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spectable male god RAW novel - Chapter (119)
#119. 좋은 사람
재인은 오늘도 듬직하게 곁을 지키는 하찬에 빙그레 웃었다. 저만 보면 꼬리가 떨어지라 흔드는 녀석이 낯선 사람은 얼마나 경계를 잘하는지 든든하기 그지없었다.
“왕 크니까 왕 귀엽다.”
“헥헥!”
“하하하. 곧 >완벽한 파트너> 촬영 끝나. 그때 되면 형이 하찬이랑 많이 놀아 줄게.”
“컹컹!”
“착하다.”
팔뚝만큼 길쭉한 대형견 간식을 꺼내서 하찬의 입에 물려 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완벽한 파트너>의 촬영이 막바지라 며칠간 정신없이 바빴었다. 매일 두 번씩 하던 하찬의 산책도 한 번으로 줄였는데, 그 시간도 겨우겨우 냈을 정도였다.
‘대기 시간이 긴 거 빼면 그렇게 힘든 건 없었는데, 개인 시간이 너무 없긴 했어.’
드라마 두 개 동시 촬영이라고 해도 세트가 서울과 지방으로 떨어진 것도 아니라서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김고운 감독이나 황인아 감독이나 연출 경험이 많아서 그런지 촬영 스케줄을 잘 지켰다. 도중 촬영 스케줄이 틀어졌다면 컨디션 조절은커녕 촬영을 따라가기도 벅찼을 텐데,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물론 두 감독만의 힘으로 일정이 무사히 지켜진 건 아니었다. 그의 곁에서, 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해 준 사람들이 있어서였다.
“매니저님 고마워요. 일정 안 겹치게 잡아 주시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스케줄 같이 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아닙니다. 저보단 재인 씨가 더 힘드셨지요.”
“저는 생각보다 괜찮았어요. 그래도 다음엔 일정이 겹치게 잡진 않을 거지만요.”
“하하하. 예.”
최상호는 가끔 그를 촬영장에 내려 준 뒤 자리를 비우곤 했다. 대부분은 유명한 영화감독이나, 드라마 작가와 만나기 위해서였다. >황태자비 스캔들> 이후의 일정, 내후년 재인의 일정을 위해서였다.
‘이번 작품 끝나면 스태프 다 같이 여행이라도 갈까?’
성적이 좋은 드라마의 배우와 감독, 스태프들이 포상 휴가를 받았다는 소식을 기사에서 여러 번 봤었다. 방송국이나 제작사처럼 대규모로 휴가를 보내 주는 건 어려워도, 최상호나 김신우 같은 개인 스태프들의 휴가 정도는 보내 줄 수 있었다.
“겹치기 촬영도 오늘로 끝이네요. 마지막까지 같이 힘내 봐요.”
“예.”
며칠간 밤늦게까지 촬영한 피로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밝은 얼굴로 재인이 스튜디오에 들어갔다. 김고운 감독과 스태프들이 마지막 촬영을 준비하는 곳으로.
* * *
마지막 촬영까지 깔끔하게 마쳤지만, 바로 스케줄에 여유가 생기진 않았다. 회사에 얘기했던 아동 도서 기부 건 일정이 예상보다 빨리 잡혀서였다.
재인이 업로드하는 동화책 읽어 주는 채널은 아동 도서 출판사에 꽤 환영받는 채널이었다. 늘어나는 구독자 수만큼 광고 효과가 크기 때문인지 회사로 보내오는 동화책은 나날이 늘고 있었다.
그렇게 쌓인 책과 출판사로 직접 주문한 책을 기부할 계획이었는데, 일정이 빨라진 건 물론이고 규모 역시 커져 버렸다.
“팬과 같이하는 기부 행사라니.”
현서와 같이 가까운 어린이 도서관에 조용히 기부할 생각이었는데, 데리고 가기 어려울 것 같았다. 기자 없이 조용히 진행하려고 해도 무려 다섯 곳을 직접 들르는 행사라서 아이의 존재가 알려질 위험이 있었다.
‘현서랑 보내는 시간을 좀 늘리려고 했는데, 아쉽게 됐네.’
그래도 기부 행사 자체는 반가웠다. 자신이 하는 기부에 팬이 동참해 준다는 게, 자신을 지지해 주는 팬이 있다는 게 무척 반갑고 고마웠다.
“재인 씨 세트로 갈 시간입니다.”
“예.”
최상호를 통해 들은 소식은 반가운 내용이었지만, 일단은 생각을 접어 두었다. 지금은 촬영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태자 전하. 부디 경호를 물리라는 말은 삼가십시오. 어린 시절부터 전하를 보필하여 온 소인의 진언이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학교 안에서 하는 경호만 물려 달라는 것이야.”
“하오나. 벌써 인원을 반으로 줄이셨지 않습니까. 여기서 거리를 더 벌리면 경호에 틈이 생깁니다.”
“학교에서 내가 태자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어. 경호를 물려도 위험하지 않다고 보장할 수 있어.”
“전하. 황후 마마께서…….”
재인은 권상연의 다음 대사를 기다렸다.
황후 마마께서 태자비가 될 처자가 격이 맞지 않으니, 청혼을 재고해 달라고 폐하께 주청을 드리셨다는 대사가 이어져야 하는데, 바로 나오지 않았다.
-컷! 다시 갑시다.
재인은 황인아 감독의 컷 사인에 떨리는 권상연의 눈을 가까운 곳에서 바라봤다. 이미 촬영 시작하고 한 달이 넘게 지난 시점이었다. 촬영 현장 분위기에 익숙해지고도 남을 시기였는데, 권상연은 여전했다.
넉살 좋게 죄송하다 사과하고 다시 해 보겠다고 말해도 될 텐데, 실수 한 번에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현장에서 보낸 시간은 꽤 긴데도 적응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처음처럼 심하게 긴장하고 있었다.
‘너무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서 뭐라고 하지도 못하겠다.’
아무리 선배라도 상대 역인 그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 태도를 지적해야 하는데, 하지 못했다. 보기 딱할 정도로 얼은 모습에 말을 걸지 못했다.
“화, 황후 마마께서 태자비가 될…….”
몇 번 반복해서 촬영하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권상연은 더 뻣뻣해지고 있었다. 스태프한테 하던 사과도 잊고 다음 대사만 찾아볼 뿐으로 조금도 여유를 찾아볼 수 없었다.
황인아 감독이 그의 상태를 알아차리고 디렉션을 주기보다 진정할 때까지 기다려 주는데도 점점 더 실수가 늘었다.
“으음.”
“재인 씨?”
재인은 어찌어찌 촬영을 마치고 돌아가는 권상연의 뒤로 따라붙었다. 최상호가 의아해하며 그를 불렀지만, 모른 척 재빠르게 뒤를 따랐다.
“선배님.”
“허억!”
단순한 부름이었는데 권상연은 경기하듯이 펄쩍 뛰며 놀랐다. 그 때문에 되레 그를 불러 세운 재인이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무, 무슨……. 아!”
“저 이거 제 연…….”
“죄송합니다!”
“예?”
“죄송합니다. 일부러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가만두면 허리까지 숙이며 사과할 기세에 급하게 권상연의 어깨를 잡았다. 사과받을 생각에 따라가서 붙잡은 것도 아닌데, 이게 무슨 일인지.
“괜찮아요. 고개 드세요.”
“진짜 죄송해요. NG 났을 때 너무 긴장해서 바로 미안하다고 해야 했는데.”
“그럴 수 있죠. 긴장하면 그러실 수 있어요. 괜찮아요.”
“고, 고마워요.”
진심이었다. 진짜로 여러 번 NG를 내고도 사과하지 않은 걸 탓할 생각은 없었다. NG가 쌓일수록 절망스러워하는 기분을 가까운 곳에서 생생하게 느낀 탓에 상대에게 사과할 여유 따위 없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선 것이기도 했고.
“여기 제 번호예요. 궁금한 게 생기거나 연습 상대가 필요하시면 아무 때나 연락하세요.”
“아!”
“너무 긴장하지 말라고 해도 쉽지 않지요?”
“그게……, 네. 그렇네요.”
“많이 힘드시면 얘기하세요. 진정할 수 있게 스킬 걸어드릴게요.”
“……예.”
재인은 권상연이라는 배우가 안타까웠다. 누구보다 현장에 오래 나와 있고 연기를 좋아하는 게 느껴졌는데, 마음과 다르게 실수만 계속하고 있었다. 세트 밖에서 연습할 때 보여 주던 실력이 카메라 앞에만 서면 나오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카메라에 대한 공포는 느껴지지 않는단 말이지.’
지나치게 긴장해서 얼어붙는 것이지 카메라 앞에 서는 걸 두려워하는 건 아니었다. 그런 상태라면 재인에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진정 스킬도 있었고, 가볍게 신성력을 풀어서 분위기를 온화하게 유지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럼 다음 촬영에 뵈어요.”
“예.”
재인은 얼떨떨한 얼굴인 권상연을 두고 최상호와 분장실로 돌아갔다. 전화번호를 건네느라 늦어졌다. 김신우와 팀원들의 퇴근을 위해 서둘러야 했다.
* * *
권상연에게 연락처를 줬지만, 연락이 바로 올 거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저와 가까운 역할인데도 이상하게 거리감을 두는 사람이라서 그랬는데, 결과는 의외였다.
“네, 선배님. 황인아 감독님은 호위 시종을 원작이랑 조금 다르게 설정하셨잖아요. 원작에서는 황태후와 태자 사이를 오가면서 정보를 전해 주는 약삭빠른 캐릭터였는데, 드라마에선 우직한 캐릭터로 나오잖아요. 그런 부분이 두드러지게 연기하길 바라시는 것 같아요.”
-…….
“아뇨, 아뇨. 지금 대사 톤은 너무 무거워요. 꼭 정통 사극에 나오는 장수 같아요.”
-…….
“네. 지금 그 대사 톤이 딱 좋은 거 같아요. 네, 그럼 4-12부터 같이 맞춰 봐요.”
권상연은 다음 날 저녁부터 바로 그에게 연락했다. 같이 연기하는 신에 관해서 그의 의견을 묻기도 하고, 디렉션을 줄인 감독님의 의향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받길 바랐다. 또는 지금처럼 연기 상대를 해 주길 바랐다.
-달칵!
거실에서 연기 연습 상대가 되어 주는 재인의 앞에 물잔이 놓였다. 시원한 물잔을 든 재인이 고맙다는 눈빛을 동생에게 보냈다.
“끝났어?”
“어. 물 고마워.”
“그 사람은 잠도 없어? 지금 몇 시야?”
“하, 하하. 너무 뭐라고 하지 마. 열심히 하는 사람인데.”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다른 사람 사정도 살펴야지.”
재현은 턱짓으로 새벽 3시를 넘긴 시계를 가리켰다. 아무리 연기 연습이 중요하다고 해도 컨디션을 망치는 것보다 중요하진 않았다. 그것도 본인의 연습 때문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연습을 돕다가 그러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미련한 일이었다.
“나도 아는데, 이렇게 연습하면 다음 촬영에서 확실히 좋아진 모습이 보여서 말이지.”
“그래도 형이 그렇게 할 이유가 없잖아.”
“에이, 덕분에 퇴근이 빨라졌잖아.”
“대신 재택근무가 늘었지.”
“…….”
그래도 벼랑 끝에 선 것처럼 자신을 몰아붙이는 사람을 보고도 못 본 체할 수는 없었다.
촬영이 진행될수록 긴장을 풀고 실력이 늘어나는 다른 배우들과 다르게 권상연은 깊은 수렁에 빠져 가는 것 같았다. 날이 갈수록 긴장이 풀리긴커녕 더 심해졌다. 심해지다 못해 자기 자신을 해칠 것 같은 상태까지 갔다. 그래서 나설 수밖에 없었다.
“내 작품이기도 하니까. 좋은 작품이 나오길 바라서 돕는 거지.”
“하여튼 적당히 해. 사람 좋은 것도 정도껏 좋아야지”
“알았어.”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재인은 재현에게 한 말을 지키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좋아! 좋아! 이렇게 잘할 수 있는데, 지금까지 왜 그랬어?”
“아, 아니에요.”
“아니긴. 오늘 감정 좋았어. 지금처럼만 해. 지금처럼만 하면 내가 뭘 할 게 없겠어.”
“감사합니다.”
“감사는 내가 감사하지. 진짜 이런 촬영만 계속할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어.”
NG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권상연의 연기가 마음에 들었는지 황인아 감독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연기 연습을 도와준 보람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재인은 황인아 감독의 흡족한 미소와 닮은 미소를 지으며 모니터링하는 두 사람을 지켜봤다.
‘이쪽은 해결됐고. 문제는 저쪽인데…….’
교실처럼 꾸며진 세트에서 빠져나온 재인과 권상연 대신 들어가는 김민기와 장윤하에 고개를 저었다.
내년 상반기까지, 일 년 가까이 같이 촬영해야 하는 사람들인데 정말이지 저 두 사람하고는 호흡을 맞추기 쉽지 않았다. 캐릭터 이미지에는 딱 맞는 두 사람이었지만, 영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한 명은 쉴 새 없이 저에게 날을 세우고, 한 명은 지저분한 꿍꿍이가 엿보여서 꺼려졌다.
‘그냥 저 두 사람이 커플이 되면 좋겠다.’
완벽한 원작 파괴 드라마로 드라마 역사에 적힐 법한 생각을 한 재인이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나 몇 걸음 걷지 못하고 다시 뒤를 돌아봐야 했다.
‘살기? 아니, 원망인가?’
왜? 순간 강렬해진 찌르는 느낌에 돌아본 곳에는 김민기가 있었다. 검은 눈동자 가득 원망을 품은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 담긴 감정이 지나치게 짙어 순간 살기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재인은 그런 김민기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유 없는 원망을 고스란히 받아 줄 생각은 없었다. 좋은 사람 역할은 좋은 사람을 상대할 때만 하면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