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Survive as a Scrapped Extra Villain RAW novel - Chapter 94
“토끼한테 밥도 주고. 마틴 생도한테 이런 귀여운 면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오늘은 마틴 생도의 새로운 면을 볼 수 있어서 좋네요!”
그러면서 손을 들어서, 내 머리 위로 얹는다. 그리고 쓰담쓰담.
“잘했다, 잘했다.”
“….”
어딜 만지냐고 소리칠 수 없었다. 헤일리 선생에게는, 이미 받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에.
한참 내 머리를 쓰다듬던 헤일리는.
“우리, 간만에 보죠?”
운을 띄웠다. 방학 중 동아리 활동인 커피 탐방 동아리는 비스터번 후작의 테러 사건으로 잠정 중단됐다. 임페리움 아카데미의 거의 대다수 동아리가 그렇게 됐다.
“그동안 잘 지냈어요?”
“네, 뭐. 평소랑 똑같죠.”
정말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있었다.
“힘들지는 않았어요?”
“괜찮아요.”
힘들었다. 많이 다치기도 했고 휘둘리기도 했다.
“응, 마틴 생도는 잘 이겨낼 거라고 선생님은 믿어요.”
“….”
“다음 방학 때는 꼭 다 같이 수도 맛집 탐방을 해봐요.”
“….”
“알겠죠?”
나와 길버트는 전쟁 중이다. 지금은 냉전 중이지만. 아마… 눈치 빠른 헤일리 선생이 그걸 모를 리 없을 터.
“네.”
그 짐을 스스로 짊어지려는 노고를 보라.
모든 것을 품어주는 봄 같은 헤일리 선생답다.
이 사람은 도저히 싫어할 수가 없다.
“아차차, 다른 선생님의 심부름 중이었기 때문에, 먼저 일어나 보도록 할게요. 마틴도 너무 자고 있지만은 말아요.”
“네.”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 헤일리를 보며,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엑스트라 특전 상점.’
메튜, 네르진, 루리, 사보. 아무리 다시 떠올려봐도 헤일리의 것은 없었다.
아델라는 엑스트라가 아닌 메인급 악역이니 없다 쳐도. 헤일리는 원작에서 이름조차 한 번 언급된 적이 없는 단역 엑스트라인데.
‘그건 역시.’
메튜의 트라우마를, 네르진의 숙명을, 루리의 친구를, 사보의 자유를 구했다.
그들은 죽어서도 해방되지 못할 인생의 굴레를, 나로부터 구원받았다.
하지만… 그건 다시 말해서, 즉….
‘헤일리 선생님을 본질적으로 구하지 못했다는 뜻인가.’
***
헤일리 폰 루아 에뜨랑테. 자연 마법사. 임페리움 아카데미 교생.
본래 페트낙 현장체험학습에서 케넨 박사의 실험체에게 잡아먹힐 운명이었으나, 내게 구함 받았다.
징계위원회에서 나를 변호해주었고, 케넨 박사 연구소 공략에도 함께했고, 카페 탐방 동아리의 담당 교생이 되어 주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받은 적이 훨씬 많았다.
심지어는 그녀에게 위로받은 횟수가 얼마나 많던가. 아까 전에도 말이다.
‘뭐… 차라리 잘 됐지.’
나 같은 것과는 어울리지 않는 게 좋다. 순결한 봄이 나 따위와 있다가 보면 오염되기밖에 더 하겠나.
‘무엇보다.’
나한테 구함 받을 정도로 나쁜 일이, 그녀에게는 없었으면 좋겠다.
헤일리는 좋은 사람이다. 인간적으로 정말로 착하고, 순수한. 때 묻지 않은 분홍빛 꽃.
“무슨 고민을 그렇게 하는 거야?”
“어? 아….”
맞은편에 앉은 루리가 파르페를 떠먹으며 물어왔다.
“잠시, 멍하니 있었습니다.”
“흐흐, 마틴도 그럴 때가 있구나?”
“뭐…. 그렇죠.”
아카데미를 마치고 루리의 요청으로 근처에 새로 생긴 파르페 가게로 왔다. 당연하지만 사심은 없다. 그냥, 신메뉴 개발차 온 것에 불과하다.
“2학기 수업은 어땠어? 좋았어?”
“그럭저럭입니다.”
“으음, 그래?”
은근하다는 투로 물은 루리는 이내.
“거기… 전학생이 왔다면서…?”
“…?”
어쩐지 조금은 화가 나 보였다. 착각, 이겠지? 내가 화날 일을 했던가?
“네. 아델라 황녀가 A반으로 전학 오긴 했습니다.”
“어, 어어, 되게 친근하게 부르네~?”
“예? 뭐… 옆자리라.”
아드득, 까드득.
루리의 악문 잇사이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마틴…! 아델라 황녀가 괴롭히면 나한테 꼭 말해줘야 해!”
“…? 알겠습니다.”
“꼭이야! 꼭!”
***
‘후, 힘드네.’
처음에는 등하교만 잘하면 됐는데, 아는 사람이 하나둘 생기니 자꾸 피곤한 일이 생긴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라일락이 보였다.
“주인님! 어서오세요!”
“다녀왔어.”
“오늘 아카데미 생활은 어떠셨나요? 개학 초기라지만 제가 호들갑을 떠는 걸까요? 하지만 주인님께 좋은 일만 가득했으면 라일락은 기쁠 것 같아요. 아, 이럴 때가 아니죠. 주인님, 식사는 하셨나요? 아니면 먼저 몸부터 씻으시겠어요? 제가 만들어 둔 치즈 케이크가 있는데, 그건 씻고 나오시면 드릴게요!”
방긋방긋 웃으며 반겨주는 모습에 심장이 간질거렸다.
그러자 오늘 하루 동안 혹시 나쁜 냄새라도 배겨서 오지는 않았나 하는 걱정이 문득 들었다.
“씻고 올게.”
“네!”
욕실에 들어가 보니 내가 올 시간에 맞춘 듯 따뜻한 물이 욕조에 받아져 있었다. 수건, 갈아입을 옷까지 완벽했다. 욕조에 몸을 담그자.
‘아.’
싱그러운 꽃향기가 몸을 감싸 안았다. 마치 욕실 전체에 꽃이 만개한 환상마저 보였다.
아카데미에서의 피로가 싹 풀리는 느낌. 누가 이런 선물을 준비했을지는 뻔했다.
내가 올 시간에 맞춰서 물을 데우고 수건과 옷을 잘 개어서 한편에 올려 두고, 손수 향을 풀었을 라일락의 모습이 저절로 떠올라 흐뭇해졌다.
‘고마워라.’
기분 좋게 몸을 씻고 주방으로 가자, 라일락이 맛있어 보이는 치즈 케이크를 꺼내 놓은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리에 앉자 라일락이 막 우린 홍차를 찻잔에 따라주었다.
“그러고 보니 다른 사람들이 안 보이는데?”
“네르진 점장은 주인님께서 주신 스크롤을 들고 방안에서 연구 중이에요. 사보도 밖에서 검술을 수련하는 중이고요. 비앙카는 오늘 친구들과 약속이 있다나 봐요.”
문득 심장이 따끔거렸다.
네르진과 사보에게는 강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비앙카는 친구들이 있다. 하지만… 라일락은?
그녀가 친구와 만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어디로 놀러 가는 모습도. 그녀는 언제나, 항상, 늘 내가 돌아올 곳에서….
내게 매여 삶을 누리지 못하는 것처럼 보여서, 답답하고 속이 불편해졌다.
“라일락.”
“네?”
“너는… 약속이 없나?”
“….”
라일락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이런, 미친. 무슨 말을 한 거냐?’
너무 무심한 말이었다. 무성의했다. 멍청했다. 이 빌어먹을, 자식아!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아,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아뇨, 주인님.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인지 알아요.”
라일락이 눈웃음 지어 보였다. 마치, 정말로… 한 떨기 꽃처럼 아름답고 고아하며 순수했다.
“마틴 주인님. 저 라일락은요, 주인님께서 오래전, 유년 시절 때 저를 구해주신 순간 결심했어요. 오로지 주인님만을 위해서 살겠노라고. 주인님께서 힘드실 때도, 즐거울 때도, 슬플 때도, 기쁠 때도. 허락만 해 주신다면, 세상 어디까지라도. 인생의 황혼 녘에 서시는 그날까지. 아니, 그 너머. 황천의 강을 건너 그곳에 도달하고 사후의 세계를 살아가는 그 모든 순간을.”
라일락의 비장함은, 오로지 나를 향한다.
“허락해 주신다면, 주인님과 함께할 것이라고요. 영원히. 영원히. 세상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제게 허락된 모든 것들이 끝나는 순간까지요.”
그러고는 옅게 미소 짓는다.
“허락, 해 주실 거죠?”
그 미소가 너무 아름다워서 나는.
“…응.”
바보처럼 답했다.
‘바보 같아.’
뭔가, 더 멋있는 말을 해줄 수 있지 않았을까. 말보다 멋진 행동을 보여줄 수 있지 않았을까.
‘정말 바보다.’
라일락은 영원히 나와 함께해준다고 했다. 어쩌면 내가 세상을 적으로 돌리는 날이 있더라도, 라일락만큼은 날 따라올 것이라는 확신마저 들었다.
내가 돌아올 곳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확신.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의 근원이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이유는.
‘헤일리와 마찬가지로, 라일락도 엑스트라 특전 상점에는 나타나지 않았어.’
내가 아직 라일락을 온전히 구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일전에 보았던 라일락과 마틴의 과거가.
아른거리듯 계속 떠오른다.
내가 그녀의 구원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드세요, 주인님. 오늘 나온 것 중에 제일 잘 나온 것들이에요.”
“어, 아. 고마워.”
라일락의 음성이 들리자 순간 모든 상념이 사라졌다.
항상 미래의 종말만 바라보던 나인데, 라일락과 함께하는 지금만큼은 현재에 충실하게 되는 것이다.
포크를 집어 든 순간, 라일락의 얇은 손목이 보였다.
“요즘, 밥은 먹고 다니는 거지?”
“네? 네! 삼시세끼 다 챙겨 먹고 있어요!”
“….”
하지만 너무 말라 보인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포크를 들고 치즈 케이크를 조금 잘라서, 라일락의 입 앞으로 밀었다.
“아.”
라일락의 커진 눈동자와 함께 나도 정신을 차렸다.
내가 무슨 정신으로 그랬나 싶어서 손을 거두려는 순간, 라일락이 입을 앙 벌려서 포크를 물었다. 우물거리며 치즈 케이크를 먹던 라일락이 날 보며, 웃어주었다.
***
원래라면 이 시기에 나타나야 했을 악당이 있다.
일전에 에우디알트 사막 유적에서 쓰러뜨렸던 퀘샤로우 가문의 넬슨.
친형인 퀘샤로우의 파리스 선생을 습격하고 나와 엘리샤마저 죽이려고 했으나 실패, 스스로의 목숨을 제물로 고위 악마를 소환했으나 내가 쓰러뜨렸다.
“흥! 당당하지 못한 발걸음, 그만두지 못하겠느냐?! 보아라, 활을 쏜다는 것은 활과 과녁 앞에서 당당해지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괴, 굉장하세요, 아, 아델라 황녀님…!”
…신경 쓰이는 소리가 들려오지만, 지금은 잠시 설명부터.
어쨌든 그거다. 당분간은 큰 이벤트가 없어서, 일개 생도처럼 임페리움 아카데미 생활을 보내게 됐다.
이름 없는 혁명가에게 받았던 무술서도 탐독하는 중이고, 엑스트라 특전 상점 물품의 효과도 보려는 참이니 딱 좋은 시기가 아닐 수 없다.
설령 그것이 폭풍전야라 할지라도 나는….
“이, 이렇게가 마, 맞을까요?”
“데미니얀의 메리! 아까보다는 낫지만, 손아귀에 힘을 더 꽉 쥐어라!”
…하아. 그래. 고백하겠다. A반의 전학생 아델라 황녀와 주인공 일행 중 비구름의 데미니얀의 장녀 메리가 친해져 버렸다.
‘저기도 가관이군.’
A반 전원이 힐끔거리며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주인공 일행도 차마 다가가지는 못하고 멀리서 멍하니 지켜보는 중이다.
‘사실, 남 말할 처지는 아니지.’
나도 어처구니가 없었으니까.
‘대체 무슨 일이 생겨서 아델라 황녀와 메리가 친해진 거지?’
건방짐이 하늘을 찌르는 아델라 황녀.
소심하지만 타인의 악심에 민감한 메리.
‘진짜.’
나쁘게 볼 일은 아니다. 하지만 원작 설정과 스토리에 또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를 생각해 보면 골치가 아플 지경이다.
미간을 찌푸린 내게 한 사람이 다가왔다. 모두에게 친절한 금발의 실눈 캐릭터가.
“후후, 저 두 사람이 친해질 줄은 몰랐는걸? 그렇지, 마틴 생도?”
“아…. 파리스 선생님.”
궁술 명가 퀘샤로우 백작가의 장남 파리스. …내가 죽였던 넬슨의 친형이다. 친동생의 장례식, 유적에서 입은 부상 등으로 요양하다가 복귀했다고 들었다.
그가 내 곁에 섰다. 우리는 서로 마주 보지 못하고 아델라 황녀와 메리를 보았다.
“네, 그러네요.”
껄끄럽냐고 하면, 아니다. 그냥 어색하다. 난 그의 동생을 죽였고, 사회적으로 매장시켰으니까. 넬슨의 추악한 욕망과 스스로를 제물 삼아 악마를 강림시켰던 영상 파일이 온 대륙에 퍼졌기 때문이다.
‘그것이 설령 대의일지라도.’
이 세계가 악마 숭배자들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길 바랐다.
‘쓰레기 같은 짓이었다.’
그러나 내가 파리스와 넬슨 형제에게 한 행동은, 주인공 일행이 마틴에게 한 짓과 같았다. 악행을 널리 퍼뜨려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것.
‘과거로 돌아가도 똑같이 하겠지만.’
나는 주인공 일행과 다르다.
정의를 외치는 소꿉놀이 따위랑은 차원이 다른 종말 예방이라는 대의가 있기에.
…그러나 그걸 변명으로 자위하는 것도 끔찍하다.
분명하다. 동생과 사별한 눈앞의 파리스 앞에서 나는 죄인이었다.
“저기….”
“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