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233
233
죽은 자들은 산 자와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마주한다. 온통 명암으로 얼룩진 상 가운데 영혼만이 발갛게 타오른다.
그리고 피에트는 사그라지는 촛불과 같았다.
희미한 잔불이 가냘프게 흔들린다.
“피에트.”
보부상에겐 죽음의 얼룩이 다분했다.
멍하니 천장을 응시하던 노인의 눈동자가 깜빡인다. 그는 상처 입은 짐승처럼 낮게 으르렁대듯 가쁘게 호흡을 내쉬었다.
토드는 앙상한 손을 부여잡은 채 다독이듯 쓸어내렸다.
“굳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기력을 아끼세요.”
피부가 마른 나무껍질처럼 거칠고 차가웠다. 청색증이 도드라지고, 맥박은 둔중하다. 그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노인이 힘겹게 손을 들어 올린다. 손끝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긴 토드가 찬찬히 읊조렸다.
“저건 바티유에서 가져온 화병이군요. 자줏빛 붓꽃이 인상적입니다. 그 옆에건 도시 국가에서 노획했다던 양탄자던가요?”
하나하나 정물에 대한 소견을 이야기할 때마다 노인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맞장구를 치고 싶어 발끝이 근질거리지만, 따라주지 못하는 몸뚱이가 한스러울 뿐이었다.
피에트의 침실은 이 땅 곳곳에서 만들어진 물산으로 가득했다. 생애의 말미에 이르러서야 올라선 갑판. 그는 거동이 불가한 지경까지도 항해를 마다하지 않았다.
“여기 가득한 물건들이 당신의 생애를 증명하는 전리품들이군요.”
노인은 면면에 뿌듯한 미소를 흘렸다. 이내 그가 다리를 부들부들 떨더니, 침상에서 미약한 지린내가 올라온다.
피에트의 눈이 격하게 흔들렸다.
“아······.”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임에도 그는 허공을 향해 양손을 들어 움켜쥐려고 시늉했다.
그러나 손아귀에 잡히는 것은 없었다.
인간은 날 때와 마찬가지로 빈손으로 떠나야만 한다.
섬망 중 소유물에 대한 집착을 보이는 증세는 비교적 흔한 편이다. 다만 회색 눈동자에서 탐욕의 기미를 읽지 못했다.
방을 채운 물건들은 진귀하나, 현물로서 가치가 높은 것은 없었다. 흔한 금붙이가 없는 게 그 방증이었다.
토드가 방울을 집었다.
“피에트, 우리 모두는 이 땅에 단명하는 인간으로 태어났나니.”
딸랑-
“육체는 잔재에 불과하매. 죽음은 모든 것을 드러내노라.”
방울은 신과 인간을 잇는 상서로운 매개. 청음이 울리는 공간은 사바와 망천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그대가 품은 죄와 욕망마저도.”
기로 앞에 선 자가 동공을 곤두세웠다.
좋은 징후다. 아직 생에 대한 미련이 짙다.
“그대는 죽음이 두려운가?”
사령술사의 물음에 노인은 가까스로 입을 뗐다.
“그렇소···.”
달싹이던 피에트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자꾸만 고개를 떨군다. 하여 토드는 작은 호의를 베풀었다.
“헌데, 내가 두려운 건··· 죽음 그 자체가 아닐세.”
이미 생의 고동을 다한 노구. 요사스러운 힘을 빌려 단말마로 그칠 넋두리를 잇게 만든다.
“아직 내가 닿지 못한 미지가, 이토록 많다는 게 한스러울 뿐···!”
그에겐 여전히 소년과 같은 동경심이 있었다.
“네 수완 덕분에 네크로폴리스의 재정이 도움을 받았었지.”
지인으로서 친분은 죽음을 잠시 유예시켜준 선에서 그쳤다. 기회를 제안하는 건 순전히 피에트가 추구하는 의지 때문이다.
“고드프리가 사략 함대 제독으로서 기량은 출중할지 몰라도, 협상가의 재목은 없더군.”
토드가 손을 내밀었다.
“어머니의 품에 귀의해 대해로 떠나겠는가? 아니면 내 수하로서 네크로폴리스를 위해 봉사하겠나.”
피에트가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선택의 여지가, 없구먼.】
사자가 사령술사의 손을 맞잡고 일어선다.
“판가우 자유시. 6월의 셋째 주, 목요일 9시에 피에트 디 카푸아노는 사망했습니다. 그의 임종은 사령술사 토드 셰우드가 참관했음을 고지합니다.”
의례적인 선고에 망자가 너스레를 떨었다.
【참 묘한 기분일세.】
하수인을 돌아보던 토드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렸다.
“보부상 피에트는 이 자리에서 죽었으니,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겠군요. 혹여 생각해둔 바가 있으십니까?”
【내가 죽으리란 것도 몰랐는데, 그 뒤의 이름까지 생각했을까.】
토드는 골똘히 고민하다 말했다.
“카스퍼···는 어떠십니까.”
어느새 노인의 눈동자엔 토드와 같은 안광이 흘렀다.
【카스퍼, ‘보물지기’라. 마음에 드는 울림일세.】
피에트의 묘역은 공동묘지 한구석에 마련될 테지만, 빈 관이 묻히게 될 것이다.
대신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날이면 남부 연안의 뱃사람들은 창백한 낯의 사내가 유령 선단을 이끄는 모습을 목격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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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거, 내 이리될 줄 알았지.”
죽음을 앞둔 것치고 스칼바냐르 사내의 입은 여전히 걸쭉했다. 심지어 병나발까지 부는 모습에 산시아는 고개를 기울였다.
“···죽어가는 것 같진 않은데요.”
“바티유 병이오.”
토드가 빙긋 웃었다.
“매독이군요.”
흔히 제국 사람들은 온갖 해로운 것들에 역사적으로 앙숙이었던 바티유를 수식어처럼 갖다 붙이는 경향이 있다. 이젠 고향 땅보다 여기서 더 오래 살아서 그런지, 그 역시 다르지 않았다.
넌덜머리를 낸 쇠렌이 중얼거렸다.
“골목가 들쑤시고 다니는 놈들의 뻔한 말로지! 그래도 원 없이 놀아봤으니 불만은 없수다.”
“학파에 문의하셨다면 제가 적절한 치료를 제공했을 텐데요.”
쇠렌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 원체 바쁘다길래. 민폐 끼치는 것도 정도가 있잖소. 내 아무리 쌍놈이라지만, 도의는 아는 남자요.”
“미련하시군요. 대체 무슨 치료를 받았길래 이 꼴이 된 겁니까?”
이불을 두껍게 덧씌워 맨살이 보이진 않았으나, 드러난 얼굴 위론 발진이 가득했다.
“수은 증기가 그리 좋다길래, 아랫도리다가 쐬보기도 하고··· 욕조에 수은이랑 황을 끓여다 반신욕도 해봤는데. 꽝이더이다.”
그토록 흑색 학파가 위생과 의학 보급에 힘썼는데, 아직도 민간엔 엉터리 자식들이 판치는 모양이었다.
토드가 나직이 속삭였다.
“당장 처방한 치료사를 잡아다 500년 노역을···”
“아니, 아니! 그 돌팔이 새끼는 이미 남부로 튀었을 거요! 괜히 나 때문에 헛수고 마쇼. 속아 난 내가 등신이지.”
낄낄거린 쇠렌은 기침을 거듭했다. 애써 농지거리로 감추려 해도 그에겐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피에트는 제 하수인이 되었습니다.”
“···흐! 내한테도 같은 제안을 하러 온 거요?”
“예.”
쇠렌이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우리 사령술사 양반이 이리 잔정 많은 사람인 줄은 몰랐는디.”
토드 역시 말없이 웃기만 했다. 요리조리 눈을 굴리던 쇠렌은 단호한 어투로 답했다.
“거절하겠소.”
“고향의 전통 때문입니까?”
볼에 앉은 딱지를 긁적이던 쇠렌이 고개를 저었다.
“나랑 그 삭막한 동네는 일절 관계없소. 티르핑 형님이야 끝까지 자기 영혼이 동토에 묶여 있다 생각했겠지만, 내가 여기서 보고 지낸 지만 몇 년인데.”
슬쩍 창가를 둘러본 토드가 모호한 미소를 흘렸다. 갈까마귀 한 마리가 빤히 텅 빈 동공을 깜빡이고 있다.
“무엇보다도 오입질을 못하잖소이까.”
천박한 언사와 더불어 손가락까지 꼼지락대니 산시아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고작 그것 때문에?”
“그것 때문이라니! 내 사는 이유가 그 짓거리 때문인데!”
그녀는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으나, 애써 입을 닫았다. 제자의 성장에 탄복할 따름이었다.
“그간 제자들의 노고 덕에 해부학 방면으로 연구가 상당히 진척돼서, 아마 기능을 재현하는 정도는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혈액을 마력으로 순환시키는 식으로요.”
다소 솔깃한 제안이었는지, 쇠렌의 눈알이 동그래졌다. 이내 그가 혀를 찼다.
“그래 봐야 송장 내 감추려고 평생 방부제 달고 살아야 하는 신세 아뇨. 게다가 송장이랑 붙어먹는 상대방 입장도 생각해야지. 병 걸려. 그러다.”
산시아가 황당한 듯 되물었다.
“어차피 당신은 사창가만 드나들지 않나요?”
“어허이! 제자 아가씨가 뭘 모르는구만. 무릇 정사란 상대를 향한 배려, 거기서 비롯된 교감이 참맛인 거여! 쾌락만을 좇는 관계가 얼마나 허무한지 모르쇼?”
산시아는 결심이 섰는지 왕홀을 쥐었다.
“스승님. 악질이 머리까지 잠식한 게 분명해요. 지금 여기서 그의 고통을 끝내고, 안식을 안겨주는 게 자비로운 처사일 거예요.”
“사, 사령술사 양반! 저 처자 좀 말려주쇼!”
토드가 부드럽게 산시아를 문밖으로 내몬 사이, 쇠렌은 옆구리의 피고름을 닦고 있었다.
“흐, 흐. 내 이런 모습은 안 보이려 했는데. 제자 아가씨의 제안을 받아들일 걸 그랬나 보오.”
“피에트도 당신 못지않게 몰골이 추레했답니다. 누구나 어머니 앞에선 아이로 돌아가는 법이죠.”
“그 영감 꼴도 가관이었겠구만! 그걸 못 봤다니, 아쉬워 죽겠어.”
둘은 동시에 어깨를 들썩였다. 피가래 섞인 기침 탓에 방 안의 공기가 다시 가라앉는다.
“···그래서 진짜 이유를 말해보세요. 쇠렌.”
토드의 재촉에 쇠렌이 씁쓸히 웃었다.
“난 놀고먹는 게 일생의 숙원이었소. 후스카를이 되려던 것도 적어도 돈 걱정은 안 하지 않을까 싶어서였지.”
사그라지는 잔불이나마 다시 피워보려 발버둥 치던 보부상과 달리, 장물아비는 관망할 뿐.
“이제 전사들은 이 땅에 설 이유를 잃었소. 형편이 안되니 여기까지 와서 돈 될만한 것들은 다 해봤고. 그러다 운수 좋게 귀인을 만나서 말년에 팔자가 폈지만.”
낄낄거리던 쇠렌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원 없이 즐겼소. 나 같은 놈한테 천국이 있다면 여기가 아니고서 또 있겠나?”
“죽음이 두렵진 않으십니까?”
“우리가 용처럼 강한 것도 아니고, 요정들만큼 오래 사는 것도 아닌데 피조물의 영장이라며 자화자찬하지 않소?”
쇠렌이 이기죽댔다.
“비결은 인간이 욕망의 동물이라 그런 게 아닐까 싶어. 자기들 나름대로 더 나은 삶, 바라는 것들 말이여. 전부 얻으려 어떻게든 쥐좆만한 명줄 부여잡고 아등바등 난리를 피운 게 이까지 온 거고.”
“그래서 당신은 그걸로 만족하나요.”
“그렇다우. 솔직히 산다는 것 자체가 원체 지랄 맞아야지. 욕망은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야. 그게 없으면 송장이랑 다를 게 있겠소?”
토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루고 싶은 미련도 없고, 실컷 즐겼겠다. 남은 일이 관짝에 눕는 것뿐이라면 미뤄봤자 뭐하겠어. 난 이 정도 그릇밖에 안 되는 인간이라오.”
눈꺼풀을 깜빡이던 장물아비는 금실이 장식된 이불을 끌어 올렸다. 겹겹이 쌓인 비단은 사뭇 수의를 연상시킨다.
“돌이켜보면 참 오래도 쏘다녔군. 이제 눈 좀 붙여야겠소. 길게 말이야.”
토드가 서랍 위에 올려진 촛대를 꺼트렸다.
“좋은 꿈 꾸세요. 쇠렌.”
방문을 나서려는데, 앓는 소리를 삼키던 쇠렌이 희미하게 속삭였다.
“···사령술사 양반.”
까마귀가 날아오른다. 피조물들은 공경을 잃었을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지상을 굽어살피고 있었다.
“당신이랑 한 여행. 그럭저럭 재밌었소. 살아남았으니 하는 소리지마는.”
실소한 토드는 문고리를 잡았다.
“즐거우셨다니 다행입니다.”
달칵.
문이 닫힘과 동시에, 숨 끊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 뒤에 고요가 그를 포근히 감쌌다.
‘욕망이 없으면 사람은 죽은 거나 다름없다.’
유곽을 떠나며 토드는 자문했다.
‘내 욕망은 뭐지?’
네크로폴리스의 직접적인 수혜를 입은 판가우는 어느 때보다도 융성했다. 부랑자들이 넘쳐나는 건 여전했지만, 화려한 옷을 입은 졸부들도 더러 보인다.
아직 반질반질한 망토를 두른 풋내기 사령술사들도 많았고, 기증받은 시신을 끌고 가는 수습생들이 변두리 골목을 오간다.
저들에게선 가지각색의 욕망이 요사스럽게 타올랐다.
‘집무실에 처박혀 「약물서」나 「해부학 및 수술 원론」 같은 사료들을 해독하는 게 내가 바라던 일이던가?’
아니. 이젠 네크로폴리스엔 자신 외에도 유능한 이들이 많았다.
일찍이 화염 마탑에서 비효율적인 커리큘럼으로 부당함을 겪었던 카리나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아낌없이 조언을 해줬고, 그 덕에 흑색 학파는 획기적으로 수습생들을 위한 교육을 개선할 수 있었다.
그녀와는 지금도 양측 마탑의 수장으로서 드문드문 서신으로 교류를 하곤 한다.
‘내가 추구하는 건 세속의 부나 장막 너머의 지식, 육체의 안락함이나 대외적인 명성도 아냐.’
토드는 네크로폴리스의 주인으로서 제국에서 독보적인 권세를 갖췄다. 까마득한 첨탑 위에서 자신이 이룬 명예를 돌아보며 과거의 영광들을 반추하는 삶도 딱히 나쁘진 않으리라.
그러나 광인의 입가엔 천진난만한 미소가 어렸다.
‘역시 기반이 안정화되면 재미가 없어.’
또 몸이 제멋대로 휘청인다. 급히 그를 부축한 산시아가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스승님···. 너무 무리하신 게 아닌가요.”
일찍이 어머니께서 점지하신 대로 산시아는 훌륭한 사령술사가 되었다. 해부학과 생체 변형의 대가로 저명한 학술원들에서도 명망이 높았다.
“당분간 동방으로 여행을 떠날까 합니다.”
“그 몸으로요?”
토드가 입가를 훔쳤다.
“그래서 떠나려는 겁니다. 이 몸뚱어리의 수명은 10년도 남지 않았겠죠.”
산시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요즘 이스라 경이 동방에서 들여온 서적에 심취다고 듣긴 했어요. 거기에 생명을 연장하는 약초가 있다는 헛소문을 진심으로 믿으시는 건 아니시죠?”
“글쎄요.”
유들유들한 미소에 제자가 한숨을 흘렸다.
“저한테 또 귀찮은 일을 떠넘기시려고···”
“제가 죽는다면 마귀들이 다시금 도래할 겁니다.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이 땅이 충분한 발전을 이룩할 때까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이틀 전 무저갱에서 대규모 군세가 이동했다는 첩보가 있었어요. 정황이 심상치 않은데, 스승님께서 자리를 비우시면-”
“아,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들이 향할 행선지는 잘 알고 있다.
“다 예상이 되거든요. 예상이.”
이미 대비는 해놨지. 스승의 영문모를 미소에 제자는 여전히 의뭉스러운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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