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23)
23화. 미술 전시회(2)
“일단 어른들이 할 일은 어른들이 나서기로 했어.”
박선화가 한 번 더 목소리를 낮추며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그러니까, 관장님이 직접 나서신다는 거야?”
수현이 박선화를 따라 나지막한 목소리로 묻자 박선화가 비밀결사대라도 된 듯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내가 이런 소식을 어디서 들었겠어. 다 엄마가 말씀해주신 거지.”
그러더니 박선화는 주위를 한 번 더 살피며 모기만 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넌 그냥 작품에만 전념하라고. 억울한 일이 생기지 않게 일선화랑에서 든든히 지원해줄 거라고 하셨어.”
“어?”
수현이 눈을 끔뻑였다.
경매라는 생각지 못한 변수.
어쩌면 귀찮고 화나는 일이 생길 수 있겠다 싶었는데, 일선화랑이란 든든한 백이 지원에 나서 주겠단 말이었다.
경매로 심사가 불공정해지지 않게 감시하는 동시에, 수현의 그림이 억울한 평가를 받지 않도록 도움을 주겠다니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넌 이런저런 말이 들려도 흔들리지 말고 네 그림을 그려가란 이야기야.”
이야기를 마친 박선화는 마지막 남은 햄버거 조각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거기까지 가만히 듣고 있던 차윤희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 뭐가 뭔지. 나도 집에 가서 얘길 좀 해봐야겠다.”
“집에?”
“이번 전시회, 나도 꽤 열심히 준비하고 있거든. 근데 이런 식으로 엉망이 되는 걸 마냥 두고 볼 순 없잖아. 아빠한테라도 이야기해 보려고.”
세현예고엔 이름만 대면 알만한 기업의 오너 일가, 예술가 집안, 정치인이나 연예인의 자녀들이 꽤 많이 다녔다. 윤희 역시 그런 있는 집 자식 중 하나였고.
다만 윤희 역시 과거엔 박선화처럼 자신의 배경을 크게 드러내거나 이용한 일이 없던 터라 직접적인 언급을 하는 모습이 새삼스럽고 신기했다.
“아버지? 차수혁 작가님?”
반면 박선화는 태연하게 차윤희의 아버지 이름을 입에 올렸다. 차윤희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뭐야, 너 우리 아빠가 차수혁인 거 어떻게 알았어?”
“뭐래, 아버지랑 똑같이 생긴 주제에.”
“뭐?”
“그런 얘기 못 들었어? 너 차수혁 작가님이랑 완전 붕어빵인데?”
“아닌데? 나 엄마 닮았는데?”
“양심 없네. 네가 어떻게 조성아 배우님이랑 닮아. 아, 눈 두 개, 코 한 개, 입 하나인 건 닮았네.”
“와, 너 진짜. 우리 엄마가 누군지도 알고 있었어?”
“어. 근데 내가 알려고 해서 아는 건 아니야. 화랑에 있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알게 된 거지. 내가 뭐 네 뒷조사라도 했을까 봐? 할 일 없이?”
“하. 음흉해. 박선화.”
“응. 자존감 너무 커, 차윤희.”
또다시 으르렁대는 둘을 바라보던 수현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고-.
“어쨌든 선화가 말한 대로면 어른들은 어른의 일을 해주신다면, 우린 우리의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겠네. 그치?”
“그렇지.”
“어, 맞아.”
간결하게 상황을 정리하며 눈을 빛냈다.
“좋아. 윤희 너는 작업 얼마나 진행됐어? 선화 너는?”
“어?”
“응?”
박선화와 차윤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 작업에 관심 가져주는 건 고마운데, 너희도 세현예고 학생이고 전시회 참가자이고, 특히 윤희 너는 입상이 목표라고 했잖아.”
“그, 그랬지.”
“방학까지 봤을 땐 둘 다 진도가 영 안 나가는 것 같던데, 이제 학생의 본분으로 돌아가서 좀 열심히 해야 하지 않을까?”
“아, 한수현 왜 이래, 무섭게.”
“그러게. 한수현. 우리가 어? 애도 아니고, 우리도 우리 일은 알아서 한다고.”
당황하는 차윤희와 박선화의 어깨에 수현이 차례로 팔을 걸치며 말했다.
“그래. 내가 지켜볼 거야. 우선은 실기실로 가자. 이제 곧 수업 시작하겠어.”
수현이 애들을 끌고 나오며 슬쩍 매점 안쪽을 돌아보았다.
박선화의 얘기를 들은 직후라 그랬을까. 의기양양한 얼굴로 웃고 떠드는 김하영 무리의 모습이 무척이나 거슬렸다.
그래,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누군지 한번 지켜보자고.
수현이 쓱- 고개를 돌려 매점을 빠져나왔다.
***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는 게 오롯이 느껴졌다.
그만큼 매일, 매 순간이 충만했다.
또다시 2주가 흐른 금요일 저녁.
“어으으. 죽겠다.”
“아이고, 어깨야. 우리 1학년인데 너무 달리는 거 아니냐?”
“맞아. 입시는 마라톤인데, 벌써 전력 질주하는 건 좀 아니다 싶어.”
“그래도 재밌지 않았어?”
“재미? 흠. 그랬나?”
“뭐, 시간이 좀 빨리 가는 것 같긴 하더라.”
“어. 후딱 지나가긴 했지. 벌써 8시잖아.”
“그게 재미야. 몰입했단 거니까.”
수현과 박선화, 차윤희가 실기실을 나서며 도란거렸다.
월, 화 소묘 수업을 빼면 수, 목 전공 수업에 금요일 전시회 전담반까지 같은 반으로 묶여 일주일에 10시간 이상을 붙어 있다 보니 셋은 빠른 속도로 친해졌다.
무엇보다 같은 시기 같은 과제를 하며 힘겨운 터널을 통과하는 동료라는 데에 생겨난 동지애가 관계를 끈끈하게 만들었다.
“선화, 너 흙에 물 뿌리고 왔지? 손반죽도 했고? 그대로 두면 담주에 또 쩍쩍 갈라진다?”
“당연하지. 지난 시간에 그렇게 혼이 났는데, 내가 아메바냐? 칙칙 촥촥 촉촉하게 뿌려주고 왔어. 아, 근데 차윤희. 너 진짜 아버지 닮긴 닮았더라. 조소 수업은 그냥 독보적이던데?”
“지금 알았냐? 내가 소묘랑 다른 전공은 한수현, 저 신의 손한테 다 밀려도 조소 수업만큼은 사수할 거야.”
“갑자기 나는 왜 걸고넘어져? 그리고 좀 신의 손이란 말 좀 하지 말라니깐.”
“싫은데에? 싫어하니까 더 하고 싶은데에?”
차윤희와는 학과 반이 겹쳤고, 박선화와는 기숙사 룸메이트로 지내니 실기 수업 외에도 부딪칠 일이 많아 주고받는 말도 많았다.
신기한 건 그런데도 얼굴을 보면 또 시답잖은 얘기들이 멈추지 않고 튀어나온다는 거였다.
처음엔 어색한 기분을 느꼈던 수현도 이젠 제법 고등학생답게 수다에 동참하고 있었다.
“잘 가!”
“그래, 주말 잘 보내! 삐삐 치고!”
“그래. 알았어. 야! 차윤희! 너 필통 떨어졌어!”
“으악! 고마워! 간다아!”
양재 봉고를 향해 달려가는 차윤희를 배웅하고 수현과 박선화는 터덜터덜 기숙사를 향했다.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박선화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수현의 일정을 체크했다.
“맞다, 너 짐은 다 챙겼지?”
“어, 재료야 화랑에도 놔뒀고. 그림만 가져가면 되니까.”
“그래. 조심해서 옮겨야겠다. 이제 채색이 제법 들어갔잖아.”
“그래야지. 바다 그림은 이번 주말에 마무리하고 당분간 화랑에 두려고.”
“어. 좋은 생각. 괜히 불안하게 학교에 둘 이유는 없지.”
박선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의 연작은 아주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세 장 중 마지막 그림인 ‘빛의 계절’은 마무리만 하면 될 정도로 거의 완성됐고, 주말에 작업을 끝낸 후엔 일선화랑 작업실에 보관할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주말 내내 마무리 작업이 이어질 텐데 물감이 마르지 않은 그림을 학교로 다시 들고 오는 게 번거롭고 조심스러울 뿐더러, 최형욱 선생과 김하영 쪽과 괜히 마주쳐 일이 생기는 건 아닐지 신경 쓰이기도 했던 거다.
이제까지 그들의 행보를 보면 무슨 일을 저질러도 놀랍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맞다. 오늘은 봉고가 올 거야.”
박선화가 또 까먹은 게 생각난 얼굴로 손뼉을 탁. 치며 말했다.
“봉고?”
“어, 너 그림이 제법 부피가 되잖아. 30호짜리 캔버스가 세 갠데.”
수현은 세 장의 그림을 모두 30호짜리 캔버스에 그리고 있었다.
긴 면의 길이가 91cm 정도니 승용차라면 겹쳐 실어야 했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쉽지 않을 일이었다.
그걸 염두에 둔 강유진 관장이 화랑 쪽 봉고차를 한 대 보내주기로 한 모양이었다.
“부담 갖지 마. 내 것도 부피가 제법 되거든. 조금만 잘못 건드리면 다 부서질 수도 있고. 승용차로 운반하긴 무리야. 그니까 가는 김에 같이 가자, 이거지.”
“어, 그래. 알겠어.”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감정이 짧게 스친 걸 놓치지 않았는지 박선화가 센스 있게 나서서 수현의 부담을 덜어줬다.
맞는 말이긴 했다.
박선화의 전시회 과제는 건축 모형. 작은 충격에도 망가지기 쉬운 것이었다.
“그런데 너, 모형 주제는 뭘로 할지 정했어?”
이왕 얘기가 나온 김에 수현이 궁금했던 걸 물었다.
이제 1학년 2학기.
동양화, 서양화, 조소, 디자인 4개의 전공 중 3번째 전공 수업을 받는 중이니 빠른 애들은 슬슬 진로를 정할 때였다.
수현은 서양화를 차윤희는 조소를 마음에 두고 있었고.
‘선화도 서양화를 선택할 줄 알았는데.’
수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과거 박선화는 수현과 같이 서양화 반에서 입시를 준비하다 예술학과에 진학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미술 전시회에서도 평범한 풍경화를 그려 제출했고.
그런데 갑자기 건축 모형이라니.
그건 디자인 전공에 가까운 시도였다.
물론 디자인으로 입시를 준비하다 예술학과에 지원할 수도 있겠지만, 과거와 확연히 달라진 행보에 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닐까 궁금해졌다.
“내가 그간 좀 설렁설렁했잖아.”
박선화가 별일 아니라는 표정으로 휘휘 손을 저으며 말했다.
“뭐가?”
“어?”
“설마 자아 성찰?”
“에이. 진짜.”
피식 웃어 보인 박선화가 다시 진지하게 고해성사를 이어갔다.
“세현예고 애들이 워낙 실력이 뛰어나기도 하고, 난 작가를 목표로 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승부에선 항상 한 걸음 물러나 있었던 거지.”
“응.”
“근데, 요즘 너희랑 친해지면서 조금 자극이 되더라고.”
“자극?”
“어. 지레 겁먹고 포기하는 거 말고, 안 되더라도 내 한계는 어딘지 한번 부딪쳐보고 싶다는 기분?”
“좋은데? 그런데 왜 디자인이야?”
“에이, 그럼 회화과 가서 너랑 붙어? 아님 조소과 가서 차윤희랑 붙을까?”
“뭐야, 좀 전엔 안 되더라도 부딪쳐보겠다며.”
“어라, 수현이 너, 지금 역시 그건 안 될 승부라고 못 박은 거야? 와, 나 상처받았어.”
“아니, 그게 아니라. 아, 말이 왜 꼬이지?”
수현이 당황하자 박선화가 깔깔 웃었다.
“장난이야, 장난. 음. 그러니까, 내가 전보다는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전업 작가 될 마음은 여전히 없거든. 난 그쪽은 아니야.”
박선화가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그보단 우리 엄마처럼 내 갤러리를 만드는 게 꿈이야. 일선화랑을 뛰어넘는 세계적인 갤러리.”
“그래.”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박선화가 만든 갤러리 수아는 박선화의 꿈처럼 세계적인 갤러리로 이름을 알렸다. 그러니 충분히 가능한 목표였다.
“그 꿈에 좀 더 다가갈 방법이 뭘까 생각했는데, 디자인이 좋겠더라고. 브랜드도 만들고, 도록도 만들고, 전시 테마며 여러 가지 해야 할 일들이 디자인을 전공하면 도움 되지 않을까 싶어서.”
“음. 그럴 수 있겠네.”
“어, 그래서 이번 전시회에는 내가 미래에 만들고 싶은 화랑을 모형으로 만들어 보려고.”
박선화가 활짝 웃었다.
“대단하다, 선화야.”
수현이 진심으로 감탄하며 박선화를 칭찬했다. 열일곱 나이에 벌써 이만한 꿈을 꾸고, 꿈을 이룰 수 있는 길을 스스로 찾고 있다니.
“헤헷. 어쨌든 너, 내가 나중에 화랑 만들면 우리 화랑에서 꼭 개인전 해야 한다?”
“물론이지.”
수현도 박선화를 향해 활짝 미소 지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어?”
박선화가 주머니에 차고 있던 삐삐를 꺼내 들더니 눈을 번쩍 떴다.
“와, 봉고 온 것 같은데? 얼른 들어가서 짐 챙기자!”
“그래. 얼른 가자.”
박선화의 재촉에 수현도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수현의 첫 번째 그림이 완성될 주말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