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234
234(完)
띠- 띠-
삐빅.
『플레이 시간: 2,908,416』
『플레이 시간: 1,025,328』
『플레이 시간: 683,352』
『플레이 시간: 280,728』
『플레이 시간: 350,760』
멍하니 모니터를 응시하던 인영이 낮게 탄식했다.
“아.”
『업적 달성률: 489/490(99.7%)』
익숙한 정취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이는 곧장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터져 나오는 고음의 비명.
“이, 이··· 시발 놈 새끼야!!”
거울에선 갸름한 인상의 여자가 울부짖고 있었다.
///
쪼록.
원랜 콜드브루만 시키는 데, 프라푸치노가 먹고 싶었다. 혈관에 당분이 주입되니 곤두섰던 기분이 조금이나마 가라앉는다.
‘아씨, 뒤통수 가려워 죽겠네.’
여기저기서 시선이 느껴진다. 저쪽이었다면 뭘 꼬나보냐며 엄포를 놓았겠지만, 벌써 유치장 신세를 지긴 싫었다.
아무리 견고한 지하감옥이라도 탈출할 자신은 있었지만, 여긴 CCTV가 사방에 깔렸다.
빈 앞자리만 노려보고 있는데, 돌연 핸드폰이 울린다. 노골적으로 번호를 달라는 에어드롭이었다. 벌써 3번째다.
‘얘미, 시발. 남정네였을 땐 알림창에 김미영 팀장 문자밖에 안 오더니만.’
욕지기를 삼킨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대각선 건너편에 앉은 남자다. 중지를 들어 보이자 도리어 입가가 풀리는 게 아닌가.
‘미친놈.’
그나저나 이 새낀 왜 이렇게 안 와. 슬쩍 계단 쪽으로 고개를 내밀어보니 연락한 놈이 얼빵하게 기웃대고 있었다.
“야, 이지한!”
카랑카랑한 목청에 지한이 화들짝 놀랐다. 주변의 시선이 온통 쏟아지는 통에 그녀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여기, 여기야···.”
손짓까지 하고 나서야 지한이 주춤대며 다가왔다. 착석한 그는 눈앞에 앉은 상대를 훑어내렸다.
“캬아, 요즘 태국 폼 미쳤다.”
손가락으로 가위 자르는 시늉을 해 보이자 여인이 중얼거렸다.
“뒤질래?”
“아니, 리얼 감쪽같은데? 너 디코방에 일주일 동안 안 보이더니 그새 방콕 갔다 왔냐?”
“아니라고. 시발아.”
너털웃음을 터뜨린 지한은 턱을 매만지며 감탄했다.
“푸켓도 나쁘지 않지. 거기도 좀 친다는데.”
정강이를 걷어차고 나서야 나불대는 입에 침묵이 걸렸다.
“그래서, 뭐 사촌 동생이나 몰카, 이런 거 아니고 진짜 기혁이 맞는 거지?”
기혁이 인상을 구겼다.
“그래. 썅놈아. 덕숭고등학교 동창. 2학년 때 야자 째고 담 넘으려다 바지 찢어진 채로 돌아다니던 새끼 때문에 양봉동 파출소까지 끌려가서 쉴드친···”
다소 상세한 배경 설명에 지한은 황급히 얼버무렸다.
“어어, 거기까지! 내 부라더 천기혁이가 맞네. 어쩐지 와꾸는 다 갈아엎었어도 싸가지 뒤진 눈꼬리가 똑같더라고.”
마지막까지 주먹을 부르는 부언이었지만, 뒤틀린 성미를 풀기엔 역시 중세의 싸구려 술보다도 우월한 게 현대 사회의 당분 음료였다.
“얼른 썰 좀 풀어봐. 이 형님이 오늘 전공 3개 있는데, 자체 휴강 때리고 와주셨으니까.”
한숨을 흘린 기혁은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생생한 체험담이 끝났을 즈음, 탁자엔 빈 컵만 다섯 잔이 굴러다녔다.
“···그래서. 유클 엔딩을 보고 돌아왔더니 아직 여캐인 상태다?”
“어.”
지한이 진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이름도 천기순으로 개명해야 하나? 야, 근데 트젠도 주민번호 앞자리 2로··· 악!”
“너, 시발. 내 이야기 들은 건 맞아?”
정강이를 매만진 지한이 울상을 지었다.
“뭐가 문젠데! 개새끼야! 게임 폐인 새끼 데려다 엔터 회사들이 절하고 모셔갈 와꾸로 에토전생해줬는데! 팔자 다 폈구만!”
“하··· 이지한, 이 새끼. 네가 날 조커로 만드는구나.”
문득 커피를 홀짝이던 지한이 물었다.
“근데, 너. 처음 연락 돌린 게 나냐?”
“어.”
“너희 아버지한테 말씀은 드렸어?”
기혁은 우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우리 아부지가 알면 그날이 내 장례식일걸.”
“으음··· 힘내고.”
깊게 탄식한 기혁이 테이블에 엎드렸다. 긴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늘어진다.
“막상 돌아왔더니, 앞으로 뭐 먹고 살지도 존나 막막해. 분명 앞주머니에 금화도 두둑이 챙겼던 것 같은데, 몸뚱이만 덜렁 왔다니까.”
구레나룻을 긁적이던 지한이 손가락을 튕겼다.
“너, 인방해라.”
“뭐?”
“인터넷 방송 말이야.”
눈가에 묘한 열기가 이글거리는 지한과 달리, 기혁은 시큰둥했다.
“그 레드오션을 뭐하러? 내가 입을 잘 터는 것도 아니고, 게임 취향도 하드코어 중세 판타지만 골라 먹는 존나 힙스터인데.”
답답했는지, 지한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마, 인마! 지금 네 쌍판떼기면 레드오션이 아니라 걍 콜롬버스, 코르테스, 피사로 줄 세워놓고 뺨 싸다구 갈길 급이라고! 그쪽 문명 수준이 중세면 그깟 금화 몇 푼 챙겨봤자 순도도 낮아서 얼마 안 해! 컴퓨터 속에 금광이 있는데 그걸 못 캐냐?”
열변에 도리어 기혁은 의기소침하게 답했다.
“아니··· 이 얼굴로 유명세가 팔리면 또 문제인 게. 난 수술 정도가 아니야. 그냥, 완전히 다른 몸이라고. 그랬다가 괜히 신상 따이고 비밀 연구소에 실험체로 끌려갈 수도 있잖아.”
아무래도 비약이 지나친 게 아닌가 싶었지만, 한눈에 봐도 눈앞의 친우는 정서적으로 몰린 듯한 인상을 풍겼다.
고민하던 지한이 히죽 웃었다.
“그럼 버츄얼로 시작해봐. 그게 요즘 대세거든.”
버츄얼 유튜버, 이른바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화상 아바타를 내세워 송출하는 인터넷 방송인.
수면 아래 기거하는 종일수록 서로를 적대시하는 경향이 짙다. 괜히 동족 혐오라는 용어가 존재하는 게 아니다. 매니악한 게임만 즐겨하는 주제, 기혁이 경멸 어린 눈빛을 보냈다.
“여태껏 이 얼굴 가지고 떠들던 놈이. 그렇게 드리프트를 꺾으면 설득력이 떨어지지 않아?”
“아니, 들어봐. 이계에서 현대로 돌아온 전직 암살자 출신! 컨셉은 신선해! 일단 네 발성은 완벽하단 말이야.”
정녕 쇠퇴하던 건 저쪽 세계뿐만 아니라, 이쪽도 마찬가지였던가? 잠시나마 들여다본 현대 사회의 심연에 두통이 밀려온다.
“어차피 청자들은 목소리랑 리액션만 본다고. 기믹은 그걸로 잡고, 판떼기만 대충 그럴싸하게 뽑잖아? 못해도 1년 안에 하꼬 탈출은 씹가능이라니깐. 내가 그쪽 업계 전문이야.”
재차 당분을 채우려는데 격한 진동에 커피잔이 뒤집혔다. 한창 신나게 떠들던 지한도 표정이 굳었다.
“어, 뭐야. 지진인가? 경보도 안 왔는ㄷ···”
콰앙!!
폭발이 들이치기 전, 본능적으로 기혁이 몸을 날렸다. 암살자의 우월한 기동력은 전혀 녹슬지 않았다. 사뿐히 지한을 내려놓은 기혁은 눈자위를 부릅떴다.
‘유황 냄새.’
카페 2층은 반절 가까이가 통째로 뜯겨나갔다. 곳곳에서 허덕이는 신음이 들리는 와중에, 바깥에서도 비명이 들린다.
“토드 셰우드···! 이 개새끼.”
어째 뒤가 켕길 여지를 팍팍 풍기더니, 이런 식으로 엿을 먹일 줄이야. 발밑의 그림자가 꿈틀거리더니 예리한 단검이 손아귀에 잡혔다.
“학비군 이제 1년 남았는데.”
이 상황에서 태평하게 헛소리나 지껄이는 걸 보니 다른 능력치는 몰라도 멘탈 수치만은 쓸만해 보인다.
“지한. 너 유클 얼마나 했지.”
콰앙!!
꽃게리아 쪽에서 솟구치는 불기둥에 지한이 기겁했다.
“뭐?”
“유어 크로니클 플탐이 어떻게 되냐고!”
“미, 미친놈, 아니. 년인가? 아무튼! 그게 지금 뭔 상관이야!”
바지춤을 뒤적이니 역시 카드는 멀쩡히 들어 있었다. 입에 단검을 문 라노가 싸늘히 읊조렸다.
“살고 싶으면 빨리 말해. 핏 핀드들은 최소 레벨 80부터야. 너까지 신경 쓰면서 빠져나갈 여유가 없어.”
서슬 퍼런 눈빛에 지한이 어물쩍 답했다.
“사, 사천팔백 시간이었나.”
“대학교 동아리는 복싱부였지.”
“···후배한테 찝쩍대다 까여서 한 달 만에 나왔는데.”
“수능 때 너희 어머니가 절 가셨었고.”
“거기 지금 불나서 없어졌다더라.”
육체 적성 준수. 의지력 높음. 어차피 수중에 선택지가 많진 않았지만, 라노는 카드를 추려냈다.
“네가 수도승 해.”
지한은 엉겁결에 카드를 받아들었다. 곧 그의 육신에 황금색 광채가 흘렀다.
“성전사랑 주술사는··· 차차 찾아보는 거로 하고.”
시가지가 화염에 휩싸였다. 사방에서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리고, 산발적으로 전투기들의 굉음이 천둥처럼 고막을 흔들었다.
역시 핸드폰 신호는 잡히지 않는다.
“일단 서울은 망했어. 관문이 열렸으니 곧 장막이 깔릴 거야. 못해도 수도권은 벗어나야 해.”
몸을 일으킨 지한이 지껄였다.
“인방하기엔 글러 먹었네.”
라노가 눈동자를 번뜩였다.
“일단 너희 집이 여기서 더 가까우니 거기부터 들리고. 위례대병원 들려서 강변 따라 빠진다. 질문 있어?”
“너··· 원래 이런 캐릭터였나?”
라노는 코웃음 치며 단검을 쥐었다.
“이제부터 잘 따라와. 지금 장비가 없으니까 까딱하면 죽는다.”
어째서인지 심장이 두근거린다.
분명 세상은 개판이 되었음에도 막막하던 불안감이 개인 듯했다.
암살자와 수도승은 거침없이 악마들을 짓뭉개며 시가지를 헤쳐나갔다.
///
광활한 회토 위로 티끌 없는 창천이 쏟아져 내린다. 하늘과 땅을 가르는 경계는 아득히 지평선을 채우는 옥산.
허리춤에 자욱한 안개를 드리운 거인들의 자태는 뭇 피조물들의 범접을 허용치 않겠다는 듯 엄포를 놓는 것만 같았다.
덜컹대는 달구지 위에서 하염없이 절경을 눈에 담기 바쁘던 행객이 입을 열었다.
“어르신, 실례지만 저 산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염소를 몰던 노공이 두건을 들췄다.
“아, 탕귀톡. 중원 말론 천절만산이란 곳이오.”
흑건을 두른 청년은 빙그레 웃었다.
“실로 장엄한 위용에 걸맞는 명칭이군요.”
잠시 그의 말씨를 헤아리던 노인이 귀를 긁적였다.
“억양이 독특하구만. 중원 쪽 사람은 아닌 모양일세?”
“예. 소인은 도보道保, 라한(羅瀚)국에서 왔습니다.”
장대를 두드린 노인이 탄식했다.
“서역인이었구만. 어딘진 모르겠지만, 멀리서 왔겠고.”
그의 시선이 자연스레 동승자에게로 옮겨간다. 마찬가지로 헤진 흑건을 걸친 인영은 겉으로 봐도 기골이 장대했는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서책을 읽으며 히죽대는 게 여간 괴이했다.
【하, 하! 하. 여기도 명예에 대치되는 개념이 있군.】
비록 말은 구사하지 못해도, 활자 중독에 가까운 파멸의 기사는 기어코 문자만은 독파했다.
【협의라! 호방한 무인이 모범으로 받아들여진다니. 마음에 들어!】
“···저와 동행하는 낭인, 이서라입니다.”
책장을 넘기던 인영이 안광을 번뜩였다.
【오호, 토드! 여긴 사혼식이라는 풍습이 있다 하네! 이토록 좋은 문화가 있다니. 제국도 속히 받아들여야 맞지 않겠나?】
음흉한 미소에 토드는 애써 시선을 피했다.
“파사 쪽에 살비(薩非)국이 들어선 뒤론 비단길이 막혀서 서역인들의 왕래가 여의치 않다 들었는데. 거길 용케 넘어왔군.”
“저희는 수행자인지라. 고행은 익숙합니다.”
이역만리 떨어진 이국에서 종교적 열의를 갖고 사토를 넘어왔다니 노인도 호기심을 가졌다.
“수행이라 함은. 어느 성역을 방문하려기에 그리 먼 길을 가로지른 거요?”
도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듣기론 타화자재천왕의 유해를 봉헌한 묘역이 인근에 있다고 하더군요.”
천조가 몇 차례고 바뀌는 동안 누구도 찾지 않은 이름이다. 언급이라도 했다간 즉각 강호에서 살수가 붙고, 금의문이 주시한다.
그 무게를 안다면 아무리 출중한 객이라도 쉽사리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다.
노인의 낯빛이 급격히 창백해졌다. 이내 그가 딸꾹질했다.
“안심하세요.”
진녹빛 눈동자가 일렁인다.
“전 어르신의 신체엔 일절 관심이 없으니.”
이래서 괜한 오지랖은 화를 부른다던가. 노인이 눈을 질끈 감았다.
덜덜 떠는 노인을 흘겨보던 토드가 잠자코 조소를 삼켰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너무 재밌단 말이야.’
어째 네크로폴리스를 등진 뒤로 고삐가 풀린 기분이다. 여기까지 자신의 명성이 미쳤을 리 없으니 어떠한 제약도 존재하지 않았다.
가여운 노약자를 우롱한 데 천지신명이 분개한 탓일까.
바위틈 사이로 칼을 빼 든 사내들이 나섰다.
“멈춰.”
확실히 험준한 외곽지여서 그런지 몰라도, 도적치곤 기세가 제법 예리하다. 대략 급을 예상해보자면 삼류에 조금 못 미치는 정도려나.
‘도적 주제 이 정도 수준이라니. 역시 DLC 지역은 인플레가 끼는 게 국룰이지.’
자꾸만 입가가 솟구친다.
토드는 공손히 포권을 취하며 나름의 예를 차렸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그러자 도적들은 해괴한 놈을 보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저건 또 뭔 인사법이라냐?”
“글쎄요. 회교도 놈들은 아닌 것 같은데.”
토착민의 생소한 반응에 토드가 혀를 찼다.
‘아차. 포권은 청대에나 통용된 예절이랬나. 시기상으로 치면 여긴 한참 전이잖아.’
어쨌거나 회화를 늘릴 기회였기에 토드는 웃는 낯으로 상대하려 했다.
“저는 라한국에서 온 하와도(夏蛙到) 도보···”
【으랏차-!!】
호쾌한 기합과 더불어 도적의 머리가 지면을 구른다.
‘안돼!! 내 회화 교보재가!’
울상을 지은 토드가 머리를 집어 들었지만, 깔끔하게 도려낸 도적은 눈을 부라린 채 멎어 있었다.
【나그네들을 약탈하려는 악적들에겐 문답 무용! 그것이 협의요, 기사도 정신에도 부합되는 바일 터!】
팔 척 같은 대검을 거침없이 휘두르는 모습에 도적들도 당황한 눈치였다.
“고, 고수다! 강검을 쓰는 것 같으니, 거리를 벌리고 합격을···!”
그러나 흑의인은 난생처음 보는 초식을 구가했다. 베기 위주의 강격에만 치중된 것처럼 보여도, 능수능란한 찌르기에 호되게 당하는가 하면, 검날을 걸친 채 흘려보내는 유검을, 변화무쌍한 검로가 순식간에 몸뚱이가 반 토막 난다.
“쏴! 그냥 쏴! 살려서 팔아먹을 만한 놈이 아냐!”
절규에 가까운 비명에 숨어있던 사수들이 연노를 겨냥했다. 기겁한 토드는 황급히 달구지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콰직!!
“이크.”
가느다란 작살처럼 보이는데 파괴력이 제법 살벌하다. 발 빠르게 숨은 토드와 달리, 불운하게도 노인은 가래 끓는 소리를 흘리다 바닥에 떨어졌다.
타타타탕!
【하, 하! 하. 간지럽군!】
파멸의 기사야 가볍게 웃어넘길 정도였지만 달구지에 숨은 토드는 점점 부서지는 널빤지에 위협을 느꼈다.
게다가 매복한 숫자가 제법 많았다. 이스라도 도적들의 날랜 움직임이 익숙지 않았는지, 베어 넘기는 속도가 꽤 둔해졌다.
‘이거 이러다 부서지겠는데.’
결국 온전한 시신을 향해 시선이 끌린다. 토드는 정중히 합장하며 읊조렸다.
“놀려서 죄송합니다. 영감님. 정말 관심은 없었는데, 상황이 어쩔 수 없네요.”
대신 영혼은 확실하게 극락정토로 보내드릴 테니 염려 마시길.
“내가 그대를 부르노라.”
사이한 진언이 축 늘어진 노구를 일으킨다. 귀기 어린 눈동자를 희번덕대던 시체가 으르렁거렸다.
【크으으···!】
사지를 뒤튼 망자가 곧장 사수들을 향해 뛰어갔다. 그를 발견한 도적들이 방아쇠를 당겼지만, 망자는 벌어진 내장을 덜렁거리며 달려갔다.
억척스러운 손아귀에 붙들린 도적은 애처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갸아악!!”
산 채로 동료가 뜯어먹히는 걸 목격한 도적이 펄쩍 뛰었다.
“시, 실혼인(失魂人)이다! 저거, 저거! 송장이야!”
송장이라는 말에 다른 놈의 표정은 사색이 되었다.
“그럴 리가. 혈교의 명맥이 끊긴 지가 언젠데.”
“당신은 뭘 좀 아는 눈치네요.”
돌연 바로 옆에서 사령술사가 불쑥 고개를 내민다. 외마디 비명을 지른 도적이 허둥지둥 허리춤에 찬 도를 뽑으려 들었다.
“당신이 보-입-니-다-.”
토드를 마주 본 동공이 확장된다.
미력한 존재는 잠시나마 사령술사의 의식계를 엿보았다. 다리가 풀린 도적은 입가에서 거품을 일으키며 벌벌 떨었다.
자세를 굽힌 토드는 그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무엇을 알고 있죠?”
뇌수를 따라 새어든 마력이 조직에 파고든다. 도적의 머릿속에 빙의한 토드는 잠재의식을 낱낱이 후벼팠다.
···그리고 알아낸 지식은 기대 이상이었다.
‘한매망량(寒梅魍魎), 묵혈수라귀(墨血修羅鬼), 황금봉제강(黃金封制殭), 탈백환혼(奪魄還魂), 고루염매(蠱髏魘魅).’
테크 트리에 없는 망자들이다.
비록 도적이 알고 있는 내용은 구전으로나마 전해지는 단편적인 수준에 그쳤지만, 알에 갇혀있던 토드의 세계관을 깨트리는 격변이었다.
‘일부 생존한 흑색 학파의 지파가 동녘까지 흘러들어왔었어.’
이들은 사령지기라 불리는 힘을 통해 온갖 불길한 대법을 부렸다.
정황상 오래전 절멸한 것으로 보였지만, 중세풍 세계관과 달리 풍토에 맞게 변형된 하수인이나 토착 지역의 기술과 결부되어 독창적으로 발달된 주문이 엿보였다.
“흐흐. 흐. 흣.”
어느새 떼거지로 불어난 망자들이 나머지 잔당을 먹어치웠다. 장검을 거둔 이스라가 흡족하게 웃었다.
【하, 하! 하. 이 정도는 독서 이후의 몸풀기로 적당하군!】
토드는 씨익 웃으며 속삭였다.
“역시 여기 오길 잘했어요.”
【음!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네! 고작 황야의 도적 나부랭이들이 이 정도라면, 얼마나 뛰어난 강자들이 도처에 널려있단 말인가!】
어떻게 금제에 대해서도 대략적으로나마 아는가 싶었는데, 이들은 해체된 마교의 잔당들이었다. 이쪽 역시 천자가 강호에 입김을 불어 넣으면서 불가해하던 신비들이 역사 속으로 묻히는 흐름이었다.
‘이토록 세상은 흥미로운 컨텐츠로 가득한데.’
토드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불쑥 파멸의 기사가 팔짱을 끼우더니, 나직한 어조로 속삭였다.
【달구지를 끌 하수인들도 많아졌으니, 자네는 본인과 이곳의 사혼식 문화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는 게 어떻겠나.】
“어, 어···.”
오갈 데 잃은 눈동자가 허공에서 흔들린다.
사령술사는 두려워졌다.
-完-
후기
저는 네크로맨서라는 소재를 참 좋아합니다.
소설, 영화, 게임을 포함해 어지간한 매체는 거의 섭렵했다고 자부합니다.
사실 웹소설 쪽에서도 네크로맨서가 그리 참신한 느낌은 아니죠.
희한하게도 제가 좋아하는 중세풍 세계관에 어우러진 작품은 찾아보기가 어렵더군요.
그래서 제가 직접 써봤습니다.
562, 23.
총 조회수, 선작입니다.
리메이크를 거치기 전 최초 연재분의 기록인데요.
처참하게 망했습니다.
순수악 성향 주인공은 독자분들이 이입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왜 주인공이 저렇게 행동하는지 납득시킬 이유가 필요하지요.
그래서 주인공의 동기나 방향성을 아예 갈아치웠고, 네크로맨시가 금기를 넘나드는 소재인만큼 독자분들이 눈쌀 찌푸리지 않게끔 만들 장치를 고안해냈습니다.
그 결과 여러분이 토드를 좋아해주셔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초반부 삽화가 잦았던 데서 보시다시피, 저는 대략적인 흐름을 구상해놓고 계획해가며 줄거리를 잇는 성향인데 일일연재가 누적될수록 체력이 발목을 잡더군요.
상시 패시브로 탑재한 지각, 랜덤연재, 잦은오탈자, 내용중복… 그야말로 악몽이었습니다.
이쪽 업계의 특성상 차기작을 섣불리 장담하기 어렵지만, 언젠가 다음 글을 쓴다면… 그땐 비축분 넉넉하게 쟁여두고 오겠습니다…
제가 연재하면서 유일하게 자신할만한 구석이 있다면, 한 분의 독자분도 차단하거나 댓글을 삭제한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고수들의 살초가 오가는 고무림 댓글에서 이토록 좋은 말들만 해주시다니… 통으로 일주일 날려먹었을 땐 욕플도 각오했는데, 격려를 해주시더라고요… 정말 내팽개치고 도망갈까 싶었던 순간도 많았지만, 그때마다 덧글을 되뇌며 의지를 다졌습니다.
리메이크 전때도 봐주셨던 탐험가분들,
5차례 거절당한 소설에 계약 제의해주신 박 PD님,
불규칙한 연재주기 동안에도 꾸준히 자리 지켜주신 일천 결사대분들,
그리고 책갈피의 마지막까지 함께해주신 여러분.
여러분의 성원 덕분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마음같아선 지금 원기옥도 쓸 수 있을 것만 같네요.
불초 쪼렙글쟁이… 빌어먹게 신세 많이 졌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