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232
232
“뭐야, 여긴.”
먼저 발을 디뎠던 라노가 당혹스러워했다.
분명 군주가 파견한 사절들과 원만히 합의를 나눈 뒤 지상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토드와 라노, 단둘이 허에 던져져 있었다.
‘묘한 곳인걸.’
어떠한 권능의 자취도 느껴지지 않는다. 물리적 실재도 없고, 끄트머리 없이 펼쳐진 허무.
라노는 발을 구르며 중얼거렸다.
“거봐. 악마 새끼들은 믿을 놈들이 못 된다니깐? 순순히 돌려 보내줄 리가 없지.”
바닥을 훑던 토드가 몸을 일으켰다.
“악마들의 농간처럼 보이진 않습니다.”
“게네가 장난질 친 게 아니면, 우리가 이런 곳에 떨어질 이유가 있어?”
토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한때 무저갱도 영혼의 대해로 뻗은 거룩한 지류의 일부였죠. 그런 맥락을 감안하면···”
품에 보관해둔 주신의 파편이 요동치고 있다.
“외계에서 발흥한 우리가 여기 새어 들어온 건 전혀 이상할 일이 아닙니다.”
사령술사의 설명이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느껴졌는지 암살자가 인상을 구겼다.
“또 헛소리 떠드네. 쉽게 말해봐.”
토드는 빙긋 웃으며 신체를 풀어냈다.
“여긴 일종의 교차로. 우리가 헤어질 지점이란 거겠죠.”
손에 놓여 있던 신성이 광채를 뿌리며 잿가루로 화한다. 그물처럼 번져나간 권능은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며 투영된 세계를 비춘다.
천상과 지상, 명계와 무저갱, 뿌리처럼 얽힌 경계 너머. 파편화된 다섯 화신이 떨어졌던 틈새로.
“어, 어어? 이렇게 갑자기?”
“당신의 승리 조건은 모든 화신의 살해. 저와 당신을 제외한 다른 화신들은 모두 사망했고, 당신은 저를 직접적으로 살해한 경과가 있잖아요.”
암살자는 머쓱한 듯 볼을 긁적였다.
“크흠···. 뭐, 그렇게 치면 진작 달성된 거긴 한데. 왜 이제서야?”
“당신이 제 계약에 묶여있었으니까요.”
멱살잡이라도 해야 하나 싶다가도 싱글벙글 웃고 있는 낯짝을 보자니 힘이 빠진다.
암살자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감격스러우신가요?”
“잘 모르겠어.”
그녀의 얼굴에 얼룩진 회한이 묻어난다.
“난··· 아무도 아니었다고. 흔해빠진 방구석 겜돌이. 인생에 이룬 것 하나 없는···.”
사령술사는 묵묵히 웃으며 경청했다. 둘은 서로를 투영하는 잔영이었다.
“그런 놈이 외딴 세상에 갑자기 떨어졌단 말이야? 부엌칼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놈더러 누굴 죽이라니. 난이도가 개씨발이잖아. 그거···”
“암살자도 난이도가 높긴 하죠. 특성상 악에 기울어진 성향인 데다, 원한도 자주 사니.”
여기서 ‘그렇다고 사령술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이라고 딴죽을 걸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았다. 언제나 날이 서 있던 눈매가 물기에 젖어 있었던지라.
“오로지 돌아가야겠다는 일념만으로 어떻게든 살아남았어. 그게 햇수만 30년이 넘었네.”
필부의 굴곡진 고해에 대해 토드는 짤막이 답했다.
“고생 많았습니다.”
떨군 고개 사이로 희미한 울먹임이 들려오는 듯하다.
“손에 너무 많은 피를 묻혔는데, 돌아가서도 내가 멀쩡히 살아갈 수 있을까?”
“글쎄요.”
토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제게 물어볼 게 아니라, 당신이 살아가면서 알아낼 일이겠죠.”
그녀는 수시로 주먹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이에 사령술사가 팔을 펼쳤다.
“혹시라도 기댈 품이 필요하시다면, 기꺼이.”
“웩, 꺼져! 토 나오니까.”
대번에 눈매가 평소 모습대로 돌아온다. 거세게 눈가를 비빈 라노가 일어섰다. 그토록 고대하던 염원을 앞두고 복잡한 심상이 오가는 모양이었다. 토드는 차분히 그녀가 정리하길 기다려줬다.
“···내 단원들은 잘 살아있어?”
토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의회에 부탁해놨으니, 생활에 지장은 없을 겁니다. 적어도 판가우에 머무르는 한은요.”
“마지막으로 안부 인사 못 건네는 게 마음에 걸리네.”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던 암살자가 나지막이 물었다.
“얼굴들 한 번 둘러보고 가는 건 안 되려나.”
“안타깝지만,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여긴 쉽게 들를만한 곳도 아니거니와, 파편에 담긴 신성도 떠나가고 있거든요.”
조물주의 권능은 한낱 필멸자가 쥐기에 너무나 웅대했다. 이제 쓰임새를 다한 표상은 본래 주인에게로 귀속된다.
입술을 곱씹던 라노가 고개를 털었다.
“그래, 뭐. 그 새끼들이랑 내가 구질구질하게 얽매인 관계도 아니고. 한가락 하는 놈들이니 알아서들 잘 먹고 잘살겠지.”
한결 홀가분한 얼굴로 중얼거리던 라노가 재차 물었다.
“그래서 넌. 진짜 안 돌아가게?”
“네.”
단호한 대답에 라노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이내 옅게 한숨을 삼킨 암살자가 픽 웃었다.
“그래. 너답다. 나답기도 하고.”
사령술사가 손을 먼저 내밀었고, 암살자는 기꺼이 맞잡았다.
“단원들에게 안부 인사나 전해줘. 도시에 처박혀서 잘들 살라 그래. 괜히 길에서 객사하지 말고.”
“그럴게요.”
문득 토드가 덧붙였다.
“아버지껜. 당신이 저 대신 안부 전해주시고요.”
“···그래야겠지.”
맞닿은 물결이 흘러내린다. 같은 수맥에서 발원했을지라도 사령술사와 암살자가 각자 겪은 삶의 궤적이 다르듯, 갈라져 나갈 지류 역시 상이했다.
전자는 남고, 후자는 떠난다.
담담히 손을 놓으려는데 사령술사가 입술을 달싹였다.
“나는 지게 지고 가는 이이니, 당신이 진 허물. 여기 얹고 떠나가소서.”
마력의 기미에 암살자가 본능적으로 단검을 뽑으려다 겨우 자제했다.
손아귀엔 사령술사가 쥐여준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이건···”
“저는 잔이었는데, 당신은 그런 형태로 굳어지는 모양이네요.”
카드 3장. 익살스러운 중세풍 삽화로 법황, 영매, 이교도가 그려진 게 인상적인 모양새였다.
“선물입니다.”
휘어진 눈꼬리에 괜히 불안해진다.
“왜?”
“아마 필요할 거에요.”
“돌아가봤자 거긴 악마나 영물 같은 것들도 없을 텐데. 구태여 챙겨줄 이유가 있나.”
투덜거리면서도 착실하게 챙기는 모습에 사령술사가 낄낄거렸다.
“그래도 별천지에서 고생하다가 귀향하는데, 나름대로 보상은 있어야 섭섭하지 않잖아요.”
“그건 맞지.”
구태여 자세한 부연설명까지 해주진 않았다. 그걸 스스로 깨닫는 재미도 있을 테니까.
토드는 그녀를 향해 손가락을 펼쳤다.
“라노, 그대는 나와의 계약을 완수하였노라.”
권능으로 옭아맸던 끈이 풀린다.
“이제 잔재는 허물어지고, 영혼은 본래 머물렀던 곳으로 돌아가리라.”
고위 흡혈귀의 육신이 붕괴된다. 자신을 둘러보던 암살자가 삐죽 이빨을 드러냈다.
“두 번 다시 마주치지 말자. 아직도 꼴 보기 싫으니까.”
“자비로운 어머니 오르카사의 이름으로. 그대의 환향이 무사히 보호받기를.”
경건하게 자세를 갖춰 대응하는 모습에 라노가 진절머리 쳤다.
“어휴, 진짜 교주님 다 됐네. 잘 있어! 미친놈아.”
“안녕히 가세요. 라노.”
성광이 사방을 훑어내린다. 암살자는 완벽히 떠나갔다.
환송을 마친 토드는 주변이 무너지고 있음을 인식했다. 품에 남은 파편의 일부가 그걸로 괜찮으냐는 듯, 미약하게 흔들린다.
“···저는 이걸로 족합니다.”
사명을 완수했노라고. 작은 되뇜을 들었다. 그간 응어리진 일거리를 해결한 기분이라 토드 역시 홀가분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이제 뭘 해야 하지?’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물음.
답을 내리기도 전에 의식이 부상한다.
그리고 토드의 눈이 뜨였다.
“······아.”
사령술사는 눈두덩을 짓누르던 안대를 풀어헤쳤다. 시야에 곧장 앙갈라툼의 뼈 무더기에 올라선 파멸의 기사가 보였다.
【하, 하! 하. 보이느냐! 우리의 위업이! 무저갱을 정복하고 돌아왔다!】
지옥에서 노획한 전리품과 더불어 귀환한 하수인들의 모습에 네크로폴리스에 온통 떠들썩한 열기가 흘렀다.
번거롭게 하수인들의 시야를 오가며 훔쳐볼 필요 없이, 온전히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담는 게 이리도 감사할 일일 줄이야.
토드가 작게 중얼거렸다.
“역시 컨텐츠는 온몸으로 체험하는 게 최고인 것 같습니다.”
메인 퀘스트가 끝났다고 해서 여정에 종지부가 찍힌 것도 아니었다. 본래 게임은 만렙부터 시작이라고들 하지 않던가.
사령술사의 입꼬리는 내려올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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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앵-
타종과 더불어 인부들이 흙을 덮는다. 예배당에서의 전례까진 수단을 입은 태양교단의 사제들이 집도했다면, 매장 의식부턴 흑복을 입은 이들이 도맡았다.
“모든 것을 일으키시는 죽음의 어머니, 오르카사께 간청하사 고인 겔라흐 슈타인만이 영혼의 대해로 나아가 생전의 죄를 정결케 하시며.”
딸랑···.
“그가 영원한 안식을 받아 쉬게 하옵시고, 그의 죽음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이 피어나 이 땅을 풍요롭게 하리니.”
스승과 동행하는 수습생이 느티나무 씨앗을 뿌렸다. 안장이 끝난 뒤 사령술사가 비석에 직접 인장을 봉하는 것으로 장례 절차가 마무리된다.
거미 문양이 새겨진 묘비는 도굴 행위가 일절 금지되며, 묘역을 침범한 자들은 네크로폴리스에서 직접 묘역 기사단이 출두한다.
상주인 사내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고맙, 습니다요. 사령술사···님.”
사령술사는 품삯으로 받은 은화를 헤아리며 답했다.
“애도는 다음 주 성 울리히의 축일까지 하시고. 이따금 묘역이 마르지 않도록 해주세요. 간혹 성수를 뿌리는 분이 계시는데, 염분 때문에 자칫 모종이 죽을 수도 있으니 삼가시고요.”
“예, 예에.”
거의 누더기나 다름없는 망토를 걸치고 있음에도 은빛 머리칼이 돋보인다. 분명 자기네 같은 무지렁이들관 다른 출신임은 분명했다.
비록 사내는 장성한 자식까지 둔 가장이었지만, 눈앞의 상대가 염하는 일이나 하기엔 아까운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고인에게 안식이 깃들기를.”
망토를 눌러쓴 사령술사는 향로를 거두곤 앙상한 말 위에 올라탔다.
“···가자. 마르칼.”
“아, 네. 스승님.”
교회 뜰을 떠나 마을 외곽으로 나서는데, 양을 치던 목동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새카만 망토와 뼈만 남은 말을 보곤 일제히 모자를 벗은 체 고개를 숙였다.
‘예전 같았으면 면전에서 수군대거나, 썩은 소채를 던지는 일도 자주 있었는데.’
누구보다도 격세지감을 몸소 느끼는 사령술사였다. 제국의 내전을 종결짓고, 무저갱까지 패퇴시켰더라도 시체에 손대는 족속들이라는 모멸 어린 시선은 쉽사리 걷히질 않았다.
그 뒤로도 흑색 학파가 얼마나 봉역에 이바지했던가. 개선장군 같은 대우를 기대했던 제자 중엔 실망해서 네크로폴리스를 떠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제자는 수시로 날아드는 딱정벌레들을 어림하여 재잘재잘 떠들었다.
“그뤼나부흐트엔 이번 달 사망자가 없다고 하네요. 하셀도르프는 그쪽 재무관이 대금을 미납해서 당분간 장례 금지령이 떨어졌고요.”
갑충 조종은 망자 소생의 기초에 해당하는 권능으로, 모든 수습생이 입문 시기에 익힌다. 배우기는 쉬우나, 의외로 통달하긴 어려운 편이었다.
‘마르칼은 무리 떼를 통솔하기보단 섬세하게 조종하는 기교가 특출나지.’
사령술사의 뇌리에 익숙한 인물이 연상됐다.
‘스승님을 닮았어.’
무저갱 원정이 끝난 뒤로 토드는 대규모 하수인을 직접 이끌기보단 소수의 수뇌부만 담당했다. 용아병은 후세의 위협을 안배해 네크로폴리스의 묘역에 묻혔고, 다수의 중급 망자들은 제자들에게 배분했다.
덕분에 상당한 전력이 이탈했지만, 여전히 자체적인 무력은 어지간한 대공령에 준하는 수준이었다.
이따금 새로운 하수인을 시연할 때 추종을 불허하는 응용에 경탄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한편으론 기량이 하락한 게 아니냐는 의구심 섞인 여론도 있었다.
사령술사가 입술을 곱씹었다.
‘요즘 들어 눈에 띄게 쇠잔해지셨지. 집무실에서 잘 나오지도 않으시고.’
흑색 학파는 단단한 기반 아래 뿌리를 틀었지만, 그만큼 수장의 헌신을 적잖게 요구했다. 누구보다도 측근으로서 직접 곁에서 모신 사령술사야말로 그 노고를 잘 알았다.
“어. 판가우에서 직접 들어온 소식이 있네요?”
사령술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판가우는 입문자들이 많아서 어지간한 부고는 보고되지 않을 텐데.’
네크로폴리스에서 가까운 도시라 사령술사들이 넘치다 못해 과포화된 곳이다. 산시아에게 직접 보고될 정도라면 스승님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인물일 공산이 컸다.
“이름이 어떻게 되니.”
사령술사의 물음에 제자가 풍뎅이를 쓸어내리며 대꾸했다.
“항만 부둣가에서 피에트 디 카푸아노. 장미 골목의 쇠렌 스콜다르손이라네요. 특이한 건 둘 다 위중한 상태라는데요? 죽지도 않았는데 연락망으로 서신이 오다니.”
표정을 굳힌 사령술사가 뇌까렸다.
“급히 네크로폴리스로 가야겠구나.”
“네? 아직 그렌부르크랑 오벨도르프에 양례가 남아있는데도요?”
산시아는 고삐를 잡아당겼다.
“학파장님의 지인분들이란다.”
“어이쿠, 그럼 말이 아니라 유해룡이라도 불러서 가야 하는 게···”
마르칼이 너스레를 떨다 말고 숨을 들이켰다.
“네크로폴리스까지 오실 필요 없습니다.”
어느새 고요하게 내려앉은 그림자가 나직이 고개를 털었다.
“타세요. 산시아. 판가우로 바로 갈 테니.”
백발이 성성한 사내가 유해룡 위에서 웃고 있었다. 청년의 얼굴을 간직했지만, 범접할 수 없는 관록이 여실히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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