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632
◈ 난세 (2)
* * *
정연신이 막사로 돌아간 이후.
듬성듬성 내리던 싸라기눈의 간격이 스스로 좁아졌다. 서늘한 냉기의 파편들이 깃털마냥 하늘을 채우고 떨어진다.
자그마한 변덕으로도 기후가 바뀐다는 용의 마음에 서리가 낀 것처럼.
후욱!
온통 허여멀건 풍경.
새하얀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눈발 속에서, 용희명은 짐짓 진중한 얼굴로 진명조에게 시선을 던졌다.
“제정신이냐?”
“그리 보지 마십시오. 출수하실까 두렵습니다.”
얼어붙은 것처럼 싸늘한 음성이었다.
“두렵다?”
순간 용희명의 고개가 기괴하리만치 느릿하게 갸우뚱 기울어졌다. 잠시나마 사람이 아니라 어떤 정물로 변한 듯했다. 바위, 비늘, 혹은 구름 같은 기질.
“지금 무서운 게 없는 것 같은데.”
“…….”
“죽은 이족의 황제가 너와 겹쳐 보인다. 제 자신만의 대의로 빚어진 괴물 말이다.”
“제 말에 틀림은 없었습니다.”
“그름은 있었지. 신검단이 황실의 의사와 무관하게 천하목 열매를 딴다? 그건 반역이다.”
“천하목의 과실이 정 공께 돌아간다고 명 황실이 무너지진 않습니다. 어떤 천재지변이 자금성을 강타해야 벌어질까 말까 한 일이지요. 반면에 정 공께서 돌아가시면 이 땅은 호국(護國)의 검을 잃는 격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명조는 조용히 물었다.
“용 단주께서 황실의 검이었던 적이 있습니까?”
용희명의 입매가 헛웃음을 맺는다.
“나야 명나라의 신검이자 양민 아이들도 휘두를 수 있는 장난감 칼이지만, 이제는 황실의 윗대가리들이 허락하지 않을 듯싶군. 입신검이 섬예에게 계승되는 것을.”
“그건 명나라 수뇌부가 아니라 입황성 구성원의 마음이 일치했을 때 벌어지는 일입니다. 일선에서 목숨을 버리는 자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권리가 아닙니까? 단주의 권위에 힘을 보태는 것 말입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달변이었나?”
“잡혈(雜血)은 생존에 노련한 법입니다.”
신검단의 고수들.
살아남는 법에 통달한 이들뿐이라 했다.
본인이 아니라 정연신에게도 향할 수 있는 노련함이었다.
“협조해 주십시오.”
진명조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순간 용희명의 헛웃음도 짙어졌다.
“얼른 입신검을 내놔라? 상관에게 할 말인가?”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몰아버리는군. 용희명이 중얼거렸다.
* * *
까마득한 절벽 위.
신검단의 임시 진지가 구축된 장소다.
언덕이 널찍하다. 당연히 재빠른 경공 기동에서 비롯된 습격을 방비하기도 쉽다.
한편 동쪽으로는 폐허가 된 흑도가 내려다보이고, 서쪽 아라사(俄羅斯: 러시아) 방향으로 넘어가는 협곡마저 관측할 수 있는 지점.
눈으로 뒤덮인 설봉(雪峰)인지라, 시야에 닿는 모든 곳이 새하얗다. 군데군데 지어진 십수 개의 막사들과 간헐적으로 피어오르는 몇 줄기의 연기도 마찬가지다.
북방의 끝자락은 백색이었다.
정연신은 그 한가운데에 깊은 발자국을 새겼다.
사박.
낭떠러지 중턱에는 희미한 구름의 바다가 펼쳐져 있다. 운해(雲海)의 저편에 햇살의 광원이 아스라이 걸쳐진 정경.
정연신은 그 풍경을 힐끗했다가, 불현듯 천하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선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도 옳아.’
이제 장성 경계선의 남북을 통틀어 신검단보다 고강한 무림 세력은 없다.
대규모 무공군세와 같은 일국(一國) 단위의 전력을 제외한다면, 입황성의 협객들이야말로 천하 강호의 정점이다.
남녘 무림이 알든 모르든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 힘만큼 신검단주의 책임감도 커야 할 터. 본성 가족에 대한 마음도 어떤 은원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
정연신이 순천익의 막사에 먼저 발 디딘 이유였다.
마침 천막의 입구에서 경계를 서던 백색무사의 눈도 커져 있었다. 이미 반사적으로 정연신에게 양손을 모아 올린 채다. 놀란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눈매가 돋보였다.
그렇게 예를 취한 뒤에야 의문 어린 말이 흘러나온다.
“단주 대리?”
순천익의 호연검쾌(護堧劍快) 신빈빈.
언젠가 사천행 환익대에서 정연신과 함께한 적이 있는 무인으로, 신소빈의 언니이기도 했다. 예전부터 백기린 남궁화신을 크게 연모하여 정연신과 조금쯤 마찰했던 인물.
눈매가 신소빈과 닮았지만, 팔다리 간합은 정가동공을 익힌 동생보다 짧은 편이다.
반면 이 순간 그녀의 입김만큼은 하얀 불꽃처럼 짙게 흘러나왔다가 흩어지길 반복했다. 앞서 치른 싸움의 격렬함을 나타내듯이.
‘다들 이렇겠지.’
과거가 어떻든 완연한 입황성의 무인이다.
“……?”
정연신은 눈짓과 함께 신빈빈을 지나치다가 멈췄다. 짧은 순간 그녀의 손이 자색 옷자락을 쥘 뻔했다가 되돌아갔던 탓이다.
급한 말이 생겼지만 감히 자색의 소맷자락을 쥘 수는 없었던 듯했다.
동시에 신빈빈의 전음이 엉킨 실타래처럼 불안하게 이어졌다.
―순천익주가 중태입니다. 북왕 격 절세고수의 검기를 정면으로 쬔 탓인지, 본성의 온갖 대법(大法)으로 깨워 보려고 했는데도 의식을 차리지 못해서… 단주 대리의 치하가 절실한 상황이에요. 부디 좋은 말씀을 많이….
정연신은 미간을 옅게 좁혔다. 마음속의 불안을 억누르면서였다.
“네 직속상관의 체면을 깎지 마라.”
―그게 아니라…!
정연신은 입구로 걸음하면서 신빈빈의 옆얼굴을 잠깐 곁눈질했다. 몇 년 새 마모되어버린 날붙이처럼 굳은 모습. 정연신은 그녀의 어깨를 짚었다.
“잘 생환했다. 흑도가 고됐을 텐데.”
사락.
희끗한 법력이 신빈빈의 기파를 어루만지고 사라진다. 그녀의 불안정한 내공 호흡이 조금이나마 안정된 것도 동시였다. 입황신가의 제천무경이 정종 무공이었던 까닭이다.
신검단주의 치하를 받아야 마땅한 사람은 남궁화신만이 아니었다. 본성의 전원이 같은 처지였으니까.
“……!”
신빈빈의 동그란 눈이 더욱 커지는 한편.
정연신은 묵묵히 천막의 입구를 열어젖히며 안으로 들어섰다. 등 뒤에서 잘게 떨리는 기척과 별개로 짙은 약향이 코끝을 스친다. 금창약을 얼마나 바른 걸까.
눈앞의 펼쳐진 것은 병상이었다.
핏자국으로 범벅된 모포 더미 위에 남궁화신이 잠든 모습. 심지어 붕대로 온몸을 휘감은 채다. 그를 둘러싼 이들은 미리 일어나서 정연신에게 예를 표하고 있었다.
“정 공.”
“단주 대리.”
눈에 익은 순천익 고수가 다섯 명에, 헌원창과 신소빈도 함께였다.
순간 정연신은 무심결에 신소빈의 눈을 피했다. 자신이 막사로 들어서자마자 물끄러미 살피기 시작하는 수제자. 그녀 역시 다른 흑색들과 같았다.
소천무적이 역루성에서 일을 벌인 탓이다.
‘망할 인간이.’
그녀의 낯이 뇌리를 스친 것도 잠시.
다음 순간 정연신은 자연스럽게 남궁화신의 머리맡에 서 있었다. 직후에 주변을 갈고리마냥 훑어대며 훅 번지는 파공음.
근래에 일반적인 걸음과 보법(步法)의 경계가 크게 허물어진 참이다. 순천익 고수들이 새삼 놀란 얼굴로 반보씩 물러날 만큼.
동시에 남궁화신의 눈꺼풀이 꿈결처럼 올라간다. 실로 귀신 같은 움직임. 어떤 감각을 극한까지 닦은 검객이 반사적으로 뽑아 올리는 발검 같았다.
“……!”
놀람을 띠고 있던 순천익 고수들의 표정이 경악에 이르고, 남궁화신은 고개를 비스듬히 틀더니 정연신과 시선을 맞댔다.
“…무사하실 줄 알았습니다.”
“남궁 대주의 노고가 컸습니다.”
정연신은 담담하게 말을 건넸다. 문득 입황성 입문 시험 때의 남궁화신을 떠올리면서였다. 비무에서 정연신에게 이기고도 스스로 패배를 인정했던 대협의 풍모를.
입황성에 들어오기 전부터 백도정파의 천하 기재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던 청년.
정연신처럼 많은 일을 겪었다.
모친과 연인이 죽임당했고, 흉수였던 누이와의 은원을 스스로 매듭짓지 못했다. 그처럼 의식을 잃은 사이에 형 청기린의 죽음이 있었으며, 돌연히 전대 순천익주 하도운도 격살당했다.
심지어 그 모든 은원들을 본인이 끝맺지 못한 형편에, 심극기린을 사사했음에도 화산지약 비무결에 나설 수 없었다.
또 입황대전의 발발로 몽인월이 순천익 전각을 습격했을 때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입마(入魔)가 왔다고 했다.
다른 대주들이 그를 기피하고 있을 정도라고.
곡절이 깊다. 어쩌면 남궁화신이야말로 난세의 증거일지도 모른다. 똑같이 주화입마를 겪었던 정연신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신검단주로서 해줄 말은 달리 없었다.
“살아남아서 다행입니다. 덕분에 흑도고궁까지 빠르게 당도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끝이다. 본래 기린(麒麟)은 안팎이 오색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이야기 속 영물이라 했다.
이미 수년 전에 무림의 기린이었던 남궁화신이라면, 사람으로서 정연신보다 못하지 않다. 스스로 입마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터였다.
‘그래,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정연신은 당대 순천익주가 제 삶을 되찾길 바랐다. 자신의 명줄이 다하기 전에.
문득 남궁화신이 진중하게 입을 뗐다.
“정 공.”
“말하십시오.”
“공월무를… 베었습니다.”
“예?”
“진정으로.”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어느새 다시 눈을 감았던 것이다. 반드시 전해야 할 이야기를 남긴 모습. 정연신은 남궁화신의 삶을 빠르게 되찾기로 했다.
‘천마총.’
마(魔)의 모든 것이 천마의 유산에 잠들어 있다고 했다.
한때는 이름 모를 천마의 무덤이란 말이 돌았지만, 소천무적의 입에서 초대 천마의 유산이 중원 땅에 있다는 말을 들은 참이었다.
곁에 있던 헌원창이 어색하게 웃는다.
“뭐, 어찌 되었건… 말문이 트였으니 내공 호흡도 확실하게 틘 셈이오. 혹시 격체전력이 필요할지 몰라 함께 있던 참인데, 참으로 잘되었다고 할 수 있겠소.”
정연신의 대답은 전음으로 이루어졌다.
―칠주금혈대법.
헌원창의 눈이 부릅뜨일 차례였다. 곧이어 정연신이 명교에서 있었던 일과 금제의 해제에 관해 말했음은 물론이다. 담담하게, 그러나 자신을 질책하듯이 이어진 이야기였다.
헌원창은 그런 정연신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이내 슬쩍 웃으며 말했다.
―아직은 괜찮소. 이건 무적의 귀식대법이거든. 살수 무공을 익힌 사람에겐 더더욱 그렇소. 내가 정 공의 싸움을 따라가려면, 이 금제는 반드시 있어야 하오. 그 바둑이나 점잖게 둘 것처럼 웃으면서 땅을 바둑판으로 만들어 버리던 괴물… 육원성군 뭐시기의 기감을 속일 수 있었던 것도 이놈의 칠주금혈대법 덕이었으니.
―헌원 형.
―물론 지금 정 공이 맞닥뜨린 싸움은 따라가지 못하겠소. 흑색 선배들과 양귀비쟁이, 그리고 소빈이가 비밀을 알아버린 형국 말이오. 이런 일은 언변이나 은잠술로도 어찌할 수 없는 법이거든.
거기까지였다.
다시 막사를 나선 정연신은 곧장 요사스러운 혈공 기파들의 근원지로 향했다.
전후(前後) 정리에 나섰던 것인데도 오히려 머릿속이 복잡해진 참이었다. 더 복잡한 여인을 보면 역으로 심상이 맑아질 터였다.
‘이독제독….’
한편 그의 인영엔 새까만 단발의 그림자가 덧대어져 있었다.
다름 아닌 신소빈의 정수리가 정연신을 그늘로 삼았던 것. 막사를 나선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녀가 정연신에게 따라붙고 있었던 까닭이다.
“하실 말씀 없어요?”
“다음에 와. 기별할 테니까.”
“저쪽 협곡에선 암검… 그러니까 마씨 어르신이 천하제일쾌와 보신경을 겨루고 계신대요. 저도 정 공께 십리광요의 성취를 보여드릴 의향이 있어요.”
“다음도 괜찮아. 언제쯤에 볼까.”
“언제나.”
발을 둘 곳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신검단주를 피해 다니던 신검부대주가 이러했을까. 정연신은 전진 걸음을 후퇴 보법처럼 밟으며 칠사도와 혈왕적가의 막사에 이르렀다.
고아한 향기가 꽃밭처럼 흐르는 장소였다.
정연신은 문득 직감했다. 이처럼 잠시 맞이한 평안이, 난세로 발 디디기 직전의 마지막 꿀물일 수도 있음을.
그럼에도 발을 들여야 한다.
흑도 대회전에 이르러 신검단의 손은 더욱 부족해졌다. 천하 최강임을 증명했지만 사상자도 많았던 탓이다.
장성의 남북을 똑같은 천하로 삼은 지금, ‘입황적가(入荒赤家)’와 같은 분파의 신설이 절실했다.
대의에 쓰지 못할 것은 없다.
신검단주가 검성과 남제에게 배운 바였다.
‘명색이 북왕가다. 말을 던진다고 정말로 본성 산하로 들어오진 않겠지만….’
사락.
천막의 입구를 열어젖힌 순간, 또 다른 난장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