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n obsessed tyrant and a sleeping cat every night RAW novel - Chapter (120)
Chapter 119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상체를 숙여 입을 입추며 반쯤 내리뜬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생경하리만큼 뜨거우면서도 동시에 시리게 빛나고 있었다.
놀란 채 굳어 있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아 버렸다.
지그시 머물러 있던 그의 입술이 천천히 떨어졌다.
“말해야지, 레네트.”
숲을 연상케 하는 청량한 향기가 그에게서 밀려들었다.
“어…….”
내게 대답하라면서도 그가 틈을 주지 않고 고개를 비틀어 입을 맞췄다.
심장이 쿵, 아득한 먼 곳으로 내려앉는다.
“응?”
가볍게 대답을 종용하는가 싶더니 그가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응……?”
그리고 또 한 번.
끝을 모르고 쿵, 쿵 심장이 내려앉고 또 추락했다.
도저히 대답할 틈이랄 걸 주지 않는 그로 인해 자꾸만 몸이 밀려났다.
순식간에 부풀어 오른 가슴에 심장이 쾅쾅 찧어 대고 머릿속까지 하얗게 변해 갔다.
거부할 새도 없이 몇 번이나 이어진 버드키스가 등에 책꽂이가 닿고 나서야 멈췄다.
너무 긴장한 탓에 숨이 자꾸만 터져 나갈 것처럼 입술 새로 흘러 나갔다.
“기다리고 있잖아.”
킬리언이 얄밉게 입가를 슬쩍 말아 올리며 말했다.
“뭐가 이해가 안 되는데.”
허리를 끌어안는 손길에 파드득 놀라 나도 모르게 그의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
“안 돼요!”
“내가 뭘 할 줄 알고 막아.”
그가 눈초리를 접으며 태연히 물었다.
그의 입을 막은 내 손을 아프지 않을 만큼 쥐고 얼굴에서 떼어 낸 킬리언이 내 손을 쥔 채로 내려놓았다.
“그렇게 하면…… 제가 말을 잘할 수가 없잖아요…….”
가슴 속에 수천 마리의 나비 떼가 일시에 날갯짓을 하는 것만 같았다.
그가 일으킨 파동이 난감하면서도 간질거리며 온몸에 흘러넘쳐, 나를 흔드는 듯했다.
“얌전히 잘 듣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아니거든요!”
“흐음…….”
나를 내려다보는 눈길에 타고난 거만함과 나른한 미소가 뒤섞여 있었다.
“그렇게 하면 제가 말이 안 나온단 말이에요…….”
내가 거의 울먹이듯 애원하자 그가 이번엔 천천히 내 눈을 들여다봤다.
책을 정독하듯 고요하고 집요한 시선이었다.
“오늘 종일 못 봤어, 레네트.”
그의 얼굴에서 차츰 웃음기가 사라져 갔다.
“오늘뿐일까?”
“…….”
“아마 이런 날은 당분간 계속 계속될 거야.”
나는 멈칫하며 그를 응시했다.
하루 중 겨우 서고에서 한 시간 정도를 보내는 게 앞으로도 계속될 거라고…….
그제야 킬리언의 눈에 비친 아까 그 차가운 기색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아…….”
뒤늦게 탄식이 새어 나왔다.
날카롭게 벼려진 듯한 그의 붉은 눈동자가 퇴폐적이면서도 권태로웠다.
꽉 막힌 스케줄이 앞으로도 지속되리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가질 만한 냉소적이면서도 차분한 태도였다.
“일이 너무 많으시죠…….”
아돌프가 브륀힐트의 광물을 손에 넣게 된 이후로 그렇지 않아도 빡빡했던 킬리언의 일정이 더욱 복잡해졌다.
하젤이 알아 온 소문으로는 아돌프가 전쟁을 일으킬 만한 빌미를 찾는 중이라고 했다.
제국과 연맹을 맺고 위페르 군대를 주둔시켜 놓았던 국가들에게 더 좋은 부지와 건물을 무상으로 제공하라거나 무역 중심지로 이용하는 항만 사용료에 대한 세율을 올리겠다는 식의 통보를 보낼 예정인 모양이었다.
이를 수용하지 않는 나라부터 침략하려는 포석을 깔아 놓는 것이다.
당연히 킬리언에게 아돌프의 판단은 골칫거리가 됐을 것이다.
그의 몫이 된 지 오래인 국무와 군대 안건, 제국 안팎의 정세를 살피는 일, 이 밖에도 레일버나 아카데미와 같은 자질구레한 일까지.
그가 매일 이렇게 시간을 내 잠깐이라도 서고에 함께 있을 수 있는 건 순전히 살인적인 스케줄을 감당하면서도 기어이 오고야 마는 그의 의지 덕분이었다.
“아니.”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그가 픽 웃음을 지으며 내 머리를 쓸어 넘겼다.
거짓말……. 일이 산더미면서…….
머리칼을 넘겨 주는 그의 손길에 물에 녹아나는 솜사탕처럼 나른해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일이 많은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무리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내가 걱정돼?”
“당연하죠!”
냉큼 대답하자 그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눈가를 휘었다.
그림처럼 살짝 더해지는 그의 미소를 멀거니 바라보던 나는 문득 소리 내 말했다.
“안아 드릴까요?”
내 말이 의외라는 듯 흠칫한 그가 슬그머니 미간을 좁혔다.
방금까지 그렇게 애원해 놓고서? 라는 의문이 둥실 떠오른 게 분명했다.
“안아 드릴게요!”
나는 그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일순 굳듯이 기립한 그의 근육들이 그를 안는 팔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제 보니 변덕쟁이였네.”
핀잔을 주듯 말한 그가 이내 나를 꽉 끌어안는 손길이 느껴졌다.
무언가 따뜻하고 설명할 수 없는 충만한 어떤 게,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빼곡히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변덕이라면 늘 환영이야.”
이윽고 지그시 내 머리를 누르는 그의 턱이 느껴졌다.
그의 말처럼 요즘 우리는 식사조차 같은 자리에서 하기 어려웠다.
하루 중 함께할 수 있는 게 고작 서고에서 책을 찾는 것뿐이라 헛헛함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걸 티를 내기엔, 너무 유치해 보일까 걱정이 돼 내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는 중이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했어.”
머리 위 허공에서 그의 낮은 음성이 느릿하게 울려 퍼졌다.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지.”
무슨 말인가 싶어 그를 올려다보고 싶었지만 나를 끌어안는 킬리언의 손에 더욱 힘이 실려 꼼짝할 수가 없었다.
“……나는 왜, 쉬운 길을 두고 굳이 이렇게 지지부진한 평화를 자처하고 있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 무섭게 나를 끌어안은 채 숨을 힘껏 들이켜는 그의 흉곽이 크게 부풀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아돌프와 기젤라 부인, 어쩌면 그에게 거슬리는 황실 전체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내 머리를 쓰다듬고 얼굴을 기댄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알 것 같아.”
“…….”
“나는 그대에게 나쁜 건 보여 주고 싶지 않아.”
“…….”
“……무서워할 건 더더욱.”
그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나는 그가 무엇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인지 알 수 있었다.
시뻘건 피를 뒤집어쓴 채 광기를 띤 눈빛으로 죽인 모두를 둘러보다 입가를 문지르던 킬리언의 모습이 불현듯 오버랩되었다.
그렇다면 킬리언은 오래 준비해 온 쿠데타를 포기한다는 뜻일까?
“쓸데없는 절차를 다 지킬 필요는 없겠지만, 최대한 조용하게 해결할 생각이야. 황실에 관한 일도, 신탁에 관련된 것도.”
“…….”
“조금만 기다려 줘.”
말을 멈춘 킬리언이 나를 살짝 품에서 떼어 냈다.
“칭찬 안 해 줄 거야?”
내 안색을 들여다보며 묻는 그의 행동에 나는 퍼뜩 내가 원작을 통해 아는 바를 내색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오래 품어 온 계획을 저해한 게 아닌가 싶어 신경이 쓰였지만 칭찬을 바라며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는 그의 시선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요. 전하가 마음먹은 일이 무엇이든.”
“칭찬은?”
“어……. 해 드려야 하는 거죠?”
“당연하지.”
참 집요한 사람.
나는 잠시 눈을 굴리다 그의 목에 팔을 걸고 가볍게 잡아당겼다.
순순히 끌려와 주는 그의 볼에 쪽, 하고 입을 맞춘 후 싱긋 웃어 보였다.
“기특해요, 전하!”
“뭐.”
킬리언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나는 헤실헤실 웃으며 그의 볼에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그때엔 미처 알지 못했다.
그가 원하는 평화란 실제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그가 원하든 원치 않든, 킬리언이 반드시 검을 뽑아야 하는 순간이 우리에게 닥쳐오고 있다는 것을.
“제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점은 말이에요.”
테이블 위에 신탁과 관련한 내용이 담긴 책들과 파비앙 넬라스의 기도문이 놓여 있었다.
우리가 아까 찾으며 내려놓은 것들이었다.
“제가 이능을 가진 자들을 회복시키고 강하게 만드는 기폭제라면, 그게 왜 제게 있는지, 그게 궁금했어요. 아이그니스신은 그 오랜 시간 동안 이리나를 비롯한 선대에게 저주를 받게 했었잖아요?”
파비앙 넬라스는 그 오랜 시간을 회개의 시간이라 기도문에 말했다.
회개를 마쳤기에 아홉 번째 아이인 나에게 이런 능력을 줬다고 했지만…….
“영아 살해 사건과 연관돼 있으면서도 어떻게 회개의 여지를 남겨 두게 된 건지. 그리고 저는 이제 이 힘으로 뭘 해야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어요.”
나는 스스로 힘을 쓰거나 강해지는 게 아닌, 킬리언이나 바른처럼 이능을 가진 자들을 강하게 만드는 매개체였다.
이능을 가진 사람들을 강하게 하는 것과 다가오는 멸망을 막는 게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엘리제는 내가 멸망을 막을 수 있는 열쇠라 했지만, 내가 어떤 식으로 쓰여야 하는지는 그녀도 알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멸망의 원인을 알았다면 그녀가 구태여 아이그니스 신에게 답을 내려 달라 할 필요는 없었을 테니까.
원인을 몰랐기에 답을 달라 하였고, 신은 고양이라는 답을 줬으나 그녀는 꿈에도 고양이란 존재가 답이 될 줄은 모른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더 문제는, 더 이상 어떻게 신탁을 좇아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거예요.”
말을 내뱉는 순간 어깨에 힘이 빠졌다.
내 안에 엉켜 있는 것처럼 느껴지던 답답한 응어리가 무엇인지 비로소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대로 영원히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내 안에 자라나고 있었다.
폴리아타나 숲으로부터 신탁과 관련한 그 어떤 단서도 찾지 못했다는 걸 알게 됐을 때부터, 줄곧, 지금까지.
“찾게 될 거야, 레네트.”
“…….”
“지금껏 잘해 왔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
킬리언이 내 등을 두드리며 파비앙 넬라스의 기도문에 눈길을 던졌다.
그 역시 더 이상 단서를 찾지 못해 답답할 텐데, 서두르는 기색 하나 보이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
나는 나로 인해 폴리아타나 숲을 헤매야 했던 사누아와 해리드 일행을 떠올렸다.
그곳에 단서가 있으리라 여기며 돌아다녀야 했던 그들에게 내가 큰 민폐를 끼친 것 같아 내내 마음이 괴로웠다.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숨겨진 원문을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있을 수는 없다는 건 알지만, 나 때문에 그들이 헛수고 했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웠다.
신탁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제가 뭔가를 놓친 걸까 봐 겁나요.”
나는 나직이 읊조리며 파비앙 넬라스의 기도문에 손을 댔다.
바뀌는 활자들이 그의 언어를 빌려 나에게 신탁의 행방을 찾으라 말했다. 신이 나를 인도하리라고도 했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신 아이그니스는 정말 나를 이끌듯이 지금껏 적절한 실마리를 찾게 해 왔으니까.
마지막 단서는 폴리아타나…….
하지만 폴리아타나 숲은 신력을 강하게 할 뿐, 신탁과는 무관했다.
그렇다면 폴리아타나는 단서가 아니었나?
“놓친 게 있다면 되돌려 생각하면 돼. 처음부터 다시.”
킬리언이 차갑게 식은 내 손을 감싸 쥐며 대꾸했다.
처음부터 다시…….
킬리언이 나를 구해 줬고 바른으로 인해 신의 가호가 있는 걸 알게 됐다.
바른이 나에게 부모가 있으리란 예상을 한 덕에 이리나를 찾았고, 이리나는 황실의 서고에 우리의 비밀이 있음을 알려 주었다.
그곳에는 파비앙 넬라스의 기도문이 있었고, 이리나는 어쩌면 내가 아홉 번째 아이가 될 수 있다며 기도문을 확인하게 했다.
나의 낮과 밤은 사누아를 찾아 바뀌었고, 그 후에 엘리제로부터 내가 가진 능력에 대해 들었다.
여기에서 무엇을 더?
나는 답답한 마음에 거대한 아치형의 창문들이 펼쳐진 벽 쪽에 눈길을 던졌다.
유리창을 투과하는 오렌지빛 석양이 서고 안에 찬연한 황금빛 물결을 드리웠다.
“잠시 앉아서 쉬어.”
킬리언이 손이 내 어깨를 지그시 눌러 앉게 했다.
나는 괜한 걱정을 끼친 것 같아 그를 올려다보며 입가에 힘을 주어 웃어 보였다.
노을빛이 스민 그의 눈동자에 옅은 빛이 드러나자 새삼 더 신비하다고 생각되는 순간 나는 문득 지금껏 내가 봐 온 것과 무언가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좀 더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동안 황실의 서고에 들어올 때마다 감탄을 금치 못했던 천장화가 내 머리 위에 펼쳐져 있었다.
“…….”
푸른 대지와 뭉실뭉실 떠 있는 하얀 구름, 이어진 언덕과 폭포 그리고 하프를 켜는 천사들.
맑게 흐르는 시내와 드넓은 강.
새들이 노니는 잔잔한 호수.
울창한 숲과 또다시 이어지는 아름다운 풍경들.
그 안에 뛰노는 아기 천사들과 바라보는 신들의 모습…….
천장화의 아름다운 풍경은 붉은 낙조에 물들어 원래보다 노랗거나 붉어져 있었다.
하얀 구름이 적란운처럼 여린 붉은색을 담고 있자 나는 서서히 고개를 들어 내 머리 위, 빛이 드리워진 방향을 올려다봤다.
마치 금방이라도 흘러넘칠 것 같은 폭포수가 석조에 비쳐 붉은빛을 머금고 있었다.
‘하얀 언덕 너머 붉은 폭포를 지나면 귀여운 아이는 잠이 들어요.’
그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쫘악 끼쳤다.
이리나의 자장가가 귓가에 선연히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