을 등진 채 걷고 있었다.
“그만.”
섬예 정연신이 말했다.
굳이 돌아보지 않고도 태황태후와 눈을 마주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