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88)
88화. 결선(3)
오후 6시.
수현이 시험장을 빠져나갔다.
아직 남은 참가자는 여덟 명.
그중 수현과 같이 서양화 부문에 응시한 참가자는 김민준을 포함해 셋이었다.
멈칫거리는 붓질과 불안한 시선.
말은 안 해도 다들 한수현의 존재에 큰 부담을 느끼고 신경 쓰고 있던 듯했다.
스윽.
김민준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자신의 그림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흐음.”
본래 계획에 지장이 생기며 잠깐 흔들리긴 했지만, 페이스를 유지하며 좋은 그림을 완성했다.
여행.
김민준은 망망대해 위에 떠 있는 요트를 실감 나게 그렸다. 한수현의 작품에서 가져온 아이디어로 요트의 돛 부분은 실제 천을 부착해 만들어 바람의 느낌과 질감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날씨는 맑고 파도는 평화로웠다.
여행을 즐기기 알맞은 유속을 내는 요트 위에는 자유를 만끽하는 인물들이 있었다.
바다 건너편으로는 작은 섬을 하나 그렸다.
목적지가 될 수도 경유지가 될 수도 있는 섬. 여행자들과 그림을 보는 이가 불안을 느끼지 않게 작은 땅을 그려 넣은 거다.
사람이라는 게, 막상 거대한 자유를 주면 오히려 불안해하는 법이니까.
김민준은 그런 걸 생각해 그려 넣은 자신의 센스에 스스로 감탄했다.
라울뒤피의 색감과 스타일을 적용해 고급스러운 느낌을 완성한 것도 마음에 들었다.
‘이번엔 정말 쉬웠어.’
200시간이라는 시험 시간이 아니더라도 김민준은 빠르게 라울뒤피의 그림을 분석하고 그걸 자기화할 수 있었다.
죽어라 연습한 덕분이었을까. 언젠가부터 김민준은 다른 이의 그림을 보면 그게 어떻게 그려졌는지, 순서와 방식이 머릿속에 저절로 그려졌다.
어떻게 보면 엄청난 재능이었다.
누군가는 일생을 바쳐 연구해 얻은 기술을, 쓱- 보는 것만으로 읽어내 재현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맛집에 가서 음식을 한 입 먹어 본 순간, 그 음식의 레시피를 저절로 떠올리는 식이라 해야 할까?
그린 이가 어떤 색을 어떤 색과 섞었는지, 어떤 붓을 어떤 각도와 빠르기로 움직였는지, 우연처럼 보이는 효과에 어떤 공식이 숨어 있는지 너무 쉽게 보였다.
게다가 그건 의지와 상관없이 저절로 발동되는 것이었다. 그걸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따라 그려내면 제법 훌륭한 그림이 뚝딱 그려지니 재미가 붙을 수밖에.
그렇게 연습을 더 하니 실력이 부쩍부쩍 늘어 본래 그림의 수준까지 크게 높아졌다.
거리낄 건 없었다.
사실 그 옛날의 화가들도 아카데미에서 고전을 연구하며 그림을 배우지 않았던가. 세기의 천재들이 남긴 족적을 더듬으며 따라가길 열망했고, 소수는 그걸 뛰어넘어 결국 자신만의 경지를 개척해냈고.
물론 김민준은 고전의 연구뿐 아니라, 동시대, 스승과 선후배, 또래의 그림까지 자유자재로 흡수한다는 부분이 조금 다르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다를 게 뭐야?’
그저 하늘이 준 재능이라 여기고 받아들였다. 그렇게 김민준은 중앙예고에서 거침없는 독주를 이어왔고, 이번 전국대회에서 자신의 이름을 알릴 참이었던 거다.
‘불안한 부분이 있었지만, 그래도 고작 고등학생인 한수현이 라울뒤피를 등에 업은 이 그림보다 뛰어난 걸 그려낼 순 없겠지.’
김민준이 심호흡하며 천천히 자기 그림에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천천히 수현이 떠난 수현의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잠시 후.
“허.”
김민준은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비스듬히 세워놔, 자기 자리에선 제대로 보이지 않던 수현의 그림.
그걸 확인하러 가까이 가면서 자꾸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며칠 스트레스를 받은 탓인가 싶었는데, 동물적인 직감이라도 발동했던 걸까.
김민준은 차마 수현의 그림에 바짝 다가서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거리에서 멈춰버리고 말았다.
‘미친. 이게 뭐야?’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그림이었다. 처음 낙서 같은 것들만 의미 없이 그려내기에 유아기로 돌아가 그때 그림 그리기의 즐거움을 표현하려는 건가, 고개를 갸웃했는데, 완성한 그림은 그런 예측을 비웃기라도 하듯 엄청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압도적인 크기.
100호짜리 합판은 본래 크기도 큰 편인데, 어쩐지 수현의 그림을 더 크게 느껴지게 만들었다.
100호 이상.
어느 정도의 크기라고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하고 넓어보였다.
‘왜 이런 기분이 느껴지는 거지?’
김민준은 재빨리 눈을 빛내며 그림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원근을 준 걸까?
아니면 그림의 구도?
대각선으로 사물을 배치해 중심을 향해 시선을 쏠리게 만들어서?
색채는? 채도 차를 이용해 깊이감을 더해준 건가?
그런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아니, 그런 요소가 보이긴 했는데 그게 결정적인 것 같진 않았다.
그럼 뭐지?
이 그림은 왜 이렇게 거대하게 느껴지지?
김민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압도적이다, 크다는 느낌의 첫인상이 지나가자, 다음으로 따뜻하고 유쾌한 감상들이 쏟아졌다.
그러니까, 결국 이 낙서들은 뒤에 붙인 오브제, 그 인물들이 그린 거구나. 이런 식으로 오브제를 활용할 줄이야.
기법이나 기교는 솔직히 화려하지 않았다. 그런데, 느낌이 왜 이렇게 묵직한 거지?
뒷모습일 뿐인데, 인물의 표정이 그려졌다.
몸을 움츠린 정도, 팔을 흔드는 각도, 고개의 움직임, 다리를 얼마나 벌리고 서 있는지에 따라 인물의 성격과 상태가 고스란히 읽혔던 거다.
‘얜 대체 뭐지……?’
김민준이 고개를 흔들었다.
2차전에서 봤던 그 그림, 거기서 느껴지던 위압감은 그러니까 진짜였구나.
게다가 그때 본 건 일부에 불과한 거였고, 어쩌면 이 그림도 한수현의 재능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김민준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어쩌면 한수현은 자신이 느끼는 것보다 더 크고 높은 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승승장구 달려온 자신이 처음으로 좌절을 맛보게 한 대상인 동시에, 평생 뛰어넘을 수 없는 대상일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 그리고 벗어날 길 없는 좌절이 파도처럼 김민준을 덮치고 있었다.
“하…….”
김민준이 반걸음 더 수현의 그림에 다가섰다.
“이런 게 진짜 천재구나.”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깨달음의 고백이 그의 입에서 작게 흘러나왔다.
***
“선생님.”
곧바로 시험장을 나온 김민준이 강성실 선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회 기간 내에 응급상황이 생기면 아무 때나 전화를 하라며 강성실이 번호를 알려줬던 거다.
-어, 민준아. 무슨 일이야. 아직 시험장에 있을 시간이잖아?
“저 아무래도 질 것 같아요.”
고해성사처럼 대뜸 늘어놓는 고백.
수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강성실의 깊은 한숨이 이어졌다.
-뭐가 문제야?
“좀 전에 보고 나왔어요. 그 애 그림요. 저랑은 비교가 안 돼요.”
김민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심상치 않은 감정의 동요.
강성실은 잠깐 고민하다 윽박지르기보다 타이르는 쪽으로 노선을 정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연기했다.
-한수현이라는 애, 한 명이 문제인 거지?
“네?”
-그 애 말고는 또 신경 쓰이는 애는 없고?
“네. 다른 애들이야 뭐…….”
-그럼 걱정할 거 없어.
강성실이 단호하게 말했다.
-민준아, 예술은 말이야. 일등이 없는 거란다.
“네?”
-달리기처럼 기록을 재는 스포츠도 아니고, 수학처럼 공식이 있어 정답을 찾아야 하는 것도 아냐. 예술은 그저 해석, 주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지. 그러니…… 걱정할 거 없다.
이미 자신과 김민준은 황 화백 쪽 라인을 탔고, 2차 시험 때처럼 지지를 받을 테니 1등은 문제없을 거라는 말.
그걸 김민준 역시 모를 바는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면서 불편한 말을 꺼낸 건 이 불안을 잠재울 확신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한수현. 그림 실력은 네가 나보다 뛰어날지 모르지만, 선생님 말대로 그게 꼭 성공과 직결되는 건 아니야. 재능은 인정하지만, 이번 대회 일등은 내가 가져가야겠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김민준이 입술을 굳게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선생님. 그럼 전 선생님만 믿을게요.”
그렇게 전화를 끊은 김민준은 잠시 밖을 배회하다 간단하게 저녁 식사를 했다. 그리고 근처 화방을 찾아 부족한 도구들을 주문했다.
한결 태연하고 편안한 얼굴로 다시 시험장으로 돌아온 게 저녁 8시 무렵.
시험장에 남은 애들은 이제 세 명이었다.
한 명은 조소 쪽이었고, 다른 둘은 각각 디자인과 도예.
서로에게 관심 없는 분야니 자기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고.
바스락.
시선에서 자유로워진 김민준이 비닐봉지를 열어 화방에서 산 재료들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유화에 쓰이는 흔한 미디엄(보조제)들과 공병.
김민준이 공병에 보조제를 옮겨 담고, 텅 빈 병에, 또 다른 보조제를 옮겨 담았다.
내용물과 병에 표시된 이름이 다르게 이것저것을 섞은 후엔 한참이나 그걸 노려보며 기회를 엿보았다.
드르륵.
의자를 밀고 한 학생이 일어났고,
탁.
작업을 마친 나머지 애들도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9시 20분.
도르르륵-.
혹시나 오해를 사지 않게, 김민준은 한수현의 자리 쪽으로 연필을 하나 굴렸다.
그리고 그걸 찾으러 가는 척 일어날 때 미리 작업해둔 미디엄(보조제) 병을 들었다.
수현의 자리에 있던 보조제 병과 바꿔치기하기 위해서였다.
손때가 탄 물건이라면 티가 났겠지만, 마침 재료가 다 떨어진 직후였는지, 수현은 뜯은 지 얼마 안 돼 보이는 깨끗한 보조제 병을 사용하고 있었다.
‘알아볼 방법이 없을 거야.’
작업해둔 보조제를 올려두고, 수현의 진짜 보조제를 슬쩍 손안에 감춘 김민준. 교실엔 혼자뿐인데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학생. 지금 거기서 뭐 해요?”
잠시, 시간에 맞춰 교실을 찾은 감독관이 고개를 갸웃했으나,
“연필을 떨어뜨려서요.”
김민준은 자기 연필을 들어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이제는 정말 걱정할 게 없다는 안도에서 나온 환한 미소였다.
***
다음 날 아침.
“하.”
마무리 작업을 하러 시험장에 나온 수현이 황당한 얼굴로 팔레트를 내려다보았다.
“밤사이, 연금술사라도 다녀간 모양이네.”
마지막 정교한 묘사만 남은 상황.
하이라이트가 될 부분을 손보려 물감과 보조제를 섞었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스윽.
쓰다 남은 나무 조각에 발라보니 더 확실해졌다.
“이것 봐라?”
실소가 터져 나오는 사건.
수현은 은은하고 묵직한 느낌을 주기 위해 이번 작품에 주로 광택이 없는 보조제들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하룻밤 사이 어떻게 숙성이라도 된 건지, 반짝반짝 니스처럼 빛나는 광택제로 바뀌어 있었다.
“용기는 가상하다만.”
수현이 붓을 빠르게 세척하고 팔렛트에 덜어놓은 나머지 보조제를 닦아내며 고개를 저었다.
“경험의 차이라는 게 무시할 수 없는 거란다.”
물감과 보조제를 섞는 순간 수현은 곧바로 이질감을 느꼈다.
붓에서 느껴지는 점도가 평소와는 달랐기 때문.
보조제들은 용도에 따라 색상, 점도, 윤기 같은 것이 조금씩 달랐는데, 그간 수많은 보조제를 익혀가며 다뤄온 수현은 그것들의 특징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물론 보통의 고등학생이라면 무심코 넘겼을 일.
그림을 한참 그린 다음에야, 왜 보조제가 평소와 다른 역할을 하는지 당황하며 놀랐을 거다.
수현 역시 예전이었다면 꼼짝없이 당했겠지만, 이젠 이런 질 낮은 장난엔 당하려야 당할 수 없는 짬이라는 게 생겨 있었다.
“하아.”
수현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굳이 밝히지 않아도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는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