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aristocrat RAW novel - Chapter (559)
00559 대격변? =========================================================================
남기철은 세종시 WCO 관사에 살고 있다. 초대 의장으로 선출된 후 가족을 데리고 서울에서 내려왔다. 도시는 조용하고 깨끗했으며, 문화 시설이 부족하긴 해도 서울까지 20분 거리라서 크게 불편함은 못 느낀다.
국장 시절, 유지웅의 측근으로 소문났을 때에는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애를 먹었다. 직장 상사, 선후배 가리지 않고 눈도장을 찍으려고 난리도 아니었다. 신기하게도 WCO 의장으로 선출되자 그런 움직임은 싹 사라졌다.
대단한 권력을 가질 것으로 예상되던 때에는 온갖 어중이떠중이들이 다 몰려들었는데, 막상 대단한 권력을 직접 손에 쥐자 더 이상 접근하지 못했다. 그것이 바로 권력의 속성이다.
“오후 2시부터 회원국 대회의가 있습니다. 지금 각국 대사들이 먼저 회의실에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의장님, 미국에 긴급 지급한 그린 결정체 상환은 어떻게 합니까? 3차 상환을 이미 세 번이나 어겼습니다.”
“일본 대사가 면담을 위해 나흘째 기다리는 중입니다. 어떻게 한 번 시간을 내달라고 애걸을 하고 있습니다.”
“제3세계 국가들이 결정체 정제 연료 계획이 어떻게 되는지 대략적인 그림이라도 미리 알고 싶어 합니다.”
“의장님.”
“의장님.”
“선배님!”
남기철은 퀭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후배이자 오른팔인 박주혁 비서실장이 안쓰럽게 쳐다봤다. 그가 뭔가를 내밀어서 겨우 눈을 뜨고 보니 홍삼액이다.
“이거 드시고 기운을 내시죠. 일정이 산더미처럼 널려 있습니다.”
“고, 고마워.”
입맛이 없지만 남기철은 억지로 홍삼액을 뜯어 마셨다. 위약 효과인지 모르지만 개미 눈물만큼 기운이 날 것 같다. 그는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자, 그럼 일을 해야지!”
요즘 들어서는 한 시간 간격으로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지?’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그만큼 어마어마한 격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1조 달러어치 그린 결정체가 날아가고, 옐로 몹이 극단적으로 줄어든 상황에서 WCO가 해야 할 일은 넘쳐나다 못해 터지기 직전이었다.
가입국은 물론이고 가입되지 않은 온갖 나라들이 너도 나도 다 몰려들어서 어떻게 좀 해주기를 바랐다. 그 사이에 낀 남기철은 원활한 교통정리를 위해 매일 매일 죽어났다.
‘겨우 연봉 3억 받자고 내가 이 고생을…….’
오죽하면 한때는 그런 생각까지 들었을까. 연봉 3억이 적다는 게 아니라 그만큼 요즘 죽어난다는 의미다. 물론 사임했다가는 제일 먼저 마누라가 기겁을 할 것이다. 그 다음은…….
지갑에 들어있는 다이아몬드 카드가 묵직하게 만져졌다. 이런 게 있으면 뭐해? 긁을 데도 없이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부담만 백배인데! 다이아몬드 카드 따위 백 장이 있어봐야 격무를 줄여주지는 못하는데!
“의장님. 국무총리가 뵙자고 합니다.”
“국무총리가?”
수행원들 사이에 잠시 날카로운 눈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남기철도 물론 그걸 알아봤다. 또 어깨에서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한바탕 신경전 또 하겠군.’
WCO는 아무래도 유지웅이 만든 세계 기구이다 보니 요직 인물들이 대부분 한국인이었다. 법적으로는 ‘UN과 대등한’ 국제기구지만 결정체 자원관리부의 사생아쯤으로 보는 사람들도 존재하고 있었다. 특히 정치판에 그런 인물들이 많은데, 남기철 측근들은 그런 시각을 대단히 싫어했다.
‘우리가 아직까지 공무원인 줄 아나?’
‘우리가 무슨 결정체 자원관리부 하위기관인 줄 알고 있네.’
그들의 불만을 추슬러 보면 대강 저렇다. 그래서인지 한국 정부측 사람들이 나오면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벌어진다. 남기철 입장에서는 매우 피곤한 일이다.
‘어차피 우리 맘대로 하면 되는데.’
한국 정부한테 예산 지원을 받는 것도 아니고, 그들 눈치를 볼 거 뭐 있나. 그냥 그런 거 신경 안 쓰고 WCO 본연의 임무에만 충실하면 그만인데, 그놈의 기 싸움은 왜 하는 건지 모르겠다.
“반갑습니다, 남 의장님.”
“먼 길 오느라고 고생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직통 열차를 이용하니 금방이더군요.”
남기철은 살짝 의아했다. 서울과 세종시를 연결한 제니스 사설 철로를 이용하면 금방이긴 한데, 국무총리나 되는 사람이 열차를 타고 왔다고? 어지간히 시간이 급한 모양이다.
국무총리는 노련한 공직자답게 바로 본론을 안 꺼내고 이것저것 국제 정세를 짚어나갔다. 부분적으로 공감이 되긴 했지만 남기철은 시계를 계속 흘끔거렸다. 대회의실에는 자신을 기다리는 수많은 각국 대사들이 있었다.
“제가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15분 뒤에는 총회의를 개시해야 합니다.”
“이런, 미안합니다. 공사가 다망한 분을 제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군요.”
비서실장의 눈썹이 슬쩍 치켜져 올랐다. 국무총리는 한때 남기철이 쳐다볼 수 없을 만큼 높았던 상관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입장이 완전히 바뀌었다.
온힘을 다해 예우를 지켜도 모자랄 판에 느긋하게 저리 대하고 있으니 측근 입장에서는 열불이 터진다. 그렇다고 노인네한테 대놓고 뭐라고 따지기도 그렇고.
“다름이 아니라 한때 같은 공직에 몸을 담았던 인연에 기대서 부탁을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부탁이요? 하지만 각국 형평성 때문에…….”
“그런 종류의 부탁이 아닙니다. 들어보시면 WCO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의아한 남기철에게 국무총리는 청와대 국정 회의에서 나온 결론을 이야기해주었다. 당연히 남기철은 놀랐다.
“회장님한테 그런 부탁을 하자고요?”
“의장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야…….”
무심코 말하려던 남기철은 입을 다물었다. 이 자리에서 곧이곧대로 말하는 것은 절대 안 좋다.
“한 번 우리끼리도 의논을 해보겠습니다. 그럼 이만. 정말 시간이 없어서요.”
“부탁합니다.”
국무총리가 딱히 무례하거나 한 것은 아니다. 다만 한때 까마득한 상관이었던 몸인지라 영 어색하다고 해야 할까. 남기철도 그 점은 이해했다. 측근들이 WCO가 한국 정부의 사생아로 보이는 게 싫어서 으르렁댈 뿐이다.
“의장님께서 입장하십니다.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땅. 땅. 땅.
조용했던 대회의실은 한순간에 시끌벅적하게 변했다. 각국 대사들이 모인 자리가 무슨 개발도상국 시장 한복판 같았다. 대사들도 자기 나라 생존이 걸린 문제라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팽팽하게 설전을 벌였다.
‘내가 왜 이 고생을.’
남기철은 문득 이가 갈릴 만큼 서러웠다. 최근 들어 격무에 시달리는 건 결정체 부족 현상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것은 유지웅이 블루 결정체 해외 배분을 WCO에 위탁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제니스 공격대는 일주일에 보통 블루 결정체 66개를 획득한다. 예비대가 56개, 유지웅 커플이 10개다. 유지웅 커플이 가져오는 게 왜 이렇게 적냐고? 일주일에 한 번, 그것도 반나절만 레이드해서 저만큼이나 가져온다.
아무튼 그 물량의 해외 배분을 전부 WCO에 위탁해버렸으니, 일이 어떻게 되겠는가?
각국 대사들은 그 물량이라도 어떻게든 가져가려고 배분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고 있었다. 물밑에서 온갖 로비가 오고 가고 있는 중이었다. 하물며 WCO의 최고 권력자인 남기철에게는 온갖 청탁과 로비가 우회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발전소를 가동할 연료가 없어 국민들이 어두운 밤에 두려워하며 떨고 있습니다. 부디 지원을 바랍니다.”
“아닙니다. 우리나라가 더 급합니다.”
“우리나라가 더 급해요!”
블루 결정체 하나라도 어떻게든 따내기 위해서 다들 체면을 가리지 않고 싸운다. 카메라만 없다면 서로 머리끄덩이 붙잡고 육탄전을 벌였을지도 모르겠다.
‘어떡하지?’
진짜 대사들에게는 안 된 이야기인데, 회의 내내 남기철은 딴생각만 했다. 다음 달 결정체 배분안 따위가 지금 머릿속에 들어오기나 할까?
연간 4조 3,500억 달러라니. 직접 구체적인 숫자가 거론되니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남기철도, 그리고 WCO도 세계적으로 어마어마한 결정체 부족 현상이 닥쳤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나 심각하게 모자랄 줄은 몰랐다. 이건 남기철의 예상을 넘어섰다.
‘의존도가 너무 심해.’
결정체 연료 시장만 5조 달러, 산업소재 시장이 4조 달러, 그리고 의약 및 자잘한 시장이 1조 달러. 그냥 현대 산업 문명 전부가 결정체에 의존하다 못해 업혀 있는 꼴이다. 그러니 이 사단이 났지.
그렇다고 의존도를 낮출 수도 없지 않은가? 이미 결정체 없는 세상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환경오염이 심한 화석 연료? 방사능 오염과 위험도가 엄청난 핵연료? 그런 걸 부활시키자고 말했다가는 당장 몰매를 맞을 것이다. 결정체가 없는 건 아니니까.
‘당분간만 그렇게 해주신다면 세계가 편해지는데.’
남기철은 솔깃해졌다. 진심을 털어놓고 양해를 구하면 유지웅은 들어줄지도 모른다. 그는 그런 남자다. 괜히 복잡한 명분이나 점잔을 떨 필요는 없다.
‘근데 하려고 하실까?’
이게 문제다. 귀찮아서 하려고 할까?
결정체가 부족해서 난리치는 걸 모르진 않을 텐데, 일주일에 꼴랑 하루만 레이드를 간다. 그것도 반나절 동안 사냥해서 10개 모으고는 땡이다.
남기철은 회의 내내 머릿속으로는 딴생각만 했다. 말을 대체 어떻게 물가로 끌고 가지? 일단 끌고 가기만 하면 물은 먹일 수 있을 것 같은데.
박 비서실장이 알면, 한국 정부의 그런 자잘한 요구까지 들어주면 안 된다고 거품을 물겠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WCO 의장으로서 오히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유지웅이 조금만 부지런하게 나서주면 결정체 부족으로 고통 받는 수십 억 세계 시민들의 생활이 나아진다.
그리고 유지웅 본인도 좋지 않나? 무료 봉사도 아니고 제 값 다 받고 팔 수 있으니.
그날 업무를 마치자마자 남기철은 나는 듯이 서울로 달려갔다. 아니, 실제로 V-23을 타고 날아서 서울로 갔다. 흑석동 저택 관제탑에 착륙 허가를 요구하자 쿨하게 승인이 났다.
미리 연락을 한 터라 본채에 들어서자 유지웅이 편안한 옷차림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쩐 일이세요? 요즘 엄청 바쁘시다고 들었는데.”
그 바쁘게 만든 사람이 바로 당신인 걸,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는 얼굴이었다. 남기철은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꺼냈다.
“결정체가 많이 부족합니다.”
“알아요.”
“앞으로 연간 4조 3,500억 달러 정도의 결정체가 추가로 필요합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한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들이 연쇄 부도를 맞을지도 모릅니다. 벌써부터 부자들은 자산을 빼돌리는 등 난리가 났습니다.”
유지웅은 잠시 남기철을 바라보다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말했다.
“청와대 부탁받았죠?”
“예? 예. 그렇긴 합니다만, 저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WCO 시각에서 지금의 결정체 부족 현상은 현대 세계가 유지되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생존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은 회장님 밖에 없습니다.”
유지웅은 일어서서 창가로 갔다. 정원 곳곳에는 소복하게 눈이 쌓여 있었다. 남기철은 조용히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기울어진 가로등 조명이 만들어낸 명암이, 어쩐지 묵직한 분위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여전히 등을 돌린 채였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게 저밖에 없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제가 레이드만 할 수는 없지 않나요? 막말로 제가 내일 당장 죽으면요?”
“…….”
“저 하나에 의존하는 경제는 위험해요. 각 국가가 자체적으로 레드 몹 레이드를 상업적으로 할 수 있게끔 내실을 키워야 합니다. 물고기를 잡아주는 것보다 물고기 잡는 법을 알려주라고 하지 않던가요? 저 역시 그 점이 염려돼서 이 심각한 시기에도 선뜻 움직이지 못하고 있던…….”
“저, 파이널 스페이스 5 시리즈 아직 클리어 못 하셨죠?”
“헉! 그걸 어떻게!”
“……역시 그거 때문이셨나요.”
이 중요한 시기에 유지웅이 조금만 열심히 하면 돈도 더 많이 벌고 국제적인 영향력도 대폭 높이고, 세계적인 인망도 한층 더 두터워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엉덩이를 들지 않는 것을 놓고 온갖 말이 많았다. 뭔가 대단한 노림수가 있어서 그런다는 다양한 음모론이 존재했다.
하지만 남기철은 음모론을 부정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왠지 그거 때문일 같아서, 이제는 허탈하지도 않다. 그냥 자기 감이 좀 안 맞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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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되겠어. 레이더 대상 셧다운제를 도입하지 않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