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run away from an SSS-class obsessed man RAW novel - chapter 77
인상을 찌푸리며 되묻자 그는 또 한 번의 한숨과 함께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냥 설득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보스는 당신을 포기 안 할 거라는 거뿐입니다. 죽을 때까지…….”
“…….”
“하. 아니, 제가 본 바로는 죽어서까지도요.”
무언가를 떠올리듯 허공에 시선을 둔 테리가 씁쓸한 미소를 띠며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야 했지만 몸이 무거워 따라나서지 못했고, 어느새 내려가는 계단 앞에 선 테리는 나를 돌아보고 허리 숙여 인사를 건넸다.
“다시 뵙겠습니다. 그간 부디 몸조심하세요.”
내가 알던 다정한 테리의 목소리와 딱딱해진 오늘의 목소리가 반반씩 느껴지는 미묘한 어투였다. 그가 계단 밑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가면을 벗고, 소파에 몸을 늘어뜨리며 중얼거렸다.
“아니. 이제 볼일 없을 거야.”
김세한이 날 알아 버린 이상, 병원 운영은 이것으로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재현이 여길 놔둘 일도 없고, 그렇다고 내 옆에 상시 붙어 있을 팀원을 배치하기엔 일이 너무 바빴다.
“생각보다 일찍이네.”
이야기의 후반부가 시작된다면 쏟아지는 사건으로 인해 병원을 운영하거나 보육원을 돕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해질 게 분명했다. 그땐 누굴 도울 여유 따윈 없을 테니까.
‘그래도 최대한 많이 후반까지 끌고 가고 싶었는데…….’
눈물에 젖어 축축한 김세한의 입술이 닿았던 입술을 매만졌다. 익숙하지만 확실히 다른 감각. 단 한 번도 이런 입맞춤을 한 적이 없었다. 늘 날 깊게 파고들기 바빴던 김세한이 오늘은 입술의 감촉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조심스럽게 입을 맞춰 왔었다. 날 붙잡았던 손도 쉽사리 떨어졌고, 도망가는 날 쫓아오지도 않았다. 흐느끼는 듯한 울음소리가 머리를 맴돌아 다시 귀를 울리는 듯했다.
“야, 구재희! 괜찮아?”
지끈 아파져 오는 머리에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젖히자마자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기색이 그대로 드러나는 토끼 눈을 한 유태영이 내게로 걸어오며 무전기를 들었다.
“찾았어. 별일은 없는 거 같아. 김세한도 돌아갔고. 구재희는 2층에 있어.”
아마도 이재현에게 치는 무전 같았다. 의도치 않게 나는 알지 못하는 아래층 상황을 듣게 되었다. 김세한이 정말 순순히 돌아간 모양이었다.
“깜짝 놀랐잖아. 무전은 안 되고, 와 봤더니 김세한이 보이질 않나, 정장 입은 남자들이 서 있질 않나.”
“나, 들켰어. 김세한한테.”
덤덤하게 꺼내서일까. 펄쩍 뛸 거라 예상했던 유태영은 생각보다 차분했다.
“그런 거치곤 우려했던 거보단 일이 쉽게 끝나는 기분이네.”
“어. 다시 만나게 된 이후로 내내 이러네. 내가 알던 놈이 아닌 거 같아.”
힐끔 나를 바라보던 유태영은 창문 밖을 내려다보았다. 바깥 상황을 살피고 있는 듯 보였다.
“진짜 간 건가?”
“아마. 그보다, 요즘 가격 흐리는 거. 역시 이재현 말대로 우리 공격하고 있는 게 맞나 보더라. 괜히 너희 힘들게 하는 거야. 나 가지고 협상하려고.”
순순히 돌아간 것과는 달리 날 데려가기 위한 계획은 진행되고 있었다. 발목을 서서히 옥죄는 덫에 걸려든 것만 같았다.
“잘됐네.”
“……뭐?”
“차라리 그런 쪽이라면 뺏길 일 없어. 네가 가지 않는다면 우리가 먼저 널 놓을 일은 없으니까.”
어쩐지 천진하게만 생각했던 유태영이 의외의 모습을 보였다. 민폐 끼친다고 생각하고 있던 내 머릿속을 읽은 것처럼 똑바로 눈을 맞추며 말했고, 나는 그 말이 마냥 다정하게 들리진 않았다. 약간의 날이 서 있는 목소리 때문인지 오히려 경고처럼 들렸다.
“너만 흔들리지 않으면, 우리가 흔들릴 일은 없다는 거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이런 분위기, 저번에도 느낀 적 있었다. 유태영이 김세한과 있던 나를 목격했던 날, 그간 아무것도 보고하지 않았던 나에게 배신감을 느꼈다고 한 날에도 말이다. 유태영답지 않은 냉랭한 분위기에 입이 떨어지지 않을 때쯤이었다.
“왔나 보네…… 이성재.”
계단을 오르는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고, 곧이어 젖은 머리를 한 이재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언가를 찾듯 휙휙 방 안을 훑던 눈이 나를 담고 나서야 안정을 찾은 듯 잠시 감겼다 뜨였다. 이재현은 숨이 차 괴로운 듯 벽을 짚고 섰고, 그걸 지켜보던 유태영이 내게 물어 왔다.
“자리 피해 줘?”
그건 아마 나와 이재현의 관계를 의식해서 한 물음이겠지만, 마침 필요한 배려이기도 했다. 이재현에게는 따로 묻고 싶은 것도, 얘기할 것도 있었으니까. 고개를 끄덕이자 유태영은 그대로 몸을 돌려 이재현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곤 계단을 내려갔다.
“김세한…… 어떻게 된 거야?”
이재현이 내게로 다가오며 자신의 무전기를 두어 번 두드렸다. 즉 ‘왜 연락하지 않았느냐’, ‘무전기는 어떻게 된 거냐’ 같은 물음이 담긴 말이었다.
“고장 났어. 김세한이 부쉈거든. 앉아, 일단. 엄청 달려왔나 보네.”
“하……. 어, 방심한 건 사실이라. 유태영한테 김세한이 와 있다는 연락받은 순간, 내가 여기 도착했을 때 네가 이미 없을까 봐 무서웠거든.”
어김없이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은 이재현은 내 앞자리에 앉아 테이블에 내려놓은 가면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들킨 거지? 김세한한테.”
물음이라기엔 확신이 담긴 듯한 어투였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이재현이 낮은 한숨을 내뱉었다. 길드가 크면서 언젠가 들킬 것도 우려했던 건지, 생각보다 여상한 태도였다. 그를 똑바로 마주한 지금, 아까부터 내내 머릿속을 떠돌던 의문을 풀어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나 오늘 테리랑 대화했어.”
“……그래?”
역시 놀라는 기색은 없었다. 그는 마치 쿼터의 가면을 다시 주워 쓴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차갑고 속 모를 얼굴이어서일까. 조금 낯설었다.
“어. 얘기해 보니까 한 가지 오해한 게 있더라고.”
힐끔, 가면을 만지작거리는 이재현의 손을 바라보다 그와 눈을 마주했다.
“테리가 탄 약, 수면제가 아니었대. 우울증 약이었대.”
“…….”
느리게 깜박이던 이재현의 눈이 그대로 내리깔렸다. 대답 없는 그의 반응에 꿀꺽 침이 넘어갔다. 안 좋은 예감이 어쩌면 맞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너…… 알고 있었구나? 그게 무슨 약이었는지…….”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고, 내리깔렸던 이재현의 눈은 반쯤 뜨인 채로 내게 향했다.
“그게 무슨 약인지가 중요한가? 너 모르게 먹였다는 건 똑같잖아.”
날 진정시키곤 했던 덤덤한 말투가 지금은 속을 헤집어 놓고 있었다. 떨리는 몸을 멈추려 이를 꽉 깨물었다. 울지 않으려고, 화내지 않으려고, 침착하려고 애썼다.
“다 알고 있었던 거지? 김세한이랑은 관련 없다는 것도.”
이재현의 시선이 무심하게 바닥을 굴렀다. 손에 들린 가면을 다시 테이블 위로 내려놓은 그는 낮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래.”
짧은 대답에 그날의 모든 기억이 재구성되는 듯했다. 그날 배신감에 몸부림치던 나를 덤덤하게 위로했던 말들과 숨구멍을 뚫어 주었던 제안도 모두 검은 잉크가 서서히 번지는 듯 얼룩지고, 흐려져 갔다.
“날…… 속인 거야?”
떨리는 목소리로 뱉은 물음에 놀라울 만큼 덤덤한 답이 돌아왔다.
“응.”
“왜, 왜 그렇게 당당해? 사람 가지고 노는 게 재밌어?”
말을 뱉어 내는 것과 동시에 까슬한 혀가 느껴졌다. 당당하지 못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김세한과 만났던 날을 숨겼고, 그 때문에 이런 사태가 일어났다. 이재현이 나를 속였다 한들 비난할 자격이 있는 건가. 생각이 거기까지 닿은 순간, 던진 말이 내게 향하는 칼날이 되어 가슴을 쑤셨다.
배신감일까, 분함일까. 혹은 나를 향한 혐오감 때문인지도 모른다. 눈에 담은 이재현의 얼굴이 차오른 눈물에 흐려져 갔다. 덜덜 떨리는 손을 멈추려 쥔 주먹에 한껏 힘이 들어가 하얗게 질려 갈 때쯤 이재현이 입을 열었다.
“그럼…… 그때 나오지 못했으면 어땠을 거 같아? 내가 아니었으면 넌 아직 그 방에서 창밖만 보고 살았을 거 같은데, 원하는 게 그거야? 잘 생각해 봐. 난 지금 네가 왜 우는 건지 모르겠어.”
뭐 하나 정답이 아닌 말이 없었고, 동시에 가슴을 찌르는 말뿐이었다. 귀가 먹먹해지고, 감기지 못한 눈에서 투둑,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이재현은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다 자신의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속인 건 미안해. 근데 나, 후회는 안 해. 다시 돌아간다 해도 똑같이 했을 거야. 네가 나한테 오지 못하는 이유는 다 제거해야 했으니까.”
“……뭐?”
“테리를 죽이는 방법도 있었지. 그게 김세한이 한 짓이라고 네가 오해하게 만들었다면 일이 더 쉬웠을까. 이렇게 뒤늦게 밝혀지는 일도 없었을 테고, 김세한에 대한 원망도 더 짙었을 거고.”
뚝. 뚝. 시린 눈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그러면서도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이재현을 똑바로 담아냈다. 내가 듣고 있는 말의 현실성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한테 필요한 건 너뿐이야. 네가 만든 세상은 허구고, 진짜는 우리 둘뿐이야.”
이재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내게로 다가왔다. 그러곤 손을 뻗어 내 뺨을 감싸고, 엄지손가락으로 내 눈가를 닦아 내었다.
“울지 마.”
그날 김세한에 대한 배신감으로 몸부림치던 나를 위로하던 말과 같은 투였다.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넌 벗어나고 싶어 했고, 난 도와줬을 뿐이잖아. 새장의 문을 열어 준 건 나야.”
역시 틀린 말은 없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빠져나와야 했을 곳에서, 내가 가장 숨 막혀 할 때 손을 내밀어 준 건 이재현이 맞았다. 하지만 거짓말을 했던 그때도, 지금도 그의 얼굴엔 표정이 없다. 나는 그제야 미안하다는 말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이재현은 내게 미안하지 않다. 그에겐 사과 또한 목표로 향하기 위한 수많은 대응 방법 중 하나일 뿐이었다.
“널 끝까지 속일 수도 있었어. 하지만 그러지 않은 건, 너를 속이지 않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야. 네가 나한테 온 날, 그때 약속했잖아.”
내 앞으로 하얗고 긴 새끼손가락이 들이밀어졌다. 묘한 기분이었다. 머리가 뻐근해질 만큼 잔인하고 냉랭한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갑자기 가슴 언저리에서나 나올 법한 감성을 요구하는 이재현을 대체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얼어 버린 나를 기다리지 않겠다는 듯, 내 새끼손가락을 가져다가 자신의 손가락에 걸며 말을 이었다.
“구재희, 많은 생각 하지 마.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내가 널 원하는 곳에 반드시 데려다줄게. 우린 돌아갈 수 있어.”
“…….”
“그러니까, 넌 그냥 내 옆에만 있으면 돼. 그게 내가 원하는 전부야.”
닿아 있는 손에서부터 냉기가 퍼져 나가면서 기시감이 들었다. 닮은 얼굴 탓일까. 김세한과 다르다고 생각했던 이재현은 그와 비슷한 말을 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사랑해.”
이재현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리고, 이어 내게 다가와 입을 맞췄다. 다른 어느 때보다 숨 막히고 거친 키스였다.
10. 데이트
김세한이 내 정체를 알아 버린 이상 병원을 계속 운영할 수는 없었고, 내 일상은 다시 집에서 내내 책을 읽으며 귀가하는 팀원들을 기다리는 것으로 바뀌었다. 팀원들이 다쳐서 들어오면 간간이 치료해 주기도 하면서. 외출이라고 한다면 이재현의 허락하에 보육원에 가서 원장님을 도와드리는 것, 팀원들과 함께 장을 보는 것, 유태영과 함께 짹짹이를 보러 가는 것 정도였다.
“답답해?”
이재현은 항상 내 상태를 살피었다. 혹여 내가 무력감을 느낄까 경계하는 것처럼. 그럴 때면 나는 크게 어깨를 으쓱이며 가장 태연한 얼굴을 하고 답했다.
“아니. 딱히?”
“그럼 나랑 나가자. 장도 보고, 아고라 구경도 하고.”
“답답하지 않다고 한 것 같은데. 대답이 조금 이상하지 않아?”
내 대답과는 상관없이 밖에 나가는 일정이 생겨 버린 듯했다. 모처럼의 휴일 오후, 아침밥을 먹기 무섭게 여기저기 늘어진 팀원들이 햇빛에 죽은 좀비들처럼 낮잠을 자고 있었다. 지금까지 휴일 없이 일하던 걸 생각하면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애들…… 엄청 피곤한가 보네.”
“응, 그래서 하루 비운 거야. 다들 체력적으로 한계인 것 같아서.”
다른 사람이 했다면 배려심 깊은 리더의 말로 들렸을 것 같은데, 이재현이 내뱉자 캐릭터의 남은 체력을 확인하고 그에 맞춰 포션을 주입하는 게임 플레이어가 하는 얘기 같이 느껴졌다.
– 네가 만든 세상은 허구고, 진짜는 우리 둘뿐이야.
생각보다 그 말이 머리 깊이 박혀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재현이 이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어째서 ‘이성재’를 죽이면서도 태연할 수 있었는지, 왜 나를 찾아왔는지, 대충 이해할 수 있는 말인 건 분명했다. 그에게 지금 이 세상은 그저 가상 게임 정도의 세계이다.
복잡한 머리 탓에 이재현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자, 고개를 삐딱이 기울이고 눈을 가늘게 뜨며 물어 왔다.
“왜 그렇게 봐?”
“어? 음…… 넌 안 피곤한가 해서.”
“피곤한데 너랑 있고 싶어.”
“일부러 나가는 거면…….”
“아니. 모처럼 휴일이니까, 너랑 보낼래. 잠은 이따 자도 괜찮아.”
다른 답은 할 수 없는 명료한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세한과 테리가 병원에 다녀간 날, 탄로 난 그의 거짓말과 거친 키스 이후로 약간의 거리감이 생긴 걸 나만 느끼고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면은 안 써?”
외출이라는 말에 당연히 가면을 쓴 나와 달리 문 앞의 이재현은 맨 얼굴이었다. 그는 내 얼굴에 걸쳐진 가면을 벗기며 말했다.
“괜찮잖아. 어차피 이제 숨겨야 할 이유도 없고, 나도 옆에 있고. 그리고 가면 쓰면 오히려 눈에 띄어.”
이재현의 말이 맞았다. 가면을 쓰고 아고라에 가면 마치 명함을 이마에 붙인 것처럼 모두가 b.w 소속 힐러라는 걸 알아보고 웅성대곤 했다. 어차피 가면을 쓴 이유도 김세한 때문이었고, 들킨 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이해한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재현은 가면을 대충 안에 던져 둔 뒤 가볍게 손을 잡아 왔다.
“오늘은 그냥 나랑 평범하게 데이트하면 돼.”
데이트. 낯선 단어를 뱉은 이재현의 입을 빤히 바라보다 몸서리쳤다. 그런 내 반응이 마음에 안 드는지 그는 미간을 찌푸려 왔다.
“반응이 왜 그래?”
“그런 말에 면역이 없어서. 그보다 나, 데이트 처음 해 봐. 이런 몰골로 나가도 돼?”
집에서 입던 흰 티와 회색 추리닝 바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드라마의 영향인지 ‘데이트’ 하면 나풀거리는 원피스가 떠오르곤 했기 때문이었다. 이재현은 자신이 입은 티를 가리키며 되물었다.
“난 괜찮아?”
“응.”
“너도 그래. 넌 뭘 입어도 예뻐. 옷이 중요한가. 사람이 중요하지.”
“제발…… 그런 오글거리는 말 하지 말라고.”
부끄러운 말을 뱉는 입을 틀어막고 싶은 충동에 뻗은 손이 이재현에게 잡혔고, 그대로 집을 나섰다. 아고라로 향하는 한산한 골목에서는 그와 내 발소리만 들려왔다. 맨 얼굴에 받는 햇살과 코를 통과하는 신선한 공기가 꽤 상쾌했다. 문득 옆을 돌아보았을 때, 나란히 걷는 그의 하얀 피부가 햇빛을 받아 유독 빛이 나고 있었다.
‘옷이 아니라 사람이 중요한 건 맞는 거 같네.’
새삼 잘난 외모에 감탄할 때쯤, 잡은 손을 꼼지락거리던 이재현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훔쳐보던 게 걸린 건가 싶어 눈을 돌리며 물었다.
“왜 웃어?”
“너 데이트 처음 해 본다며. 그게 좋아서. 내가 처음인 거잖아.”
“나 참, 별게 다 좋네.”
“김세한이야 그렇다 치고, 대학 가서 연애 안 했어?”
대학, 원래의 일상이 지금은 까마득한 옛날처럼 들려 이상한 기분이었다.
“안 했어. 넌 많이 만났나 봐? 여유 있는 물음이네.”
“많이는 아니고…… 꾸준히?”
“꾸준히……? 허어. 뭐 그럴 거 같기는 했다만.”
아까까지만 해도 잘났다고 감탄했던 외모가 조금 재수 없게 느껴졌다.
잘생긴 남자의 삶이란 건 꽤 요란해서, 구석에 처박혀 있길 바랐던 내 귀에까지 들어오고, 눈을 감아도 보였다. 명성에 걸맞게 학년, 학교 안 가라고 불려 나가 고백받던 그는 여느 순정 만화 속 남자 주인공 같았다. 이재현을 좋아한다는 감정이 불편하고 싫었던 건 놈이 받는 당연하고 수많은 감정 중의 하나가 되기 싫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쩐지 속이 답답해져 왔다.
“근데. 다 얼마 못 가서 끝났어.”
그 대답에 다시금 편안함이 차올랐지만, 입에서는 괜히 퉁명스러운 말이 나갔다.
“어. 그럴 거 같아.”
“그럴 거 같다고? 왜?”
“왠지 질린다고 자주 갈아 치웠을 거 같은데. 씁, 이거 순 양아치 아니야?”
말하다 보니 피어나는 난잡한 상상에 잡고 있던 이재현의 손을 뿌리치자, 황급히 다시 손을 겹쳐 왔다.
“양아치라니. 그 정도는 아니었어.”
“네가 아니라 네가 만난 여자들 말을 들어 봐야지. 원래 가해자는 자기가 한 짓 기억 못 해.”
“연애 안 해 봤다면서 해 본 것처럼 말하네.”
“연애 상담은 꽤 해 봤지. 너 같은 악질도 꽤…….”
“아니라니까, 글쎄. 난…… 나름 깔끔히 초기에 끝냈어.”
“오~ 말로만 듣던 엔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