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Club RAW - chapter (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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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사라진 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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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하늘에 스며든 달빛이 녹녹하게 잦아든 심야(深夜)…. 노구덕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잘하면 마티아스의 목줄을 움켜쥘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또다시 뒤통수를 맞고 말았으니 발을 뻗고 잘 수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할 터. 하지만 기이하게도 그다지 화는 나지 않았다.
처음에 소피아에게서 데모나가 사라졌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두개골이 뜨겁게 달아오를 정도로 격노했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어느 정도 이성을 회복한 뒤에는 그저 데모나가 왜 그리 행동했는지에만 주구장창 골몰하고 있었다. 물론 답을 얻지는 못했지만.
노구덕은 생각했다. 그토록 끔찍이도 싫어하는 배신을 당했는데, 왜 화가 나지 않는 것인지.
‘이 눈 때문인가….’
그는 무심코 푸석푸석한 눈가를 매만졌다. 데모나는 어딘가로 자취를 감추었지만, 그녀가 그리도 소중히 여기던 이 눈은 그대로 남아 있다. 이건 무슨 의미로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어쩌면, 그녀가 여지를 남겼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데모나 녀석… 뭔가 사정이 있으면 내게 털어놓으면 될 것을…… 음?’
혼자서 끌끌 혀를 차던 노구덕은 갑자기 이불을 걷어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눈 속… 안면에 박힌 무언가가 희미한 울림을 토해내고 있었다. 마치 귓가에 작달막한 요정이 들러붙어, 어느 곳으로 가달라고 애타게 속삭이는 듯한 울림이었다.
잠시 넋을 빼고 있던 노구덕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에 이런 장난을 쳐 놓을 사람이라면, 단 한 명 밖에 없었다.
‘데모나…? 데모나가 부르고 있는 건가?’
사위에 칠흑이 내려앉은 늦은 밤, 그것도 이런 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는 건… 단둘이서 조용히 만나고 싶다는 뜻이겠지.
대충 활동하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노구덕은 창틀을 밟고 훌쩍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야밤의 은밀한 초대라니… 좋다. 네가 그걸 원한다면 응해 줘야지.’
노구덕은 육중한 덩치에 걸맞지 않게 날렵한 움직임으로 지붕 사이를 넘나들었다. 예전이었다면 그 무게에 짓눌려, 지붕이 터지거나 무너져 내렸을 테지만, 기이하게도 그가 발을 내딛는 모습은 깃털이 내려앉은 듯 사뿐하기만 했다. 이는 노구덕이 불사마력, 혹은 불사투기라 불리는 기운을 운용할 수 있게 됨으로써 얻게 된 부수적인 효과였다.
물 찬 제비처럼 밤하늘과 맞닿은 건물 사이를 뛰어다니던 노구덕은 마침내 드높이 솟은 칼립스의 성벽 부근에 다다랐다. 고즈넉한 밤, 칼립스의 외진 성벽 위는 순찰 도는 병사 하나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
어렵지 않게 성벽 위로 뛰어올라 주위를 살피던 노구덕은 이내 홀린 듯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 차디 찬 성벽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몸을 걸치고 있는 데모나를 발견한 것이다.
“왔구나.”
“데모나.”
홀연히 그녀의 이름을 부르던 노구덕은 문득 허허로운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뭔가 상황에 걸맞지 않게, 태연히 성벽에 엉덩이를 걸치고 있는 데모나의 자태가 굉장히 낯설게 다가왔던 탓이다.
비스듬히 다리를 꼰 채, 밤의 여왕인 양 도도히 앉아 있는 데모나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월광이 은은하게 흐르는 피부는 특유의 창백함과 맞물려 순은 같은 빛깔을 띠고 있었고, 물기가 듬뿍 담긴 먹으로 그려낸 듯한 짙은 눈썹과 머리카락은 검푸른 호수에 비친 그림자처럼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그녀의 까맣게 우거진 속눈썹 사이, 치명적인 마력을 발산하는 눈동자를 마주한 노구덕은 잠시 동안 숨을 멈췄다.
“…네가 진짜였구나. 소피아보다는 네가 어울려.”
“뭐라고?”
“흡혈귀 말이다. 내가 상상하던 흡혈귀의 이미지와 딱 들어맞거든. 아, 참고로 이건 칭찬이다. 그만큼 아름답단 소리야.”
“멍청한 소리는 그쯤 해둬. 시시한 농담따먹기나 하자고 부른 게 아니니까.”
나름대로의 찬사였건만, 데모나는 단칼에 노구덕의 말을 잘라버렸다. 그리고는, 뭐라 말할 새도 없이 곧장 던진 한마디.
“…거래를 했으면 해.”
“거래를 원했으면 좀 더 좋은 방법도 있었을 텐데.”
달빛을 반사하여 요요히 빛을 발하는 눈동자가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랬을까?”
조용히 잦아든 음성으로 자문한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틀렸어. 넌 이제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아. 내가 순순히 달라고 했으면, 주지 않았을 거야.”
“이 눈 말이냐?”
“…정확히 말하면 네 눈과 시신경을 이어주고 있는 히드라의 핵이야. 그걸 꺼내려면 처음 네게 눈을 이식했을 때처럼, 안구 주변을 절개하는 수술을 거쳐야 돼. 시력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 히드라의 핵이 네 몸과 얼마나 동화했느냐에 따라 잘못되면 죽거나 식물인간이 될 수도 있어. 핵이 두뇌나 중추신경까지 이어져 있다면, 나도 성공을 자신할 수 없으니까.”
“…흐음.”
“꼭 이런 문제만 있는 건 아니지. 넌 지금까지 그 눈으로 이적시장에서 많은 이득을 챙겨왔어. 아이리스가 어중이떠중이들이 아닌, 전도유망한 헌터들을 독식하다시피 한 것도 그 눈 덕분이잖아? 그런 네가… 이제 와서 그 힘을 순순히 내려놓을 수 있을까?”
노구덕은 팔짱을 낀 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데모나의 말을 듣고 보니, 그녀가 왜 이런 짓을 해야만 했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요컨대, 눈을 가져가지는 않겠지만 수술을 하게 되면 기능을 잃을 수도 있단 소리군. 심하면 죽거나 병신이 될 수도 있고.”
데모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하나만 물어보자. 4년 전… 처음부터 이럴 의도로 날 살린 거냐?”
“…그건…….”
미간을 찡그리며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던 데모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반반이었어. 솔직히 말하면, 그 사람의 연구가 여기까지 진행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그리고… 구더기, 너 역시 마찬가지야.”
“……?”
“처음엔 단순한 실험이었어. 네가…오래 살지 못할 줄 알았거든. 히드라의 핵과 인체가 융합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어떤 식으로 변화를 하는지, 강력한 성질을 띤 하이스카우터의 눈에는 또 어떤 영향을 받는지…. 그 모든 걸 겸한 실험이었지. 난, 나름대로 그 사람과는 다른 나만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어.”
느릿하게 이야기하는 데모나의 말이 거짓이라 생각하긴 어려웠다. 여기까지 와서 그녀가 거짓을 말할 까닭도 없었고, 무엇보다 그녀의 말에는 진실성이 느껴졌다.
당시만 하더라도 노구덕은 아무런 재능도 없는 일개 오크 중늙은이에 불과했다. 그런 그가 고작 4년 만에 칼립스의 위원직을 두고 다툼을 벌일 것이라고 그 누가 예상을 했겠는가.
그렇다고는 해도, 노구덕은 뭔가 미진한 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가 데모나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실험체였다는 것은 알겠다. 그러나 겨우 그 정도로 데모나가 아이리스에 보여줬던 헌신을 다 설명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히드라의 핵이 중요하다고 해도 그렇지, 몇 번이나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며 그를, 또는 다른 동료들을 구해냈던 데모나의 행동을 떠올려 보면, 이건 배보다 배꼽이 더 크지 않은가?
물어보고 싶은 말이 산더미같이 많았지만, 데모나는 더 이상 세세히 떠들어댈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선택해. 히드라의 핵을 주고 계속해서 위원직을 노릴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권력을 포기하고 5년을 더 기다릴 것인지. 네가 핵을 넘기겠다면, 나도 그 오크와 영상수정을 돌려주겠어.”
선뜻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선택지. 노구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데모나는 그의 눈을 가져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오직 히드라의 핵 뿐. 데모나는 최악의 경우를 이야기했지만, 그의 재생력을 생각하면 목숨을 잃는 일까지는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히드라의 핵은 단순히 넣었다 뺐다 할 수 있는 내부 장기가 아니었다. 그의 힘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초절한 재생력은 히드라의 핵을 원천으로 한 동조술에 기반을 두고 있다. 말하자면 모든 것의 기초가 되는 토대. 그는 그 토대를 바탕으로 충왕각인, 비틀쉘 같은 강력한 권능들을 차곡차곡 쌓아왔다.
그런 상황에서, 그 밑을 받치고 있는 대들보를 쏙 빼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어쩌면 내 모든 능력이 사라질 수도 있다.’
함부로 단정 하기는 어려웠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그의 힘은 저널로도 인식되지 않는 불가사의한 능력이었으니, 어떤 이상작용이 일어난다 해도 놀라울 건 없었다.
다른 쪽의 선택지도 마찬가지다. 이 기회를 놓치면 마티아스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또다시 5년을 기다려야 한다. 게다가 말이 5년이지, 마티아스가 재차 집권에 성공한다면 힘을 잃은 그룸달은 물론이고 리엔더나 레그나토르를 그냥 가만히 내버려둘 리 없었다. 사실상 이번이 마티아스를 거꾸러뜨릴 마지막 기회인 것이다.
이번 기회를 흘려보낸다면… 앞으로 반등하기까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세월을 기다려야 할 것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권력의 중추에 서, 아트로포스 사건에 연관된 모든 것들을 철저히 파헤치고 벌레교단을 파멸시키겠다는 그의 비원도 그만큼 늦춰지게 되는 꼴이다.
아무리 염두를 굴려 봐도, 노구덕은 선선히 하나를 고를 각오를 굳히지 못했다. 결국, 그가 내린 결정은 하나.
“…둘 다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냐?”
“…어리석기는.”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하얀 입김이 새어나왔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데모나의 손에는, 강력한 어둠의 마력이 작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모여들고 있었다.
“글쎄. 이게 네가 원한 대답아니었냐? 교섭을 하려는 사람치고는 부작용을 지나치게 세세하게 설명하더란 말이지.”
“…….”
“난 욕심이 많은 놈이거든. 둘 다 포기할 생각은 없다. 아니, 그 둘뿐 아니라 너도… 이대로 놓아주진 않는다. 일 대 일, 원한다면 상대해주마.”
노구덕의 눈이 진한 투기를 머금고 타오르기 시작하자, 데모나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후회할 거야.”
“기대하지… 음?”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던 노구덕은 배후에서 엄습하는 한기에, 재빨리 어깨를 틀었다. 그러자 시퍼렇게 날이 살아있는 단검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어깨 부근을 스치고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성벽 위로 검은 그림자들이 벌떼처럼 모여든 것이 보였다. 복장은 밤에 활동하기 쉽도록 검은색 일색으로 통일했지만, 생김새는 제각각. 팔이 사마귀 칼날처럼 변한 자도 있었고, 기형적으로 덩치가 큰 자도 보였다.
노구덕에게는 꽤나 익숙한 낯짝들이었다.
“벌레교단인가? 데모나, 네가 이놈들과 손을 잡았을 줄은……. 흠, 어떻게 보면 놀랄 것도 없나….”
“…아니, 이건…. 윽!”
크게 도리질을 하던 데모나의 신형이 갑작스럽게 넘어질 듯 휘청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비틀거리는 데모나의 몸이 신기루처럼 산산이 흩어져 사라져버렸다. 마치 방금 전까지 이곳에 서 있었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허, 참.”
좀 전까지 데모나가 서 있던 자리를 넋 놓고 쳐다보던 노구덕은 뒤에서 풀풀 흩날리는 살기에 정신을 차렸다.
“염체(念體)였나? 전혀 몰랐군. 그런데… 그 녀석, 마지막에 뭐라고 말하려 했던 거지?”
아연실색하여 치떠진 눈과 버들가지처럼 파르르 떨리던 입술. 사라지기 직전 데모나의 얼굴로 미루어 볼 때, 지금의 습격은 그녀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바이론이 벌레교단과 연줄이 있으니, 당연히 데모나도 한 발 걸치고 있을 줄 알았던 노구덕으로서는 다소 의외였다.
‘조금 걱정되는군.’
벌레교단의 인물들이 나타나자마자, 수포처럼 사라진 데모나의 염체. 시기 좋게 절묘한 타이밍을 맞췄다는 건 너무 낙관적인 생각이다. 분명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때를 맞춰 그녀의 염체를 역소환시킨 것일 터. 그 말은 어디엔가 있는 데모나의 본체가 타격을 받았다는 의미였다.
꼭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여러모로 굉장히 찜찜했지만, 지금은 당면한 문제부터 해결해야 할 때였다.
“우선은… 이것들부터 치워버려야겠군.”
차갑게 내뱉은 노구덕은 양 떼를 휘젓는 사자가 되어 흉포하게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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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보셨다면 추천/코멘 부탁드립니다.
원래 오전에 올리려고 했는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좀 늦어졌네요..
cxz778 / 죄송합니다… 아주카는.. 그냥 오크일 분입니다 ㅠㅠ
코드표 / 꽤 오래된 드립인데 아직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시군요!
14C2A58H2 / 아 저는 육체적 유혹인줄.. 흠흠..
가식적썩소 / 이런 오타가! 수정했습니다!
카론느 / 땡! 이었습니다…
은신설야 / 그냥 잘보고 갑니다 하나만 써주셔도 되는데 ㅋㅋ 작가는 한줄 코멘이라도 감사합니다!
†아마테라스† / 지금 삼자? 사자 관계가 아주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블라타르 / 넵 감사합니다~!
향향공주 / 데모나가 은근히.. 커요.. 맨날 로브만 입고 있는 탓에 잘 묘사는 되어 있지 않지만…
그눈건 / 말 안듣는 아이는 엉덩이를 까서!
달음누리 / 혹시 음모물이 취향이신? 아.. 그 음모가 그 음모는 아닙니다.
트릭스타 / 과일촌 ㅋㅋ 유x촌이 왜 과일촌인가요??
신수[神手] / 그냥… 운 없는 오크였다고 합니다..
월병인 / 만고불변의 진리입지요 ㅎㅎ
호야[虎夜] / 오타 수정했습니다! 아주카를 데려간 이유를 알것 같다는 대목에서.. 흠흠.. 제 착각이었나보군요
김도리131 / 아마 다음화가 되면 좀더 뚜렷이 윤곽이 드러날 것 같네요
우낄푸핫 / 쿠폰 감사히 먹겠습니다! 건필할게요~!
북치네 / 감사합니다!
벌레 / 고기막대..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