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24)
24화. 몰입의 순간
특유의 냄새가 있다.
그림의 세계로 들어가는 신호탄이 되는 냄새가.
존재를 느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화실의 문을 여는 것.
드르륵.
오랜만에 일선화랑 아뜰리에 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그리운 냄새가 훅 밀려 나왔다.
물감들과 테레핀, 석유, 또 역할이 각기 다른 미디엄(보조제)들이 범벅이 돼 만든 강렬한 냄새, 그리고 습기를 머금은 캔버스가 풍기는 묵직한 냄새에 수현은 어쩐지 편안한 감정을 느꼈다.
‘학교에서 긴장하긴 했던 건가.’
할 일에만 매진하겠다고 다짐했지만, 김하영이나 최형욱 선생 그리고 여러 가지 학교생활에 아주 무감하긴 어려웠다.
적잖이 신경을 곤두세웠던 탓에 피로가 쌓였는지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장소에 오자 사르르 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수현을 무장해제 시키는 또 다른 존재, 친구.
“수현, 왔어?”
늦은 시간까지 옆방에서 그림을 그리던 스티브가 수현의 인기척을 들었는지 작업실 문을 열고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어, 지금 막. 잘 지냈지?”
“그럼. 나 여름에 그리던 거 이제 거의 끝냈어.”
“와, 정말?”
“너도 작업 많이 했겠다.”
“기법 연구에 시간이 걸려서 막상 그림은 많이 못 그렸어. 이제 한 장 끝내는 정도야.”
“오, 그거야?”
스티브가 수현이 손에 들고 있는 그림에 호기심을 보이며 성큼 작업실 안으로 들어왔다.
“봐도 돼?”
“물론이지.”
수현이 조심스럽게 그림을 펼쳤고 그걸 본 스티브의 표정이 단박에 밝아졌다.
“와. 기대 이상인데?”
“그래?”
“역시, 이건 아크릴로 하기 잘했다. 유화보다는 아크릴이 더 어울려.”
“응. 그런 것 같아.”
수현의 연작 바다, 바람, 빛.
세 개의 소재는 [바다 없는 바다>, [바람의 목소리>, [빛의 계절>이란 제목으로 모습을 갖춰가고 있었다.
30호짜리 세 장을 완성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덜기 위해 처음엔 유화 대신 아크릴을 선택했고, 마침 스티브가 유화의 기법을 흉내 낼 수 있는 보조제들을 알려줘 작업 속도를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던 중 수현은 또 다른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밀도를 올리는 게 효과적일 [바다 없는 바다> 그림은 유화로, 시선이라는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낼 [빛의 계절>과 중간과정이 될 [바람의 목소리>는 아크릴, 혹은 다른 재료의 혼합으로 작업하는 게 낫겠다 싶었던 거다.
‘세 장을 모두 유화로 하긴 부담스럽겠지만, 한 장 정도는 충분할 거야. 전통적인 유화와 아크릴화, 그리고 두 가지 장점이 섞인 그림을 그려낸다면 보는 재미도 더할 테고, 마침 주제와도 딱 떨어지니까.’
그 선택은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낳았고 스티브의 눈에도 상당히 괜찮게 보인 모양이었다.
“전화로 들었을 땐 완벽히 그려지지 않았는데, 이제 확실해지네. 바다, 바람, 빛. 세 장을 나란히 놓아두면 굉장히 풍부한 느낌을 받겠어. 특히 바람은 아크릴과 유화의 장점을 각각 살리면서 경계를 부드럽게 만들 거라 사람들 사이에서 꽤 화제가 될 것 같아.”
“응. 안목이 있는 사람들이야 금세 눈치채겠지만 그림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신기하게 감상할 거라 생각해.”
“그래. 어쨌든 기법은 훌륭하게 해결됐고, 남은 건 너만의 방식을 얼마나 잘 드러내냐겠구나.”
“그렇지.”
“삭제와 시선, 두 개의 주제는 잘 연결되고 있어?”
“뭐, 그럭저럭.”
스티브와는 2, 3일에 한 번꼴로 연락을 이어왔다. 때론 전화로 때론 삐삐 메시지로.
작품에 대한 고민과 아이디어를 자주 주고받긴 했지만 스티브는 수현의 그림을 마치 자기 그림처럼 이해하며 의견을 개진할 때가 있어 한 번씩 수현을 크게 놀라게 했다.
자신이야 과거의 경험을 그대로 기억한 채 다시 고등학생의 몸이 되었다지만, 스티브는 그야말로 첫 번째 인생.
그런데 작품을 향한 고민의 깊이나 재료에 대한 이해. 테크닉과 자신만의 고유한 미술 언어.
스티브는 열일곱 살 소년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드러냈다.
‘이러니 세계적인 화가, 천재라 불렸던 거겠지.’
새삼 수현이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한국에 올 때 솔직히 큰 기대는 없었거든.”
스티브가 창 쪽 선반에 걸터앉아 두꺼운 통창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작업 환경을 바꿔보고 싶었는데, 마침 일선화랑에서 후원을 해주고 싶단 연락을 해와서 왔던 거야. 짧게는 3개월, 길어도 반년 정도만 머물 생각이었고.”
몰랐던 얘기였다.
수현이 조용히 스티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자 스티브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요즘 너무 재밌어. 예술적 동지라는 게 왜 필요한지 절실히 느낀다고 해야 하나?”
“동지?”
설마, 나를 두고 하는 소린가. 수현이 눈을 끔뻑였다.
“여기저기 교류한 화가들이 있긴 했는데 어딘가 잘 맞지 않았거든. 그림만 잘 그리는 사람한테는 애초에 별 관심이 없었고, 보잘것없는 자기 언어를 대단한 것마냥 부풀려 포장하는 사람들은 아주 질색이었고 말이야. 근데 넌 아주 맘에 들어.”
“내가? 왜?”
“너한테선 나랑 비슷한 기운이 느껴지거든. 그래서 오래 지켜보고 격려하고 같이 그림을 그리고 싶은 친구라고 해야 하나?”
갑작스러운 칭찬에 수현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좋게 봐줘서 고마워. 근데 그렇게 말하니까 부담스럽긴 하다.”
“왜? 내가 실망이라도 할까 봐?”
“어. 이 그림이 어떻게 완성될지는 나도 아직 모르는 거니까.”
“흠. 잘 나올 거야. 걱정 마.”
“그래야지.”
“어쨌든.”
스티브가 다시 평소처럼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나 그래서 일선화랑에 좀 더 오래 머무르기로 했어.”
“어?”
“어제 관장님이랑 이야기했거든. 적어도 올해까진 한국에 있겠다고.”
“와. 정말이야?”
“물론, 겨울에 생각이 바뀌면 좀 더 머무를 수도 있는 거고. 여기도 그리고 싶은 것들은 많으니까.”
“그래. 잘됐네. 정말 잘됐다.”
“오, 수현이 네가 좋아해 주니까 나도 기분이 좋은데? 그러니까 너도 나랑 오래 같이 있고 싶었던 거지?”
“아, 그거랑은 좀 달라. 그냥 나도 함께 그림을 그리고 싶단 생각인 거라.”
“그게 그거지.”
스티브가 한국에 체류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수현과 교류를 이어간다면 수현의 작품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스티브가 수현을 좋게 본 것처럼 수현 역시 스티브란 또래 예술가에게 동지애를 느끼고 있었고.
“어쨌든, 너 컨디션은 괜찮은 거지?”
스티브가 다시 그림 얘기로 돌아갔다.
“컨디션? 지금? 어, 괜찮지.”
“좋아. 내가 너 학교 가 있는 동안 엄청 기다렸어.”
“뭘?”
“같이 그림을 그려보고 싶어서.”
“나랑?”
“네 짐, 아직 풀기 전이니까 내 작업실로 옮기면 어때?”
“네 작업실에서 같이 그리자고?”
“응.”
특별한 이유가 있긴 했으나 혼자 작업하는 걸 즐겨하고 타인이 드나드는 걸 극도로 꺼렸던 스티브였다.
그런 그가 자기 작업공간에 수현을 초대하고 같이 그림을 그리자고 청하는 건 정말 수현을 동료로 인정한다는 말이었다.
“그래. 좋아.”
“어, 그럼 이젤이랑 이쪽 캔버스들은 내가 옮긴다?”
“어? 그걸 다?”
“왜? 이거 네 물건 아니야?”
“맞는데, 이걸 전부 옮기면 다시 옮길 때 일이 너무 많을 것 같은데.”
“왜 다시 옮겨?”
“어?”
수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주말 동안 같이 그림을 그리잔 얘기로 받아들였는데, 그게 아니었나? 설마 쭉 작업실을 같이 쓰잔 거였어?
“잠깐. 너 그럼 내일부터 계속 나랑 같은 작업실을 쓰겠다는 거야?”
“설마 그럼 반짝 이틀 같이 그리자고 번거롭게 이걸 다 옮기자고 하겠어?”
스티브가 어깨를 으쓱 올리더니 선반에 걸쳤던 엉덩이를 떼고 성큼 다가와 수현의 이젤을 어깨에 멨다.
“오랜만에 야작(야간작업) 좀 해보자. 여긴 밤이 더 좋더라.”
“어, 그래.”
신나서 짐을 옮기는 스티브를 보며 수현도 가방과 물감들을 챙겼다.
***
짐을 다 옮기고 자리를 정돈하니 벌써 밤 10시.
수현과 스티브는 간단히 차와 쿠키로 에너지를 보충하고 자리에 앉아 차례로 붓과 연필을 들었다.
얼마 전 그림을 한 장 끝냈다는 스티브는 50호짜리 새 캔버스를 이젤에 올리고 쓱쓱- 구상한 형태를 스케치해나갔고, 수현은 아크릴화로 그린 [빛의 계절> 마무리 단계에 돌입했다.
삭제와 시선, 두 가지 테마를 다루는 수현의 연작.
[바다 없는 바다>에서 삭제란 주제를 강조했다면 [빛의 계절>은 수현의 오리지널리티를 보여줄 수 있는 시선이라는 테마가 전면에 배치된다.사물은 드러내지 않고, 사물의 그림자로만 표현하는 것.
즉 그림자의 형태로 사물을 유추하게 하며 그림자의 길이와 농도로 시간의 변화를 나타내는 게 [빛의 계절>의 특징.
어쩌면 단순할 수 있는 그림이었으나 수현은 그림자 외의 공간을 몽환적인 기법으로 표현하고 그림자마다 주체에 담긴 색깔을 조금씩 섞어 분위기와 깊이를 더했다.
어쨌거나 이제 마지막으로 강조할 부분들을 가는 붓으로 묘사해주면 완성.
“후웁.”
수현이 심호흡하며 세필을 들었다.
쭈욱- 종이 팔레트에 묽은 아크릴 물감을 조금씩 짜낸 후.
슥슥- 머릿속에 떠올린 색을 만들기 위해 섞어나갔다.
그리고 건조 시간을 지연해줄 보조제를 한 방울 떨어뜨린 다음 미리 정해둔 지점에 망설임 없이 붓을 올렸다.
아크릴은 건조 시간이 빨라 팔레트 위에 조금씩 짜놓고 사용해야 낭비를 줄일 수 있다.
그러나 너무 적은 양으로 만들어두면 같은 색깔의 물감을 만들기가 쉽지 않아 원하는 그림의 원형과 먼 결과물을 얻게 되고.
적절한 양과 속도, 그리고 순발력을 요하는 작업.
밑색과 섞어가며 부드럽고 깊이 있는 색감을 표현하는 유화와는 전혀 다른 접근이 필요했다.
‘그래도 이제 제법 손에 붙었네.’
쓱쓱- 빠르게 붓을 놀리며 그림을 완성해가는 수현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과거 수현은 아크릴화를 제법 그려봤지만 중요한 작업에 본격적으로 사용한 일은 없었다.
한 장의 그림을 완성하는 데 물감이 많이 들어 비용적인 면이 부담스럽기도 했고, 연습 기회가 적은 만큼 재료를 능수능란하게 다루지 못해 자신감이 떨어졌던 거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제 수현은 든든한 후원으로 얼마든지 원하는 만큼 습작을 그릴 수 있게 됐다.
전에는 한참 들여다보기만 했던 값비싼 재료들을 고민 없이 사용할 수 있게 됐고, 그걸로 미친 듯이 그림에 몰입하다 보니 어느 순간 재료가 손에 익었다.
이제 수현의 붓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리고-.
‘마음에 들어. 이건 진짜 내 마음에 쏙 들어.’
마침내 완성된 수현의 가을 미술전시회 첫 그림은 수현이 처음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높은 완성도로 그려졌다.
‘굳었던 손이 이제 좀 풀린 건가? 재료의 덕도 봤겠지만.’
수현이 아련하고 울컥한 마음으로 막 완성된 그림을 천천히 눈에 담을 때였다.
짝. 짝. 짝.
수현의 등 뒤에서 누군가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