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spectable male god RAW novel - Chapter (209)
#209. 블레싱 첫 방송
호랑이와 소녀 에피소드 촬영을 마치고 퇴근한 재인이 소파에 등을 깊게 묻었다. 대본을 받았을 때부터 꽤나 미진한 에피소드라고 생각했는데 실제 촬영한 뒤에도 생각이 바뀌지 않았다.
‘내가 성격이 나쁜 건가.’
이야기는 전형적인 불행한 가정의 얘기였다. 특별한 것 없는, 어딘가에서 한 번은 들어 봤음직한. 노름에 미친 가장과 그런 가장을 대신해 밤낮없이 일해서 가정을 건사하는 아내 이야기.
‘남편을 한바탕 위협해서 정신 차리게 할 줄 알았는데 말이지.’
호랑이는 누군가를 해치거나 위협하지 않고 호암골이라는 마을의 수호자를 자처한다. 호암, 이름 그대로 호랑이를 닮은 바위 위에서 소녀가 농작물이나 수공예품을 장에 내다 파는 길목을 지킨다.
첫사랑인 줄 모르고 미련을 남기고, 짧디짧은 어린 시절의 인연을 평생 그리고 죽어서까지 소중히 간직한 호랑이가 애틋했다. 첫사랑인 줄 깨닫고 나서도 그 앞에 나타나는 대신 뒤에서 지켜 주는 우직함과 배려도 좋았다.
그게 현대인의 감성에 맞는지와는 별개로.
“그나저나 >블레싱>도 이제 끝이 보이네.”
다음 일정인 포스터 촬영을 확인한 재인이 기지개를 켜면서 기분 좋게 웃었다. 몇 달간 몰두해서 한 촬영이 끝이 보이는 것이 뿌듯했다.
사실 포스터 촬영을 한다고 촬영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포스터 촬영 이후로도 한 달 넘게 촬영이 남아 있었고, 홍보를 위한 인터뷰부터 방송 출연까지 할 일은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다.
그래도 방영 한두 주 전에 하는 포스터 촬영을 할 때마다 재인은 힘든 고비를 전부 넘기고 마지막 마무리만 남긴 기분이 들었다.
그래야 했는데…….
“재인 선배! 어머나 이런 우연이! 촬영 시간이 겹쳤네요.”
누가 봐도 우연이 아니라 일부러 시간을 조정했을 것 같은 만남이었다.
‘아니지. 겨우 이틀로 나눠서 하는 촬영이니 겹칠 수도 있지.’
꼭 마지막 고비가 남은 것처럼 조금 껄끄러운 상대가 나타났다.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죠?”
“흐음! 잘 지냈어요. 선배는요?”
“저도 잘 지냈어요. 아! 저희 실장님이 부르시네요. 먼저 가 볼게요.”
“네? 네.”
재인은 순식간에 다가오는 박세영한테서 몸을 돌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박세영의 뒤편에서 김신우가 자기 쪽으로 오라고 손짓하는 게 보여서였다.
“쟤는 아직도 저러네.”
“실장님. 들려요.”
“시끄러워서 안 들려. 들리면 또 어쩌게? 이미 쟤 이상한 거 사람들이 다 아는데. 기자들도 다 알아. 소속사에서 입단속 해서 기사만 안 난 거지.”
“그래도요.”
“알았어.”
할 말은 꼭 하고야 마는 김신우였으나 재인이 말리자 입을 다물었다. 사실 계속하려면 할 수도 있었지만, 그만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쯧쯧쯧! 스태프들 눈빛 봐라.’
박세영을 바라보는 스태프들의 눈빛 때문이었다. 처음 촬영을 시작할 때쯤에 보이던 동경의 시선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지금은 동경이나 감탄 같은 그런 감정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 측은함, 안타까움 같은 감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쟤는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보는지 아나? 모르니까 저러겠지?’
난공불락의 요새를 공략하는 무모한 장수처럼 보는 걸 모르니 저렇게 들이대는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기를 쓰면서 재인에게 들이대는 자신을 안쓰럽게 보는 걸 알았다면 자존심 때문에라도 진작 그만뒀을 터였다.
“나름 어울리기는 하네.”
박세영의 사견만 들어가지 않으면 재인과 둘이 한 포커스에 잡혀도 어색하지 않았다. 독보적으로 잘생긴 누구 때문에 같이 촬영하는 배우들이 항상 손해를 봤는데 이번에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쟤가 시작일 것 같아.’
사진작가의 요구보다 더 가깝게 붙는 박세영을 보면서 김신우가 혀를 찼다. 지금까지는 재인이 신인에 워낙에 틈을 주지 않아서 건드리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었다. 최상호와 그가 싸고돌면서 철저하게 차단하기도 했었고.
그러나 그것도 이제 끝인 것 같았다. 재인은 벌써 데뷔 4년 차에 접어들어 더 이상 신인이라고 부르기 힘들었다. 재인의 뜻을 묻지 않고 다가오는 사람을 대신 막거나 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재인이를 걱정할 필요는 없지. 간덩이가 붓지 않고서야 누가 건드리겠어.”
얼마 전까지는 일반인으로 화려한 연예인 생활과는 연관 없이 살아왔으면서도 순식간에 적응하고 톱 스타로 자리 잡았다. 제 앞가림은 확실히 하는 편이니 아름다운 여자든 교활한 사기꾼이든 유혹에 빠지진 않을 것 같았다.
-찰칵! 찰칵!
그러니 걱정은 때려치우고 나중에 포스터가 공개되고 나서 SNS에 올릴 사진이나 찍어 두는 게 나았다.
* * *
>블레싱>의 첫 방영일 재인은 일찌감치 집에 돌아와 있었다.
첫 방영이라 다 같이 모여서 회식하자는 말도 나올 법했는데 스태프들 사이에서 잠깐 말이 나왔다가 흐지부지되었다. 촬영 현장의 총책임자인 감독이 그런 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더니 그 영향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까 촬영 스태프들이랑 첫 방송을 모여서 본 적이 별로 없네.”
종방연은 빠지지 않고 참석했는데 첫 방영 회식은 대부분 빠졌었다. 한 번은 촬영 스케줄이 겹쳐서, 한 번은 감독이 급하게 지방 촬영장으로 가 버리는 바람에 취소되었었다. 덕분에 집에서 편하게 방송 반응을 살피면서 보기도 하고 개인 스태프와 지인을 초대해서 보기도 했었다.
“재현이도 없이 혼자서 보는 건 또 처음이네.”
촬영장에서 친해진 배우들끼리 연 단톡방이 있으니 완벽히 혼자 보는 것은 아니지만, 곁에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드라마 첫 방송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먀앙! 먕먕!”
“아! 하찬이가 있었지. 혼자 아니었네.”
찰싹 달라붙어 앉은 저를 잊은 게 화났는지 하찬이 재인의 손가락을 잘근거렸다. 아프지 않게 무는 것이었지만, 손가락을 야무지게 앞발로 잡고 무는 게 화풀이에 진심이었다.
“먕! 먕먕먕!”
“아하하. 알았어, 미안. 형이 잘못했어.”
까만 털 뭉치의 존재를 잠시 잊은 대가로 엉덩이를 한참 토닥여 준 뒤에야 손가락의 자유를 되찾았다.
“이제 그만하자. 시작한다.”
“먀앙.”
광고가 끝날 때까지 신나게 휘두르던 고양이 낚싯대를 수납장 안에 넣은 재인이 소파에 앉았다. 오랜만에 전력으로 놀아 주는 것도 좋았지만, 일단은 본방송을 보는 게 먼저였다.
-으아아아! 귀신!
-뭐? 귀신? 으아아악!
길게 이어지는 비명과 더불어 두다다다 두 사람이 달리면서 내는 발소리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꽁지 빠지라 도망가는 두 사람을 잠시 비추던 화면이 한순간 바뀌었다. PPL 브랜드 카페의 야외 테이블에 누가 보더라도 광고로 보이는 음료수를 마시는 장면이었다.
‘너무 노골적인데.’
벌써 두 번이나 같은 카페가 나왔다. 처음 길거리에서 친구와 마주치는 장면의 배경으로, 지금은 대화 장소로.
촬영하는 동안 저 카페에서 여러 번 촬영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나올 거라는 건 알지만, 솔직히 과하게 느껴졌다.
‘케이블 드라마는 이런 부분이 좀 불편하네.’
>블레싱> 제작 준비 단계에서 프로그램 앞뒤와 중간 광고까지 전부 판매되고 투자도 많이 받았다고 들었다. 그런데도 PPL을 수없이 밀어 넣었다.
너무 많은 PPL에 드라마를 장편 상업 광고라고 사람들이 욕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나마 사회적 논란이 될 만한 상품이나 연출이 없는 게 다행이었다.
“먀앙.”
“흐흠! 별거 아니야. TV 보자.”
“먀아아.”
화면 가득 보이는 PPL 상품에 인상을 쓴 재인의 허벅지에 가벼운 무게감이 느껴졌다. 주인의 기분 변화를 예민하게 알아차린 하찬이었다.
>블레싱> 1화는 서사를 풀어 나가기 전 설정을 설명하는 내용이 절반, 앞으로 어떤 에피소드가 전개될지 알려 주는 게 절반이었다. 물론 서비스 컷처럼 김수혁과 재인이 물에 빠지는 장면이나 붙어 있다가 이상한 오해를 받는 장면도 있었다.
“적당히 코믹하고 적당히 진지하고. 밸런스는 괜찮네. 연기는…….”
김수혁과 같이 나오는 장면들은 나쁘지 않았다. 상대 쪽이 심하게 몰입하는 스타일이라서 촬영 당시에는 맞춰 주느라 덩달아 체력 소모가 컸지만, 나온 결과물은 괜찮았다.
-재인이 그냥 서 있는 게 CF야
-와! 귀신 나왔을 때 연출 개 무서웠어
-나 이제 김수혁이랑 이재인 얘네 붙어 있기만 해도 웃겨ㅋㅋㅋㅋ
-우리 드라마 뉴플릭스 서비스하는 거 아니었어?
-뉴플릭스 말고 와치유
-태선이 카멜색 코트 멋있다
-아! 역시 배우는 잘생기고 볼 일이네. 이거 전 드라마 여지원 언니라서 기대하고 봤는데 남주 ㅇㄷㅅ여서 포기했잖아. 큰맘 먹고 구매한 100인치 화면에 ㅇㄷㅅ얼굴 클로즈업하는 순간 몰입 깨져서 현타가
-ㅋㅋㅋㅋㅇㄱㄹㅇ 스토리도 깊이 있고 연출도 좋았는데 ㅇㄷㅅ 나오는 순간 갑자기 현실감이
-ㅇㅈ 배우는 잘생기고 볼 일임
드라마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블레싱> 전에 방영한 드라마가 시청률이 저조해서 1화에서 탄력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고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재인도 그렇지만, 김수혁도 준수한 연기력으로 인지도가 높은 편이라 그런지 첫 방송 시청률이 괜찮았다.
“여전히 외모에 관한 얘기가 반이 넘네.”
재인이 입은 옷, 머리 스타일, 서 있는 포즈 등을 장면이 바뀔 때마다 화제로 삼았다. 드라마의 내용도 꼼꼼하게 리뷰하고 전개 방향 추측도 많았으나 압도적으로 많은 건 일단 재인의 비주얼에 관한 것이었다. 걱정과 다르게 과도한 PPL에 관한 언급은 거의 없었다.
“하나하나 마무리가 되어 가네.”
>더 히어로즈>의 촬영까지 해 둘 일이 많았다. >블레싱>의 시작이 깔끔한 게 나쁘지 않았다.
* * *
수도 초능력 특수여단, 사람들이 흔히 키퍼 부대로 부르는 곳은 며칠 전부터 비상 대기 상태였다. 키퍼 부대의 담당 지역에 초고위험 던전의 출현이 예상되어서였다.
“길드에 연락을 돌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아니. 이대로 대기한다.”
“우리 군의 전력만으론 위험할 수 있습니다.”
“……지원을 요청한다고 응할 상대가 많진 않을 거야. 지역이 지역이라.”
“…….”
던전 사태 초기 초고위험 던전의 출현 예상지에서 있었던 사건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키퍼 부대도 스트라이커 길드도 지금처럼 체계가 잡혀 있지 않았었다. 담당 구역도 정해지지 않았고 분기별 민관 연합 훈련 같은 것도 없었다.
‘당시 사건의 목격자와 당사자들이 길드 상부에 있으니 올 리가 없나.’
선우현 중령은 여단장의 말에 마지못해 고개를 주억였다. 만약 자신 역시 길드 소속이었다면 이쪽으로 지원을 오진 않을 것이다.
던전 사태 초기 정부는 해당 지역의 고위험 던전을 핑계로 지원 요청을 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지원 온 각성자들을 각성 메커니즘을 연구한다는 명목으로 납치, 실험했었다.
그뿐 아니었다. 해당 지역에서 소위 돈이 될 만한 던전이 발견됐을 때는 군 소속이 아닌 각성자를 쫓아내기 위해서 무력을 사용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아직도 정부와 군에 반감을 품은 곳이 많지.’
길드들이 대기업과 손을 잡고 기업형 길드로 거듭나기 전, 군에 필적할 만큼 강력한 스트라이커들이 모여 지역의 패자로 자리매김하기 전 정부는 많은 과오를 범했다.
각성자 전원을 예비 범죄자로 취급해 목줄을 채우려는 시도도 했었고, 세금인지 벌금인지 구분하기 힘든 징세를 하려고도 했었다. 제약 회사의 사주를 받고 각성자 인체 실험을 정당화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려다 뇌물을 받은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었다.
고위 각성자들이 대거 한국을 떠나고 전국 곳곳의 던전에서 몬스터가 쏟아져 나오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한국도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만약을 위해서 초고위험 던전의 출현 가능성에 관해서는 알려 두겠습니다.”
“그렇게 해.”
“예.”
여단장실을 나서는 선우현의 뇌리에 인간답지 않은 외모와 누구보다 인간다운 성품을 지닌 재인의 얼굴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여단장과의 소득 없는 대화보다 재인에게 현재 상황을 설명하고 도와 달라 하소연하는 게 더 나은 해결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재인 씨 영향력이라면 가능하겠지만, 아니야.’
그러나 선우현은 고개를 몇 번 젓는 것으로 그 생각을 털어냈다.
재인은 이런 전투 일선보다 지금처럼 대중 앞에서 희망을 말하고 선의를 베푸는 게 나았다. 몬스터를 처치하는 일도 중요했지만, 사람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게 이정표가 되어 주는 일도 중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