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 shipping lord RAW novel - Chapter (32)
32화 – 키코를 막아라 (5)
내우외환이다. 은행들은 연일 키코 공격을 퍼부으며 공성을 벌이고 있고, 내부에선 주화론과 주전론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내가 키코는 악마이니까 퇴마의식을 행해야 한다고 소리치고 다니고 있지만, 공세가 만만치 않다.
은행에서 대출과 연계하려는 뉘앙스를 풍기는데 계속 막을 수 있겠냐부터 시작해서 수수료 2%씩 떼 가면서 선물환계약을 할 것이냐까지.
내부 반발도 만만치 않은데, 은행들도 아주 이를 악물었다.
주민은행은 1차 공세가 무위로 끝나자, 지점장이 직접 찾아오겠다며 2차 공세를 예고했다. 징글징글한 징글벨 같은 새끼들.
굴할 수 없지. 내 꿈과 희망이 달린 문젠데 못 이기는 척 넘어가서는 안 될 일이야.
부먹, 찍먹 고민할 시간에 하나라도 더 먹으라는 고사가 있듯이, 난 한 명이라도 더 내 편을 만들어놔야 한다.
키코에 대해서 알아보겠다는 김태우 본부장. 어디 숙제 잘 했나 확인해 볼까나.
“그러니까. 이게 말이야…….”
영업하겠다고 왔는데, 난데없이 은행 파생상품이나 들여다보고 있는 김 본부장이 피곤한 표정을 대놓고 드러냈다.
“본부장님. 키코 알아보시니까 어떠세요?”
“아휴. 말도 마.”
“왜 그러십니까?”
“염색한 지 얼마 안 됐는데, 흰머리 이렇게 빨리 자란 것 좀 봐. 내가 키코 살펴본다고 이래 됐다니까.”
아 나, 진짜. 등단한 시인인 줄 아니까 뜸 그만 들이고 바로 본론 들어갑시다 쫌. 이 정도 뜸들이면서 시 쓰면 독자들도 안 읽는다니까.
“그래서 키코 보시고 나니까 판단이 나왔습니까?”
“허허. 이 은행놈들이 아주 교묘하게 잘 짜놨어. 정신 바짝 안 차리면 홀라당 넘어가게 해 놨더라고.”
“어떻길래 그러십니까?”
5번을 물어본 끝에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진짜 대단하십니다.
“이게 겉으로만 보면 손해를 볼 수 없는 아주 안정적인 구조란 말이야. 실제로 은행이 팔면 팔수록 손해를 볼 수도 있지. 근데 은행놈들이 그럴 놈들이 아니잖아? 그렇지?”
“그렇죠. 절대 손해 볼 짓을 안 하죠.”
“이건 그냥 도박이야. 파는 놈도, 사는 놈도 똑같은 도박인데, 파는 놈이 우수리 주다가 크게 먹을 수 있게 만들어놨더라고. 바운더리 위로 넘어가서 콜옵션에 들어가면 은행은 그냥 잭팟이 터지는 거야.”
“크게 터질 확률은 낮지 않습니까?”
“확률? 하하. 아직도 그런 뜨뜨미지근한 것을 믿나? 모피아 놈들이 맘만 먹으면 환율 흔들어놓는 건 일도 아니야. 이런 설계라면 은행놈들이 어떻게든 장난을 칠 수 있다고 봐. 우린 그냥 피똥 싸는 거지.”
시인다운 아름다운 표현에 박수를 보낼 뻔했다. 그렇지. 키코 가입하면 우린 피똥 싸는겨.
“본부장님께서 전무님 설득 좀 해 주시죠. 전무님께서는 리스크가 있긴 해도 미미하니까 가입해도 괜찮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제가 봤을 땐 내년 환율이 지금처럼 간다는 보장이 없거든요.”
“아니, 아들도 못 하는 설득을 나 보고 하라는 말인가?”
“아휴. 은행들 압박이 장난 아닙니다. 전무님도 자꾸 은행에서 가입하라고 그러니까 버티기 힘들어 하시는 것 같고…….”
“버티기 힘들겠지. 이게 그만큼 혹하게 만들어놨거든. 하하. 유 실장, 걱정 말아. 내가 가서 잘 얘기해 볼 테니까.”
김 본부장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내 말이 먹혀들었다는 기쁨보다 키코를 막아낼 수 있다는 안도감이 더 크게 다가왔다. 아재요, 우리 잘 해 봅시다. 우리 자연사하자구요.
“근데 말이야. 자네 말대로 원화가 약세로 안 돌아서면……. 어후야, 죽어나는 거야. 알지?”
“본부장님도 은행놈들이 장난칠 수 있다고 하셔놓고 무슨 걱정이십니까? 걱정 마시죠. 이 호황이 내년까지 지속된다면 그건 정말 미친 겁니다.”
“하하. 그래, 그래. 상식적이라면 자네 말처럼 될 수밖에 없겠지. 지금 너무 호황이야. 뭐 중국이 급성장하네, 미국 경기가 좋네, 이러지만, 그런 것치곤 상승세가 너무 가팔러. 올해도 이 흐름이 유지되겠지만, 진정되는 추세가 안 보이면……, 내년엔 어찌될지 모르겠어.”
알려주고 싶다. 내년에 어떻게 되는지.
일감은 2010년까지 꽉 차서 여전히 바쁘지만, 일 다 떨어지면 회사가 망할 것이라며 서서히 전해지는 공포감. 그게 진짜 사람 미치게 한다.
다행히 이번 생에는 미칠 일이 없을 것 같다. 정 상무도 그렇고, 김 본부장도 지금의 호황에 취해서 정신 못 차리는 사람이 아니니 말이다. 키코만 막으면 모든 게 다 잘 될 거야!
“남들은 다 호황이라고 노래 부르고 있을 때, 저희라도 일찌감치 불황에 대비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본부장님께 계약서 다시 검토해 달라고 말씀드렸던 것이구요.”
“그래그래. 그래서 말이야. 궁금한 게 있는데.”
“네, 말씀하시죠.”
무슨 말을 하려고 저래 무게를 잡나. 전생에 그랬던 것처럼 갑자기 시 낭송하고 그러진 않겠지?
“유 실장, 자네 말이야. 나한테 와서는 상승 사이클이 꺾인다면서 불황 대비하자고 열변을 토해놓고, 정 상무한테는 야드 대폭 늘리고 도크도 파겠다고 했다면서? 이거 앞뒤가 안 맞는 게 아니야?”
난 또 뭐라고. 진짜 산 넘어 산이로구나.
정 상무도 그러더니, 김 본부장도 불황 대비와 설비 확충이라는 모순된 주장에 태클을 걸고 나섰다. 본의 아니게 우리 아재들 실력을 테스트한 꼴이 됐네.
선박 발주 자체가 줄어드는 불황이 올 것이라고 해놓고, 캐파를 크게 늘리자고 하고 있으니, 전문가라면 응당 지단 발목 나가듯 태클 한번 거하게 들어와야지.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상선 발주가 확 줄어버리지만, 초대형선 발주는 오히려 늘어난다는 요상한 현상이 나타난다고 말할 수 없으니…….
어느 순간부터 내 주특기가 된 일단 우기고 보기 시전해야겠구만.
김 본부장은 황소 같은 눈망울로 쳐다보며 주문한 요리를 기다리고 있다. 네, 갑니다. 벨 그만 누르세요.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정 상무님께도 말씀드렸지만, 호황이 지속되면 달라질 것이 없어도, 불황이 찾아오면 약육강식의 시대가 되지 않겠습니까?”
“음. 아무래도 그렇겠지. 여유 있는 것들은 그때가 기회니까 경쟁자들 죽이려고 하겠지.”
“맞습니다. 그렇다면 경제성 높은 선박들로 선대를 교체해서 경쟁력을 높일 것이라고 봅니다. 탑티어들도 기존 선대로는 경제성이 없으니까요.”
“기존 선대로는 경제성이 없다? 무슨 격변이라도 찾아온다는 것인가? 허허. 생각해 보자고. 상승 사이클이 꺾인다는 건 글로벌 경제가 침체기로 돌아선다는 것인데, 그 상황에서 배가 경제성의 잣대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를테면 말이죠. 운임이 떨어져도 버티는 선사와 그렇지 못한 선사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연비 좋은 선박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수 있죠.”
제대로 이해했을지 모르겠다. 말 몇 마디로 책 서너 권을 써도 모자랄 풀스토리를 전달하겠다고 한 것도 과욕이지만.
“뭐 나중에 차차 얘기하자고. 아니지, 다음 주 회의 때 제대로 브리핑해 보라고. 안 그래도 정 상무가 야드 확장 계획 언제 확정되냐고 아주 안달이 났더라고. 키코는 내가 잘 해결할 테니까 유 실장, 자네는 그 일 좀 신경 쓰라고. 제대로 설득 못하면 쉽지 않을 거야.”
역시나 이해 못했네. 내가 회장 아들이 아니었다면, 저 풍부한 시인의 감성으로 쌍욕을 날리면서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했을 것도 같다. 브리핑 준비 제대로 해야겠네. 이거 일이 끝이 없어요, 끝이.
대충 설명해도 척척 알아듣는 정 상무가 몹시 그리워지는구나. 그리우면 찾아가야지.
“어, 유 실장. 어서 와. 이거 이러다 내 방이 유일조선 공식 흡연실이 되겠어. 허허.”
“상무님 방에서 피우면 그렇게 맛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커피 한 잔 타 드릴까요?”
“커피 좋지. 난 좀 진하게 부탁해. 가래침은 뱉지 말고. 하하하. 농담인 거 알지?”
이 사람은 왜 자꾸 개그 욕심을 부리는 거야. 아쉬운 사람은 나니까, 진심을 다해서 웃어줘야지. 난 예의 바른 사람이니까.
“하하. 가래침 뱉지 말라니요. 아휴, 배꼽이 빠질 뻔했습니다.”
“오늘도 한 건했군. 이거 유머 감각은 타고 났다니까. 하하.”
“…….”
“으음. 그나저나 자네는 대체 무슨 사고를 그리 치고 다니길래, 회장님께서 전체 회의를 소집하신 거야? 회사가 다이나믹한 것이 아주 맘에 들어.”
“새해고 하니까 그러시겠죠. 제가 준비한 계획도 발표할 때가 되기도 했고 말이죠.”
정 상무가 고백에 성공한 사춘기 소년 같은 눈망울로 쳐다봤다.
“하하. 도크 파기로 한 건 확정난 거야?”
“확정은 아니고, 회의 때 브리핑 준비하라고 하셨으니까, 그 때 결정되지 않겠습니까? 상무님,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아이고, 말만 들어도 기분이 좋구만. 이제 우리도 빅4되는 건가? 하하.”
머지않아 되겠지. 그리고 빅4를 넘어 글로벌 넘버원이 되겠지. 일단은 금융위기에서 살아남고 보자고.
“그래서 말인데요.”
“응? 뭐 부탁할 거라도 있어? 아차차! 옆에서 서포트 좀 해 달라 이거지?”
역시 평생 군만두 섭취권 받을 만한 사람이다. 참 맘에 든단 말이지.
정 상무에게 키코 막기와 김 본부장에서 조선소 확장을 이해시키기 미션을 던져줬다.
“키코는 김태우만으로는 힘들 것 같으니까 나한테까지 요래요래 와서 짤랑짤랑하는 것이고, 야드 확장은 김태우가 갸웃갸웃하니까 내가 좀 밟아줬으면 하는 것이구만?”
“아휴, 제가 어찌 감히 그런 불경한 뜻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허허. 뭐 얼굴에 다 쓰여 있구만 그래. 김 본부장 그 사람이 신규 투자에 대해서 좀 꺼려하더라고. 전에 우진조선 있었을 때도 그렇게 반대를 했다고 하잖아? 그래서 우진조선이 어떻게 한 줄 아나?”
“플로팅 도크로 계획을 바꿨군요?”
“그렇지. 플로팅 도크도 괜찮지. 근데 그게 생산성이 떨어지잖아. 이왕 하는 거면 드라이 도크 새끈하게 파는 것이 낫지. 그건 내가 확실하게 분위기 잡아볼 테니까 걱정 말고 있어. 자넨 돈 걱정이나 하고 있으라고. 허허.”
그렇게 보람찬 하루 일과가 끝났다.
말을 너무 많이 했다. 목이 컬컬한 것이 바닷바람 잘못 쐬면 며칠 앓아 누울 느낌이다. 집에 가서 좀 쉬어야지…….
아니 휘바휘바. 이거 또 뭐야!
책상에 쌓인 결재 서류. 와, 진짜 다 불 질러 버리고 싶다.
결국, 사내 식당의 정월대보름 특별식 제공 건 같은 유일조선의 미래를 결정하는 실로 중차대한 일들을 다 처리하고 나서야 퇴근할 수 있었다.
***
“역시 회는 통영이 최고야.”
“그렇지? 거제보단 통영이 낫지? 허허.”
정 상무는 김 본부장에게 소주를 가득 따랐다. 봄이 왔음을 알리는 도다리 세꼬시 앞에서 술을 마다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오늘 한 번 제대로 마셔보자고. 우리 음유시인 쓰러지는 꼴 한 번 봐야겠어.”
“또 무슨 무서운 소리를 하려고 이럴까?”
“넌 인마. 우리 젊은 피가 의욕적으로 해보겠다는데 왜 태클을 걸고 그래?”
“유 실장? 도크 파겠다는 거 말이야?”
세꼬시 한 입 넣고 소주 털어 넣고, 도다리쑥국으로 게워내는 의식을 마친 정 상무가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래, 인마. 나한테 와서는 본부장님이 도크 파는 걸 꺼려하는 것 같다면서 아주 질질 짜더라고. 다른 게 꼰대가 아니고, 그런 게 꼰대라고.”
“허, 나 참. 누가 들으면 내가 결사반대라도 하는 줄 알겠네.”
“허허. 뭐 질질 짜고 그런 건 아니고. 금마도 회사 키워보겠다고 이것저것 열심히 하는데, 이왕이면 우리 같은 영감들한테 박수 받고 싶지 않겠어? 뭐 하는 얘기가 허무맹랑하고 철부지 같으면 모를까, 그렇지도 않잖아?”
정 상무는 본부장을 숨 쉴 틈도 없이 밀어붙였다. 매번 어그러졌던 도크의 꿈을 이번에는 어떻게든 관철시키고 싶었다.
명분도 좋았다. 앞으로 회사를 책임질 유 실장이 총대를 멨으니, 자신은 서포트해주는 모양새.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래서 앞에 앉은 김태우 이놈이 찍소리 못 하게 잔뜩 먹여야겠다고 다짐했다.
“이 사람 보소. 지금 유 실장 라인을 타겠다 이거야?”
“하하. 젊은 놈 줄잡고 나도 회춘 좀 해 보자. 우리도 좀 대형선 만들면서 뽀대 나게 일해 보자 이거지!”
“난 반대한 적 없다니까 그러네.”
“응?”
“이 사람아. 생각을 하고 살란 말이야. 그래, 유 실장 밀어주는 건 좋다 이거야. 그렇다고 대놓고 그러면 어쩌겠다는 거야? 사람 하나 키우는 것이 좀 어려운 일이야? 박수도 쳐 주고, 호통도 치고, 그렇게 밀당해 가면서 단련을 시켜야지. 아주 애지중지. 쯧쯧. 헐겄다, 헐겄어.”
“아하. 그런 거였어? 하하. 난 또 우리 음유시인께서 기를 쓰고 반대하는 줄 알았지. 그래서! 도다리가 별로라는 거야?”
“술잔 비었어, 이 사람아.”
이번엔 즐거운 마음으로 먹이고 또 먹였다. 정 상무는 몸을 못 가눌 정도로 만취한 본부장을 부축하면서도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도크 생기면 그땐 진짜 실력 발휘하겠다는 의욕이 힘을 솟아나게 만들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