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adin of the Dead God RAW novel - Chapter (377)
377화. 영원한 창백 (3)
아이작은 자신이 이름 없는 혼돈의 사도로서 이 세상의 결말을 본다면 어떨까 하고 가끔 상상하곤 했다.
전쟁이 격해질수록, 세상이 험해질수록 더더욱 그런 충동에 시달리곤 했다.
주로 자신이 지켜야 할 체제─빛의 법전이라든가, 천사들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최악의 것들로 보일 때 그런 충동이 느껴졌다. 자신이 아등바등 애써가며 지켜낸 존재들이 사실 기분 나쁘고 퀴퀴한 똥덩어리들에 불과했다면……?
그냥 싹 쓸어버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실제로 작정하고 촉수를 꺼내면 무슨 상황이든 쉽게 해결된다.
아이작은 이때까지 살아남기 위해 빛의 법전 성기사를 흉내 냈지만, 사실 어느 정도 시점부터는 위장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가 도덕성도 규율도 전부 버리고 외지를 떠돌며 성장에 매진했다면 지금보다 이미 몇 배는 더 강해졌을 수도 있었다.
거리낌 없이 포식하고, 기이한 의식과 주술도 남용하며, 세상에 구멍을 내 혼돈의 권속들을 마구잡이로 끌어들였다면.
하지만 그러지 않는 이유는 그가 아끼고, 그를 따라주는 사람들 때문이다.
아이작은 자신이 괴물이 되는 것보다 자신을 믿는 사람들의 기대를 배반하는 것이 더 무서웠다.
그리고 그들은 아이작이 의지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했다.
이제 와서 명천사 하나의 위협에 걱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는.
“그렇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면 효과가 있을 것 같나? 통하면 모를까 이렇게 들통나면 스스로가 우스워 보일 거란 생각은 안 들던가?”
아이작이 비꼬듯 쏘아붙였지만, 창백은 그다지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사실 명천사와 대화를 나눠 봤자 큰 의미는 없다.
그것도 이미 적으로 만난 이상.
그들은 전달자이자 집행자이지, 의견을 내는 존재가 아니다.
[알고 있다.]“부끄러움을?”
[네가 그들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불사 황제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었지.]아이작은 창백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생각해 보려 했지만, 창백은 날개를 크게 펼쳐서 느리게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네 약점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구나.]창백은 날개를 크게 펄럭였다.
사막을 하얗게 얼린 서리들이 더욱 새하얗게 번져 나갔다.
***
얼마나 맹렬한 추위가 다가오는 것인지, 커다란 얼음 결정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할 지경이었다.
펑, 퍼펑! 이사크레아 성기사단이 미처 수습하지 못했던 시신들이 얼어 터지면서 폭발하는 소리가 사나웠다.
데스나이트들의 갑옷마저 사나운 추위에 견디지 못하고 비명 지르고 갈라져 나갔다.
아이작과 이사크레아 성기사단은 빛의 법전의 가호 아래 머물고 있음에도 추위가 찾아드는 것을 느꼈다.
아이작은 루앗딘 열쇠를 뽑아 땅에 꽂아 넣었다. 루앗딘 열쇠에서 피어오르는 열기가 기적을 강화하면서 땅 밑을 통해 침식해 오는 한기마저 몰아냈다. 하지만 지켜야 할 사람들은 많고, 기적은 강력했다.
‘오월의 검은 오지 않는 건가?’
의지할 생각은 없었기에 아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베셰크나 불타는 처녀가 등장했을 때 나타난 것을 보면, 그녀가 개입하는 것은 정말 오로지 ‘어쩔 도리가 없을 때’ 뿐이다.
그리고 지금 아이작에게 창백은 ‘어쩔 도리가 없는’ 위기까진 아니었다.
‘그래도 곤란하군. 이 추위의 결계를 어떻게 뚫고 창백을 처치하지?’
창백의 능력은 ‘시간조차 얼어붙게 만드는 추위’로 요약된다.
그녀의 권능이 닿는 영역 안에서 분자들은 움직임을 멈춘다. 그 어떤 진동도 열전달도 되지 않는 정지된 공간을 채우는 것은 절대영도의 싸늘한 추위뿐이다.
창백은 이 능력을 빛의 법전식으로 담백하게 불렀다.
모든 열이 사라지고 더 이상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우주적 종말을 가리키는 단어.
열죽음(Heat death).
‘물론 실제 열죽음과도 거리가 멀고, 완전한 절대영도도 아니지만…….’
뚫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다. 빈틈이 있다면 창백은 강력한 결계 능력을 가진 대신 별다른 전투 능력은 없다는 것. 하지만 바로 그 창백에게 도달하기까지의 거리에는 장애물이 많았다. 뭣보다 놈은 하늘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열죽음의 영역 아래 움직이고 관측할 수 있는 존재는 영원을 사는 불멸자들뿐이다.]빠드드득. 창백의 담담한 선언에 데스나이트 무리가 서리를 떨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완벽한 절대영도, 열죽음에 도달한 영역이었다면 애초에 저들은 움직일 수도 없다.
저들이 움직인다는 사실 자체가 ‘열죽음’이 완벽하지 않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 부족한 추위만으로도 인간을 죽이기엔 충분했다.
데스나이트 무리들은 창백에게 지배당하고 있었다. 그들은 두터운 포위망을 구성하며 성가를 열창 중인 이사크레아 성기사단으로 접근해 왔다. 이 와중에 전투가 벌어지고, 성가를 부를 수 있는 인원이 줄어들면 열죽음의 영역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죽어 나가고, 언데드의 숫자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다.
“아이작!”
쾅. 게벨의 고함을 뒤로 하고 아이작은 파수자의 등대를 발동시키면서 열죽음의 영역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찬란한 광휘가 아이작의 머리 위를 후광처럼 둘러싸면서 ‘비합리적인’ 열죽음의 영역을 몰아냈다. 아이작은 곧장 데스나이트 서넛을 쓰러뜨리며 달려갔다. 데스나이트 역시 이 추위에는 관절조차 얼어붙는 듯 동작이 둔했다.
창백은 다가오는 아이작을 보면서 담담하게 명령했다.
쿵쿵쿵! 데스나이트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아이작을 덮쳤다.
아이작이 가장 어려워하는 적은 사실 이런 타입이다. 검술로 덤벼드는 강적을 썰어 버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무작정 질량으로 덮쳐 오는 군세는 아이작으로서도 막는 데 한계가 있다. 심지어 상대는 썰어도 죽지 않는 언데드 무리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린데, 아니, 겨울아귀가 있었다.
두개골을 잃은 린데 단장의 몸뚱이는 완전히 겨울아귀에게 지배당한 상태였다. 놈은 관절을 기괴하게 비틀며 다른 데스나이트 무리마저 자신의 수족처럼 활용해 부딪쳐 왔다.
한번 꺾은 상대를 다시 꺾지 못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는 창백의 권능이 파도처럼 몰아닥치고 있었다.
치이이익…… 데스나이트 하나를 베어내자 부서진 얼음조각이 뺨을 스쳤다. 파수자의 등대로 인해 달아오른 머리는 얼음이 닿자마자 녹아내리고 기화시켰다. 천사의 권능과 정면으로 반발하는 기적은 아이작에게도 힘겨운 일이었다. 동시에 그는 쏟아지는 데스나이트들의 칼날마저 막아내고 공격해야 했다.
[죽으러 왔느냐, 성배기사!]겨울아귀가 조롱하듯 소리쳤다.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창백은 멀고, 이제는 이사크레아 성기사단의 도움을 받기에도 너무 멀었다. 누군가는 자신을 구하려고 억지를 쓰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이작은 지금 이 선택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성기사단으로부터 충분히 멀어졌다고 판단한 순간, 아이작은 파수자의 등대를 껐다.
광휘가 잦아들고 싸늘한 한기가 순식간에 그의 몸을 엄습해 왔다. 아이작의 갑옷에 하얗게 서리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대신 다른 기적을 초대했다. 이 자리에는 질서 대신 혼돈의 권능이 어울렸다.
시커먼 장막이 아이작의 주변을 세상으로부터 가렸다.
***
색채가 아이작을 중심으로 범람한 순간, 언데드들은 전에 없던 ‘어둠’을 느꼈다.
언데드들은 밤눈이 밝지만, 시야를 직접적으로 가리는 안개나 빗속에서는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범람한 색채 속에서 한순간 언데드들은 장님이 되었다.
쉭, 카가가각, 칵! 그와 동시에 아이작은 재빨리 아직 시야에 남아 있던 언데드들을 베어 내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창백이 불러낸 추위는 더 이상 아이작을 막아 내지 못했다.
열은 더운 곳에서 찬 곳으로 향하는 성질이 있다.
창백이 불러낸 한기는 물질의 열기를 빠르게 앗아 간다. 절대영도에 가까운 이 무시무시한 한기는 인간이건 물질이건 그 근처에 가기도 전에 얼어 터지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아이작은 물론이고 ‘감춰진 제례’의 장막 안에서 방출되는 짙은 농도의 저 너머의 색채는 열 소모를 방지했다. 즉, 아이작은 일종의 두터운 패딩을 전신에 두른 상태였다. 때문에 언데드조차 앞을 보지 못할 정도의 어둠이 형성된 것이다.
‘서둘러야 해.’
하지만 이 상태를 오래 유지할 수는 없었다.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이작도 마찬가지다. 이런 밀도 높은 색채 속에선 아이작조차 숨을 쉬기 힘들었고, 결국 궁극적으로는 색채가 가진 미지근한 온기마저 열죽음에 모두 빼앗길 것이다.
즉, 시간제한이 있는 방어.
비슷한 판단을 한 것은 겨울아귀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작의 권능이 뭔지는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이작의 시야도 가려진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라 판단한 겨울아귀는 데스나이트들을 움직여 일제히 공격을 지시했다.
[성배기사를 죽여라!]데스나이트들은 장님 같은 꼴로 허우적대며 아이작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닿은 것은 차가운 칼끝뿐이었다.
쿡, 콰득, 우드득. 아이작은 데스나이트를 단칼에 베어 버리고 앞으로 나아갔다. 겨울아귀는 우연, 혹은 감이 좋다고 생각했지만 이어지는 결과는 달랐다. 아이작은 먼 거리에서도 주저 없이 겨울아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며 주변의 데스나이트들을 모조리 베어 나갔다.
‘어떻게?’
이 기이한 색채는 놈의 눈은 가리지 않는 건가?
겨울아귀는 그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 역시도 아이작을 보는 것이 불가능했다. 날카로운 금속음과 부서지는 소리로 위치만 파악할 뿐이었다.
겨울아귀는 어쩔 수 없이 아이작으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아이작도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달아나는 겨울아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장막 안에서 달아날 수 있는 곳은 없겠지만, 아이작은 더 이상 시간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
아이작의 손가락이 발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향했다.
우득.
[기이이이잇!]겨울아귀가 기괴한 신음을 토해내며 발버둥 쳤다. 아이작은 그곳을 향해 다가갔다. 린데의 사지가 바닥에서 솟은 촉수에 휘감겨 있었다. 겨울아귀는 그제야 아이작이 어떻게 데스나이트들과 자신의 위치를 파악했는지 깨달았다.
바닥의 무수한 촉수들이 섬모(纖毛)처럼 돋아나서 그에게 감각을 전달해 주고 있었다.
이 공간 전체가 아이작의 혓바닥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보이지 않아도 입안의 혀를 굴려 이빨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듯, 아이작은 보이지 않아도 겨울아귀가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아이작은 여전히 시선을 먼 곳에 둔 채로, 카훌린을 들어 올렸다.
그의 칼이 향할 자리는 바로 겨울아귀, 린데의 몸을 장악한 요도였다.
카훌린에서 타오르던 검기가 일순간 강하게 응축되면서 검게 물들었다.
아틀란에게 처음으로 사용했던 이래, 그는 많은 성장과 단련을 거쳐 다음의 영역으로 가 닿았다. 기대하는 영역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지만, 어차피 지금은 그 정도까지의 힘은 필요 없다. 그저 겨울아귀를 파괴할 정도면 충분하다.
공간을 지우고, 카훌린이 벼락처럼 겨울아귀를 향해 내리쳤다.
귀곡성이 터져 나왔다.
한두 명이 아닌, 수백, 수천 명이 일시에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카훌린과 겨울아귀가 부딪치면서 터져 나온 충격파로 주변에 있던 색채마저 강하게 물러났다.
아이작은 카훌린이 내리찍은 자리를 보며 웃었다.
“결국 내려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