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genius interpreter RAW novel - Chapter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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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손가락 두께를 재고 주문까지 마치고 나온 우리는 식당을 찾았다.
마침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기도 하니, 파전과 막걸리만큼 어울리는 조합도 없을 터.
나는 대학생 때 종종 친구 놈들과 가던 오래된 파전집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여전하네, 여긴.”
조금은 허름하지만 운치가 있는 오래된 식당.
벽 한 면에는 이곳을 방문했던 손님들의 낙서가 가득하다.
주변을 둘러보던 레아가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고 하던 그때.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양은 주전자에 한가득 담긴 막걸리와 해물파전이 나왔다.
오징어, 새우 등 각종 해물을 아낌없이 넣어서 부친 파전은 두께가 제법 두툼했다.
‘부치다기보다 통째로 튀겨낸 느낌인걸.’
한 젓가락 들어 입에 집어넣자 바삭, 하며 입안에서 부서진다.
그리고.
“···맛있어!”
레아 역시 이런 식감을 좋아하는지, 신이 나 먹기 시작했다.
‘복스럽게 잘 먹네.’
기분 좋게 먹는 얼굴이 사랑스러워 멍하니 쳐다보는데.
한참을 신나게 먹던 레아가 제 손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있잖아.”
“응?”
“나, 전에는 커플링 같은 걸 왜 하는지 이해 못 했거든.”
커플링은 물론이고.
둘 사이의 관계를 남들에게 보여주는 식의 모든 행동에 의문을 가졌단다.
“왜 굳이 몸에 끼고 다니면서 애정을 과시하는 걸까, 그런 식으로 생각했는데··· 이젠 생각이 좀 달라졌어.”
“어떻게?”
레아가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음, 일단은 아무래도 불안한 마음이 덜 들겠다 싶기도 하고···.”
그 말과 함께, 내 손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갰다.
벨벳처럼 부드러운 감각에 갑자기 머리가 멍해지는데, 그녀가 내 네 번째 손가락을 꾸욱 눌렀다.
“여기에 우리 둘이 똑같은 반지를 끼고 있다면··· 그걸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 것 같아.”
그녀가 고개를 들더니 나와 눈을 마주쳤다.
“아. 우리는 손을 맞잡은 채로 이 삶의 터널을 걸어가고 있구나.”
“···.”
“내 옆에서, 동반자가 단단히 나를 붙잡아주고 있다는 생각에 무척 기쁠 것 같아.”
···활짝 웃으며 말하는 그 얼굴이 너무도 사랑스러워, 나는 가슴이 뻐근해지는 동시에 뭉클해졌다.
‘연애 초기의 열정은 절대로 영원하지 않다고들 하지만.’
비록 처음의 이 설렘과 열정이 점점 옅어지더라도.
우리 사이의 감정은 조금 더 진화한 형태의 애정으로 발전해나갈 것이다.
‘그걸 세간에서는 한낱 정이나 우정, 전우애라고 부르는지도 모르겠지만.’
형과 형수를 볼 때마다, 단단한 무언가로 묶인 두 사람이 늘 부러운 터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도 마찬가지야, 레아.”
언젠가는 레아와, 그런 관계가 될 수 있기를 나는 마음속으로 소망했다.
*
그로부터 며칠 뒤, 정화영 교수의 수업이 한창인 가운데.
나는 레아의 빈자리를 흘긋거렸다.
‘잘하고 있으려나.’
평일 오후에 이뤄지는 이 수업에 레아가 결석한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성주원 교수와 함께 ‘철학연구소 국제학술대회’ 동시통역에 나갔기 때문에.
우리 한명외대에서 주최하는 학술대회인 만큼, 저기 저 맞은편의 인문대학 강당에서 진행된다.
수업만 아니었다면 나도 참석해서 직접 들어보고 싶었지만···.
‘수업이 없더라도 안 돼, 오지 마.’
‘왜.’
그녀의 첫 공식 동시통역을 직접 보지 못하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자, 레아는 고개를 저었다.
‘자기가 듣고 있다 생각하면 긴장될 것 같단 말이야. 괜히 민망하기도 하고.’
‘···전혀 안 그럴 것 같은데.’
지금껏 내가 본 바로, 그녀는 언제나 마이크에 불이 들어온 순간부터 통역에 100퍼센트 몰입하곤 했다.
거기에 나 이상의 강심장이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필드에서 처음 하는 동시통역이라고 생각하니 긴장이 돼서···.’
그 레아가 긴장을 하다니.
···내심 신경이 쓰였지만, 그저 믿고 기다릴 수밖에는 없다는 결론을 내리던 그때.
“오늘 레아 씨는 성주원 교수와 함께 국제학술대회 동시통역을 진행하기로 했죠?”
강의를 마무리한 정화영 교수가 학생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재학생이 졸업 이전에 실전에서 동시통역을 맡는 건 10년 만에 처음 보는 것 같네요. 여러모로 감개무량합니다.”
레아의 실력을 한껏 칭찬한 정 교수가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42기들이 이래저래 바쁘네요. 번역과 학생들 중에도 학업과 출판번역을 병행하거나, 본격적인 번역 프로젝트에 착수한 경우가 꽤 있다고 들었고요. 그래서 그런지 우리 교수진도 이번 기수에 거는 기대가 큽니다.”
이번 기수에 거는 기대라 하면, 아무래도 졸업 이후에 대한 기대를 말하는 것일 터다.
졸업생들이 어느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느냐에 따라 또 학교의 위상이 그만큼 달라지는 셈이니.
“그럼 이것으로 수업을 마치죠.”
그렇게, 별다른 특이사항 없이 수업이 끝난 후 불어과 휴게실로 이동하자.
마침 같은 시간의 수업을 듣고 나온 번역과 동기들이 앉아 있었다.
“이것 봤어?”
“의 여파가 상당하네.”
다 같이 둘러앉아 인터넷에서 ‘대학미래 통대’ 따위를 검색하며 낄낄거리는 동기들.
레아가 엘프 통역사로 널리 알려진 것도 그렇지만, 의 수혜자는 그녀뿐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찬영 오빠, 이것 봤어?”
은새가 내민 스마트폰을 본 나 또한 눈이 커졌다.
“오.”
“히히, 대박이지?”
에 실린 통대생 단체컷에 관한 코멘트 중, 이런 것들이 꽤 많았으니까.
– 저기 저 남성분은 누구신가요?
└ 모델인가 배우인가
└ 얼굴로 통역하시나 봄
└ 저런 분이 통역하러 오면 긴장돼서 입이 안 떨어질 듯
그러한 반응에 여자 동기들은 신이 나서 서이준을 놀리는 한편, 수용이 형은 ‘불공평한 세상’ 2절을 외우는 중이었던 것 같다.
“···아 좀, 그만하라니까.”
볼멘소리를 내는 서이준.
그러나 저러나, 은새는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이준 오빠 연예 기획사에서 연락받은 거 알아?”
통번역사 겸 방송인으로 활동할 생각이 없냐는, 나름 중대형급 기획사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는 모양이다.
“와, 대박이네.”
그러고 보니 레아도 어느 기획사에서 연예인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고 했지.
···물론 똑 부러지는 그녀답게 끝까지 듣지도 않고 거절했다고 말이다.
“···은새야, 민망하다니까.”
서이준이 머리를 긁적이며 한마디하자, 은새는 헤헤 웃기만 했다.
“그건 그렇고 찬영아. 나 뭐 좀 물어볼 게 있는데.”
“뭐?”
고개를 들자 서이준이 내게 프랑스어 원서 한 권을 내밀었다.
화려한 실사풍의 그림이 눈에 띄는 베데(BD, 프랑스 만화)였다.
“이번에 프랑스 그래픽노블 번역 맡았거든.”
“오, 축하한다.”
서이준은 이전에 출간된 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이른 후, 여러 출판사의 러브콜을 받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중 어느 한 곳과 그래픽노블 시리즈 번역 계약을 맺었다고.
“나도 베데는 좋아하긴 하지만, 너만큼 많이 본 건 아니라···.”
그렇게 말한 서이준이 표시해둔 페이지를 펼쳐 이것저것을 질문했다.
대부분이 프랑스 만화 특유의 효과음(의성어, 의태어)에 관련된 것이었는데.
“···뭐, 대충 대답해주면 이 정도이고.”
나는 질문에 대답해준 후, 결국 만화 효과음에 익숙해지려면 다른 작품을 최대한 많이 읽어보는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아마 기억하기로는, 이런 효과음을 따로 정리해둔 프랑스 사이트가 있을걸?”
내 말에 서이준이 아, 하며 탄성을 냈다.
“그걸 찾아볼 생각을 못했네. 진짜 고맙다, 찬영아.”
“뭘.”
얼굴 가득 미소를 짓는 서이준을 보고 있으려니, 녀석을 처음 봤을 때가 문득 떠올랐다.
‘저··· 박찬영 씨?’
···로봇처럼 두 눈을 꿈벅거리며 어색하게 말을 붙이던 모습이 말이다.
‘그때만 해도 감정이 얼굴에 거의 드러나지 않는 놈이었는데.’
지금은 어느덧 동기들 사이에 부드럽게 녹아들어 있는 것을 보니, 새삼 그간 많은 일들이 있었구나 싶던 그때.
부우웅-
스마트폰이 진동하며 화면에 [최재중 한성일보 기자]라는 이름이 떴다.
‘무슨 일이지.’
밀려드는 호기심을 주체 못 하며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최 기자의 설명을 끝까지 들은 나는 이렇게 물었다.
“그러니까··· 레아를 인터뷰하고 싶으시다는 거죠?”
나를 한순간에 전국구 유명인으로 만들어준 결정적 계기가 된, 한성일보의 코너.
최재중 기자는 레아에게 이 코너의 인터뷰를 요청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레아의 첫 공식 동시통역은 흠 잡을 데 없이 잘 마무리되었다.
‘물론 내가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현장 분위기가 상당히 좋았다는 것만 들어도 충분히 알 수 있었던 사실일 뿐더러.
무엇보다 학술대회가 끝난 직후, 이례적으로 통역 관련 기사가 쏟아져 나왔으니 말이다.
[엘프 통역사의 실력을 현장에서 확인하다] [ 신레아 통역사, 학술대회에서 선보인 이모저모] [부스 안의 숨은 공로자 – 동시통역사의 세계]···
지금의 레아는 그야말로 유명세라는 것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체감하는 중인 상황.
‘마치, 또찬영이 유행했을 초기의 나 같다고 해야 할까.’
어떤 면에선 기쁘고 감사한 일이지만, 또 어떤 면에선 혼란스럽고 스트레스 받을 수 있는 일.
그런 만큼 나는 그녀의 곁에서 어떠한 제안을 받아들이고 거절할지, 어떤 식으로 대처할지 내 나름의 조언을 하고자 했다.
덕분에 레아는 최재중 기자와의 한성일보 인터뷰 취재만 받아들이기로 한 터.
‘또, 주변 동기들에게 통대 안에서의 사생활 얘기가 바깥으로 나가지 않게 해달라고도 부탁했지.’
뭐, 나 같은 경우 이미 사돈의 팔촌까지 내 얘기를 떠들어대고 있으니 이미 그른 것 같지만.
아무래도 지금 레아는 조금 더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는 상황에 처해 있으니 말이다.
‘일단 외모로 주목을 받은 게 있다 보니, 드물지만 악의적인 리플이 달리기도 하고.’
외모 보면 혼혈 같은데 맞냐.
혼혈이면 국적은 한국인이냐, 세금은 한국에 내는 게 맞냐는 둥.
본질과는 상관없는 부분만 트집잡는 식의 반응도 꽤 있었던 만큼···.
나는 레아가 그런 일로 스트레스를 받는 게 영 마뜩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찬영 씨, 그런 건 걱정하지 마.”
“···하지만.”
“진짜로. 물론 예전 같으면 그런 댓글 하나 하나에 엄청 신경썼겠지만···.”
레아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꼭붙잡았다.
“이젠 찬영 씨가 옆에 있잖아.”
“···.”
“그 생각을 하면, 인터넷에서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악의적인 말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져서.”
그리고는, 내 손등에 본인의 손을 겹쳤다.
새하얗고 가느다란 네 번째 손가락 위에서 플래티넘 골드링이 반짝인다.
중세시대의 성유물을 연상케 하는 투박하면서도 독특한 디자인.
···얼마 전에 완성된 우리 두 사람의 커플링은, 내 손가락에도 끼워져 있었다.
반지를 슥 돌아본 레아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걸 볼 때마다 자기가 날 곁에서 지켜주는 기분이 들거든.”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 말과 함께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자, 레아의 눈이 애정을 담은 채 미소를 머금었다.
*
그렇게 모든 것이 순탄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나 또한 다음 일정을 논의하게 되었다.
“오노레그라스 CEO요?”
통대 센터 서지연 과장의 입에서 ‘오노레그라스’라는 이름이 나온 순간, 나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오노레그라스.
17세기부터 이어진 향수 제조법으로 유명한, 몇백 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굴지의 향수 브랜드.
‘솔직히 향수를 잘 아는 편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 이름을 알고 있는 건.’
작년 여름에 남부 프랑스에 여행을 갔을 때 향수의 도시라 불리는 그라스에 들러 ‘오노레그라스’ 향수 공방에서 여행 선물을 사왔기 때문도 있지만···.
2010년대 초만 해도 프랑스 내수용 이미지를 지닌 이 브랜드가, 10년 후에는 국제적인 명품 향수 브랜드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명품관에서 크나큰 인기를 자랑하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향수’로 명실상부 자리매김하지 않았던가.
‘그 오노레그라스의 한국 론칭이 이쯤이었구나.’
나는 서 과장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수행통역 겸 행사 통역은 여러 번 경험해보긴 했지만, 이번엔 CEO를 직접 통역하는 거니 나쁘지 않겠네 라고 생각하던 그때.
서 과장의 말이 이어졌다.
– 음, 근데 그냥 일반적인 CEO 통역과는 조금 다르다고 해야 할까요.”
“네?”
– 사실 그냥 CEO 수행통역이라면 박 선생님한테 권유하기 전에 저희 선에서 거절했을 거예요.
“···CEO 통역인데요?”
내 말에 스마트폰 너머 서 과장이 웃음을 터뜨렸다.
– 어머, 이제 박 선생님 몸값이 얼마나 높아졌는데요? 선생님 본인만 의식 못하는 것 같지만요.
“아···.”
– 어쨌거나 요점만 얘기하자면 단순한 통역 의뢰만 들어온 게 아니라···.
어쩐지 즐거운 기색이 가득한 서 과장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 박 선생님은 이번 오노레그라스 한국 론칭 행사의 스페셜 게스트로 초청됐어요.
“···네?”
그것도 메인 게스트다, 라는 그녀의 말에 나는 잠시 멍해지고 말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