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 shipping lord RAW novel - Chapter (31)
31화 – 키코를 막아라 (4)
김태우 본부장은 강서연 전무의 호출에 올 것이 왔다는 긴장감에 휩싸였다. 키코, 그 요물이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는구나.
그가 봤을 때 키코는 지킬 앤 하이드였다.
잘 몰랐을 때야 은행들이 환헤지에 고민이 많은 중소기업들을 위해 좋은 상품 하나 만들었구나 생각했다. 가입자가 안정적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상품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 실장이 침 튀겨가면서 키코는 절대 안 된다고 소리치고 난 뒤에 살펴봤을 때는 그 흥분의 의미를 알게 됐다.
무시무시한 칼을 숨기고 다니는 사이코패스였구나. 아니, 어떻게 이런 구조를 가진 상품을 은행이 주는 특혜인양 포장할 수가 있지? 그걸 승인해 준 당국도, 정신이 나가도 단단히 나갔어.
크게 해 먹겠다는 음흉한 의도가 똑똑히 보였다.
가입자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이 판매자에 비해 지나치게 불리하게 짜여있었는데, 그걸 교묘하게 감추고 있었다. 면밀히 살피지 않으면 알 수 없게 말이다. 그런데도 완벽한 환헤지 상품이라고? 절레절레.
그는 결론을 내렸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상품이야. 지킬이 아니라 하이드가 본질이다. 지금이야 은행 말대로 제로 코스트겠지만, 환율이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밑도 끝도 없이 나락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괴물 같은 상품을 만들어 팔 생각을 했다는 것에 공포마저 느꼈다.
3년 전 외국계 은행에서 키코란 것을 들여왔을 때 수상한 점을 느꼈어야 했다. 이 새끼들 IMF 때도 그렇게 뽑아먹더니 또 장난질을 치려고 꿈틀거리고 있구나.
김 본부장은 나름 이 바닥 금융전문가라고 자부해 왔건만, 키코를 한참 들여다보고서야 유 실장의 경고를 이해했다는 사실에 큰 부끄러움을 느꼈다.
부끄러움과 함께 질투도 찾아왔다.
영업전문가인 자신보다 시황 분석을 잘 하는 것 같고, 금융 쪽도 그렇단 말이지. 환갑이 다 돼 가는데, 서른도 안 된 녀석에게 질투라니…….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정한호 상무가 했던 말이 생각나 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유 실장 말이야. 군대 갔다 왔더니 사람이 완전 달라졌더라니까.”
“뭐 어렸을 때부터 똘똘했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긴 했어도, 그거랑 일머리는 다른 거잖아. 그놈 말로는 군대 있을 때 공부했다고 하던데, 말하는 걸 보면 아주 전문가가 따로 없어. 좀 사짜 기질도 있는 것 같고. 허허.”
“뭐가 됐건 회사에 걸출한 녀석이 들어왔으니 좋은 일 아닌가?”
“허허. 내가 그놈 때문에 인생을 다시 느낀다니까. 왜 우리 그때 있잖아? 일본 제치자면서 날마다 구호 외치고 으쌰으쌰했잖아.”
“그때가 힘들긴 했어도 참 재미있었지. 일할 맛도 나고.”
“내가 지금 그때로 되돌아간 기분이라니까. 허허허.”
정 상무의 환한 표정이 떠오른 김 본부장은 유 실장이 유일조선의 밝은 미래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 녀석도 참.
그는 유 실장이 능구렁이를 몇 마리나 잡아먹었을지 생각하다, 이내 집어치웠다. 자신을 간절히 기다리는 강 전무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전무님, 찾으셨습니까?”
“네, 상의 드릴 게 있어서요. 요새 키코로 시끌시끌한 것 아시죠? 은행에서 날마다 전화며, 메일이며 가입하라고 난리네요.”
“그거 임원회의 때 안건으로 올려서 의견 묻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결국 저나 본부장님 의견이 제일 중요하죠. 회의 전에 의견 조율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네요.”
이미 무슨 상의를 할 지 알고 있었기에 번거로운 인사 절차는 생략됐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강 전무의 페이스에 맞춰, 그도 시답잖은 얘기는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유 실장이 키코 가입하면 안 된다고 그러지요?”
“본부장님한테도 뭐라고 했나요? 아휴, 제가 걔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겠습니다. 다짜고짜 가입하면 안 된다고 그 난리니……. 은행에서는 얼마나 난리인데요.”
“전무님도 고충이 많으십니다. 키코 가입 안 한 회사가 없다고 해서, 저도 키코가 뭔지 좀 살펴봤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유 실장 뜻대로 하는 것이 맞을 듯합니다.”
결론부터 던진 말에 강 전무는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군요. 키코가 파생상품인 것이 걸리긴 했는데, 본부장님도 그렇게 말씀하시면 조심하는 게 맞겠죠. 그런데 말이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환헤지를 안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유 실장은 키코 대안으로 뭘 얘기하던가요?”
“환헤지 안 해도 된답니다. 나 원 참. 제 자식이지만, 저도 그 녀석 속을 모르겠어요.”
“허허.”
김 본부장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유 실장이 무당이거나 금치산자이거나, 둘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자신도 동의한 유 실장의 견해, 그러니까 호황이 길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맞다면 환율은 상승할 것이다. 지금의 원화 강세는 해운ㆍ조선업이 달러를 무지막지하게 벌어들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으니.
그렇다면 금치산자는 아닐 것이다. 그럼 무당이란 소린데…….
그는 문득 한 가지를 빼먹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유 실장이 아주 대범한 도박꾼일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성적으로는 이것저것 따져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본능은 유 실장에게 올인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만들어냈다.
원래 이 바닥은 유래 깊은 글로벌 도박판 아니었던가? 도박판에서는 대범하게 나오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다.
유 실장, 그 녀석. 배짱 하나는 아주 두둑하구만. 다 죽어버린 줄 알았던 젊은 혈기를 일깨울 줄 아는 녀석이야. 오대양 육대주를 헤집고 다녔던 20년 전의 김태우가 되살아나는 기분. 그는 살짝 기분이 좋아졌다.
“본부장님? 왜 그리 웃고만 계세요?”
“아, 네. 뭐 좀 생각하느라요.”
“그래서 본부장님도 환헤지가 필요 없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원화 가치가 떨어진다는 확신이 있으면, 오히려 환헤지를 안 해야 이득 아닙니까?”
“아니, 두 사람 미리 말 맞추자고 약속이라도 했어요?”
“허허. 글쎄요. 유 실장 말이 터무니없었다면 그렇게 하자고 안 했겠지요.”
강 전무가 오묘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그는 표정의 의미를 대번에 알아챘다. 미친 소리라고 생각하면서도 해양금융 전문가인 자신의 말을 무시할 수 없다는 난처함.
그렇다고 해도 그는 없는 말을 지어내지 않았다.
지금 시황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호황이기에 그만큼 반동이 거셀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직 일부에 불과하지만, 불황에 대비하려는 움직임도 분명히 목격했기도 했고.
결론은 유 실장의 말에 찬성표를 던질 수밖에 없었다.
“정말 그렇게 해도 괜찮겠다구요?”
“세상에 백프로는 없지만, 그래도 전 확신합니다.”
김 본부장은 속으로 혀를 찼다. 자신도 대범한 도박꾼에 설득돼 버렸다는 깨달음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힘이 나는 기분이었다.
***
강서연 전무는 심경이 복잡다단했다.
아들의 말을 들었을 때는 살짝 화가 났었지만, 김태우 본부장까지 똑같은 소리를 하니, 이걸 진짜 믿어야 하나 싶었다.
키코 가입하지 말라는 것은 그러려니 했는데, 환헤지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도무지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그런 심정을 아는지, 김 본부장은 흡사 강연과도 같은 설명을 아낌없이 쏟아냈다. 월요일 1교시 교양수업 같은 명강의에 강 전무는 설득되기 시작했다. 질려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아마도.
“그래서 전무님도 크게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아휴. 유 실장이야 철부지라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데, 본부장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이거 혼란스럽네요. 저도 조선판에서 꽤 오래 있었지만, 환헤지를 안 해도 된다고 하니 원.”
“뭐 새삼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IMF 때도 환헤지했다가 재미 못 본 업체들이 꽤 있죠. 그리고 빅3라고 해서 전량을 헤지하지는 않습니다. 환율이 유리하게 흘러가겠다 싶으면 헤지 비중을 확 낮추기도 합니다. 환헤지 안 하는 것이 마냥 허무맹랑한 얘기는 아니라는 것이죠.”
“흐음.”
“유 실장 때문에 그러시는 것이죠?”
“뭐 그렇기도 한데…….”
“유 실장이 나이도 어리고 아직 경험도 부족하지만, 시장 흐름은 정확하게 짚어내는 것 같습디다. 정 상무도 어찌나 칭찬을 하던지 귀에 딱지가 생길 지경입니다. 허허. 아들이니까 오만 생각 다 드시겠지만, 제가 보기엔 잘 하고 있습니다.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은데요.”
김 본부장의 열띤 강의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아들에 대한 칭찬 때문이었을까?
강 전무는 만년설처럼 굳건하던 환헤지에 대한 걱정을 사르르 녹여버렸다. 이 바닥에서 꽤나 유명한 사람이 저리 자신 있게 얘기하니 아들 말대로 해도 되겠다는 안도감을 갖기 시작했다.
내심 김 본부장이 아니었어도 아들 말을 믿을 생각이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시험관 6번 만에 겨우 가진 우리 아들,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 주고 싶었다. 아들 판단이 잘못되더라도 어떻게든 수습하면 그만이다. 살면 얼마나 더 산다고.
그럴수록 맘을 굳게 먹었다. 아들에게 힘이 돼 주면서도, 더 크고 잘 성장하라고 훈육하는 것도 부모의 역할이니까.
아들 잘 가르쳐서 이 회사의 선장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아들에게 평소와 다르게 과하게 반응했었다. 세계 10위권 조선사로 올라선 회사를 준비도 안 된 상태로 물려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행여나 아들이 멋모르고 날뛴다는 소리를 듣게 하고 싶진 않았다.
김 본부장이 유 실장 잘 하고 있다며 힘을 실어주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러면서도 입 밖으로는 마음과 다른 소리가 튀어나왔다.
“뭐, 본부장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시니 다시 한 번 검토해 보겠습니다. 그나저나 유 실장 말이에요. 회사 들어온 지 이제 넉 달짼데 너무 나대는 것 같지 않습니까?”
“넉 달이요? 그거 밖에 안 됐습니까? 저는 한 몇 년 된 줄 알았습니다. 허허.”
“회사 들어와서 잠자코 3년만 일 배우라고 했더니만, 오자마자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녀서 참…….”
“허허. 얼마나 좋습니까? 회사가 시끌시끌하고 그래야 좋죠. 행여나 잘못된 판단을 한다고 한들, 우리 같은 노땅들이 가만있겠습니까? 젊은 직원들이 마음껏 활개 칠 수 있도록 울타리 역할을 해 주는 것이 저희가 할 일이죠.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강 전무는 만년설에서 흘러나온 물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편안함을 느꼈다.
그런데도 자꾸 말은 정반대로 흘러나왔다. 연성이 이 녀석 좀 눌러줘야 해, 그게 더 크게 성장하게 만드는 길이야.
“키코에 대한 본부장님 의견은 잘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본부장님은 야드 확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허허. 그것도 유 실장 얘기 아닙니까?”
“유 실장 이 녀석이 도크를 파야 한다고 난리를 쳐서요.”
“도크 얘기는 들었습니다. 빅3와 경쟁하려면 꼭 필요하다고 하는데, 글쎄요. 솔직히 잘 모르겠네요.”
강 전무는 김 본부장의 어정쩡한 태도가 눈에 확 들어왔다.
“그렇군요. 본부장님도 시간 나실 때 검토 한 번 해보시면 좋을 것 같네요.”
“물론, 도크가 있으면 좋죠. 그런데 타이밍이 좀 아닌 듯싶더군요. 제가 선박 투자 쪽에 몇 년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신규 투자에 나설 때가 아니라, 힘을 비축할 때가 아닐까 싶네요.”
“그 말씀도 일리가 있지요. 뭐 도크가 돈이야 많이 들긴 해도, 그게 꼭 필요하다고 하면 어떻게든 자금 마련해야죠. 근데 다른 대안도 있는데 굳이…….”
“유 실장한테 따끔하게 얘기 좀 해 달라는 말씀이죠? 아니면 지그시 눌러달라거나?”
“호호. 꼭 그런 건 아닌데, 임원들끼리 서로 자주 소통하면 좋지요.”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제 나름대로 역할을 해 보겠습니다. 저야 뭐, 지금 도크는 아니라고 생각해도 회사 결정에 따를 뿐이죠.”
2000억 정도가 추가되는 투자자금은 친정 살림살이 다 팔아서라도, 은행 문턱이 닳아 없어지게 해서라도 마련할 생각이었다. 남편의 숙원인 줄만 알았는데, 이제는 아들의 희망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건 그거고. 아들을 엄하게 훈련 시켜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강 전무는 그 역할을 김 본부장이 잘 수행해줄 것 같았다. 정 상무? 그 사람은 사람이 너무 좋아. 이제야 제대로 된 훈장 선생을 찾았군.
그 시간 실장실에서 부지런히 야드 확장 계획안 작성에 몰두하고 있던 유연성은 화들짝 놀랐다. 종아리가 찌릿찌릿 저려왔기 때문이었다. 누가 회초리를 때리는 것 같았다.
의자에 너무 오래 앉아 있었나.
유연성은 종아리를 어루만지며, 아무리 바빠도 운동을 빼먹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고개를 드는 순간 책상에 쌓인 결제서류가 눈에 들어왔다.
분명히 빡세게 다 처리했는데, 화수분처럼 이 지랄이네. 운동과 함께 하는 삶이 나에게 찾아오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