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39)
39화. 런던행(1)
“그럼 너 혼자 갈 생각을 했단 말이야?”
“그러게, 서운하게. 긴긴 겨울방학 동안 우릴 안 보려고 했어?”
몰아치는 차윤희와 박선화의 공격에 수현이 어지러운 얼굴을 했다.
“아니,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었잖아. 그리고 잠깐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된 거야? 진짜 너희도 런던에 간다고? 정말?”
수현의 질문에 박선화와 차윤희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한수현. 너도 좋은 거야? 우리가 간다니까?”
“어유, 이제야 말이지만 이거 허락받느라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나 몰라.”
“맞아. 박선화 쟤는 엄마가 전공이나 소묘 중 하나라도 A 받아야 보내준다고 하셔서 미친 듯이 그림만 그렸잖아. 그러다가 지지난 주 소묘 시험에서 A- 하나 겨우 받아가지고 극적으로 가게 된 거고.”
“……강유진 관장님이?”
“어, 우리가 알던 관장님이랑 박선화 엄마는 아주 다른 사람이더라니까? 여튼 박선화 아주 눈물 질질 짜면서 그림 그렸어. 고생 많았다, 진짜.”
“와, 나만 힘들었어? 차윤희 너도 아버지한테 약속 여러 개 했다며. 다음 작품 조수도 하기로 하고, 용돈도 보태기로 했다고 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경비의 반은 아빠가, 반은 내 용돈에서 내기로 했거든. 하, 그래도 좋다. 런던이라니! 그것도 한수현이랑 같이!”
박선화와 차윤희는 수현 모르게 런던 여행에 동행할 계획을 세운 모양이었다.
“근데, 너흰 런던에서 뭘 하려고? 숙소는 어디로 잡았고?”
장난이 아니라는 걸 알자 다음으론 걱정이 밀려왔다.
수현이야 제임스 리와 주기적으로 레슨이 있을 거고, 남은 시간도 대부분 그림을 그릴 게 빤했다.
준의 집에서 쉬고, 자는 시간을 빼면 온종일 작업실에 있을 텐데. 박선화와 차윤희가 온다니 얘들을 챙겨야 하나, 어떻게 놀아줘야 하나, 혹시 런던행 비행기표만 끊어놓고 아무 생각 없이 있는 건 아닌가. 염려가 몰려온 거다.
“걱정마. 스티브가 쫙- 준비해주기로 했어.”
“스티브?”
“응. 걔 인맥이 엄청나잖아. 지난번에 제임스 리랑 같이 왔던 준이라는 분. 그분이랑도 친하다고 했고.”
그랬지.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술전시회 경매가 있던 날.
수현은 강당 2층에서 스티브와 준, 제임스 리가 함께 앉은 모습을 지켜봤다. 이후 준과 제임스 리가 뉴욕 화랑에서 만나 꽤 친하게 지냈다는 걸 들었고.
‘그럼 스티브가 준에게 일정을 묻고 얘들이 거기에 맞춰 동행할 계획을 세운 거구나.’
그런데 수현의 예상을 넘어서는 일이 더 있었다.
“스티브가 준비부터 현장 가이드까지 책임져주기로 했어. 영국 인맥을 털어서 제대로 놀게 해주겠대.”
“……현장 가이드?”
“어.”
“잠깐. 그럼 스티브도 가는 거야?”
“그렇지?”
“너희 셋 다 같은 시기에 런던에 온다고?”
“맞아.”
발이 넓은 스티브는 준의 집과 가까운 거리의 숙소를 한 달간 빌렸고, 준의 도움으로 작업실도 확보했다고 했다. 그곳 역시 제임스 리의 작업실 근처라 언제든 드나들 수 있었고.
“그러니까 신경 쓸 거 없어. 우리도 그림을 그리긴 할 건데, 솔직히 관광에 좀 더 집중할 것 같거든.”
“응. 수현이 너한테 방해될 일은 없을 거야. 한 번씩 저녁이나 주말에 쉴 때는 같이 놀자고 하겠지만. 하핫. 우린 낮엔 전시도 보고 템즈강도 보고, 맛집도 가고 나름 빠듯하게 계획을 세웠거든.”
“맛집은 빼야지. 스티브가 런던의 음식은 크게 기대하지 말라고 했잖아.”
“아, 꼭 맛이 중요해? 여행이란 분위기로 먹는 거지? 어쨌든 우리 할 거 많아. 타워브리지, 세인트 폴 대성당, 버로우마켓, 베이커가 221B도 가기로 했어.”
“베이커가? 거긴 첨 듣는데? 어디야?”
“셜록홈즈 박물관 말이야. 어휴, 차윤희 넌 말해줘도 맨날 까먹냐.”
짧다면 짧다고 하겠지만 한 달은 긴 여정이었다.
그래도 나름 목표를 세우고 떠나는 여행이라니 다행이었다.
‘낯선 땅에 뚝 떨어질 생각에 좀 막막했는데 심심할 일은 없겠네.’
수현이 싱긋 웃었다.
마침 런던 화랑에 볼일이 있는 강유진 관장이 런던까지 부모님을 대신해 동행해주기로 했지만, 이후엔 내내 혼자 움직이는 일정이라 긴장되긴 했다.
하지만 애들과 함께면 길을 찾거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도 덜 부담스러울 테고. 무엇보다 박선화와 스티브는 영어에 능통하니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을 떠나기 직전.
수현은 자신이 이 친구들을 얼마나 과대평가했는지 제대로 깨닫게 됐다.
***
12월 22일.
김포국제공항.
“내 여권 어딨지?”
박선화와 차윤희가 혼비백산한 얼굴로 가방을 뒤지고 있었다.
“좀 전까지 있었잖아. 티켓도 제대로 발권했고.”
“그러니까 말이야.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여권이 갑자기 어디로 사라진 거야?”
“윤희 너는? 서류가 왜 갑자기 안 보인다는 건데?”
“몰라. 나 분명히 여기 작은 가방에 넣었거든? 아까 화장실에서 손 씻기 전에. 아! 설마!”
해외여행을 몇 번 해본 애들이지만 자기들이 전부 책임지고 준비한 건 처음이라서일까. 덜렁대는 수준이 도를 넘었다.
짐을 부쳐야 하는데 여권과 신분을 증명하는 서류, 부모님 동의서 같은 게 갑자기 보이지 않는다며 난리였다.
“쟤들 원래 좀 덜렁거리나?”
화장실로 냅다 달려가는 박선화와 차윤희의 뒷모습을 보며 스티브가 수현에게 물었다.
“활발하긴 한데, 오늘은 좀 과한 느낌이긴 하네.”
“넌 다 챙겼지?”
“어, 난 여기 작은 가방에 따로 넣어 뒀어서.”
“뭐, 여차하면 우리끼리만 가자.”
“어?”
“어우. 나 쟤들 감당 못 할 것 같아.”
그렇게 스티브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때, 잠깐 통화를 하러 자리를 비웠던 강유진 관장이 돌아왔다.
“애들은?”
“아, 그게 선화는 여권이 사라졌다고 하고, 윤희는 서류가 안 보인다고 해서요. 화장실에 두고 온 거 아닌가 하고 찾으러 갔어요.”
“못살아.”
강유진이 머리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무슨 정신들이야? 걔들 아까 잃어버릴 것 같다고 징징대서 나한테 맡기라고 했는데, 그래서 내가 다 따로 챙겼는데, 그걸 잊어버렸다니? 그것도 둘 다?”
“허, 정말요?”
“그래. 여기 내가 가지고 있어.”
강유진이 애들의 여권과 서류를 들어 보였다.
“하하, 마침 저기 오네요.”
세상 무너진 표정으로 걸어오는 차윤희와 박선화의 모습을 보며 수현이 저도 모르게 크게 웃었다.
그렇게 공항에선 여권으로 정신을 쏙 빼고, 비행기 안에선 기내식이며 간식을 얼마나 먹었는지 화장실을 들락거리느라 한바탕 난리던 애들은 런던 히드로 공항에선 완전히 얼어붙고 말았다.
입국 심사에서 그만 영혼이 탈출해버린 거다.
“……Pardon? (뭐라고요?)”
차윤희야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제법 영어를 한다는 박선화가 당황하는 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하, 망할 영국식 발음.”
결국 스티브의 도움으로 다들 무사히 심사대를 지나올 수 있었고, 짐을 찾고 나선 그야말로 녹초가 되어버렸다.
“자, 자. 여기서 지치면 안 돼. 얼른 숙소까지 가서 제대로 쉬자.”
“어우. 삭신이야. 벌써 비행만 12시간이 넘었잖아요. 죽을 것 같아요.”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다. 잘 생각해봐. 런던에 가겠다고 한 게 누구였는지.”
“히잉. 그렇긴 한데.”
덜덜덜. 짐을 끌고 게이트를 나서는 애들의 눈은 반쯤 풀려있었다.
공항에서 런던 시내까지 들어가려면 다시 지하철을 한 시간 반쯤 타거나 고속버스를 한 시간 이용해야 하니 생각만 해도 질리는 일정이었다.
그런데-.
“웰컴!”
대합실로 통하는 문이 열리자 생각지도 못한 반가운 얼굴이 서 있었다.
제임스 리와 준이었다.
“세상에.”
“구세주다.”
“와, 우릴 데리러 와준 거야?”
애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눈치 빠른 스티브가 얼른 준과 제임스 리에게 다가가 감사 인사를 전했고 강유진 관장도 싱긋 웃으며 반가움과 고마움을 표했다.
그리고-.
“저 차예요?”
“진짜?”
“우리 이거 탄다고요?”
공항 바깥에서 일행을 기다린 건 영화에서나 보던 호화로운 리무진이었다.
“특별히 준비했어. 다들 런던에 온 걸 환영해. 그것도 이 환상적인 크리스마스 시즌에.”
제임스 리가 원래 기분파였나?
지난 생엔 지면으로만 접했으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수현에겐 무척 새롭고 놀랍고 얼떨떨했다.
“그러게요. 크리스마스네요. 그것도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겠는데요?”
강유진이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말 작은 눈송이가 하나둘 떨어지고 있었다.
런던에 온 걸 환영한다는 반가운 인사처럼.
***
1시간 후 준의 집.
“춥진 않아?”
“아뇨. 엄청 따뜻해요. 감사해요. 신경 써주셔서.”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말해. 어려워하지 말고. 내 집에 온 이상 수현은 내 손님이기도 하니까.”
“네. 그럴게요.”
“그럼 오늘은 푹 쉬어. 시차 때문에 힘들 거야. 내일은 늦게 깨울게. 제임스도 내일은 작업실 구경만 잠깐 시켜준다고 했으니까.”
수현을 고려해 또박또박 짧게 그리고 느린 말투의 영어로 용건을 전한 준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문을 닫아주었다.
리무진을 타고 런던 시내까지 온 일행은 좀 전에야 흩어졌다.
강유진 관장은 시내의 호텔로, 박선화와 차윤희, 그리고 스티브는 준의 집과 한 블럭 떨어진 게스트하우스에서 각각 내린 거다.
저녁이라도 함께 먹을까 고민했는데 다들 밥보단 잠이 더 고픈 얼굴이었고, 오늘은 쉬고 내일 만나자며 손을 흔들었다.
“예쁜 집이네.”
수현이 침대에 털썩 앉으며 창밖을 내다봤다.
외관도 내부도,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도 예쁜 준의 집.
“좋다.”
게다가 공기가 따뜻했다.
난방도 난방이지만 아기자기한 소품과 은은한 조명, 깔끔한 침구, 인테리어가 무척 포근한 느낌을 준달까.
런던의 첫인상과도 어울렸다.
우아하고 고풍스럽고 두근거리는 이곳.
“실감이 안 나네.”
꿈같은 일이었다.
과거 수현은 유럽을 와본 일이 없었다. 해외여행이라고 해봐야 동남아 두 번이 전부.
게다가 지금은 동경하던 화가들이 지척에 있다.
후웁.
수현이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가까이 있을 예술가들의 호흡을 조금이라도 느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런던의 어떤 것들이 그 위대한 예술가들을 탄생시킨 걸까.’
수현이 천천히 풍경을 곱씹었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거장들에게 영감을 준 풍경들을 찾아내 그것들을 온전히 느끼고 그려봐야겠다 결심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다가 수현은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땐.
-식사는 주방에. 우린 작업실에 있을 거야. 아래는 작업실 연락처.
언제 두고 간 거지?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데 일어나보니 머리맡 테이블에 준이 남긴 메모가 있었다.
곤히 잠든 수현을 깨우지 않고 짤막한 메시지를 남겨둔 모양이었다.
“작업실이면 바로 근처잖아.”
준의 집과 작업실이 있는 이곳은 예술가들의 마을로 유명한 런던 쇼디치 거리.
경기가 나빠진 공장들이 문을 닫으면서 90년대 중반 싼값에 집이 나온 바람에 예술가들이 몰려들어 분위기가 확 달라진 동네였다.
‘과거엔 위험하기 짝이 없던 골목들이 예술가들의 캔버스로 바뀌었다고 했지. 그렇게 점점 런던에서 가장 힙한 명소가 되었고.’
“안 그래도 한번 걸어보고 싶었어.”
쇼디치는 과거 잡지와 여행자들의 블로그, 영상으로도 질리게 본 곳이었다.
어제 리무진을 타고 올 때 제임스 리와 준이 작업실 건물의 위치를 알려줘, 혼자 찾아갈 자신도 있었고.
“구경도 할 겸 슬슬 가볼까?”
수현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단정히 씻고 외출복을 단단히 챙겨 입고 화구 가방을 든 수현이 들뜬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