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38)
38화. 선택지
“디자인과 순수예술이 어떻게 구분되기 시작했는지 알고 있니?”
김여진이 수현 쪽으로 몸을 틀며 질문했다. 미술사 시간에 대강 배운 내용이긴 했다.
“18세기 이후부터 테크네와 파인아트가 분리됐고, 19세기 바우하우스가 설립되면서 모던 디자인이 시작됐다고 들었어요.”
“역시 잘 알고 있네. 그런데 초기 바우하우스는 미술학교와 디자인학교가 통합된 형태였어. 그러니까 학생들이 조각, 회화, 공예 모든 예술 분야를 넘나들며 배울 수 있었지. 그러다가 산업혁명 후기에 기능주의가 튀어나오면서 순수미술과 디자인이 명확히 분리된 건데 그 경계는 한참 후에 또 모호해지기도 했고.”
김여진의 말대로 디자인과 순수예술은 거리를 벌렸다 좁히기를 반복했다. 기능적인 면을 추구하던 디자인이 미적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변화한 시기가 있었고, 뒤샹과 앤디 워홀 같은 예술가들이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예술을 선보이며 대중의 사랑을 받기도 했으니까.
그나저나 여기서 갑자기 미술사 이야길 꺼내는 의도는 뭘까.
수현이 김여진의 다음 말을 잠자코 기다렸다.
“흠. 그러니까 내 생각에 디자인과 순수예술, 즉 서양화, 동양화, 조소, 디자인 같은 세부 전공을 벌써부터 구분하고 정할 필요는 없다 싶거든.”
“네?”
“1학년 동안 네 과목을 모두 배웠다지만, 이 정도로 충분히 모든 전공을 이해했다고 볼 수는 없는 거니까. 경험이 더 필요할 거란 얘기지.”
진로를 정하는 상담이 분명했다.
그런데 김여진은 진로를 벌써 정할 이유는 없다며 고개를 젓고 있었다.
어쩐지 흥미로운 이야기에 수현이 귀를 기울였다.
“수현이 너는 아무래도 순수예술 쪽에 좀 더 흥미를 느끼고 있지? 그중에서도 서양화에 말이야.”
김여진 선생이 수현을 뚫어보듯 물었다.
“네. 맞아요.”
“그래, 그럴 것 같았어. 그런데, 넌 다른 전공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거든. 어디까지 자랄지 확인하지 않고 덮기엔 아까울 정도로 재능이 뛰어나고 말이야.”
부끄러운 칭찬이었으나, 수현도 내심 아쉬웠던 부분이긴 했다.
입시라는 통과의례를 지나야 하니 정해진 규정에 따를 뿐, 서둘러 하나의 전공을 정해 그것만 파고드는 게 꼭 옳다고 할 순 없었으니까.
“음, 생각을 뒤집어 보자. 수현이 네가 이 시기에 전공을 정해야 하는 이유가 뭐지?”
“그야 입시 때문이 크죠.”
“맞아. 한국에서 미대에 진학하려면 적어도 늦어도 2학년부턴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가야 하니까. 그게 정석이고 많은 애들이 그 시스템을 따르고 있지. 그럼 이건 어떨까? 입시 같은 건 생각하지 말고 수현이 네 개인의 문제에만 포커싱해보는 거야. 네 미래를 생각할 때, 그러니까 작가로서의 활동과 수명을 고려한다면, 지금 입시에 맞춘 커리큘럼을 따라갈 필요가 있을까?”
“……네?”
“더 좋은 길이 있다면, 남들이 가는 길을 굳이 따라갈 필요는 없을 거야. 그렇지?”
조목조목 맞는 이야기.
그러나 한국의 미대 입시, 그리고 화랑의 보수적인 태도가 뒤집히지 않는 다음에야 개인이 손쓸 수 있는 부분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더 좋은 길이라니 뭘 염두에 두고 있는 걸까.
수현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혹시, 유학을 권하시려고요?”
그러자 김여진 선생이 양손과 고개를 동시에 저으며 강하게 부인했다.
“하하, 아냐. 물론 더 넓은 세상에 나가서 많은 경험을 하는 것도 좋겠지만, 외국 대학들도 대부분 전공이 세분화 돼 있어. 폭넓은 예술의 세계를 경험하는 덴 역시 한계가 있을 거야.”
김여진이 숨을 몰아쉬었다.
“혹시 ‘세인대’가 어딘지 들어봤니?”
“아, 알아요. 세인대.”
이름을 듣는 순간 수현의 머릿속에 과거 알았던 세인 예술대학교의 정보가 떠올랐다.
1990년. 종합대학교 안의 단과대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국내 미술대학들의 처지에 공감하며 만들어진 예술전문대학교.
미술과, 음악과, 연극과, 무용과.
단 네 개의 과로 규모가 작고 단출했으나 수업의 질은 무척이나 높았다.
전문 예술가를 양성한다는 취지 하에 다양한 수업을 경험하게 했고 2000년대 후반부턴 실제로 훌륭한 예술가를 여럿 배출해내는 명문.
‘해외 유명 대학의 커리큘럼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 독자적인 커리큘럼을 운영했었지. 학생이며 교수며 다들 의욕이 넘치는 분위기에 적당한 지원까지.’
역사는 짧지만 단기간에 훌쩍 성장하며 국내 미술대학 탑3에 들게 되는 세인대.
아직은 내세울 실적이 없는 초창기지만, 97년 권인호 학장이 부임하면서부터 학교의 위상이 크게 높아지게 된다.
‘그런데, 김여진 선생이 왜 세인대를 추천하는 거지?’
수현이 김여진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번 상담의 목적은 세현예고 커리쿨럼 안에서 동양화, 서양화, 조소, 디자인 중 한 과목을 정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김여진은 뜬금없이 세인대를 추천하며 네 개의 전공을 좀 더 깊이 있게 공부해보란 조언을 해주고 있었다.
멀리 내다보면 도움이 될 얘기지만 당장은 필요하지 않은 얘기.
“사실 내 지도 교수님이 이번에 세인대로 가시게 됐어.”
수현의 궁금증은 이어지는 김여진의 이야기로 풀리기 시작했다.
“나도 내년부턴 강사로 출강할 예정이고.”
“아.”
“세인대는 출범은 다소 늦었지만 몇 년 안에 국내 최고 예술대학으로 우뚝 서게 될 거야. 반드시 그렇게 만들 생각이거든. 그러려면 무엇보다 좋은 학생들이 필요한데, 내가 볼 때 수현이 네가 정말 적합한 인재 같아서 말이야.”
그제야 조금씩 상황이 이해됐다.
초창기 바우하우스처럼 경계를 두지 않고 다양한 예술을 경험하고 배우게 할 세인예술대.
김여진은 수현이 거기 진학해 예술가에게 필요한 양분을 가득 머금길 권하고 있었다. 더불어 수현 같은 뛰어난 학생을 양성해 세인예술대의 명성이 높아지길 기대했고.
‘재학생과 졸업생들의 역량과 활동에 따라 학교의 평판이 달라질 수 있으니 뛰어난 자질을 보이는 학생들을 스카우트하려는 거구나.’
영광스럽고 감사한 제안이었다.
그러나 바로 결정할 일은 아니었다.
“고민해볼게요, 선생님.”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해 봐.”
김여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인예술대는 국내 미술대학과 가는 길이 다르다 보니 입시도 독자적인 방식으로 진행했다.
포트폴리오를 따로 준비해야 하는 것은 물론, 창의성을 보는 시험을 2박 3일에 걸쳐 치르는 것까지 기존 미술대학과는 궤를 달리한 거다.
그리고 그 점은 입시생들에게 커다란 진입 장벽이 됐다.
보통 미술대학은 전공 실기와 공통실기인 소묘 시험을 이틀에 나누어 본다. 그러니 학생들은 막판 눈치작전으로 원서를 쓸 수 있고.
실기시험 유형이 거기서 거기다 보니, 학과성적에 따라 상향 지원, 하향 지원해도 무리 없이 시험을 치를 수 있는 구조인 거다.
그러나 입시 경향이 완전히 다른 세인예술대는 변수가 생겼을 때 대응할 선택지가 없었다.
올인하자니 리스크가 크고, 병행하기에도 부담이 큰 학교.
김여진은 수현이 혹시 그런 부담감을 느낄까 봐 세인예술대의 장점을 내세우며 적극적으로 어필한 거겠지만.
‘그건 별문제가 아니지.’
사실 수현에겐 크게 부담되는 일이 아니었다.
입시야 이미 정점에 달한 경험이 있고, 예전보다 높은 성취를 얻은 지금이라면 석고 데생이든, 정물화든, 유화든, 2박 3일짜리 창의력 시험이든 뭘 던져줘도 두려울 게 없었다. 오히려 수현이 꽂힌 건 다른 지점이었다.
‘김여진 선생의 말대로 타 전공에도 좀 더 관심을 두는 게 좋겠어.’
과거 수현은 미련스럽게 회화에만 매진했다. 그렇다고 목표 지점에 도달한 것도 아니어서 좀 더 다양하게 공부했으면 풍성한 작품을 그려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고.
그러니 입시와 별개로 김여진 선생과 인연을 이어간다면 도움을 받을 수 있겠다 싶었다. 세인예술대란 가능성을 무조건 닫아둘 필요도 없었고.
“어쨌든 세현예고에선 세현예고의 룰을 따라야하니, 수현이 넌 서양화를 택하겠지만, 그냥 그걸로 끝이라 생각하지 않았으면 해서 상담을 좀 딥하게 한 거야.”
김여진이 사람 좋은 얼굴을 하며 활짝 웃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시야가 트인 것 같아요.”
“무슨 말을. 난 가르치는 게 천직이라 너처럼 훌륭한 자질이 보이는 학생을 보면 몸이 막 근질거리거든. 세현예고에 있는 동안에도, 서양화 전공이라고 내외하지 말고, 궁금하거나 배우고 싶은 게 있음 언제든 찾아와. 알겠지?”
“저야 너무 좋죠.”
수현도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러니까 윤희는 조소과, 수현이는 서양화, 나는 디자인. 힝. 우리 2학년 때는 다 떨어지게 생겼네.”
어느덧 12월 초.
미술과 1학년 모두가 전공을 정했고 2학년부터 함께 수업하게 될 선생님과 교실을 안내받았다.
전공이 다른 수현과 차윤희, 박선화는 당연히 반이 갈리게 됐고 박선화는 그게 영 서운한 얼굴이었다.
“그래도 소묘가 남아있잖아. 학과 반도 붙을 가능성이 크고.”
“아, 난 1학년 때도 니들이랑은 다른 반이었잖아. 막판에 전시회 전담반이랑 전공 두 번 겨우 같은 반 했던 거지. 게다가 전시회 전담반은 선착순이었고. 아, 몰라. 떨어지면 어떡해. 너무 심심할 것 같은데.”
“심심할 새가 있을까? 우리 이제 본격적인 입시 모드에 진입하게 될 텐데, 여유가 있겠어? 너 소묘도 그렇고, 디자인도 외사랑이지 아직 실력은 좀 달리잖아.”
“와, 기분 나쁘네? 차윤희 너 뭐 잘못 먹었어? 아니다, 너 혹시 차였어? 그래서 그래?”
“뭔 소리야? 내가 뭘 차여?”
“뭐야? 왜 발끈해? 너 진짜야? 혹시 설마 진짜?”
이제는 티격태격하는 게 그저 일상인 차윤희와 박선화의 모습을 보며 수현이 빙그레 웃었다.
“그래, 심심하긴 하겠다. 니들이랑 다른 반 되면 이렇게 싸우는 것도 못 보게 될 텐데.”
“힝. 그러니까 말이야. 우리 기도하자. 꼭 같은 반 되게 해달라고.”
“흠. 미운 정도 정이라고 나도 뭐 그럭저럭 나쁘지 않긴 해.”
“아, 맞다. 우리 이제 담주면 방학이잖아?”
재잘재잘 떠들다 뭔가 떠올랐는지 박선화가 손뼉을 짝 쳤다.
“어, 월요일에 방학식이야.”
“수현이 너, 이번에도 집에 먼저 들를 거지?”
“그래야지. 그날 저녁엔 부모님이랑 동생이랑 간단히 식사하기로 했어.”
이번 겨울방학, 수현은 영국 런던을 향하게 됐다.
전시회 특전으로 제임스 리의 레슨을 받게 됐는데, 그걸 런던, 그의 작업실에서 하게 된 거다.
제임스 리는 약속한 대로 비행기 티켓을 보내줬는데 날짜가 빠듯했다.
방학식 후 3일 후엔 바로 런던으로 출발해야 하는 일정이었다.
‘갑자기 일정을 묻는 걸 보니 떠나기 전에 하루 놀자는 얘길 하려는 건가.’
수현이 박선화의 표정을 살피며 생각했다.
안 그래도 일선화랑에 들러 강유진 관장에게도 인사를 전하고 스티브의 작업도 한번 들여다볼 참이었다.
‘그 후에 몇 시간 애들이랑 놀자고 해야겠네. 밥도 좀 사주고.’
수현이 싱긋 웃었다.
박선화나 차윤희나 고맙게 늘 먼저 수현에게 다가왔으니 이번엔 자신이 먼저 시간을 내달란 얘기를 해봐야겠다 싶었다. 그런데.
“그럼 영국 가기 전날 밤엔 우리 다 같이 아뜰리에 숙소에서 자는 게 어때?”
수현의 예상보다 스케일 큰 제안을 박선화가 꺼냈다.
“하긴. 다음 날 일찍 출발하려면 그게 더 편하긴 하겠네. 어차피 한 차로 갈 거잖아.”
차윤희도 저항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편해? 뭐가? 어딜 한 차로 가?”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수현이 되묻자 박선화와 차윤희가 씨익 웃었다.
“같이 움직일 거니까.”
“어?”
“우리도 런던에 갈 거거든.”
“런던에? 너희가?”
뜻밖의 선언에 수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