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 shipping lord RAW novel - Chapter (30)
30화 – 키코를 막아라 (3)
조선소 일이 얼마나 힘든가!
여름에는 바닷바람까지 짜증 날 정도로 더위와 싸워가며 용접질을 해야 하고, 겨울엔 바닷바람에 쌍욕을 날릴 정도로 추운데도 족장 쳐가며 일해야 한다.
그렇게 힘들게 돈을 버는데! 은행 놈들이 서류 몇 장 따위로 날름 빼먹으려고 해? 어림없지!
우리 회삿돈 뺏어 먹으려는 마구니를 물리치는 방법은 적금이었다. 그렇게 50억짜리 대출을 위해 회사는 월 천만원짜리, 나는 월 백만원짜리 적금을 들었다.
알고도 당한다는 끼워팔기. 그래도 키코가 아니라서 천만다행이다.
“아들! 아니, 넌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야?”
양복쟁이 마구니 두 마리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물러나자, 예상대로 어머니의 추궁이 강하게 밀어닥쳤다.
마구니도 물리쳤는데, 어머니의 추궁이야 껌이지. 아들 말 한마디에 150억이나 빌려주시는 분 아닌가! 그래도 안 된다 싶으면 머릿속에 손주 안고 있는 모습 그려주면 된다.
“아들!”
“아, 네. 제가 너무 주제넘었네요. 반성 좀 하느라.”
“그래, 뭐. 리스크 생각하는 건 좋아. 근데 진짜 리스크가 뭔지 알아? 바로 환율이야. 우리가 백날 뼈 빠지게 배 만들어 팔아도 환율 살짝 어그러지면 헛고생하는 거야.”
“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키코는 너무 위험해요.”
“그래서 그 비싼 수수료 물면서 선물환 계약하자는 거야? 선물환 좋지. 근데 수수료가 얼만지나 알고 그러는 거야?”
“2%로 알고 있습니다.”
“알긴 하네. 적금 이자 2% 생각하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뱃값의 2%면 그게 아니란 말이야. 배가 한두 척이면 몰라. 수수료만 몇십억씩 날아가는 거야.”
“선물환이 비용부담이 있어도, 환헤지로는 가장 확실하죠.”
“키코는 수수료 없이 환헤지할 수 있다잖아! 그걸 마다하는 이유를 모르겠네, 정말.”
어머니가 많이 아쉬웠던 모양이다. 이렇게 추궁할 줄 생각도 못 했네.
다시 말하지만, 키코는 그 정도로 사람을 혹하게 만든 악마의 속삭임이다.
환율이 설정값 밑으로 떨어지면 프리미엄 약간 내면 끝이고, 위로 올라갈 일은 ‘절대’ 없을 테고.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그 절대 없을 일이 실제로 일어났고.
이쯤에서 미친 소리 한 번 해야겠다.
“전무님, 아니, 어머니. 당분간 환헤지 할 필요 없습니다. 원화 가치는 계속 떨어집니다.”
“뭐? 뭐라고? 헤지를 하지 말라고? 내가 지금 뭘 잘못 들은 거니?”
“아니요. 맞게 들으셨습니다. 케이프사이즈가 8천만 달러죠? 지금이야 740억이지만, 2년 뒤에 인도할 때는 1100억이 돼 있을 겁니다. 환율은 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아들, 너 어디 아프니? 아휴, 내 머리가 다 아프다야. 일단 알았으니까 나중에 얘기해.”
어디 아프냐는 소리, 몇 번을 듣는지 모르겠네. 사지멀쩡 신체건강이지만, 당분간 어디 아프냔 소리를 계속 들어야겠어.
***
큰 착각이었다.
주민은행에 키코 가입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악몽이 끝났다고 생각한 것 말이다.
은행이 주민은행 하나뿐이 아니었어. 이 몰려드는 마구니들을 어찌 다 물리쳐야 하나.
오는 은행마다 키코 가입 안 하겠다고 혼신의 연기를 펼쳐야 할 생각을 하니, 오장육부 깊숙한 곳에서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
발연기라도 해야 해. 지금 키코 가입하면 그라목손 원샷하는 일이야. 갈증 난다고 무턱대고 마시면 입이 타들어 가고 폐가 썩어가는 고통을 느끼게 되겠지.
오는 족족 막자.
“아니! 이 좋은 환헤지 상품을 왜 마다하십니까? 아, 뭐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는데, 그래도 서로 오고 가는 정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럼 뭐 하나 물어보겠습니다. 제로 코스트라고 했는데, 옵션 평가액이 마이너스가 될 수 있다는 건 무슨 의미입니까?”
“아, 그건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이게 구조가 복잡해서 말씀드려도 이해 못 하실 거예요. 그냥 금융 기법상 플러스, 마이너스 표기될 수 있다는 것이지, 실제 손실이 난다는 건 아닙니다. 전혀 걱정하실 게 없어요.”
“아, 그렇군요. 그럼 적금으로 하겠습니다.”
“제가 지금 적금 하나 팔자고 이러는 게 아닙니다. 정말 유일조선 생각해서 말씀드리는 상품입니다. 무조건 이익을 본다니까요. 진짜 막말로 우리 은행에서 그냥 돈 드리는 겁니다.”
“그럼 제 명의 적금도 하나 더 추가하겠습니다.”
“제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는 겁니까?”
“그것도 성에 안 차십니까? 그럼 직원들한테도 적극 권해 보겠습니다.”
적금이 자꾸 늘어났다. 내 월급도 고스란히 은행에 보내게 생겼다. 지들도 어떤 구조인지 모르면서 우리한테 팔겠다? 구황작물로 연명한들, 키코는 가입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세상 일이 다짐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세 번째로 찾아온 은행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물리치고 났더니, 강한 반격이 들어왔다.
“아들! 달러 벌어들이는 회사가 헤지를 안 하겠다고 하니, 어쩌자고 이러는 거야? 맡겨달라고 해서 아무 말 안 하고 있었더니, 점점 가관이네?”
회사 전무로 오자마자 나 때문에 바람 잘 날 없는 상황에 처한 어머니가 결국 화를 냈다.
아무리 아들 사랑이 지극해도, 말도 안 되는 짓을 계속하는 걸 마냥 좋게 지켜볼 수 없었을 테지.
그것도 그렇지만, 은행의 압박이 점점 거세지고 있는 것도 마음을 초조하게 했을 것이다. 전화는 기본이고, 매일 같이 이메일 폭탄을 날리며 압박을 가해 왔다.
유명 투자은행들을 거론하면서 달러당 환율이 1000원을 ‘절대’ 넘지 않을 것임을 궁서체, 볼딕체로 강조한 그 무서운 이메일. 키코에 당장 가입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공포심을 안겨주는 그 이메일 말이다.
아주 미친놈들이지. 올해에도 원화 강세가 계속되니까 염려 말고 키코 가입하라는 행운의 편지나 보내고 말이야. 그러면서 새해 복 많이 받으래. 수르스트뢰밍 같은 놈들.
저승사자 같았던 이메일에, 은행 직원의 끼워팔기에, 키코에 가입한 천여개 업체들은 직접적으로만 5조원 넘는 피해를 봤다. 그중에서 우리 회사가 제일 큰 피해를…….
“아들! 입이 있으면 얘기를 해 봐. 그래서 환헤지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 선주들한테 원화로 결제하자고 할 거야?”
환헤지는 모든 수출기업의 고민일 수밖에 없다. 특히 조선처럼 2년에 걸쳐 대금을 받는 경우면 더더욱.
내가 이 자리, 이 상황에서 할 얘기는 딱 하나뿐이다.
나중에 돈 벌면 금융전문가들 대거 영입할 테니까, 지금은 환헤지하지 말고 넘어가시죠. 그렇게 얘기하면 어머니는 하나뿐인 아들 잘 키웠다고 대성통곡하실 것이다.
이미 충분히 아픈 아들이 됐는데 뭐. 그냥 지르자.
“아, 네. 제가 저번에 말씀드렸다시피, 당분간 환헤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1원만 왔다 갔다 해도 수십, 수백억이야!”
평소와 달리 몹시 흥분한 어머니를 진정시키기 위해 주머니에서 USB 하나 꺼냈다. 그렇다. 난 준비된 남자다.
은행놈들만 유명 투자은행 들먹이며 행운의 편지 보내는 거 아니다. 니들이 바클레이즈를 거론한다면, 난 JP모건이다.
“이건 또 뭐니?”
“제가 공부한 걸 보기 편하게 정리한 건데요. 우선 이건 JP모건에서 발표한 올해 환율 전망치입니다. 결론만 보시면, JP모건이 어떻게 전망했습니까? 환율이 1000원 넘을 것이라고 예상했어요.”
“아들.”
나지막한 목소리를 발산한 어머니에게서 이거 안 먹혔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내 말이 맞다니까요!
“네가 JP모건에 꽂혔나 본데, 다른 전망치도 볼까? 원화가 강세를 보일 것이란 전망이 더 많아.”
“다수결로 볼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보고서가 더 논리적인지를 봐야죠.”
“그래서 지금 2년째 900원 초반대로 유지되는 환율이 갑자기 1000원을 넘을 것이란 전망이 그렇게 논리적이니?”
“JP모건의 환율전망에는 확실한 근거가 있습니다. 글로벌 해운 시장에 버블 경고를 내린다고 하지 않습니까? 선박 수출이 줄어들면 당연히 환율이 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보고서는 그저 보고서일 뿐이야. 누구 말이 맞는지 모르겠지? 그렇기 때문에 헤지를 해야 한다는 거야. 이제 좀 알겠어?”
어머니 짬밥도 사모님 소리 들으며 부티크에서 VIP카드 긁으며 쌓은 가라짬밥이 아니다. 돈 냄새 기가 막히게 맡는 유전자에, 수십 년 회사 생활로 다져진 재무 근육까지.
이런 사람 앞에서 미국이 휘청거리고, 우리나라도 뒈질 것 같으니까 죽일 정부 놈들이 고환율 정책 펼치게 될 것이라고 얘기한들, 당연히 안 믿겠지. 갑갑한 상황이네.
세계 경제 전망 썰이 안 먹히면 키코 문제를 파고들 수밖에.
“전무님. 저도 헤지의 중요성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키코는 절대 대안이 될 수 없습니다. 차라리 헤지를 안 하는 것이 나을 정도라서 말씀드린 겁니다.”
“대안이 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대안이 되지! 이만한 상품이 어디 있다고 그래.”
“이거 엄청 위험한 것이라니까요. 키코 구성을 보면, 대부분이 하단은 900원 초반대, 상단은 900원 후반대거나 1000원 정도이잖아요? 문제는 상단이에요. JP모건 전망대로 환율이 1000원을 넘어서면-”
“그래, 네 말도 알겠어. 만에 하나 환율이 상단 넘어서 버리면 우리가 큰 손실을 입는 구조 아니니?”
“네네, 맞습니다! 우리가 IMF 때는 그렇게 될 줄 알고 있었던 것 아니지 않습니까?”
“환율이 1000원을 넘어서지도 않겠지만, 그렇다고 한들 그것만 믿고 헤지를 안 해? 무슨 사업을 그렇게 얼렁뚱땅하려는 것이야!”
“얼렁뚱땅은 키코 팔겠다는 은행이 하고 있죠. 상품 구조가 그렇게 복잡한데,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준 사람 있었습니까? 우리한테 이익이니까 무조건 가입하라는 소리뿐이었습니다. 저들도 이해 못 하는 걸 우리한테 팔겠다? 당연히 말이 안 되죠.”
대화가 엎치락뒤치락, 출혈만 계속된다. 승기를 잡았다 싶으면 뒤집기에 나서는 어머니. 그 뜨거운 모성애를 이용하면 가장 쉽게 설득될 줄 알았는데, 초반부터 끝판왕 만나는 느낌이네.
“은행 놈들이 끼워팔기에 환장해서 그러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키코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야. 선물환은 안 돼. 자금 사정을 생각해야지! 들어갈 돈은 잔뜩인데, 2%씩 갖다 바치란 말이야? 지금은 한 푼이라도 줄여야 할 때야. 알겠어?”
“그럼 제 말 믿고 헤지 없이 가보시죠. 환율은 무조건 오릅니다.”
“또 그 정신 나간 소리!”
내 진심을 몰라주다니, 슬프다 슬퍼.
이 서글픈 상황에서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단기필마로 돌파가 안 되면 주변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 세상 섭리 아니던가! 김태우 본부장 코인을 빨 수밖에 없네.
“어머니. 그러면 김태우 본부장님 의견을 들어보죠. 본부장님이 이쪽 금융전문가이시기도 하니까, 해법을 제시해 주지 않겠습니까? 하나뿐인 아들의 부탁입니다.”
어머니가 눈을 흘기며 쳐다봤다. 저 표정은 등짝에 스매싱 날리기 직전의 표정인데? 등을 내주면 안 된다.
“넌 이럴 때만 엄마 타령이니?”
“어머니,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본부장님이 키코 가입해야 한다고 하면 저도 더 이상 고집 안 부리겠습니다.”
“아휴, 내가 못 살아. 됐고, 임원 회의에 올리는 걸로 해. 어디 한 번 얘기들 쭈욱 들어보자고.”
어머니의 재가가 떨어졌다. 내 등짝도 안식을 찾았다.
김태우 본부장. 안 그래도 복잡해 미쳐버릴 것 같은 해양금융 분야에서 이름 좀 알린 사람의 위력이 이 정도다. 이럴 때 쓸 속담이 하나 있지. 보기 좋은 김태우 코인이 먹기도 좋다.
그렇게 키코에 대한 내 도발은 판을 키워 버렸다.
이제 임원들이 이 바닥 핫한 패션인 ‘유일조선’이 오바로크된 작업 점퍼를 입은 채로 한자리에 모여 ‘역시 커피는 믹스지’ 외칠 회의만 열리길 기다리면 된다.
아니, 그 전에 김 본부장 찾아가서 확실하게 약을 쳐 놔야지. 그 사람이 애먼 소리 해버리면, 유일조선을 세계 1위로 만들고 자연사하겠다는 내 거룩한 꿈은 그저 꿈이 될 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