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58
◈ 입황대협
상대가 검과 팔을 함께 잃었다. 정연신이 심수검의 목을 치려던 때였다.
“이 무도한 놈!”
멀리 뒤에 있던 지현의 몸이 광풍을 일으키며 쇄도했다.
관복의 연녹색 옷자락이 나비처럼 하늘거렸다.
명족 특유의 몸놀림으로 심수검을 지나친 그가 양팔을 활짝 펼치며 그녀를 막아섰다.
“감히 본관의 정실 부인을 해한다? 입황성은 황실의 검이다! 어디서 칼 따위가 스스로 주인을 벤단 말인가?”
“황보 혈족이 황실과 동격이라고?”
정연신은 길가의 쓰레기를 보는 것보다도 무미건조한 눈으로 되물었다.
명족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적어도 정가장에 있을 때는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지현이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본관을 베지 않고서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포기하라. 이 평음현의 지현인 날 어찌 해친단 말인가? 네놈이 흑색무사도 아니거늘!”
후웅!
바람이 한 번 더 불었다. 정연신은 힐끗 곁눈질했다. 어느새 청명이 옆자리에 서 있었다.
늘상 웃고 다니던 표정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얼굴이었다.
“씨족의 법도를 따르면 되지.”
청명이 말했다. 동시에 표정이 바뀌었다. 눈매는 변함이 없는데 입술만 미소를 짓는 모습이었다.
“태황태후 전하께서 가로되, 입황성 명족은 위계를 불문하고 육품 이하의 관리를 참할 수 있다 하셨지. 지현은 칠품이지? 터무니없는 특권이라고 생각했는데, 임무를 뛰다 보니 이렇게 쓸 일이 생기긴 하네.”
“그대가 정녕······!”
“우리 씨족도 한족과 섞여 세속에 물들면 꼴불견이 된다더니, 네 목 하나 날리는 걸로 뭐라 할 사람은 없을걸? 기껏해야 북경에 잠깐 불려 올라가는 정도일까.”
음률을 들으며 협객들의 죽음을 감상했다는 지현이 흥취를 잃었다.
잘생긴 얼굴이 완전히 사색으로 변했다.
이번에는 정연신도 놀랐다.
명나라에서 명족의 위세가 드높은 건 이미 당연한 일이지만, 대주급인 흑색무사가 가질 법한 권한을 지녔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황실의 혈통부터 명족의 피가 짙게 섞인 까닭일까.
“후.”
불현듯 지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낯빛에 평온을 찾은 그가 슬쩍 웃었다.
“가는 길에 천박한 모습을 보일 뻔했군. 멋스럽지 않고서야 어찌 주취와 가무의 풍류를 논한단 말인가?”
“더 말해 뭐하겠어. 명족 체면에 흙 뿌리지 말고 가.”
“아, 물론이지.”
청명이 검을 뽑은 순간 지현의 미소가 짙어졌다.
“이만 가야겠구나. 천하에 날 반기지 않는 자들이 없거늘.”
정연신은 시선을 뒤로 돌렸다. 박살 난 대문 쪽에서 움트는 기파 때문이었다.
심수검과 싸울 때부터 신경을 자극한 기척이 있었는데, 역시 아군이 아니었던 것이다.
“입황성!”
체구가 아주 컸다. 뺨에 기다란 상처가 있는 중년 남자였다.
한 손에 웬 소녀의 뒷덜미를 쥐고 있었다. 그녀는 정연신의 또래로 보였는데, 아혈과 마혈(痲穴)을 짚인 듯했다.
말도 하지 못하고 몸이 딱딱하게 굳은 채 남자의 손에 매달려 있었다.
그가 포효하듯 소리 질렀다.
“기이한 협을 논하며 무림을 어지럽히는 망종들아!”
그의 외침에 화색을 띤 지현이 맞장구쳤다.
“이제 마씨가 아니라 황보마준(皇甫磨峻)이라 불러드려야겠군! 이런 위기가 오긴 하는구려! 본가 무인께서 왕림하셨으니 이 금 모가 큰 시름을 덜었소이다!”
지현이 소리쳤다.
첫째 부인이라는 심수검 황보미미의 오른팔이 신경 쓰이는 듯 마냥 쾌활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한숨 덜었다는 기색이 얼굴에 번지고 있었다.
황보마준이란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평소 지현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듯이 완전히 외면했다.
소녀를 높이 들어 올린 그가 정연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소년 무사! 그 연배에 입황성 청색이라면 천하에 보이는 게 없겠구나! 어깨 문양을 보니 더 그렇다! 입황성주의 직전제자라? 명예와 지위에 취해 있을 마음이 훤히 보인다!”
“······보이는 게 없는 건 네놈 아닌가? 척 봐도 무고한 양민을 손에 들고.”
정연신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그는 이미 간격을 가늠하고 있었다.
너무 멀다. 저놈은 상당한 수련을 쌓았다.
몸놀림이 자신보다 빠른 청명이 쇄도한다 해도 소녀를 제때 구하지 못할 거리였다.
황보마준이 피식 웃었다.
“황보 혈족의 행사에는 언제나 대의가 있다. 나라의 녹을 받아먹는 반쪽짜리 무림인들이 무얼 알까. 강호인의 목을 날리는 데 혈안이 된 네놈들 입황성이 제남까지 기어들어 와서는.”
“지금 대의라고 한 건가?”
정연신은 눈매가 살짝 올라간 소녀의 얼굴과 황보마준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수치심도 느끼지 못하느냐는 말을 시선으로 대신했다.
황보마준의 가슴이 더욱 펴졌다.
“무림의 대의는 고고한 법이다. 네놈들은 강호에 흙탕물을 튀겨대는 무뢰배지. 무공으로 수도하는 이들의 세상에 더는 간섭하지 말라.”
“······.”
저런 자들이 있다고 들었다.
문물과 사상의 교류가 활발하지 않은 세상이었다.
무림은 특히 그랬다. 괴팍한 외골수가 많았다.
무공 수행은 수련의 외길이었다.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강호의 은거기인들이 한 번씩 세상에 나왔다 하면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이유라 했다.
인질을 잡고 협을 논한다. 공맹의 학문으로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입황성 역시 무림인들과는 사서삼경의 법도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칼을 들이댈 뿐이었다.
‘황보세가는 더 그렇겠어. 제남의 왕가니 뭐니 했지. 혈족들끼리 모여서 세력을 굳건히 했으니.’
정연신의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황보마준이 소녀의 뒷덜미를 쥔 손을 흔들며 말한 까닭이었다.
“네놈들의 협은 몹시도 이질적이다. 황법에 어긋나는 일을 했다 하여 우르르 달려와 목을 날려대지. 귀천한 이들 중에 무림의 협사가 없었을까? 여기 이 소녀의 이야기를 들려주마.”
“해 봐라.”
대꾸해 주면서 체내의 진기를 순환시켰다. 정연신은 태연하게 선 채로 중첩 연환식을 준비했다. 시화무극권의 발경 경파가 저놈의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길 바랐다.
“이 아이의 조부는 단무휴(段烋務)라는 자로, 저 지현이 부임하기 전에 이곳 평음현의 지현을 지냈다.”
눈만 부릅뜨고 있는 소녀의 턱에 힘이 들어간 듯했다. 황보마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대쪽 같은 인물이었지. 저잣거리에서 백성을 겁박하는 사파 무림인에게 거침없이 얼굴을 들이댔다. 대명률을 따져 물으며 관의 뇌옥에 가두어 놓겠다고 호통을 쳤다 하더구나.”
그가 씩 웃었다.
“장법 한 번에 배가 터져서 날아갔다. 그 사파 놈도 참 물정 모르는 인물이었지. 경공으로 도망치면 끝일 줄 알았을 테지만, 지현과 함께 제남 질서를 조율하고자 했던 본가의 분노를 받아야 했다. 그렇게 우리가 이 아이의 원수를 갚아주었다.”
“목을 잡고 은인 행세를 하는 건가?”
“자질이 출중한 아이다. 삼재심법 따위로 상당량의 축기를 했더군. 이대로 죽기에는 아깝지만, 나는 항상 네놈들 입황성의 민낯을 보고 싶었지. 높은 덕으로 현을 다스렸던 전대 지현의 손녀다. 어찌 대할 테냐?”
“음! 으으음!”
소녀가 신음하며 몸을 작게 꿈틀댔다. 점혈을 조금이나마 스스로 푼 듯했다.
축기에 재능이 있다고 하더니, 정말로 기를 다루는 데 천부적인 감각을 지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것 봐라.”
이채를 띤 눈으로 그녀를 흘겨본 황보마준이 손을 번쩍 들었다. 소녀의 몸이 대롱대롱 매달렸다.
“네놈들이 이대로 물러나면 이 아이는 산다. 무림으로부터 만민을 지킨다는 입황성의 협 또한 증명하겠지. 허나 그러지 아니한다면.”
놈의 눈이 전방을 훑었다. 제 잘난 듯 행패를 부려대는 입황성을 두고 보지 못하겠다는 의미일까.
얼굴에서 가증스럽다는 감정이 묻어나오는 듯했다. 그가 짧게 말을 이었다.
“다시는 민생을 입에 담지 마라. 제남의 질서는 황보세가가 조율한다. 같잖은 반푼이 협객들 같으니.”
“구구절절 맞는 말이외다!”
이제는 웃음까지 띤 지현이 호응할 때였다.
“언제까지 더 들어야 합니까?”
정연신이 문득 말했다.
동시에 황보마준의 뒤통수 아래에서 칠흑 같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뭣······!”
놈의 등 뒤에 백미려가 서늘한 얼굴로 자리했다.
심연에서 땐 불꽃이 올라온 듯 새까만 기류를 온몸에 두르고 있었다.
밤하늘처럼 시꺼먼 안광이 그녀의 두 눈을 가득 채웠다.
스윽.
반대로 백설처럼 하얗게 물든 백미려의 손이 황보마준의 뒷목을 올려 잡았다. 놈은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입황성의 청색 소맷자락이 유형화된 묵색 진기와 함께 펄럭였다.
같은 옷인데 그녀가 몸에 걸친 무복은 달랐다.
설화 속 구천현녀의 재림인 양 선녀의 새까만 옷자락처럼 다가왔다.
백미려가 입술을 달싹였다.
“팔대세가 아닌가. 구질구질하게.”
나지막한 음성이었다.
압도적으로 제압했다. 신비로운 기파로 반응을 늦춘 뒤 단숨에 마혈을 짚은 것이었다.
애초에 본가의 정예 무인이 아니라 그저 분가를 감시하는 놈이었던 듯했다.
청명이 빙글거렸다.
“마광익과 창천대, 멸섬대가 네 본가로 향했어. 지금쯤 멸문당하고 있을 거야. 대주들이 박살을 내놨겠지.”
“뭐, 뭐?”
지현이 얼어붙은 듯 몸을 굳힌 순간 정연신의 신형이 휘돌았다.
잔잔한 봄바람을 탄 나뭇잎처럼 자연스러운 회전으로 지현을 스쳐 지나갔다.
순간적인 신법의 몸놀림 끝에 입황검이 있었다. 손아래의 검신이 시린 빛을 번뜩였다.
촤악!
정연신은 손아귀에서부터 확실히 느꼈다. 살을 가르고 뼈까지 쳐내는 감촉이 임무의 끝을 고했다.
“······!”
또 한 번 천것이라 부르려 했던 걸까. 심수검 황보미미의 입 모양이 그랬다.
부질없었다. 이내 경악으로 입술을 뭉그러뜨린 그녀의 목이 툭 떨어졌다.
“입황성은 반역도와 협상하지 않아.”
정연신은 심수검의 머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뒤늦게 돌아선 지현이 대노한 얼굴로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소리도 없었다.
놈의 복부를 뚫고 서슬 퍼런 검날이 튀어나왔다. 청명의 입황검이 놈의 등을 꿰뚫은 것이다.
“내, 내가 이리······.”
“짧게 있었는데도 지긋지긋한걸.”
사람을 죽이는 와중에도 청명의 음성은 청량했다. 지현이 들은 마지막 말이었을 것이다.
청명이 검으로 뿜어낸 경파가 무지막지했다.
복부를 관통당한 시체의 눈에서 피눈물이 차올랐다. 내부를 완전히 부숴 버린 듯했다.
‘청명 선배의 손속이 냉정해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같은 명족이기에 더욱 냉엄해진 걸까.
끝이 아니었다. 뒤를 돌아본 정연신은 눈을 크게 떴다.
“커, 컥.”
황보마준의 뒷목을 잡고 있던 백미려의 새하얀 손에서 음습한 냉기가 훅 끼쳐 왔다.
동시에 그의 목이 얼음 부스러기처럼 맥없이 분질러졌다.
“읏!”
잡혀 있던 소녀가 용케도 엉덩방아를 찧지 않고 착지했다. 자그마한 비명을 끝으로 장원이 침묵에 잠겼다.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어둠을 천천히 말아 이부자리에 드는 듯한 햇살이 희뿌연 빛을 뿌렸다.
강호에 불어온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연못 물푸레나무의 잎사귀를 튕기고 지나갔다.
사건이 일단락됐다. 지현과 심수검이 죽었다. 황보 분가의 무인들 또한 전멸에 이르렀다.
뒤처리는 청색의 몫이 아니었다. 입황성에서 사람이 나올 것이다.
정연신은 입황검을 집어넣은 채 단씨 소녀의 옆을 스쳤다.
험한 일을 겪은 또래 소녀에게 한마디라도 해 주고 싶었다. 걸음을 멈추지 않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 무공에 자질이 있구나.”
“응?”
소녀가 고개를 홱 돌렸지만 정연신은 돌아보지 않았다.
유형화된 흑색의 진기를 어느새 지워낸 백미려가 살짝 웃고 있었다.
묵빛 일색이었던 눈이 흰자와 까만 눈동자를 되찾았다.
새하얀 손만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는데, 그녀가 그대로 정연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서늘한 감촉과 함께 부드러운 소맷자락이 그의 귓가를 스쳤다.
“입황성은 협을 논하는 방파가 아니다. 네가 협객이 되고자 한다면, 언젠가 상처받는 일이 생길 거야.”
“······조언 감사해요.”
정연신은 눈을 살짝 감으며 대꾸했다. 어찌 됐든 이번 임무는 성공이었다.
또 한 번 커다란 공적을 쌓았다. 대주들이 직접 간 황보 본가 쪽은 일행이 끼어들 틈도 없을 터였다.
그때였다.
사건이 끝나길 기다렸다는 듯이 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하늘색 깃털을 올올이 빛내며 청명의 손가락에 내려앉는다. 영물인 듯했다.
황보세가의 이공자가 쓰던 녀석과는 또 달랐다. 금수의 자그마한 몸에서 신비로운 향기가 느껴졌다.
청명이 새의 다리에 묶인 자그마한 전서를 풀었다.
“신소빈이 쓴 건가? 글자들 한번 빽빽하네.”
곧바로 전서를 펼친 청명이 훑어보는데, 그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무슨 변고가 있습니까?”
정연신은 담담히 물었다.
“아니. 본가를 치러 간 쪽에서 온 게 아냐.”
“그럼······?”
“그, 용봉지회 후기지수들을 백색들이 잡아두고 있었잖아. 놈들의 가문에서 사력을 다했나 봐. 결국 찾았나 본데.”
“위치를요?”
“맞아. 혈염교 놈들과도 교전했다는데? 싸움이 세 번 있었대. 무림세가, 혈염교, 다시 무림세가. 전열을 다듬다가 대패했다고 하네. 헌원창까지 잡혀갔다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