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40)
40화. 런던행(2)
“한국보다 훨씬 더 추운 것 같은데?”
저절로 옷깃이 여며지는 날씨였다.
어제야 차를 타고 이동했지만 오늘은 짐을 들고 걷는 길.
칼바람에 손이 에일 듯했다.
그러나 수현은 한 번씩 추위를 잊었다.
수백 년 된 낮은 건물들과 건물 높이보다 크게 자란 가로수들.
시원하게 뻗은 다리와 멀리 보이는 템즈강.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큰 영국인들 사이에 섞여 걷는 것만으로도 다른 세상에 온 기분이 충만해 가슴이 쿵쿵 뛰었던 거다.
“이쪽으로 가볼까?”
작업실은 대로를 따라 직각으로 두 번 꺾으면 바로였지만 수현은 일부러 골목을 빙빙 돌았다. 쇼디치 거리의 생동감을 느끼고 싶었다.
“또 있다.”
골목을 구경하는 재미는 무척이나 쏠쏠했다.
코너를 돌 때마다 이름 없는 화가들이 그려놓은 낙서들이 가득 펼쳐졌고.
“엄청나네. 진짜.”
그것들이 뿜는 에너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어떤 건 아기자기하고 어떤 건 대담했다.
색과 선을 어떻게 썼는지 들여다보고 있자면 그림이 어떤 순서로 그려졌는지 상상할 수 있었다.
죽은 전시장과는 달랐다.
끊임없이 꿈틀대는 열정적인 기운.
그리고 거리는 자신이 품은 생명력을 증명이라도 하듯.
달칵달칵.
치이익-.
치이이익-.
스프레이 통을 흔들고 뿌리는 경쾌한 소리를 여전히 머금고 있었다.
“이 날씨에 누가.”
근방에도 누군가 있는 듯했다.
수현은 놀라면서도 한편 궁금해져 소리가 들리는 골목으로 저도 모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내놔! 내 거라고!”
“증거 있어?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물건인데 어째서 네 거라는 거야?”
“그야 우리 형이 준 거니까!”
“형? 네가 형이 어딨는데?”
“있어! 형이 준 물건이니까 못 알아볼 리도 없고!”
누군가 다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딱 봐도 10대로 보이는 소년과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덩치 셋.
‘비겁하네. 셋이서 어린 애 하나를 두고.’
빠른 영어라 전부 알아듣긴 어려웠지만 눈치로 보니 덩치들이 소년의 물건을 빼앗으려는 상황 같았다.
‘저건 스프레이잖아?’
소년이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악하는 물건은 그림 도구인 스프레이.
소년과 덩치들 모두 거리 벽화를 그리는 화가들로 보였는데, 스프레이를 두고 서로 자기 거라 우기고 있었다.
“지난번에도 빼앗아갔잖아. 왜 자꾸 괴롭히는 거야?”
“빼앗아가다니, 누가 들으면 우리가 도둑이라도 되는 줄 알겠네. 그것도 우리 물건이 맞았고, 이것도 우리 게 분명한데?”
“그러게 말이야. 내가 오늘 집에서 나올 때 분명히 노란색, 파란색, 검은색을 두 개씩 챙겨왔거든. 그런데 지금은 하나씩밖에 없으니까 이 노랑, 파랑, 검정은 내 물건이 맞는 거잖아?”
“그걸 누가 믿어!”
“그럼 이게 네 거라는 건 누가 믿어주는데?”
“맞아. 네 말은 무조건 맞다는 거야? 숫자로 봐도 이쪽이 우세한데?”
덩치들이 소년을 놀리며 피식거렸다.
“진짜 비겁하네. 니들 그림으로 지니까 시비를 거는 거지?”
“뭐? 그림으로 져?”
“한스 아저씨가 너희 벽화를 다 지워버린 일 때문에 그러는 거잖아! 그 뒤에 나랑 형이 그린 그림은 그대로 둔 걸 보고 질투가 나서!”
소년의 말에 덩치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다가 금세 뻔뻔한 얼굴로 돌아왔다.
“한스? 야, 너희들 한스가 누군지 알아?”
“글쎄? 소시지 집 아들인가?”
“아냐, 걘 루터지. 한스는 채소가게 점원 아니야?”
“무슨 소리야. 채소가게 점원은 에밀리잖아. 아무리 남자처럼 생겼기로서니.”
“푸하하. 맞아. 에밀리였지.”
“어쩌지? 우린 한스가 누군지 모르겠는데? 네가 하는 말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고?”
어깨를 으쓱 올리며 웃음을 터트리는 덩치들. 소년은 약이 올라 곧 울음이라도 터트릴 표정이 됐다.
‘이런 걸 쓰레기 질량보존의 법칙이라고 하나. 런던까지 와서 이런 애들을 보게 되다니.’
상황을 지켜보던 수현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대화로 추론해보니 덩치들이 먼저 한스란 아저씨네 담벼락에 그림을 그렸고 그게 마음에 안 든 한스가 지워버렸는데, 그 후 소년과 그의 형이 그린 그림은 그대로 뒀던 모양이었다.
덩치들은 그게 눈꼴 시었던 거고.
‘따지려면 담벼락 주인인 한스를 찾아갔어야지, 왜 저 앨 괴롭히는 거야? 그리고 실력 부족으로 인정받지 못한 거면 분하더라도 한 걸음 더 성장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거 아닌가?’
다행히 행인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덩치들은 사람들의 시선이 의식됐는지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얼른 소년의 화구통에서 스프레이를 몇 개 휙 집어 들었다.
“왜 이러는 거야! 내놔! 내놓으라고!”
“이거 우리 거라니까?”
“무슨 소리야! 이건 내 거야!”
소년이 소리를 질렀고 남자들은 빼앗은 스프레이를 자기들끼리 던져가며 약을 올렸다.
“이봐요. 그거 저 애 거 아니에요?”
구경꾼 중 하나가 참견하자 덩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답했다.
“아니에요. 우리가 잃어버린 걸 얘가 가지고 있던 거죠. 원래 우리 게 맞아요. 그치?”
“그럼요. 이거 우리 물건이 분명하다고요.”
태연하게 우기는 덩치들.
이름이 쓰여있는 것도 아니고 흔하디흔한 스프레이다 보니 이들의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가려낼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구경꾼이 맥없이 물러나는 순간,
‘어? 통 옆면에 저 흔적들은 뭐지?’
수현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잠깐만요?”
수현이 나선 게 뜻밖이었는지 덩치들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우리?”
“아까부터 지켜봤는데 그 스프레이, 이 아이 물건이 맞아요. 아무래도 아저씨들이 뭔가 착각하신 것 같은데요.”
“착각? 우리가?”
“휴. 꼬마야. 괜한 일에 나서지 말고 가던 길 가는 게 어떨까?”
“그래. 우린 나쁜 사람들이 아니야. 외국인, 그것도 어린 여자애를 윽박지르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고 말이야.”
남자들이 주변을 의식하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받고 수현도 활짝 웃었다.
“음. 그럴 것 같았어요. 다들 예술가잖아요.”
“어? 예술가?”
“아름다운 것들을 그리는 사람들이 나쁜 일을 할 리가 없죠. 아마 착각에서 비롯된 오해일 거예요. 아, 저도 그림을 그리거든요.”
수현이 들고 있던 화구 가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흠. 그래? 반갑네?”
말과는 다르게 떨떠름한 표정들. 자신들을 예술가라 불러주는 수현에게 함부로 대하기도, 그렇다고 말을 들어주기도 난감한 얼굴이었다. 수현은 모른 척 밀어붙이기로 했다.
“어쨌든 스프레이요. 저 애 물건이 맞아요.”
수현이 성큼 남자들에게 다가서자 행인들도 호기심을 보이며 고개를 쭉 내밀었다.
“잠깐 줘볼래요?”
수현이 스프레이를 든 덩치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
“확인만 할게요.”
“뭘?”
“잠깐이면 돼요.”
싱긋 웃으며 요구하자 덩치가 어정쩡하게 스프레이를 내밀었다.
“너도 줘볼래?”
수현은 이번엔 소년의 화구박스를 가리켰다.
소년은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지만 수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결국 화구박스를 내밀었다.
그리고, 슥- 슥- 슥.
수현이 스프레이 통들을 하나하나 바닥에 내려놓더니 이리저리 옮겨가며 배치했다.
“뭐야?”
“뭘 하는 거지?”
사람들이 수현의 행동을 궁금해할 때.
“역시, 맞았네.”
수현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덩치들과 소년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여기 이름이 쓰여있는데요?”
마치 퍼즐 조각처럼 하나씩 떨어져 있을 땐 보이지 않던 비밀.
그러나 그걸 규칙에 맞게 세우자 통 옆면으로 글씨가 드러났다.
“마크? 네 이름이 마크니?”
옆면에 나타난 글씨를 확인한 수현이 소년에게 물었다.
“어. 맞아! 내가 마크야.”
“형이 준 거라고 했지? 아주 재밌는 형이네. 이렇게 스프레이 통들을 세워놓고 네 이름, 마크를 쓴 건가 봐.”
구경꾼들에게도 잘 들리게 수현이 큰 소리로 말했다.
“어머, 정말이네. 마크라고 똑똑히 쓰여있잖아?”
“저 스프레이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다른 스프레이로 큼지막하게 이름을 써둔 거구나.”
“그러니까요. 통 하나만 볼 땐 때가 묻은 것처럼 보였는데 모아놓고 보니 글씨가 되네요?”
“와, 근데 저 애는 그걸 어떻게 발견한 거지?”
신기해하며 웅성거리는 사람들.
그와 동시에 덩치들의 안색은 급격히 나빠졌다.
“이제 오해는 풀린 거죠?”
수현이 싱긋 웃으며 덩치들에게 말했다.
“어? 아, 그러게.”
“흠. 흠. 이름이 적혔을 줄이야.”
더 우기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명백히 주인이 드러난 상황에서 고집을 부릴 여지도 없었고.
“충분히 헷갈릴 수 있죠. 이건 그냥 평범한 스프레이니까요. 그치?”
수현이 마크에게 눈을 찡긋하며 동조를 구했다.
마크는 분한 듯 씩씩거렸지만 그래도 물건을 찾은 게 다행이었는지 화구박스에 스프레이를 차례로 담으며 중얼거렸다.
“어쨌든 이건 내 거야.”
그나마 이 정도면 평화로운 해결이겠지?
사건은 마무리됐고, 덩치들은 쩝쩝 입맛을 다시다 김이 빠졌단 얼굴로 엉거주춤 돌아섰다.
“어유, 저 애 눈썰미가 보통 아니네. 저걸 어떻게 봤을까?”
“어쨌든 잘 해결돼서 다행이에요.”
몰려들었던 구경꾼들도 하나둘 자리를 떴다. 오래 구경할 정도로 큰 사건도 아니었고, 날씨는 무척이나 추웠으니까.
‘나도 이제 가볼까.’
수현이 시계를 확인하고 걸음을 돌렸다. 슬슬 작업실에 가봐야 할 때였던 거다. 그런데-.
“어떻게 안 거야?”
짐을 다 챙긴 마크가 수현을 불러세웠다.
“어?”
“나도 몰랐는데, 스프레이에 내 이름이 쓰여 있는지 어떻게 알았냐고.”
“아, 별거 아니야. 화구박스에 담긴 보라색, 회색, 연두색 스프레이 옆면으로 ‘a’란 글자가 얼핏 보이더라고. 다른 것들도 그런가 싶어서 살펴보니까 글씨의 파편들로 보이는 흔적이 있어서. 근데 그게 정말 단어로 만들어질 줄은 나도 몰랐어. 한번 확인해본 거지.”
“진짜 대단한 관찰력이네.”
마크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너도 그림을 그린다고 했지?”
“응. 맞아.”
“이 동네에선 못 보던 얼굴인데, 이사라도 온 거야?”
“아, 난 한국에서 왔어. 한 달 정도 여기 머무를 생각이고.”
“흠. 그랬구나.”
마크가 중얼거리더니 다시 툭. 말을 뱉었다.
“아까 그 녀석들은 예술가가 아니야.”
“하하. 그래?”
“이 골목의 골칫덩이들이지. 그런 녀석들은 예술가라고 할 수 없어. 그림 실력도 형편없고 말이야.”
아무래도 앙금이 깊은 사이인가 보네.
수현이 마크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았다.
“어쨌든 아깐 도와줘서 고마워.”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야.”
“흠, 그런데 우리 형이 도움을 받으면 꼭 보답해야 한다고 했거든.”
“어?”
수현이 눈을 끔뻑이자 마크가 화구박스에서 스프레이 하나를 꺼내 건네주었다.
“……?”
“피터 아저씨 꽃집 옆 건물로 한번 놀러 와. 이걸 보여주고 내 초대로 왔다고 말하고.”
“어?”
“쇼디치 거리의 진짜 예술가들이 누군지 알려줄게. 정말 재밌을 거야.”
마크가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