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run away from an SSS-class obsessed man RAW novel - chapter 30
“별일 없었냐고 묻기엔 너무 노골적으로…….”
이재현의 손가락이 내 목 부근에 닿았다. 통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김세한의 흔적이 남은 부근 같았다.
“알아달라고 과시하는 듯한 모양새네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내자 놈도 놀란 듯 손을 거두었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
“손목, 멍드셨습니다.”
이재현은 고개를 까딱여 내 손목 쪽을 가리키며 말했고, 나는 그제야 내 몸을 살폈다. 내내 욱신거린다고 생각했던 손목에 검게 멍이 올라와 있었다. 어제 발버둥 치는 날 제지하던 김세한의 손자국임이 분명했다.
“항상…… 이런 취급 받는 겁니까?”
평소와 같은 덤덤한 목소리였지만, 어쩐지 분노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아…….”
왜 항상 이재현에겐 이렇게 비참한 모습만 보이는 건지 모르겠다. 산산이 조각나 버린 자존심에 헛웃음이 나왔다.
“됐어. 이런 거 치료하면 돼. 나 힐러잖아.”
“그런 문제가…… 아닌 듯 싶은데요.”
“쓸데없는 애정 같은 거 기대한 적 없어. 우린 서로 필요 때문에 옆에 있는 거니까.”
그렇게 대답하고 나니 왜인지 가슴 한쪽이 아려 왔다.
“그거. 정말 연인 사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까?”
“…….”
“제 상식으론 자기 여자를, 다른 남자 앞에서 그렇게 다루는 게 이해되지 않아서요.”
이재현이 또 한 번 가슴을 후볐다. 이미 여러 상처로 파여 있는 가슴을 말이다.
“질투가 많거든. 미안하네, 괜히 둘 문제에 너랑 테리 끌어들인 거 같아서.”
나도 모르게 김세한을 감쌌다. 그건 아마 마지막으로 날 안았을 때 그의 눈에 비쳤던 절망감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이야기를 마무리하려 한 사과에 이재현은 더 할 말이 있다는 듯 입을 벙긋거리다 이내 삼켜 내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뇨, 오히려 말리지 못해서 죄송했습니다.”
“거기서 네가 뭘 어떻게 했겠어. 그때 끼어들었으면…… 아마 손목으로 안 끝났을 거야.”
떨어져 나갔던 론의 손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면서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이재현을 끌고 나가 준 테리의 판단이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그나저나 밤새 마음에 걸려서 기다렸다니…….”
“그러게요. 걱정돼서 발이 안 떨어지더라고요.”
“고마워. 그리고 조심해. 너한테도 괜한 화풀이 할지도 몰라.”
지금 김세한이 경계하고 있는 사람은 이재현과 테리 같았다. 하긴, 김세한의 입장에선 이재현이 나타났을 무렵부터 내가 이상해졌다고 느꼈을지 모를 일이었다. 이재현이 내 생각에 영향을 미친 건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했고, 두 번이나 나한테 치료를 받았으니까. 테리는 항상 내 옆에 있는 탓에 의심을 사는 듯했다. 내가 테리를 가장 편안해한다는 건 놈도 알고 있을 테니.
“걱정해 주시는 겁니까?”
이재현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눈썹을 찌푸렸다.
“넌 항상 이상한 타이밍에 웃더라. 김세한이 시끄러운 또라이라 그렇지, 너도 적잖이 미친놈이야.”
“감사합니다.”
“칭찬 같았어? 욕이었는데.”
장난투로 말하자 놈은 여전히 조금 웃음을 담은 얼굴로 나를 훑어 내렸다. 그러곤 허리를 굽혔다.
“그럼,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미련 없이 뒤돌아 멀어지는 이재현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디가 새하얗게 보이는 거로 보아 주먹을 쥔 그의 손엔 힘이 들어간 듯 보였다. 화가 난 걸까.
‘왜 또…….’
뻐근해지는 가슴께를 움켜잡았다. 우습게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이 만남과 대화는 또 하나의 비밀이 될 테니까.
***
그날이 지나고 나선 또 평범한 하루가 계속되는 듯 보였다. 여기서 평범은 나와 김세한 사이에 고함이 오가지 않고, 서로 상처 주지 않는 하루를 뜻했다. 그 이후 김세한은 나와 식사를 같이하지 않았고, 날 자신의 방에 부르지도 않았다. 그저 잠시 자다 깰 때면 내 옆에 누워 있을 때가 몇 번 있을 뿐이다.
그런 김세한을 발견할 때마다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다. 목 언저리가 조금 불편한 정도의 숨 막힘이 있었지만, 그 감정의 이름을 찾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그만큼 지쳐 있었다.
“언제 왔어? 미안, 내내 잤네.”
“아니. 그냥 너 자는 거 보러 온 거니까 그냥 자.”
“……그래도 돼? 고마워.”
쏟아지는 잠에 순순히 놈의 품에서 잠이 들곤 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땐 내 옆에 누워 있던 김세한은 온데간데없었고, 아침밥을 가져온 테리가 나를 깨웠다. 마치 하루하루가 끊어진 필름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페르 님?”
“아……. 지금 몇 시야?”
“아홉 시 정도입니다.”
“아, 머리 아파.”
“너무 주무시니까 그런 거 아닙니까?”
이마를 부여잡은 채 몸을 일으켰다.
“으……. 김세한은?”
“나가 보셨습니다. 요즘 이래저래 일이 많으시네요.”
“그래? 잘됐네.”
김세한이 나가는 건, 나에게 마음 편한 일이 되어 버렸다. 적어도 나와 부딪칠 일이 줄어들 테니까. 그런데 꼭 이렇게 자유 시간을 가질 때면 무기력해지고 잠이 쏟아졌다. 왜 이럴까.
“나 요즘 왜 이러지, 테리? 졸리기만 하고, 무기력하고. 현실 도피하는 걸까.”
“글쎄요.”
에이 설마, 하면서 밀어 두었던 가능성이 다시금 떠올랐다.
“설마…… 이런 거 임신 초기 증상은 아니겠지?”
손가락을 접으며 날짜 계산을 했다.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몰려왔다.
‘진짜 임신이면 어떡하지?’
순식간에 눈앞이 새까매지고, 두려움의 장막이 나를 뒤덮었다. 손끝에 땀이 나기 시작했고, 얼굴은 뻣뻣하게 굳어 갔으며 입술은 말라 갔다.
테리는 내 눈을 피하며 물었다.
“걸리는 게 있으십니까?”
서로를 위해, 테리도 나도 암묵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던 그날.
“응, 김세한이 너랑 쿼터 불러서 밥 먹었던 그날.”
결국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불편할 게 뻔해 피해 온 이야기였다. 미안하지만 내가 이런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건 테리뿐이었다. 테리는 입술을 한 번 축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 마음에 걸리시면 테스트기라도 구해 볼까요?”
“응. 그래 줄래? 영 마음에 걸려서. 지금 내가 느끼기에 몸이 좀 이상한 건 사실이거든. 아……. 김세한은 모르게 구해 줄 수 있을까?”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미안해.”
테리는 방문 앞에 서서 나를 돌아보았다.
“아뇨, 제가 죄송하죠.”
탁- 내게 고개를 숙인 놈이 문밖으로 사라졌다.
‘뭐가 미안하다는 걸까?’
어쩌면 테리도 이재현처럼 그날 끼어들지 못한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하여튼 착해서는.”
테리가 놓고 간 아침밥에선 맛있는 냄새가 올라왔다. 평소라면 생각 없이 배를 채우기 위해 입에 넣었을 텐데, 괜한 걱정 탓인지 영 입맛이 돌지 않았다.
‘진짜 임신이면 어쩌지?’
배를 문질렀지만 평소와 같았고 만질수록 아리송한 느낌뿐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다 일단 아침은 거르기로 하고 멀리 밀어 두었다.
뉘엿뉘엿 해가 질 무렵, 슬슬 배가 고파 테리가 두고 간 카트 위의 음식을 흘끔거릴 때쯤이었다.
끼이익-
‘김세한인가? 벌써 돌아온 건가?’
예고 없이 열린 문에 그렇게 예상했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테리였다. 평소라면 노크를 했을 놈이라 조금 의외였다. 테리도 나와 눈이 마주치곤 놀란 듯했다.
“안 주무셨습니까? 평소엔 이 시간이면 주무셔서…….”
“나 깰까 봐? 내가 그래서 내내 자는구나. 오래 잔다 싶으면 좀 깨워.”
테리의 눈이 내 옆에 밀어 놓은 음식으로 향했다.
“아침에는 손도 안 대셨네요.”
“응, 아까는 입맛이 없어서. 이제 먹으려던 참인데.”
“아뇨, 다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이미 다 식었는걸요.”
“그래 줄래?”
내게 다가온 테리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어 보였다.
“필요하시다고 하신 거요.”
드라마에서나 보던 임신 테스트기였다. 적어도 ‘나’는 살면서 볼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꿀꺽- 나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어색하게 몸을 일으켰다.
“지금 쓰시게요?”
“미뤄 봤자 불안하기만 해서……. 결과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한숨을 삼킨 듯한 테리가 아침밥이 올려진 카트를 끌고 물러났다.
“……그럼 저는 저녁 가지고 오겠습니다.”
“응.”
욕실 문을 잡은 손이 떨려 왔다. 이미 지옥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보다 나락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죽도록 두려웠다.
테리는 문 앞에 걱정 어린 표정으로 서 있었다.
“테리, 좀 늦게 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나는 애써 장난투로 이야기했지만 테리는 씁쓸한 얼굴로 문을 나서며 고개를 숙였다.
“네.”
그 이후엔 오직 나와의 싸움이었다. 원치 않은 임신 같은 거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피임은 굳이 내가 챙기지 않아도 김세한이 철저히 챙기던 일이었으니까. 혹 내가 흐릿한 판단을 했을 때도, 놈은 브레이크를 잡았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제발, 안 돼.”
놈이 액셀을 밟는 순간, 색다른 공포가 나를 절벽으로 내몰았다.
덜덜 떨리는 다리를 진정시키기를 한참, 그도 모자라 손톱을 물어뜯으며 결과를 기다렸다.
“아닌 거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30분간 그대로 욕실에 앉아 있었지만 여전히 한 줄이었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나오고 깜깜했던 눈앞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한고비를 넘긴 기분이었다.
‘조심해야지.’
하긴, 그날은 내가 조심하지 않아서 그런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김세한이 억지로 밀어붙일 가능성도 있었다. 놈은 날 가둘 방법 중 하나를 아이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김세한과의 갈등을 피하고, 내 감정을 숨기고, 더 철저히 다정한 연인을 연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반항이 소용없다는 건 이제 뼈저리게 알았으니, 이제 몸을 웅크리고 김세한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최선이었다.
똑똑-
욕실을 벗어나자마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좋은 타이밍이었다. 지금이라면 맘 편히 밥을 먹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것 봐. 다행이지?”
열리는 문 앞에 한 줄이 그어진 테스트기를 내밀며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 웃음은 얼마 가지 못했다. 당연히 테리가 돌아온 걸 거라고 생각했던 내 앞에 이재현이 서 있었으니까.
“아…….”
이재현은 눈앞에 들이밀어진 테스트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게요. 다행이네요.”
수치심에 절로 고개가 숙어졌다. 정말 별꼴을 다 보여 주고 있는 셈이었다. 내 정수리에 닿는 시선을 느끼며 테스트기를 거두었다.
“저녁 가지고 왔는데, 좀 비켜 주시겠습니까?”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차분한 이재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응.”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자 놈이 안으로 들어왔다. 카트 바퀴 굴리는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테리는 어쩌고 네가…….”
“이 앞에서 제가 낚아챘습니다.”
그는 어깨를 작게 으쓱이며 말했고, 나는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그래도 된대?”
“보스도 없는데 뭐 어떻습니까? 그리고 그 사람은 착한 사람이니까.”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김세한이?”
“……테리 선배 말입니다.”
그 답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저녁을 가지고 왔다지만, 놈은 계속 문 앞에 서 있었다. 식탁으로 옮길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한라그룹 회장의 별세로 테리 대신 내 아침을 챙겼던 날을 생각해 본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러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나 배고픈데, 식탁으로 좀…….”
나는 테이블을 가리키며 말했고.
“저녁은 핑계고, 할 말이 있어 왔습니다.”
놈은 곧바로 속내를 비쳐 왔다.
“응, 네가 그냥 왔을 리는 없지. 먹으면서 들으면 안 되는 거야?”
“안 됩니다.”
단호한 대답에 헛웃음이 나왔다. 이재현과 내 사이에 저녁을 둔 채 대치하다가, 이게 웬 인질극인가 싶어 결국 내가 한발 물러섰다.
“그래, 나도 궁금한 거 좀 물어볼 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